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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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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자료실 스크랩 김수영시인
새벽풍경 추천 0 조회 164 14.09.06 14: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감상>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올 때마다 나는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헙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우

 

정이며 현대의 정서며 그런 것들이 뒷날 내 노트에 담겨져 시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시는 너무나 불우한 메타포의 단편

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소리 빛날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의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우어줄 것인가.'

 

 이는 1957년작 ‘폭포’의 시작메모로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의 간절한 평화 염원 메시지다. 일제 말기 동생

이 학병으로 징집되는 속에서도 만주에서 연극을 했던 사람이 김수영이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의관의 통역을

하며 거즈를 개키던 사람이 김수영이었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기다리던 여인에게 바람을 맞자 술을 진탕 마시고 완전

뻗었던 사람이 김수영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쪼잔함’에 스스로 화가 나있다.

 

 현실에 분개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비애, 자조, 궁색함이 낭자하다. 이건 확실히 자기반성이나 성찰의

태도와는 다르다. 멈칫멈칫 우물쭈물하다가,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다가 결국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

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탄식으로 마무리한다. 48년 전 김수영이 그랬듯이 불운한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시대를

 

우울하게 살아간다. 불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뻣뻣한 내 뒷목덜미가 다시 댕겨온다.

-권순진시인

 

 

 

 

  김수영 시인의 시와 그림자

 

  ㅡ김수영 시인 미망인 김현경 여사와의 대담

 

  대담 정리 함동수(용인문인협회)

 

  김현경 여사는 현재 용인 마북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녀는 19279월 14일(5.15)에 서울 사직동에서 태어났다. 덕수초등학교(4년은 경성여자보통학교)를 나와 진명여고와 이화여대에서 공부했으며 김수영 시인과 1949년에 결혼했다. 김수영 시인이 1968년 작고한 후, 수많은 문학 유품들을 관리 보관해 왔으나, 이제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문학관을 건립하여 후세에 자료를 고스란히 남기고자 하는 것이 팔순 중반을 넘어서는 김현경 여사 여생의 중요한 일이라고 거듭 토로했다.

 

  1. 들어가며

 

  우리 시단에 우뚝 선 문단의 거목 김수영 시인의 체취가 용인에서 발견된 것은 지난 2월 용인시민신문사에서 발굴 취재한 시에 몸을 내던졌던 내 남편 김수영이 보도되면서, 용인시 수지구 마북동에 김현경 여사가 기거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서부터다. 그간 용인문협에서는 거목 시인 김수영의 체취가 담긴 여러 시작품 및 시에 담긴 시작 배경 등에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결국 올 9월에 김수영 시에 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장시간 인터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충분치 못한 자료, 시간의 제약 등으로 김수영 문학에 대한 갈증 해소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망인 김현경 여사가 연로하시고 미래를 알 수 없는 연세이다 보니, 이런 기회에 기록으로 남겨서 추후 우리 현대문학사에 있어 김수영 문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분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소견에서 시도한 것이다. 우선 수많은 김수영 시에 대해 모두 거론할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며 아주 기본적이고 김 시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시 몇 편을 골라서 시작의 배경과 시대 상황, 그리고 시작에 따른 비하인 스토리 등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2. 존경과 사랑

 

  그녀의 김수영 시인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지금도 현대문학사 중 최고의 시인이며 한국 현대시단에 거목이라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그도 그러한 것이 당시 김현경 여사와 함께하는 시작 과장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가기도 한다. 김 시인은 초고를 완성하면 꼭 김 여사를 불러서 2장을 더 정서시키고 한 장은 출판사에 내고 한 장은 보관했다. 그러나 시인이 작성한 원고는 대봉투를 찢어서 이면지에 쓰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잘 알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곁에 붙어 앉아서 한 줄 띄우고 점 찍고하는 식으로 감독을 했다. 그러니까 김 시인이 초고는 작성했지만, 최종 시작 완성에 대해서는 공동 제작자라 할 수 있었다. 김 여사의 2차 육필 작업으로 출판사나 육필 원고로 남겨진 것이 대다수이다. 그래서 본인 아니고선 김 시인과의 육필 확인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시 제목만 대면 시작의 연도와 날짜를 틀림없이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신기할 것도 없어 보였다.

