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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미래성/마리아
가톨릭은 왜 좋은가
마리아, 하느님의 걸작품이여!
그리스도교 안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의 하나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십니다.
성서 안에서 많은 인물들이 인류 구원사 중에서 독특하고 바람직한 역할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우리 중의 누가 한 번 또는 그 이상,
가장 사랑 받은 사도 요한,
하느님과 함께 걷고 하느님과 이야기한 모세,
혹은 하느님 성자 아기를 알아보고 그를 자기 팔에 안은 시메온
혹은 그의 공생활의 선교 중 쉼터를 제공해
준 마르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창세 이전부터 하느님께서는 친히,
이 사람들과 또 오늘의 우리들이,
그의 구원사 안에서 아름다운 임무를 나누어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참여를 원하십니다.
그는 그의 자녀들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이시며
그의 관대한 사랑의 표출로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것을 가르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업에 포함시키십니다.
우리는 각각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으로 짜여 들어갑니다.
그러나 누구의 역할이 예수님 어머님인 나자렛의 마리아보다
더 신성하고 두렵고 위대하고 겁나는 것일 수 있겠습니까?
어린 유대인 소녀로서 그는 라헬, 사라, 유딧 그리고 에스델 등
그 그녀의 소중하고 위대한 이스라엘 여성 조상들에
하느님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느님은 위대한 일들을,
굉장한 명성의 이런 이스라엘 여성들을 통해 완성했지만
더더욱 위대하고 비교도 안될 만큼의 뛰어난 임무를
마리아에게 수행케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마리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인류 구원의 구세주, 메시아, 오랫동안 기다려 온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 이처럼 중대한 일을 부여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세, 엘리야, 세자 요한, 심지어 바울로의 역할도
이 하나의 선물에 비하면 무색합니다.
성서의 중심인물인 구세주 이외에, 창세기부터
요한 묵시록까지의 성서 전반에 걸쳐
구원의 임무를 지니신 분은 오직 마리아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일입니다.
원죄 이후 하느님께서 뱀과 여자 사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창세기 3,150의 증오를 이야기 했습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여기에서 여자란 뱀의 머리를 짓누를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구약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신약을 시작하는
예수의 전형 뿐만 아니라 새 하와가 될 마리아의
성서적 유형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궤는 세상을 새롭게 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복음서에서 '여자'라는 명칭으로 그 언급이 반복되고 있는,
사도 요한이 쓴 묵시록 "태양을 입은 여자"(묵시록 12장 1절)에서
마리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자이야기도 여자의 자손과
악마의 자손 이야기도 창세기 이야기와 같습니다.
나자렛의 유대 소녀 마리아의 비범함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에서 그녀에 관해 언급된 예시들을 조금 살펴 보십시다.
하느님은 그의 사람들이 천년 뒤의 어느날 밤에
조용히 다가올 놀라운 육화의 신비를 잘 알아 볼 수 있도록
확실하게 준비해야 했습니다.
믿음과 용기의 착한 여성들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그 외아들의 어머니를 준비시키고 있다는
몇 가지 특징을 보게 됩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은 죄에 물 들지 않고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결국 그들은 한치 사탄의 유혹에 빠짐으로써 하느님과 분리됩니다.
그들은 아름답고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로 더럽혀졌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우리에게 새 계약인 예수가
새 아담(로마서 5장 15-17절)라고 말합니다.
그는 창세기에서 뱀의 머리를 짓누릴 자손으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담과는 달랐습니다.
창세기에서 하와도 역시 자아 완성의 짝을 가졌고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새 계약의 새 하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와와 대조를 이룹니다.
져스틴(A.D. 165년 사망)과 더불어 시작되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원죄 드라마의 역전을 응시했습니다.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의 이야기를 하와가 들었던 것처럼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하와는 사탄의 거짓말을 믿었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와는 하느님의 명령에 불복종했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복종합니다.
하와는 재앙 안에서 그녀와 아담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공동 상속자로 사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며 예수의 부활과 죽음을 초월하여 태어납니다.
예수가 마리아의 자궁을 빌려 태어납니다.
