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오 헨리(O. Henry)의 대표 단편소설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의 내용은 단순하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몹시도 사랑하는 딜링햄 부부.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내는 남편에게 멋진 시계줄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주머니엔 1달러 87센트밖에 없었다. 아내는 하는 수 없이 오랫동안 길러왔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판다. 늦은 저녁, 남편이 퇴근하자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을 내민다. 그러나 남편의 얼굴을 흑빛으로 굳고 말았다. 남편의 손에는 아내가 꿈속에서 바라기만 했던 비싼 머리빗 세트가 들려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시계를 판 것이었다. 오 헨리는 이들 부부를 두고 소설 말미에 ‘선물을 주고받는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아침에 일어나 잠옷 바람으로 선물을 풀어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도 그 설렘과 기쁨을 어른이 된 뒤에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마법’과도 같은 날이다. 덥수룩한 수염, 후덕해 보이는 몸매, 어딜 가도 튈 수밖에 없는 빨간 옷을 갖춰 입은 할아버지가, 아이가 잠든 사이 일 년 동안 바랐던 선물을 머리맡에 놓고 사라진다니! 기자 역시 어린 시절에 크리스마스의 마법에 흠뻑 빠져 있었다. 심지어는 ‘산타클로스의 정체가 부모님’이라는 괴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밤새(라고 생각했지만 확실치 않다) 안방 문 앞을 감시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마법은 머리가 좀 더 큰 뒤에 ‘진짜로’ 일어났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깜짝 선물을 줄 때, 그 기쁨은 받을 때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의 소중함에 감사하는 시간… 상대방이 선물을 풀어보는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 일 년을 행복하게 살게 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행복한 이는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산타클로스 자신일 것이다.
산타가 되어봅시다
산타클로스가 되는 방법은 몹시 까다롭다. 우선 북극요정들의 심사를 거치게 되는데, 일단 합격하고 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흰 수염이 자라나고 몸이 풍만해진다. ‘호호호’하는 특유의 발성도 자연스러워진다. 이쯤 되면 사회생활은 불가. 선택받은 새 산타는 그렇게 북극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보다 손쉽게 산타가 되는 방법이 있다. 빚진자들의집(대표 송용미)의 ‘몰래산타’에 동참하는 것이다. 2003년부터 시작, 매해 12월 말에 진행하고 있는 ‘몰래산타’는 빚진자들의집의 대표적인 아동대상 복지활동이다.
진행은 이렇다. 우선 11월 한 달 동안 안양, 군포, 의왕시 내 시설 및 기관으로부터 대상 아동을 추천받는다. 한부모나 조손가정 등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며, 5~8세로 나이제한이 있다. 아이들의 사연과 받고 싶은 선물 등을 자세히 적어둔 뒤, 자체회의를 거쳐 선물이 꼭 필요한 아이 200여명을 선택한다.
한편, 11월부터는 자원봉사자 모집도 시작한다. 산타복장을 하고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 선물을 전달해주는 ‘몰래산타’ 130명과 행사진행 도우미 70명, 총 200여명의 도움의 손길이 모여야 원만한 행사진행이 가능하다.
‘루돌프’도 필요하다. 루돌프는 몰래산타들을 아이들의 집까지 태워주는 ‘교통봉사자’들을 일컫는다. 벌써 수 년째 카니발 동호회(아이러브카니발)에서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몰래산타들이 보다 신속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차량지원이 많을수록 좋다. 승합차를 보유하고 있다면 꼭 문의해보도록 하자(031-441-2688).
아이들에게로… 출발!
올해에는 12월 23일(목) 오후 5시, 만안구청 광장에서 집결한다. 이렇게 모인 몰래산타들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두 시간에 걸쳐 ‘산타교육’을 받는다. 교육 후에는 베테랑 산타와 초보 산타들을 다섯 명씩 묶어 한 팀을 만든다(팀에는 루돌프도 포함). 한 팀에 배정된 아이들은 통상적으로 다섯 명. 미리 준비해둔 선물과 케잌을 들고 아이 집에 방문해, 노래를 함께 부르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해준다. 한 아이 당 30분 정도 소요되며, 이렇게 다섯 집을 다녀온 뒤 오후 10시 쯤 빚진자들의집으로 다시 모이게 된다.
이맘때 쯤, 빚진자들의집에는 몰래산타들을 위한 따뜻한 라면이 준비되어있다. 봉사자들은 라면을 먹으며 산타활동 후기를 적어 빚진자들의집에 제출한 뒤 산타옷과 장신구들을 반납하는데, 이것으로 몰래산타의 모든 일정이 끝난다.
일 년 동안 ‘크리스마스’
‘몰래산타’의 가장 큰 특징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연을 맺은 아이와 산타가 일 년 동안 교류를 한다는 점이다. 어린이날과 추석에도 산타는 편지와 선물을 아이에게 보내준다. 빚진자들의집에는 아이들이 산타에게 보내온 감사편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송용미 대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의도를 설명했다.
기자가 읽어본 아이들의 편지 중에는 ‘채영이의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2008년부터 몰래산타와 인연을 맺은 채영이는 올해 어린이날 받은 우산이 “작년 것보다 이쁘다”며 “착한 일 많이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편지 끄트머리에는 “이제는 선물보다 몰래산타를 더 좋아하는 채영이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깜찍함’도 보여줬다. 또 다른 편지는 한 아이의 할머니께서 쓴 것이었는데 “아이가 자기도 커서 자기도 남을 돕겠다고 한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의 진정한 의미가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체 후원 필요해
이렇게 안양, 군포, 의왕시 지역의 아이들에게 1년 동안 몰래산타가 되는데 필요한 비용은 4천만원 정도다. 여기에는 크리스마스 선물과 크리스마스 케잌, 어린이날 및 추석선물 준비비용 등이 모두 포함되어있다. 빚진자들의집은 현재 몰래산타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나눔산타’가 되어줄 기업 및 단체를 모집하고 있다. 작년 7회 몰래산타에는 (주)제일모직, (주)케피코, 에너지경제연구원, 안양한라아이스하키단, 한국석유공사, 한국전력 안양지점 등의 기업들이 힘을 모은 바 있다.
비영리 민간단체인 빚진자들의집은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441-25번지 2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달팽이지역아동센터와 달팽이도서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자세한 문의는 031-441-2688(24시간 연락 가능)로 하면 된다.
오 헨리가 딜링햄 부부를 ‘가장 현명하다’고 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 헨리가 살아서 몰래산타들을 만났다면, 딜링햄 부부보다 현명한 이들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몰래산타들의 선물에는 사랑과 함께, 내일의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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