 

  또한, 활기찬 모습으로 시에 대한 해석과 이런저런 비하인 스토리를 들려주고 자료도 거침없이 보여주며, 서너 시간씩 인터뷰에 응할 만큼 대화와 식사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두루 양호한 상태는 아니어서 췌장이나 백내장 등의 문제로 병원을 계속 다니고 있었다.

 

 

 

  1975년 발간된 시여 침을 뱉어라에 대해서도 행사년도와 부산에서 강연한 원고며, 그날의 강연 핵심인 온몸의 시학에 대해서도 생생히 기억하며 김 시인의 생활 자체가 그러했다고 소개했다. 그녀가 김 시인을 얼마나 존경하고 그의 시에 대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김수영 시인이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시절, 다 잘된 친구들과 동창 모임을 가졌는데 남편이 시인이라며 하고 비아냥거려 당당히 나서 김 시인 시도 안 읽어보고서 그리 얘기하면 안 된다. 시인이라고 다 똑같은 시인이 아니다, 니나노 하는 시인 아니라, 백년에 나올까 말까 한 시인이다며 강변을 했다. 그런데 사후 40주기 신문회관에서 학술대회를 할 때, 그 친구가 30여년 지나 꽃다발 들고 찾아왔다. 김수영의 시인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차린 것일까. 김 여사는 요즘 가끔 시를 읽어봐도 신선하고 대단하여 감동을 준다며 역시 거목이라고 말한다.

 

  3. 시 그림자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은  제1회 시인협회 수상작이기도 한데, 그의 기억에 기대어 시작의 과정을 살펴본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잃어버린 靈魂肉體를 위하여

  죽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1957년 작)

 

 은 일반적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순결성, 순백의 이미지와 죽음, 정화 등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상황에 대한 생각의 순환적인 대안으로서 눈을 선택한 것으로 본다. 특히 마당 위에 떨어진 눈에서 마당과 떨어진다는 의미가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대부분 눈은 쌓이거나 내린다고 표현할 텐데, 부득 떨어지는 눈의 의미는 탁하고 둔한 느낌으로 부정적인 이미지의 마당으로 처박히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기침에 대한 의미인데 목구멍에 착 달라붙어 가래를 떼기 위한 기침이 아니라, 인기척을 내 우리는 살아 있다고 강변하는 의식이 내포돼 있는 존재 인식에 대해 절규하는 의미가 곳곳에 투영된 시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신성한 눈과 더러운 가래침의 이미지를 통하여 시인이 사는 울적한 현실과 동경의 청신한 세계화를 효과적으로 대조시키는 뛰어난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김 여사가 의 시작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암담한 시대, 어두운 시대가 지속되던 현실에서 모두를 괴롭히고 있는 부정적이고(부자유, 어둠 등의 이미지) 타협할 수 없는 추악한 것들을 정화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고 항거하는 시로 기억한다. 답답한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고 호소하였으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결국 시대정신 에스프리[프랑스어-esprit]에 대한 문제였다는 기억이다. 대개 눈을 보면 일반적으로 좋은 감정을 느끼지만, 시인의 시각은 잘라서 자각, (규정, 행위)보다도 정신적인 것을 우위에 두어 나태를 경멸하며 늘 스스로를 자각하여 스스로를 엄격하게 검열을 해가는 완벽을 추구하던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김 시인 대신 초고를 베껴가다가 획 하나가 틀려도 수정하지 않고, 전체를 다시 베끼라고 요구하는 정도의 염결성을 스스로에게도 요구하던 시인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증거로써 근래 발행된 육필원고 발행본의 80%는 김 여사의 글씨라고 한다.

