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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21일자,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을 보니 드디어 우리 정부가 제주 4·3사건 희생자 1715명에 대해 명예회복 결정을 처음으로 내렸다고 합니다. 지난 2000년 1월 4,3 특별법이 공포된 후 3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사 내용을 볼 때 이번에 결정된 희생자들에 대해 무슨 보상금을 지급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 조성 중인 4,3평화공원에 유해를 안치해 위령 사업을 벌이고 생존자 중 부상자들에게는 전액 무상으로 치료해 주는 등 실질적 명예 회복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의 막바지인 8월 30일에 정부 산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주 4ㆍ3' 에 관련한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제주 4ㆍ3 진상규명 명예회복 추진 범국민위원회가 주최한 가운데 열린 이 토론회의 주요 논제는 제주 희생자 선정 기준에 관한 논란이었습니다. 48년과 49년 당시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및 징역형을 받은 2530명도 희생자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논의의 핵심이었습니다. 당시 군법회의라는 게 아무런 법적 정당성이나 효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과 47년 대만의 2ㆍ28사건과의 비교를 통한 논리적 접근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은 당시 이 토론회도 기사화 했고 그때부터 나는 이 위원회의 활동 내용과 그 추이를 관심을 두고 보고 있었습니다. 아아, 붉은 섬, 제주가 떠오릅니다. 왜 나는 비극의 섬 제주를 잊지 못하고 자꾸만 제주를 기억하려는 것인지, 이유는 있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지난 여름부터 말입니다.
지난 여름에 제주도를 갔었습니다. 지난 겨울에도 두 차례를 갔으니 올해만 해도 세 번 째 제주도를 찾은 셈이겠습니다. 올해 여름의 제주 행은 그러니까, 방학의 끝 무렵인 8월 21일에 출발하여 23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이었습니다. 전국 시,도 연합 수능 학력평가 출제위원들의 연수가 제주도 모처에서 열렸었는데 전국 각 시도에서 150 여명의 출제위원이 참석했었습니다.
한라산에 올랐을 때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한라산 등반이라면 철따라 여러 차례 해봤지만 이번만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예전에 성판악을 출발해서 백록담까지 하루종일 산행을 했던 그 지루한 코스도 밟아봤고 어느 해 겨울에는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지천으로 핀 설화에 흠뻑 도취해 본 적도 있었지만 이번만은 전혀 다른 감흥을 받았다는 얘깁니다. 그 이유는 맑은 날씨 아래 장관을 드러낸 여름 한라산의 위용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일행들을 영실까지 태워준, 내내 와이담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던, 그러다가 별안간 한라산에 얽힌 비극적 죽음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우리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버스 기사의 넋두리 같은 얘기가 내 발목을 붙들어맨 것입니다.
"숱하게 죽었지요. 당시 제주도민이 30만 명이었다는데 그중 딱 10분의 1인 3만 명이 죽어나갔다니까, 더 말해 뭐해요? 20대 30대 건장한 제주도 남자들은 다 죽었다고 봐야지요."
운전 기사의 푸념이 아니었대도, 제주 4,3사건이라면 이제 생소하지는 않지요. 그 시대에 태어나 살지는 않았지만,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학창 시절에 폭동이니 민란이니 하는 성격규정으로 교과서를 통해 배운 바가 있고 이곳 빛고을에서도 5,18과 같은 비슷한 사건을 겪었으니 '제주 4,3' 이걸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 초로의 운전 기사가 했던 얘기들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한라산 기슭에서 가파른 숨을 헐떡이며 아득한 능선을 바라보는 나를 왜 자꾸만 멈칫거리게 했을까요. 구멍이 송송 뚫린 한라산 바위에 걸터앉아 자신의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을 떠올리고 있을 당시의 어느 제주 양민의 착한 눈망울을 본 듯도 싶었습니다.