2세기의 성 이레네우스는 "하와의 불복종이 가져온 매듭은
마리아의 복종으로 끊어지고 하와의 불신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와는 어둠의 세계로 그녀를 몰아넣으려는 사탄의 거짓말에 동의하였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를 위한 빛의 세계를 임신했습니다.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인 하와 다음으로 민족의 어머니 사라를 보십시다.
하느님이 그녀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5-16절)
사라는 자연법에 따라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임신을 했지만
마리아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기적적인 임신을 했습니다.
사라는 하느님이 주신 구약을 통하여 이사악을 낳았고
마리아는 새 계약을 통하여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오벳의 어머니인 룻은 '가장 훌륭한 어머니'로 알려진 분입니다.
(룻 3장 11절) 그녀의 유례 없는 성실성은 그의 아들이며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통해 다윗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룻 4장 13-16절)
한나는 위대한 여성으로 하느님의 미덕과 자비에 대해 지극한 신뢰심을 가졌었습니다.
비록 하느님이 그녀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지만 그는 하느님에게 겸손하게 기원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녀를 거절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한나는 임신했고
그리스도를 예언한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마리아처럼 그녀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느님께 사무엘을 바친 후 그 입에서 마리아의
천주 찬미가와 비슷한 감사의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사무엘1서 2장 1-11절)
솔로몬의 어머니인 바쎄바의 모습에서 우리는 유대 전통에 나타나는
어머니 여왕의 직무가 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왕의 부인은 만약 그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여왕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왕비의 방에서 높은 존경을 받습니다.
바쎄바는 솔로몬 왕 곁의 어머니 여왕이였으며
성서는 솔로몬이 그녀를 굉장이 존경했다고 말합니다.
(1열왕기 2장 119-129절)
솔로몬왕은 실제적으로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고 예우를 바쳤습니다.
그녀는 관을 쓰고 그의 오른편에 않았습니다.
그녀는 관을 쓰고 그의 오른편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습니다.
"어머니 말씀해 보십시오. 거절하지 않겠습니다."(1열왕기 2장 20절)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만약 예수가 유대의 왕이라면 왕중의 왕이고
마리아는 그의 오른편에 앉은 어머니 여왕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모든 영광과 존경을 그의 아들인 왕으로부터 받으시는 분입니다.
유딧은 믿기 어려운 용기를 가진 주님의 시녀입니다.
그녀는 단독으로 그녀의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 여자입니다.
성서는 그녀를 뛰어난 덕성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합니다.
매우 드물게도 유딧은 그이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
마리아의 역할을 특별한 방법으로 예표합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절단해서 그녀의 민족을 구한 유딧처럼 마리아도
그녀가 예수를 낳고 또 예수와 함께 해골산으로 불리운
골고타의 십자가를 향해
걸음으로써 뱀의 머리를 짓누릅니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예언되었습니다.
유딧의 역할은 마리아와 여러 면에서 유사합니다.
유딧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그녀에게 중재 기도를
부탁했다는 점에서 유명합니다.(유딧 8장 29절)
성서는 그녀의 미덕이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유딧 10장4,11,9절)
신약의 마리아처럼 유딧은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높다"
(유딧 13장 18절)고 칭송합니다.
몇 세기 후에 성령으로 가득찬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
모든 여자들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루가1장 42절).
메시아를 우리에게 낳아 준 마리아를
우리가 존경해야만 하는 많은 이유와 더불어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 발에 엎드려 존경한다."
(유딧 14장 7절)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딧은 예루살렘의 영광, 이스라엘의 기쁨,
우리 민족의 명예라고 불리었습니다.(유딧 15장 8-10절).
이것은 마리아를 그토록 찬양한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 주목됩니다.
성서 속의 두 여인 모두 영원히 축복받는 인물로 언급됩니다.
(유딧15장10 절,루가1장48절) 유딧의 백성들은
그녀의 명예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거룩한 날을 정했을 정도로
그녀를 존경했습니다.(유딧16장31절).
가톨릭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명예를
찬양하는 축일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등장한 마리아 유형의 또 한 사람은 에스델입니다.