 

 「에 대한 기억

 

  「풀은 김수영 시인이 616일 사망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창작과 비평1968년 가을호 발간)이다. 유신체제에 반정부 시위가 절정일 때 지어진 유고시인데, 시단에서 해석하는 바람과 풀의 관계는 권력과 민중의 병치로 해석하고 있었으며, 풀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끝 연에서 발목과 발밑까지 풀이 일어나고 웃는 모습에서 결코, 스러지지 않는 민중의 저항성을 의미론적으로 서술코자 했다는 것이 평론가들의 해석인 것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968. 5. 29)

 

  이 시가 씌어질 당시의 시국은 3선개헌 추진으로 전국이 연일 시위가 번지고 학생들이 투옥되는 등, 권력이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으며 개헌을 추진하는 어수선하고 폭압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시의 발표는 김 시인이 사후에 유고작으로 창작과 비평1969년 여름호 에 다른 시 5편과 함께 발표되었다. 따라서 에 대한 김 여사의 기억으로는 바름은 권력, 풀은 민중이라는 시각으로 이해하고, 김수영 시인도 그러한 의도와 다르지 않다는 의견을 주었다 한다. 이 작품은 영상이 좋고 심벌도 좋게 그려졌다.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소중한 가치가 지금은 독재에 쓰러지지만, 그러나 결코 쓰러질 수 없으며 분명히 일어난다는 민주, 자유 회복에 대한 투쟁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풀에 대해 또 다른 해석은 각운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각운 의 반복 효과를 살려 내어 풀이 무시무종의 존재에서 자율성을 획득하여 곧 능동적인 정체성을 찾아 온몸으로 대응해 가는 존재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종연에서 풀뿌리가 눕는다는 가시적인 영역에서 불가시적인 영역으로 까지 끌고 와 온몸으로 전력하는 의미를 의식하고 전개하는 잠언적인 수사라는 의견이 단단하다. 따라서 이 고통받는 민중이라는 식의 뻔한 알레고리를 벗어나게 하는 점이 이 시를 끝까지 성공시킨 점이라고 오봉식이 주장하는 데 별 이의가 없다.

 

 김일성 만세에 대한 회고

 

  이 시는 써놓고는 발표하고 싶어서 감옥에 가더라도 부딪쳐야겠다고 일기에도 써놓고 강행하려 했는데, 김 여사가 만류했다. 발표가 되면 요시찰 인물이 되고, 또한 발표도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의 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하 중략-

 

  그는 이 시를 듣고 몇 군데를 돌려 발표하고자 찾아갔으나, 각 출판사나 신문사에서는 망한다고 벌벌 떨면서 되돌려 보냈다. 그래서, 또 제목을 잠꼬대로 고쳤으나, 그 시 각행에 들어가 있는 김일성 만세라는 시어는 고칠 수가 없었으니 싣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출판사 등에서도 역시 못 싣겠다고 거부당했다. 그래서 봉투에 보류라고 써놓고 기다렸는데, 결국은 사후에 어디엔가 발표가 되었다. 전집에도 나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나, 구판이나 개정판에 몇 번을 찾아봐도 김수영 전집에도 이 시는 결국 없었다.

 

  이 시에서 문제는 그 때나 지금도 김일성 만세라는 다섯 글자가 불온한 시어인데, 이는 그를 찬양한다는 게 아니라 언론자유의 한계를 말한 것인데, 결국 그 무시무시한 보안법 앞에서 당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419의거가 나고 민주의지에 대한 강렬한 의견을 동아일보에 써서 보냈더니, 아주 흡족해 하던 편집부가 전국에 즉각 계엄령이 선포되고 강력한 통제를 하니 이름 빼곤 글자고 없이 하얀 조판 백지로만 나왔다. 그 후, 완전 민주화된 장면 정권 시절엔(516 전까지) 김수영에게도 사슬이 풀린 듯 다수의 글이 줄줄 쏟아져 내릴 만큼 신이 나서 글들을(, 잡문) 발표했다. 김수영 시의 시적 변모는 대체로 419를 계기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처럼 날카로운 현실감각을 지닌 시인으로서 419에 크게 자극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폭포모리배같은 작품에서 그의 변화는 어느 정도 예견되고 준비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1960년 김수영 시인의 동생인 김수환 씨 결혼식에 참석한 김현경 씨(왼쪽)

김 시인이 뒷줄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시인의 어머니 안형순 여사.

