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5월 30일 일요일, 20시 27분 명조 고딕 신명조 중고딕 견고딕 궁서 명조 산세리프 신명조 중고딕 견고딕 궁서 명조 신명조 중고딕 신명 궁서 명조 고딕 신명조 중고딕 신명 견명조 명조 신명조 명조 신명조 중고딕 #궁서 명조
시각예술의 관점에서 본 李箱 詩의 혁명성
김민수,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
I. 문제제기: 이상연구와 방법의 재조명
그동안 이상 詩를 둘러싼 주된 논의들의 한계는 대부분 문학적 맥락에서 단어가 지닌 시적 의미와 구조만을 조명하거나 그의 남다른 생애와 관련지워 정신분석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려는데 있었다. 이로 인해 이상 시에는 항상 "난해한.." 또는 "천재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고, 그의 시는 마치 외계인이 떨어 뜨리고 간 우주의 암호문과 같이 불가해한 대상으로 취급되어져 왔다. 이상에 대한 신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 연구자의 견해로 이상신화는 그가 지녔던 예술적 감수성 자체 보다는 그를 바라보는 후세 사람들의 제한된 시각에 의해 조장되어졌다고 여겨진다. 즉, 이상 시에 대한 대부분의 견해들은 '눈'을 제외시키고 오직 '문학하는 마음'으로만 시를 읽어 내려했던 특정 예술 분야의 전문가적 고립주의가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 시는 보통의 詩語로 쓰여진 문학적 텍스트가 아니라 시각적 공간구조와 시간 개념을 지닌 것으로 회화, 그래픽 디자인, 건축과 같은 시각적 텍스트에 대해 독해하는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석될 수 없는 특수한 시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 이상을 시각예술의 측면에서 분석하려 했던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들은 전체 이상연구의 방대한 분량
) 김윤식의゛이상연구ゝ(서울: 문학사상사, 1987)에 수록된 그동안 진행된 이상연구의 년대별 목록을 보면 30년대(13편), 40년대(3편), 50년대(24편), 60년대(55편), 70년대(103편), 80년대(64편)의 연구가 쏟아져 나와 김윤식이 분류한 87년 당시까지 무려 총 262편에 이르는 방대한 단독 연구분야를 형성하고 있다.
에 비하면 극소수의 간헐적으로 진행된 몇몇 연구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화가로서 이상'(오광수)
) 오광수, "화가로서의 이상" ゛문학사상ゝ1976. 6., pp. 164-66.
, '펴지 못한 날개 건축의 꿈'(김정동)
) 김정동, "이상의 펴지못한 날개 건축가의 꿈" ゛마당ゝ, 1982.1., pp. 185-193.
등의 연구는 이상이 갖고 있었던 문학 외적인 시각예술적 감수성의 근원을 밝혀준 값진 성과였다.
오광수의 '화가로서 이상'은 이상의 초기 미술가적 소양과 삽화 형식의 특성을 다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상이 그린 삽화의 기법과 표현이 다다적 현상을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것이 이상의 초기 시형태에 적용되고 있음을 간략하게 암시했다. 김윤식의 '문학과 미술의 만남'은 건축, 미술, 문학의 등가성에 대해 논하고, 이상이 갖고 있었던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의 수준과 구본웅과의 교류에서 오고 갔던 감수성에 대해 논했다. 김정동은 주로 전기적 맥락에서 이상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어 건축가로서 그의 교육 배경과 주변 상황에 대해 조명했다. 대체로 위의 연구들은 주로 이상 연구를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종 인용될 뿐 실제 화가로서 또는 건축가로서 이상이 갖고 있었던 조형 감각이 시의 텍스트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미래파와 관련된 후속 연구로서 최근 이상의 '선험적 構想 능력'이 문학에 적용된 방식을 조명한 연구(최혜실)
) 최혜실,゛한국모더니즘 소설연구ゝ(서울: 민지사, 1992).
는 이상이 받은 건축교육과 시각예술 이론을 토대로 그의 시에 나타난 구조와 의미를 밝히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연구자 자신의 문학적 배경은 이상이 영향받은 시각예술 이론을 단지 詩語에 대입시켜 설명하고, 도상적 이미지의 구조 내에서 작용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릴 수 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로 인해 최혜실은 이상 시의 시각적 속성이 건축 이론을 언어적 유희로 윤색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며, 시각예술의 시공성을 문학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언어예술의 질료적 특성을 망각한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앞으로 풀어야할 큰 과제를 남겨 놓았다.
) 위의 책, pp. 125, 130.