비록 에스델은 사랑스러운 유대인 시녀였지만
왕은 그녀를 높이고 그를 여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대단히 아름다운 처녀였고
성서에도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왕은 다른 어느 여자보다도 에스델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하여 에스델은 모든 처녀를 물리치고
왕의 굄과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왕은 그의 머리에 화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비로 삼았다."
(에스더2장17절) 유딧처럼 그녀는 그녀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법에 의하면 왕이 부르지 않는 한 아무도 왕에게 접근할 수 없었으나
에스델 만은 예외였습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죄없는 잉태로 죄와
죽음의 법으로부터 단 한 분 예외이셨습니다.
육화되신 말씀, 즉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또 성령으로부터 오는 예언 중의 하나는
마리아가 '계약의 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성하고 거룩하신 궤입니까?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의 계약을 쓰신
십계판을 모실 수 있는 성소를 장만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성소에는 정말로 특유하고 값지고 최고에 속하는 자재들만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그 성소를 설계하셨습니다.
그는 나무도 금속도 색깔도 친히 고르셨습니다.
모습과 크기와 장식까지도 친히 결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심지어 이 신성한 장소에서 그를 흠숭하는
세부적인 방법까지도 설명해 주셨습니다.(출애굽기 25장)
이 계약의 궤는 너무도 거룩하고 신성하여 다윗과
그의 백성이 후에 예루살렘으로 이 계약의 궤를 되돌려
안치할 만큼 너무도 숭고하였습니다.
사무엘 2서 6장 6-7절.
"소가 뛰는 바람에 하느님의 궤가 떨어지려고 하자
우짜가 손을 대어 붙들었는데 야훼 하느님께서
우짜의 잘못을 보시고 진노하여 그를 치셨다.
우짜는 하느님의 궤 옆에서 죽었다."
그 남자는 하느님의 성스러운 계약의 궤에
손을 댔기 때문에 실제로 돌연히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단지 그분의 말씀이 적힌 돌을 담은 계약의 궤에 대해서
그토록 지대한 가치를 부여하셨는데 하물며 예수 자신의 살이요
말씀하신 새 계약의 궤, 인간 예수를 잉태하실 여인을
창조하심에 있어서는 그 사랑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십계판인 돌을 담아 둔 나무 궤짝에 비하면
하느님 자신을 몸 속에 잉태한 마리아의 가치와 완벽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아홉 달 동안 하느님을 태내에 모시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엘리사벳의 유사성에 주목해 보십시다!
우짜가 죽은 후 다윗은 "이래서 어찌 하느님의 궤를 모실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그 궤를 오베데돔의 집에 세 달 동안 남겨 두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오베데돔과 그의 집에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사무엘2서 6장9절,11절).
루가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육화되신 말씀을 잉태하신
마리아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오시는 영광을 허락하시다니."라고 감사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그녀와 3개월을 함께한 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무궤는 돌에 새긴 하느님의 계명을 담아둔 궤였으며
마리아는 성령으로 이루어진 말씀을 담은 궤입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성스러움에 있어 돌판을 능가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성모님은 가치와 성스러움에 있어 그 나무궤를 능가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희망과 조건에 맞춰 이들 둘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들 두 종류의 궤에 대해 성서는
'성궤와 신전을 뒤덮던 영광스런 구름을 뚫고 신의 선물이 나타났다.'고
쓰고 있습니다.(출애굽기 40장 35절).
그리스어판 성서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알리는
수태고지에서 마리아를 둘러싼 보호의 기운을 묘사하기 위해
'Episkiazo'라는 진기한 단어를 쓸 정도였습니다.
루가복음 1장 35절. "천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성령이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높으신 분의 기운이 당신을 보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성스런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워질 것입니다.'"
성궤를 보호하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두려움에 싸이게 할 정도로 사랑과 관심을 가지셨다면
미래의 진정한 성소이며 유일한 아들을 잉태하실
감실이 될 여인에게 주신 축복과 사랑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녀는 진정으로 성스런 하느님의 성소였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마리아의 예표 사례들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마리아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신약에서 말하는
마리아에 대한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십니다.