 (실천문학사 제공)

 

 

 

 

  폭포에 대하여

 

 

 

 

   1954년 환도해서 성북동 임야의 계곡에 백낙승 씨(巨商)가 별장으로 양옥과 한옥을 화려하게 지었는데, 그 한옥 한 모퉁이에 세 들어 살았다. 그 집 바로 위 화강암 벽이 약 7~8미터 있고 산비탈 계곡 아래쪽으로 축대를 쌓아 계곡물이 떨어지는 아래에는 빨래터도 있었다. 그 벽에서 장마나 비가 오면 빗물이 폭포가 되어 대단히 쏟아져 내려오곤 했는데,폭포는 바로 그를 보고 쓴 시이다. 대단한 폭포가 아니라 형상만 갖춘 폭포 모양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확대재생산하여 거대한 폭포로 둔갑시키며 직선 의지를 표현하는 명시를 남겼다.

 

 

 

  그 집엔 관리를 위해 귀머거리 별장지기를 두었는데, 하릴없는 귀머거리가 밤낮으로 라디오볼륨을 크게 틀어놔 온 동네가 시끌시끌하였다. 좇아가서 사정사정해 알아들을 만하다가는 곧, 다시 그의 취향대로 볼륨을 높이는 바람에 예민하던 김 시인은 분위기만 좋던 그 별장을 뛰쳐나오게 된다. 3연의 부분이 그의 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시 정신의 높이를 따라 쓴 것이다. 시는 사람이 쓰는 것이니까.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두지 않고

   나태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또한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려주는 글이 소개되었는데, 당시의 유명한 소설가 최정희 씨가 김수영 전집 별권에 소개한 글을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그녀는 김수영 댁과 가까이 지내는 친한 사이였는데, 그녀가 게재한 거목 같은 사나이란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를 내가 거목 같은 사나이라고 느낀 일이 있다. 고무신을 신고 휘적휘적 왔다간 싱겁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꼭 그렇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이 거목 같은 사나이가 나를 참 웃겨준 때가 있었다. 시장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또는 이고 와서 파는 계란장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날 김수영 씨 집으로 계란 사러 갔었다. 부인이 닭 먹이 구하러 나갈 차림새를 하면서 그 돈어치의 계란을 내게 세어 주었을 때 그는 그런 일은 모르는 체하고 있더니 부인이 나가자 나와의 대화를 중단하고 계란이 있는 장소에 들어가 양손에 계란 다섯 개를 움켜쥐고 나오는 것이었다. 여느 사람 같으면 그저 고마울 뿐이겠는데 나는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도 할 새 없이 눈물이 나오도록 웃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만이 떠오르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중략-

 

 

 

   김수영 씨는 부인이 사들이는 책장, 책상, 식탁, 의자 등을 지겨워했던 것이다. 술이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취하는 때면 밖에서 돌을 메고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또는 도기로 찍어버리겠다고 도끼를 들고 달려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책장 속에 머리를 가지런히 하고 꽂혀 있는 책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만 못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흩뜨려놓은, 질서 없는 생활을 즐겼다는 말은 아니다. 펜대 하나라도 자기가 놓았던 데서 옮겨지는 것도 싫어하는 편이라고 했다. 다만, 부인이 귀중히 여기는 가구들이 그의 비위에 거슬렸을 뿐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면 김수영 부인은 세속적인 것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김수영 씨를 이해하고 그의 문학을 가장 잘 풀이 할 수 있는 높은 지성과 꾀 총명한 두뇌를 갖춘 여자다.

 

 

-중략-

 

 