그렇지요. 바로 그 트루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주범일지도 모릅니다. 모르긴 해도 48년 4월이면 미군정 시대 아닙니까. 그들의 하수인인 미군사 고문관에 의해서 명령을 받은 아둔한 우리 병력이 어처구니없는 용병 노릇을 하며 무고한 우리 동족을 살상한 것입니다. 레드 아일랜드. 미국이 제주도에 붙인 이름이랍니다. 군사 작전 지도를 펼쳐놓고 해안선을 따라 4킬로 이내에 붉은 줄을 그었답니다. 붉은 줄 안에 들어있기만 하다면, 제주도민 30만 명을 전부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겁니다.
1948, 레드 아일랜드, 우리의 섬 제주도에는 130개의 마을이 화염에 휩싸여 전부 소개되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그 마을에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헤아릴 수 없는 억울한 목숨들이 민족 비극의 역사의 한을 가슴에 안고 산화해 간 것입니다. 이런 기가 막힐 일이 또 어디에 있답니까.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 그 혼령의 땅 제주에는 지금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국제 관광 자유도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탑동 매립지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술에 취하고 밤에 취하고 바다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도 생각났습니다. 이재수는 1901년 '제주민란'이라고 알려진 농민 전쟁의 농민군 지도자였답니다. '장두'라고 이름 붙여진 농민군 지도자는 사태가 수습되면서 홀로 처형당함으로 해서 대다수의 민중을 살려냈습니다만 1948년 4,3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중들까지 전부 몰살당한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무장한 게릴라들은 2백 명에 불과했다는데 그 2백 명을 잡기 위해서 3만 명의 양민이 죽어나갔다니, 이게 바로 우리 한국인을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은 미군정의 인식 수준이지 뭡니까. 울분이 터져 올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같은 하찮은 미물도 속이 상하고 울화가 치밀어 잠을 이룰 수 없는데, 희생당한 유족의 가족들, 제주도민 전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분들의 해원은 누가 시켜준단 말입니까.
이런 이유로 한라산에 올랐을 때 지천으로 핀 들꽃 하나라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쓰레기통 하나 보이지 않았어도 산허리 어느 한 곳에도 쓰레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름 모를 들꽃이라 해도 무조건 꺾을 수 없지요. 신동엽 시인의 시에서 보면, 그 영혼들이 '산에 언덕에' 다시 살아나 있다잖아요.
나도 이제 철이 드나 봅니다. 그동안 제주도의 곳곳을 다니면서도 한번도 절실해 본 적 없는 생각들이 이번에는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으니 말이에요. 아마도 그 놈, 바로 그 양키 놈들 때문인지도 몰라요. 우리 꽃다운 미선이와 효순이를 죽이고도 자기들 영내 캠프하우스에 숨어 들어가 꿈쩍도 않는 바로 그 양키 놈, 니노, 워커마크, 그 놈들 때문인지도 몰라요. 워커마크가 오늘 판결을 받는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될런지요.
탑동에 가서 술을 마시긴 했습니다. 혼령들의 넋에 한 잔의 부끄러운 헌주를 하고 퇴주잔으로 여기며 받아 마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취하기는커녕 갈수록 맑아오는 정신을 느꼈습니다. 방파제를 등덜미 삼아 끝없이 아우성치는 밤바다를 바라봤습니다. 파도소리도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밤이 깊어질수록 명료해지는 정신 속에 구천을 배회하며 호곡하는 혼령들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후세들의 손에 의해 날로 새로워지는 제주를 힘겹게 인정해주고 있는 그 분들의 아량도 아울러 만날 수 있었습니다.
1948, 레,드,아,일,랜,드,
형벌의 땅, 비극의 섬에서 깨어나려면 4,3의 진상이 확실히 규명되고 억울한 혼백들이 해원을 하며 웃을 수 있어야지요. 모든 제주민이 꿈꾸고 있다는, 진정한 국제 관광 자유도시로 거듭나려면 말이지요. 이런 이유로, 제주 4ㆍ3 희생자유족회, 범국민위원회의 사업이 앞으로도 술술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일보한 활동에도 기대와 성원을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