구약에 나오는 성궤와 신약의 성궤가 지니는 유사성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마리아의 성스러움과 아름다움
-성서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역할을 수행하는-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를 망라하여 자식이 어머니를 창조한
유일한 사례이며 우리는 그 신비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가 자신의 어머니를 창조함에 있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형상으로 태어나실 메시아의 신성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돌판을 보관하던 궤짝보다
더 완벽한 성소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가톨릭은 이를 사실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태중에 모셨으며 그의 인성을 형성시키는 특권이
마리아에게 있었으므로 교회는 항상 그녀의 원죄 없음을 믿어 왔습니다.
이 교리는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1854년 12월 8일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동정녀이신 마리아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혜와 은총의 선물을 받아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로 인해,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았다."
마리아가 구원 받았음을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기 전이나 후에 하느님으로부터 사함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녀의 구세주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루가12장46-47절)라고 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가치에 의해
마리아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이시며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담과 이브가 원죄를 짓기 이전에 가졌던
완전한 인간본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인간 원죄로부터 제외되었으며 그 이성은
우리 인간들처럼 어두워진 일이 없었습니다.
욕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죄에 마음이 기울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당연한 준비였습니다.
어떤 이는 모든 이가 원죄를 갖는다는 로마서 3장 9-10절의
말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음을 반박합니다.
사도 바울로 자신도 박약아, 유산된 아기,
이성을 갖기 전에 죽은 아기 그리고 죄없이 창조된
아담과 이브조차도 예외가 적용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교인이나 유대인이나 그들이 비록
선택된 민족이라 할지라도 역시 원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이 예외 사항을 만드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태중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아 1장 5절, 루가 1장 15-44절).
마리아 또한 수태 순간에 태중에서 하느님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완전히 축복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이 믿음을 유지하기 시작한 초기에,
성 아우구스틴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동정녀 마리아가 제외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성 에프렘은 "주여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진정으로 아름다우십니다.
당신께 아무런 오점도 없으며 당신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성 암브로시오는 "사라가 아니라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를 성장케 하소서.
마리아는 순수함에 그치지 아니하고 동정녀였으며
모든 죄로부터 자유로우십니다."라 했습니다.
성서적으로 살펴볼 때,
루가복음 1장 28절의 천사 가브리엘은
그녀를 마리아라 부르지 않고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칼 카팅은 말합니다. "여기서 은총이란 영구적이며 유일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말은 은총의 완벽성을 나타내며
완벽성은 집약적이며 광범위한 완벽이어야만 한다.
마리아가 누린 은총을 가능한 충만하고 강하며
완벽한 것이었을 것이 확실하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이므로 하느님은
그녀에게 특별한 특권을 내려주셨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교회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통해
가득한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과 그녀의 수태고지 순간에
그가 구원받았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1854년에 비로소 공포된 것은
그때 처음 교리가 성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단적인 논란에 대응하고 충실한 시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인간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실 또한 사실입니다.
신이며 사람이신 예수의 육화를 반대하는
네스토리아파의 이교논쟁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 413년 에페소 공의회로 종결되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신을 창조했다거나
그녀가 신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람인 마리아를 창조하였으며 그녀는 신이요
사람이신 예수의 사실상 어머니인 것입니다.
예수는 신이며 사람인 두가지 특성을 가진 신이요 인간이고
, 마리아는 그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진정한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으며
그녀의 칭호는 마리아를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루가 복음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이
'내 주의 어머니'라고 말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루가1장 43절).
다가올 사건에 대해 천사 가브리엘이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루가1장 35절)라고 말한 것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이 그녀의 태중에서 탄생하였다면
그녀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1장23절)라는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이신 임마누엘을 잉태하셨으며 신의 어머니,
즉 하느님의 어머니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마리아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었습니다.
324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는
"우리는 예수가 처음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경배하며
그는 외양으로서의 몸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어머니신 마리아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으로서의 몸을 지니고 계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성 에프렘은 "태중에 아기를 가졌으나 아직 처녀이시고
하느님의 시녀이며 일꾼이신 그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만약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격에 대항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단지 터널을 통과하듯
마리아를 통해 탄생했고 마리아의 신성과
인간다움 속에서 탄생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신심이 없는 것이다."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시릴은 마리아의 칭호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결합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동정녀가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고백할 수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주어진 최고의 특권은
그녀가 영원한 동정녀라는 것입니다.