   커다란 테이블은 김수영 씨에게 시와 에세이와 번역을 자리를 바꿔가면서 쓸 수 있게 했다. 시를 쓸 땐 동편으로, 향해 앉았고 에세이를 쓸 땐 북쪽으로, 번역인 경우엔 남으로 향해 앉았다고 한다. 텔레비전을 들여놓을 때고 부인 앞에서 그가 손을 싹싹 부볐고, 피아노를 사들일 때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이면 부인이 기꺼이 어렵게 들여놓은 가구를 도끼로 부수려던 그 책상에서 김시인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귀퉁이마다 번역, 시작, 평론 쓰는 곳이 달리 책상을 맘껏 활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문공부에서 텔레비전을 배급하던 시절이었는데, 당국에서는 불온하게 보았던 시각으로 언감생심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그러나, 조연현(시인, 평론가) 씨 덕분에 텔레비전이 들어왔고 전화를 놔주었다. 그러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래 시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에서처럼 그를 통제하고 앞을 가로막는 의자는 억압의 상징물이었다. 미제 도자기도 일제 노리다께 반상 세트도, 곳곳마다 각으로 날 세워진 책상 모서리도 다 그에겐 걸림돌이었다. 그 많은 의자에 앉아 노리다께 찻잔에 커피를 마시며 김수영이 꿈꾸던 자유를 맛보는 행운이 있었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 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텐드가 울린다

 

 

   마루에 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옆에 놓은

   찬장이 울린다 유리문이 울리고 그 속에

   넣어 둔 노리다케 반상 세트와 글라스가

 

   울린다 이따금씩 강 건너의 대포소리가

 

 

 

   날 때도 울리지만 싱겁게 걸어갈 때

 

   울리고 돌아서 걸어갈 때 울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로 비집고 갈 때

   울리고 코 풀 수건을 찾으러 갈 때

 

 

   38선을 돌아오듯 테이블을 돌아갈 때

   걸리고 울리고 일어나도 걸리고

   앉아도 걸리고 항상 일어서야 하고 항상

 

   앉아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테이블 밑에 신경이 가고 탱크가 지나가는

   연도沿道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가만히 있어도 울린다

 

 

   미제 도자기 스탠드가 울린다

   방정맞게 울리고 돌아오라 울리고

   돌아가라 울리고 닿는다고 울리고

   안 닿는다고 울리고

 

 

    ?이하 중략-

 

 

 

   시작 이외엔 별 재주가 없던 김 시인은 항상 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자주 ! , 네 사슬에서 나 좀 벗어나야겠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그럼 그래라!’는 말은 끝내 못했단다. 겉치레가 싫다는 고충을 수시로 토로했는데, 그 부인의 깔끔한 살림살이에 따라 같이 살아가려니 시대의 억압 못지않게 시각적으로 죄는 집안 속박이 죽기보다 싫어했을지 모른다. 심지어 무거운 옷도 싫어했다. 178센티의 키에 묵직한 풍모였지만, 추위에는 지독히 약하고 항시 감기에 걸려 있었다. 또한, 극도로 예민하여 밖에서 여자를 만나 보더라도 시선은 그의 구두부터 살펴보았다. 여자가 맵시 없는 부분을 지적하며 센스가 없는 여자를 싫어했다. 그런 김 시인이 외출 시에는 옷과 손수건 용돈까지 모두 준비했다가 일체를 준비해서 내보냈다. 담배를 미리 사놓았다가 챙겨줘서 보내는 것은 물론이다.

 

 

 

 

  도취의 피안에 대하여

 

 

 

   내가 사는 지붕 우를 흘러가는 날짐승들이

   울고 가는 울음소리에도

 

   나는 취하지 않으련다

 

 

 

 

   사람이야 말할 수 없이 애처로운 것이지만

 

   내가 부끄러운 것은 사람보다도

   저 날짐승이라 할까

   내가 있는 방 우에 와서 앉거나

   또는 그의 그림자가 혹시나 떨어질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도

 

   나는 아무것에도 취하여 살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씩 찾아오는

 

 

   수치와 고민의 순간을 너에게 보이거나

   들키거나 하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의 얇은 지붕 우에서 솔개미 같은

 

 

   사나운 놈이 약한 날짐승들이 오기를 노리면서 기다리고

 

   더운 날과 추운 날을 가리지 않고

   늙은 버섯처럼 숨어 있기 때문에도 아니다

 

   날짐승의 가는 발가락 사이에라도 잠겨 있을 운명-

   그것이 사람의 발자욱 소리보다도

   나에게 시간을 가르쳐주는 것이 나는 싫다

 

 

   나야 늙어가는 몸 우에 하잘것없이 앉아있으면 그만이고

   너는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잠시라도 나는 취하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나의 초라한 검은 지붕에

