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강의 기적'은 강남시대를 개막한다. 그 강남시대는 '남서울아파트'로 시작한다.
'남서울아파트'는 서울 영등포구 반포동에 들어선다. 개발 당시 반포동은 영등포구였다.
이 남서울아파트가 들어서는 반포동은 영동(永東)지구로 불렸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의 줄임말이다.
이 반포주공아파트는 강남 일대를 중산층의 집단적 주택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반포동은 과거 한강변에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흘렀다고 해서 서릿개, 반포(蟠浦: 뱀처럼 휘감는 물가라는 뜻)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뜻이 변해 반포(盤浦)로 부르게 됐다. 한편으론 이곳이 상습 홍수피해 지역이어서 반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반포동이 주택시장에 고개를 내민 것은 1970년대 서울시의 강남 개발 때다.
당시 시는 한강 이남을 개발하기 위한 남서울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한강변에 하상을 정리해 매립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택지를 조성했다. 반포를 비롯한 6개 지구였다. 그때 택지로 거듭난 곳이 지금 반포주공1단지가 있는 구반포 일대다.
옛 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이 매립지에 대규모 아파트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반포1단지는 최초로 '강남'의 서막을 열었다. 72~138㎡(22~42평) 3786가구로 구성된 반포아파트는 처음으로
한강 남쪽에 건설된 대단지 아파트였다. 55만여㎡(16만7000평)부지에 242억원을 들여 만든 당시 최대 규모의 공사로
`남서울건설사업’이라고 불릴 정도였다.1970년대에는 아파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중동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넘쳐났다.
정부는 전국 각 지역에 동시다발적으로 아파트를 지어댔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업지가 늘어나면서 공사기간은 길어졌고 수요가 많은 서울에서는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반포차관아파트는 임대아파트라 팔거나 임대할 수 없었는데도 아파트가격(360만원)의 25%나 웃돈이 붙어
최고 450만원을 호가했다. 강남 아파트 개발의 시작인 반포 주공 단지다.
당시만 해도 이 아파트는 ‘호화 맨션·아파트’로 불렸다.
이 아파트의 규모는 시민아파트 평균 규모인 8평과는 달리 18평에서 40평까지 확대되었다.
이때 민간아파트의 경우는 70평에 이르렀다. 반포주공에서는 층형 아파트까지 등장한다.
이후 한신공영이 시리즈 단지를 지으면서 반포동과 사실상 반포동 생활권인 잠원동 일대는 3만 가구가량의 아파트 촌으로 바뀌었다.
반포1단지가 단순히 덩치로 승부했던 것은 아니다. 주택 내부에는 주택공사가 처음으로 복층 설계를 도입했다.
1,2층 연결주택이라고 불렸던 이 설계는 1호당 2개층을 사용했다. 아파트는 6층 높이지만 1,3,5층에만 현관이 있었고
내부에 계단을 놓아 2,4,6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105㎡(32평C형)주택형에는 아래층에 부부침실과 식당을 겸한 13평의
넓은 거실을 뒀고 손님을 위한 화장실도 별도로 마련했다. 부엌 옆에는 가정부방, 위층에는 서재와 가족실, 아동전용욕실이
있는 중상류층을 위한 집이었다. 단지 내에서 벗어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설을 갖춘 것도 빼 놓을 수 없다.
단지 앞에는 상가점포 238개가 죽 늘어섰고 유치원, 동사무소, 전화국, 은행, 학교도 모두 단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위치했다.
또 단지 내로 노선버스가 통과하기도 했다.
'남서울아파트' 건설을 계기로 민간주택개발사업에도 공공자금을 지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
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해서 민간건설업체의 주택건설을 적극하는 등 '아파트지구'가 법제화된다.
이때부터 반포 잠실 여의도 압구정동 등 11개 지역이 아파트지구로 지정되면서 오늘의 강남아파트시대를 열었다.
남서울아파트시대' 반포는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서울이 아닌 곳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서울시민들이 선뜻 이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반포1단지 아파트는 준공 후에도 미분양이 많았다.
당시 대한주택공사는 늦은 밤 한강에 면한 아파트의 경우 모든 방의 불을 켜 놓도록 하는 등 퍽 신경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