이는 조용하면서도 은총이 가득한 신비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능가할 수 없는 무한한 신성을 숙고한다면,
그 누구도 하느님이 아홉 달동안 계실
그 태 안에 기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쉽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 동정녀가 아니라는 상황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의 태가 거룩한 삼위일체의
제2위인 성자를 잉태하여 양육하였음을 항상 인정하여 왔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도 임신 중에도
탄생 후에도 동정녀였습니다.
553년의 제5공의회는 이러한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인정하였으며 649년의
레터란 주교회의는 이 가르침을 재확인하였습니다.
이 믿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의견은 성서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남자나 여자의 동기간을 일컫는
세분화된 언어가 없습니다.
친형제, 사촌, 친구, 동족 등을 지칭하는 데 모두
'ah'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이 롯의 아저씨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창세기 14장 12,14절)
신명기 23장 7절을 보면 사람들은 에돔인을
절대로 미워하지 말라고 충고를 받습니다.
이는 그들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는 사람들에게 "모든 이는 유대 노예들을 해방시켜야 하며,
그 누구도 형제인 유대인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된다
(에레미아 34장 9절)"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도 예수의 형제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명백히 예수의 형제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예수의 형제로 칭했습니다.
(사도행전1장 14-16절)우리는 또한 야고보와 요셉이
예수의 형제로 불려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태13장55절).
그러나 성서의 여러 곳을 참조해 보면,
그들이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알페우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마르코 3장 18절).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는 그의 어머니,
어머니의 '자매', 즉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Adelphe'는 '자매'를 의미합니다.
두 자매가 한 부모에 의해 동일한 이르므로 불리울 수 없습니다.
칼 키팅은 <가톨릭과 순복음주의>라는
그의 저서에서 형제와 자매라는 그리스어
'Adelphos'와 'Adelphe'에 대한 설명을 기술합니다.
그에 의하면 이 단어들은 먼 친척을 지칭하는 데도
이용되었으며 신약의 저자들은 이러한 용법을 이용했습니다.
예수는 종종 '맏아들'이라 일컬어집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그리스도 이후에 그의 동생이
태어났음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유대문화에 있어서 형제의 유무에 관계없이
첫아이에게는 '맏아들'이라는 창호가 붙여집니다.
이 칭호는 일종의 특권과 책임을 수반하게 됩니다.
예수에 대한 이 칭호는 동생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생이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사실, 만약에 예수가 친형제 자매를 가졌다면
그는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지 않고,
형제 중 한 명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비가톨릭 신자들은 대체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의 탄생 이후 부부관계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흔히 이것은 마태복음 1장 25절
"그는 그녀가 아들을 임신할 때까지 관계를 맺지 않았다."라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Until'은 차후에 무엇이 바뀌었음을 내포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명백한 예가 바울로의 서간경 속에 나타납니다.
"내가 갈 때까지 성경 읽는 일과 격려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힘쓰시오."(1디모테오 4장13절).
여기서 우리는 디모테오가 스승이 도착한 후에도
가르침의 실천을 지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를 보면 성서에
"아기는 날로 몸과 마음이 굳세게 자라났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파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 살았다."
(루가1장80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그가 출연한 이후에도 요한은
그의 대부분의 삶을 황무지에서 보냈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예로 에페소서 4장 13절과 로마서 8장 22절
그리고 디모테오 전서 6장 14절을 들 수 있습니다.
에페소서 4장 13절: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2절: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디모테오 전서 6장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대가 맡은 사명을
나무랄 데 없이 온전히 수행하시오."
개신교의 대표자인 마틴 루터가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을 주장했다는 것은
비가톨릭 신자에게는 큰 놀라움이 될 것입니다.
1546년 2월 2일 마틴 루터는 "...
출산과 잉태 이전에도 처녀였고 그리고 또한 그녀는
출산 그 이후에도 처녀로 남았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Ulrich Zwingli는 "나는 이것을 쮜리히 교회와
모든 나의 글들에서 언급하였다.