 

   너의 날개소리를 남기지 말고

   네가 던지는 조그마한 그림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나의 귀에다 너의 엷은 울음소리를 남기지 말아라

 

 

   차라리 앉아 있는 기계와 같이

   취하지 않고 늙어가는

   나와 나의 겨울을 한층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나의 눈이랑 한층 더 맑게 하여다우

   짐승이여 짐승이여 날짐승이여

 

   도취의 피안에서 날아온 무수한 날짐승들이여 -(1954)-

 

 

 

 

   이 시에 대해 부인은 무조건 느낌이 좋다고 했다. 서정시이고 에스프리고의 영상이 너무 대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정말 타고난 시인이다. 나는 이 도취의 피안을 최고 절정의 시로 꼽는 명시라 믿고 싶다고 했다. 이 시에 대해 김 시인과 얘길 해봤지만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어도 시간도 피안을 넘어선 것 같다. 최고의 시로 본다그랬더니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텔지어(향수).” 그러니까 느낌이 확, 영상으로 올 만큼 표현력이 절정이다.

 

 

 

  이 시는 1954년 반공포로에서 석방되어 부인과 별거 중에 감정이 집중했을 때 지은 시이다. 1953~54년도에 나온 달나라의 장난도 슬프지만 너를 잃고등의 시는 어두운 비애에 캄캄하게 젖어도, 그 정신은 그대로 검은빛이 나고 있다. 문학은 비애다 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부인과 재회한 55년 이후에 발표작들은 헬리콥터, 영사판, 수난로등은 정신세계가 전쟁과 투쟁에서 벗어나 현대 서정으로 매사를 난관으로 보는 시각이 뚜렷이 나왔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혼란과 절망적인 가운데 찾아간 부인은 돌아오지 않는(이종구씨와 동거 중) 상태였고, 결국 사상도 사랑도 모두 떠나버린 스스로의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절망이었으나 문학적으로는 최고조의 상승기였다고 볼 수 있다. 김수영 문학은 625전쟁을 빼놓고는 얘길 할 수 없다. 석방 후, 수용소에 대한 글(반공소설)을 쓰라고 종용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쪽도 저쪽 것도 쓰는데 어려움은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사상에 대한 얘기를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김수영은 전쟁이 나자 북으로 잡혀가다가 평양 근처에서 낙오가 됐는데, 누군가(?)에게 잡혀서 총살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잡힌 자들을 일렬로 세워 즉시 총살하는 상황에서 총소리와 더불어 나자빠지자 더 이상 총격은 끝났으나, 계속되는 살상총격으로 거듭 시체에 묻히는 상황이었다. 그 시체 더미에서 운 좋게 상처 없이 김 시인은 겨우 살아나왔다. 그러나 끝까지 말 못하고 혼자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총살이 누구의 소행인지, 왜 총살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도 전후 이후까지도 장기간 고민하고 있었다. 북으로 잡혀가던 중 낙오한 민간인이었는데, 당시의 혼란 중에 일어난 총살에 대해 두고두고 고민과 번민에 쌓여 지냈다한다. , 쓸데없이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였나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 후, 총살이 종료됐는지 조용해진 시체 무덤 속을 기어 나와 얼마를 가니, 민가가 있어 들어가 보니 빈집 부엌에 쪄놓은 옥수수를 남기고 급히 떠난 솥을 발견한다. 그 덕에 굶주림을 해결하니 금세 졸음이 쏟아졌으나 방에선 겁이나 잘 수 없었고, 근처 덤불 속에 들어가 자고 방에 있는 민간인 복으로 바꿔 있었다. , 한참을 내려가니 웬 소련 캠프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어찌 소련군복을 입었는데(잡혔는지) 얼마를 걸어 내려가니 이젠 또, 국군이 보여 언른 옷을 벗어 땅을 파서 묻는데 손톱이 젖혀져 피가 나도록 박박 긁어 파묻고는 민간인 옷으로 바꿔 입었다. 그러한 내용이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에 모두 기술되어 있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북원 훈련소를 탈출하여 순천 읍내까지도 가지 못하고

 

   악귀의 눈동자보다도 더 어둡고 무서운 밤에 증서면 내무성 군대에게 체포된 일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달아나 오던 날 새벽에 파묻었던 총과 러시아 군복을 사흘을 걸려서 찾아내고 겨우 총살을 면하던 꿈같은 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평양을 넘어서 남으로 오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내가 만일 포로가 아니되고 그대로 거기서 죽어 버렸어요.

