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치아
특별한 나를 꿈꾸다 평범한 나로 돌아온다. 34년생인 그녀는 특별했다. 하인들이 있는 집안에 태어나 명문학교만 거쳐 치과의사로 살았다. 68년생인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이야기로 넘쳤다. 부럽다고 느끼는 순간 지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까.
강남치과는 서울 중화동에 있었다. 7호선 중화역에서 내리면 지금도 1층엔 오래된 가구점이 있고 강남치과 간판이 있던 자리엔 권투장이 들어섰다. 그 건물 뒤쪽 3층 건물에 원장님과 가족들이 산다.
오십여 년을 현직 치과의사로 살았다. 내가 몇 대 간호조무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헤아려보면 알 수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십오 년을 결근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 계단을 오르내렸다. 하얀 가운을 입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물청소 하는 스물 한 살의 내가 보인다. 출산예정일이 내일이라고 남산만한 배를 드러내며 인사했던 서른여섯 살의 나도 겹친다.
그녀를 넘어서는 특별한 내가 되고 싶었다. 병원 일이 맞지 않는데도 생계를 위해 버텨야 했다. 생존이 아닌 생활을 하고 싶어서 퇴근하면 진짜 강남으로 진출했다. 역삼역에 위치한 학원을 드나들며 자격증 따기에 바빴다. 주경야독하며 간이역 없는 청춘열차가 어딘가를 향해 달렸다.
그녀의 퇴임식은 조촐했었다. 원장님 집 옥상에서 지인들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이렇게 소박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 때 있었던 몇 사람과 두세 사람 더 초대해 또다시 삼겹살을 구웠다. 그녀는 옥상에서 흙 놀이하며 상추와 고추 등 심어놓고 들여다보기를 좋아했다. 옥상에 심겨진 야채들은 저 홀로 꼿꼿한데 지팡이에 의지한 그녀가 자리를 잡는다. 이젠 당신 한 몸 추스르기도 버거워 의지할 대상이 늘었다. 그녀에게 의지했던 대상들이 이젠 그녀를 부축한다. 무섭도록 야단쳤던 그 목소리는 오간 데 없고 순한 양처럼 사람들 말에 귀 기울일 뿐이다.
늙은 강아지가 가끔 물려주는 고기를 얻어먹으려고 그녀 곁에 누워 눈치를 본다. 그녀 눈치를 보며 눈치껏 행동했는데도 본뜬 모형에 기포라도 생기는 날이면 한없이 작아져야만 했다. 그녀 행동변화를 살짝살짝 지켜본다. 가만히 지켜볼 뿐 지켜줄 수는 없다. 내 입 속에도 그녀 작품이 있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입 안에도 고스란히 있는데 정작 그녀는 의치 없이 고기를 씹는다. 짧은 치아가 서로 닮았다고 웃었는데 나눌만한 추억에도 한계가 와서 할 말을 잃는다.
당신 친정어머니도 예쁜 치매였었는데 당신이 걱정하던 그 치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게 안타깝다. 손녀딸에게 직접 수학을 가르치고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를 빼놓지 않고 들으며 관심사와 호기심이 많았다. 그나마 그렇게 했으니 지금의 모습 아닐까. 이러다 나까지 못 알아보면 어쩌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지워진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상상만으로도 유쾌하지 않다.
특별함에 깃든 평범함과 평범함에 깃들인 특별함이 있다. 점점 작아지는 그녀가 하나의 점이 되어 지상에서 사라질지라도 누군가 기억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 환자 보기 전에 입 냄새 날까 봐 수시로 칫솔질하던 그녀가 양치질마저 귀찮다고 숟가락 내려놓듯 칫솔을 내려놨다. 발치 감자로 겁먹은 어린 애에겐 마취주사 놓지 않고 살살 옛이야기 하듯 이야기로 마취시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빨을 뽑았다. 아파서 우는 게 아니라 허망하고 허전해서 우는데 솜을 물리니 울음소리마저 뽑힌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핸드피스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들린다. 아직도 꿈속에서 중년의 그녀를 만나 썩션을 하고 예리한 기구들을 닦아 소독기에 넣으며 종종걸음 걷는다. 본뜬 석고에 기포라도 날까봐 한 걱정하는 꿈속 장면으로부터 놓여날 때가 있다.
탈북자들이 있는 하나원에 가서 본을 떠오기도 했다. 가난한 노인들 치아는 기공료만 받고 해줬다. 수많은 치아들이 어딘가에서 그녀 얘길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 그 키 작은 여자치과의사가 지금도 살아있을지 몰라. 아마도 살아있다면 지금 몇 살쯤 됐을까. 치과는 문 닫았겠지. 그녀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고백이 어디선가 들리는 듯하다.
돌멩이가 있기에 개울물에서 물소리가 나듯이 사람 입안에도 치아가 있어 소리가 난다. 80이 될 때까지 20개의 자연치아가 남아있길 바라는 치약 이름도 있다. 이갈이를 계속하는 동물들도 있는데 사람의 치아는 남다르다.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이갈이 후에 새로 나지 않기에 치과의사가 필요하다. 물론 선천적인 결손으로 유치를 쓰는 데까지 쓰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의치나 임플란트가 보편화 되고 치과가 한 길 건너에도 있다. 치과의사로 반평생을 살았던 그녀에게 그녀 이야기조차도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다가올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