나는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이며 성인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태오복음 1장 25절에 관하여 캘빈은
1562년에 출판된 <산상설교 해설>에서
"예수 탄생 이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
복음사가들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에 관하여
분명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 반대로 엄청난 바보가 아니고는 이러한 일을
집요하게 반박할 사람도 없다는 뜻이 된다."고 썼습니다.
이러한 교리에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신자인 성 아타나시오는
"그러므로 그 아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인간의 육신을 받았다는 예수의 본질을 또한 부정하는 것이 된다"
(A. D. 358-362)라고 말했습니다.
에피파니오는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육신을 지니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영원히 성스러운 처녀인 마리아로부터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났다.(A. D.374)
"성스러운 마리아의 '동정성'은 변함이 없는 순결함이다."
(A. D.374-377)
성 아오스딩은 성모님의 동정성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 처녀가 임신을 했다.
처녀가 수태를 했다. 처녀가 미래를 가져왔다.
그 처녀는 영원하다.
왜 당신은 이것을 의심하는가?"(A. D. 391-430)
죽음은 우리들이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것은 많은 세월 뒤에 자연스럽게 오기도 하고
때때로 이것은 느닷없이 또 너무 빨리 오기도 합니다.
죽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 그리스도교인들은,
왕이시며 선하신 하느님이 그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그 순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기 전까지
아픔 또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죄가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원죄의 멍에 아래 태어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비록 세례성사를 통해 초자연적 삶을 회복했다 하더라도
죄의 징벌인 죽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마리아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것처럼 그녀는 하느님의 외아들을 위해
독특한 부르심으로 준비되었고 별도로 보호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그리스도를 잉태한 순간에 하느님은
그녀를 죄로부터 구해내셨습니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예수처럼 그녀는 죄 없이 잉태되시었고
육신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죄벌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1950년 11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교리를 공적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마리아, 죄없으시고 영원한 동정녀이신 어머니,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 올려지셨다."
그녀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완성이며
우리도 이 세상의 종말에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진기했던 최초의 인물은 아닙니다.
2열왕기 2장 11절을 보십시다.
엘리아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갔습니다.
"그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나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난데 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사는
회오리 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히브리서 11장 15절을 보십시다.
에녹도 죽지 않고 하늘로 갑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 가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시기 전부터 그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모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표현합니다.
(유다의 편지 9절). 모세와 엘리야의 변모 사건을 살펴보면
그 변모가 영혼의 변모가 아니라 육체의 변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묵시록 12장을 보아도 '한 여자'는 영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을 가진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묵시록 12장의 '한 여자'는
교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바로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초자연적 죽음 혹은 승천과 같은 개념의 강조는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바울로는 많은 사람들이 육신을 지닌 채
그리스도와 함께 승천하리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자신을 거룩하게 잉태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소중한 감실인 성소를 부정 부패없이
창조하셔야 했다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것입니까?
아무도, 교회도, 나라도, 마리아의 육신이
그리스도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마리아의 독특한 특권 때문에
하느님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마리아가 태어났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인성의 어머니라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자관계만이 월등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정말 형제로 받아들인다면
또한 정말로 마리아를 우리 어머니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이런 아름다운 말을 했습니다.
"여인이여, 이 사림이 당신의 아들입니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죽어가는 이의 최후의 말은 중요합니다.
그는 아들을 잃게 될 어머니에게 단순히
생계만을 마련해 주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요한에게 그녀를 보살펴 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으로서의 마리아에게 이야기했고
이는 창세기 3장 15절과 묵시록 12장 12절의 의미에서 연결됩니다.
그는 요한을 그녀의 아들로 선언했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사도'로 언급됩니다.
마리아는 이제 모든 사도 들의 어머니가 됩니다.
예수의 형제이기를 주장하는 이는 모두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공동체인
다락방의 오순절 기도 모임에서 마리아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어린 예수를 기르고 가르친 것처럼
초기 교회를 기르고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녀의 완벽한 지도와 지혜의 본질은
항상 우리를 위하여도 지속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요한복음 2장 5절)하셨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완전히 따르고자 합니다.