   아마 나의 영혼은 부지런히 일어나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대한민국 상병포로와 UN 상병포로들에게 한마디 말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일부

 

 

 

 

   그러나 미군들이 남쪽으로 이동 중인 것이 보이는데, 영문과 출신인 김수영이 영어를 하며 다가가 트럭에 태워 달래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트럭 짐칸엔 도저히 붙잡을 때가 없어 밤새 트럭 뒤에서 휘청거리며 시달린 끝에 서대문 형무소 근처쯤에서 내렸다. 그러나 운명은 또, 중부파출소에 잡혀 실컷 두들겨 맞고는 거제포로수용소로 잡혀가는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다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와 나의 벗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현대의 천당을 찾아 나온 것이다

 

   ㅡ「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이 시는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195355일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절규하듯 내뱉는 시에서 그것은 자유를 찾기 위해서의 여정이었고 가족과 애인과 그리고 또 하나 부실한 처를 버리고 포로수용소로 오려고 집을 버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 포로수용소보다 더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자유가 살고 있는 영원한 길을 찾아 나왔다는 절규였다. 반공포로 얘기를 써달라는 부탁으로 써준 시인데, 본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억지로 쓴 시라지만 분명 그의 행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유일한 개인의 서사시이다.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중략)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狂氣)ㅡ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ㅡ「그 방을 생각하며부분(1960.10.30)

 

 

 

   419 이후 참여시에 접어드는 시기인데, 상당 부분 혁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사회 전 부문으로 확산되지도 못하고 지지 부진한 면모를 보여주던 당시 상황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낳은 반응이라는 의견이다. 이어령 씨와 불온시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던 시기쯤이라고 한다. 결국은 혁명은 안 되고 혁명을 이르기 위한 줄기찬 자기 변혁은 여전히 계속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셋방을 얻어도 마루방 서재라도 집필실이 꼭 있어야 했다. 그리곤 항시 책을 들고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고 했다. 당시 달나라 장난의 시집 초판이 있었는데 분실하고 말았다는데, 방문한 손님 중에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고 한다. 당시 증정본이 들어오면 김 시인은 모두 버리는데, 그때마다 김 여사가 대략 챙겨놓았던 것이 현재 남아 있는 김 시인의 서재다.

 

 

 

 

  너를 잃고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 개의 侮辱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는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侮辱의 억만 배의 侮辱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하략)

 

 

 

   다들 김 시인이 연애시가 없다고 한다는데, 김여사는 이 시를 최고의 처절한 연애시로 꼽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사랑한다소리를 들어본 적 거의 없었던 것 같고 처음 프러포즈 때 벌벌 떨면서 ‘my soul is dark’라는 말 한 마디이었는데, ‘너 없이는 못 산다, 너밖에 없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며 그 한 마디가 그 어떤 장광설의 구애보다도 강렬했다고 했다. 이 시를 쓸 때는 이종구 씨가 떠나가 버려 부인에 대한 배신감을 가득 안고 살던 시기이니 당연히 이런 시가 나올 법도 한 것이라고 한다.

 

 

 

  이종구 씨가 아무리 잘해줘도 정말 맘이 안 가더란다. 그가 학교도 안 가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로 지내는데 집을 나오면 사람 망가질 것 같아서 환도 후에도 1년 반 정도 지난 후 집을 나온 것이다. 당시 조병화, 김광식 선생이 확인차, 그들의 동거하는 방을 찾아와 정성껏 차 대접을 하니, 오히려 태도가 반전돼 오히려 가호적(假戶籍)을 들먹이면서 합법적으로 처리하자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 버릇을 고치겠다고 찾아온 그들 사이에 평이 좋아 우군이 된 셈이었다.

 

 

 

  이종구 댁에서는 그의 부친께서 소문을 듣고 고민하시다 아들의 뜻에 따라서 결혼을 진행코자 쌀 담그라는 얘기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종구 씨는 결혼 전 이혼을 위한 김수영 도장을 갖고 오라는 난리가 난 상황인데, 김수영을 만나러 태평양신문사로 가 반색을 하는 김수영을 보고 도장 달라자 하얘지는 얼굴로 도장을 내밀어 주었다. 결국 고민 끝에 얼마 후, 백 하나만 들고 이종구 집을 나왔다. 그 후 이종구 씨의 난동은 익히 짐작대로였다. 집을 나와 소설을 쓰자고 방을 하나 세 들어서 살며 김수영에게 메모를 수명 동생편으로 신문사로 보냈더니 나와서 만나 합치게 되었다. 그는 환도 후 시댁 식구들과 (1954년 봄) 살고 있었는데 그 복잡한 상황에서도 독방으로 쓰며 예전처럼 식구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성북동 방으로 다시 합친 첫날 한 마디가 평화신문사에 취직해서 돈 벌어올게그 다음 날 시댁에서 책이 한 보따리 건네져 왔다.

 

 

 

  토끼에 대하여

 

 

2

생후의 토끼가 살기 위하여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 모양으로 서서 있어야 하였다

누가 서 있는 게 아니라

 

토끼가 서서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나는 캥거루의 일족은 아니다

수우나 생어같이

음정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서 있어야 하였다

 

몸매와 연령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지는 모르는 까닭에

잠시 그는 별과 도 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것이란 우리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 같은 것일까

 

 

 

초부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소리

갈대소리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

 

   “저기 저 하얀 것이 무엇입니까

 

 

   “불이다 산화다

 

 

 

 

 

ㅡ「토끼의 일부(1949)

 

 

   1949년에 쓴 시인데 아주 잘 쓴 시라고 생각한다. 설렁탕 장사를 했는데 결혼 첫해 돈암동에 방을 하나 얻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가장 안정되고 따뜻할 때라 생각된다. 어느 날 저녁에 여동생이 놀러와 이런 저런 토끼 얘기가 나왔는데(김현경 여사가 토끼띠다) 어머니가 나를 나았을 때 보니 눈만 커다란 이티(ET)같이 생겼더라고, 때는 봄 5월이라 창문을 열어놨는데 갓난애가 눈을 까맣게 뜨고는 달을 쳐다보는 게 너무 신기하더라고, 그리고 당시 토끼도 길렀고 하여 두루 토끼에 대한 얘기로 꽃을 피우다 큰길까지 동생을 데려다주고 돌아와서는 쓱쓱 시를 썼는데 그 시가 토끼였다고, 즉시 보여줬는데 아주 좋았다고 한다.

 

  결국은 토끼의 은유는 사랑하는 김 여사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통 없이 행복한 평안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해에 625가 발생해 신혼의 꿈은 깨지고 김 시인은 그 후 생사의 기로에 수십 번 서게 된다.

 

   끝으로 김 시인이 사용하던 각종 서적류와 가구들이 들어찬 서재에 들어서니 곳곳이 누렇게 색 바랜 풍경들로 가득 차 있다. 육필원고도 너덜너덜한 사전도, 외국서적부터 책상가구까지 모두가 지난 시간 속에 누렇게 잠들어 있다. 유독 눈에 띄는 누런 액자가 있는데 常住死心김수영 시인의 좌우명을 어느 서예가가 김현경 여사에게 기증한 것이라는데, 항시 죽음을 생각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시대를 살아온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살면서 항시 자유를 갈망했던 우리의 거대한 시인 김수영을 만나고 나오면서 김여사의 말이 머리를 자꾸 맴돈다.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시인이라는 자랑스럽고 간절한 그 말 한 마디.

 

 

 

 

  김수영 시인이 직접 쓴 시 의 초고().

  아래는 경복국민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김우의 한자 공부를 위해 김 시인이 쓴 글.

 

 

Ernesto Cortazar / Without A Fa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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