그녀는 최초의 그리스도교인이요,
어떻게 주님을 완벽하게 따를 것인가를 보여주는 표본이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로부터 부여된 우리의 어머니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의 계획에 계속되는 역할과 참여를
마리아에게 부여하였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가나의 혼인 축제에서 보여 준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염려로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과 초대교회 사도들을 위해
하느님에게 중재하심을 믿습니다.
마리아의 중재는 우리가 서로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중재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재자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것을 원하십니다.
만약 죄로 가득찬 우리가 기도와 중재로 서로 돕는다면
얼마나 많이 마리아가 그리고 하늘의 모든 성인 성녀들이
기도로써 우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
마리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그녀의 특별한 역할과 임무를 수행해 나가도록
독특한 역할과 은총을 받은 분이며
천상 영광을 누리는 최고의 성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을
어머니로 모실 때에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이때에 진실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형제자매로,
하늘에 있는 모든 성인들의 일가친척이 됩니다.
마리아를 우리 어머니로 모실 때에
우리는 모든 것을 지니는 것이 됩니다.
나는 가톨릭이 마리아를 믿고 공경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350년에서 450년 사이에 코리리디안 이라고 알려진 집단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들은 마리아를 신성시하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공경을 넘어서 신을 경배하는 단계로까지 이르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들의 행위를 우상숭배로 보고
그들의 믿음을 이교행위로 비난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이 마리아에게
특별한 역할을 주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마리아를 공경해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자벳은 메시아를 임신한 마리아를 보고
마리아에게 축복 받으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루가1장42-45절).
마리아는 그 자신이 큰 소리로 외치며 열렬히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루가복음1장48절)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마리아가 가장 자주 우리의 사랑을 받는
'복된 어머니'로 사랑 받으실 때에 우리는
성서의 예언을 완성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존경받는 예수의 어머님께
당연한 헌신과 존경을 바치라고 격려합니다.
제4계명은 우리가 마땅히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계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마땅히 마리아를
우리의 정신적 어머니로서 존경해야하고
우리는 마땅히 예수가 그녀를 사랑했듯
그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가톨릭의 전례에 있어서 우리는 존경의 구별을 갖습니다.
한 가지는 '흠숭'이란 의미는 'latria'인데
이것은 응당 하느님에게만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 홀로 찬양받고 유일하게 숭배 받습니다.
다른 창조물들에게 주어지는 찬양의 형태는
우상숭배로 간주됩니다.
또 다른 차원은 'dulia'인데 이것은 특수한 공경을
천사나 성인들에게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준 바울로가
우리 지도자들을 존경하라고 말한 것에 해당됩니다.
(1데살로니카 5장 12절, 1디모테오5와 6장)
우리는 우리 대통령과 시장과 전쟁 영웅과
중요한 과학자들에게도 특별한 공경을 표합니다.
이런 것은 본능적이고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dulia'라는 공경을 우리보다 앞서 가신
하늘의 모든 천사와 성인들,
즉 가장 신성하고 완벽한 천사와 성인들에게 바칩니다.
마지막으로 'hypedulia'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공경으로 '상경지례'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인 예수의 어미니 마리아에게 바치는 공경입니다.
하느님이 자유롭게 그녀에게 주신 특별한 역할과
그 역할이 요구하는 차원에서 마리아는
모든 다른 남녀를 초월합니다.
그녀는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완벽한 모델이십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바치는 상경의 예는
하느님의 미덕과 신성함
그리고 예수님께 바치는 공경을 절대로 감소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림의 화가를 찬미하거나
또는 저녁노을에 감탄하듯 창조자를
기쁘게 해드리는 찬송이 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이
지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1고린도12장 12-36절)
개신교 신자는 마리아도 하늘에 있는 성인들도 필요없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예수와 같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마리아를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모든 다른 은총을 받아 들이면서
왜 그의 어머니는 받아들이지 못합니까?
왜 그녀를 우리의 어머니로 존경하지 못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떠해야 합니까?
어머니 없는 가족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어떤 왕국이 여왕없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모친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어머니입니다.
필립 스코트 신부 씀
이인복 마리아 옮김
가톨릭은 왜 좋은가 -우진 출판사- 중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