그렇다면 과연 20세기 초 다다이스트로 대변되는 서구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이상과 유사한 방식으로 예술의 형식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언어예술의 질료"를 파괴시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편 가장 최근에 '타이포그라피의 측면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안상수)
) 안상수,゛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ゝ(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5). )
는 위의 연구들에 힘입어 이상 시의 '활자성'에 대한 시각적 미감이 현대 타이포그라피의 맥락에서 갖는 의미와 특성을 조명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앞서 이루어진 최혜실의 연구와는 반대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즉 전문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이기도한 연구자 자신의 배경은 이상 시를 형태론적 관점에서 부분적인 구조와 형태만 조명하게 함으로써 시 자체가 지닌 특별한 의미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최근 연구의 성과와 제한점들로부터 본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의문점들을 추적하고자 하는데 있다. (1) 만일 이상 시의 시각적 속성이 서구 다다이스트들이 보여준 실험시의 형태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면 다다의 어떤 속성과 관계하기 때문인가? 즉 다다 이념과 다다이스트들의 시에 적용된 구체적인 작업논리는 무엇인가? (2) 이상이 시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작업논리는 무엇이며, 그것은 시어와 구조 속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었는가? (3) 이상 시는 다다와 이를 계승하는 '具體詩'로 표명되는 현대 실험시의 맥락과 비교해 어떠한 차이점을 갖고 있는가? (4) 결론적으로 위에서 밝혀진 이상 시의 시각적 속성은 시각예술에 있어 어떠한 가치와 의미를 갖는가?
이를 위해 본 연구자는 결과적인 산물로서라기 보다는 '사고 과정으로서' 스타일 분석방법을 사용해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스타일이라는 용어는 예술 행위의 결과적 산물로서 시각예술의 유형을 분류하기 위한 개념으로 주로 형식주의 비평의 맥락에서 사용되어왔다. 그것은 한 개인 예술가의 작품 또는 집단의 작품들 속에 예술적 요소, 질, 표현에 있어 '일정한 형태'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 김민수,゛모던 디자인비평: 포스트모던·해체의 이해ゝ(서울: 안그라픽스, 1994), p. 34.
이러한 스타일의 의미로부터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과 같은 다양한 유형의 예술사조들이 구분될 수 있다. 예컨대 그동안 이상을 문학적 예술사조과 관련지워 분석해 온 대부분의 연구들은 산물로서 이상 시의 특성이 입체파, 다다이즘, 또는 초현실주의의 문학적 특질과 유사성을 갖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상 시를 특정 예술사조에 대입시켜 규명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산물로서 스타일의 분석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특정 예술작품의 (문체적) 특성을 다른 유형과 비교 가능케하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다. 극단적인 예로, 이상 시가 일본 다다 문학가들의 시를 모방하고 서구 다다를 흉내낸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의심하는 연구 결과들은 대부분 산물로서 이상 시의 스타일적 유사성만을 파악한 분석들이었던 것이다.
) 이런 방식으로 이상 시를 조명한 대표적인 예는 다음의 연구에서 잘 나타난다: 장백일, "시에 대한 의심: 이상의 시형태에 대하여" ゛현대문학ゝ1967.2., pp. 260-262.
이러한 산물로서의 스타일 분석방법은 한 예술가의 창조적 삶 속에 작용했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는 단점을 갖는다. 즉 예술 행위라는 것을 닫혀진 숙명의 법칙에 복종하는 일종의 규범적인 것으로 규정짓게 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화가 또는 디자이너가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 또는 종이 위에서 행위와 결과 사이에서 수많은 선택과 판단을 가능케하는 소위 '무언의 앎'(tacit knowing) 또는 '행위 속의 앎'(knowing-in-action)의 상태를 결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 '무언의 앎'이란 철학자 마이클 폴냐니(Michael Polayni)가 감각이 만들어낸 지식의 유형을 지 칭하기 위해 사용했던 말로서, 같은 맥락에서 사회 과학자 도날드 숀(D. Schon)은 '행위 속의 앎'이라 규정했다. 이는 예술가의 행위 속에 지적인 사고작용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또 다른 유형의 앎의 상태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김민수, 위의 책, p. 125 참고.
과연 종이 위에 펜으로 쓰고 그려낸 시의 '이미지'와 이상의 '눈' 사이에 오고 갔었던 실제 내용은 무엇인가? 作詩 행위의 수많은 절차적 상황 속에서 과연 이상이 행했던 '마음의 흐름'에 대해 보다 섬세한 설명을 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스타일의 의미를 산물로서가 아닌 '사고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상의 작품에 나타난 '작업 논리'를 추적하는 방법이다.
) 애초부터 스타일(style)이라는 용어의 어원은 시각예술의 분류체계로 취해진 산물로서의 의미 인 그리스 어원 'stylos'와 사고 과정을 지칭하는 라틴어원 'stilus'에서 유래했다. 김민수, 위 의 책, p. 35.
여기서 작업 논리란 어떤 예술가가 특정 작업 공간(이상의 경우 종이와 눈 사이) 속에서 선택한 이성과 직관을 모두 포함하는 지식 또는 정보와 채택된 절차사이의 상호작용, 그리고 이와 같은 정보, 선택행위, 절차로 이루어진 일련의 연결망 속에서 실제로 행해진 자세 또는 태도를 지칭한다. 만일 이상이 취했던 실제 작업 논리를 추적할 수 있다면 이상 시와 서구 다다이스트들 또는 일본 문학가들의 시와의 차이점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상 시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연구자는 이상 시에 대한 조명을 산물로서 스타일의 의미에 주목하면서 그가 실제로 진행시켰을 사고과정 내의 작업논리에 초점을 맞춘 스타일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연구 대상과 범위에서 본 연구자는 이상의 초기 시 형태를 대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상의 초기 시란 그가 애초에 일상적인 한글언어를 사용한 초기 소설류를 선보이면서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관지 ゛조선과 건축ゝ에 발표한 일어로 쓴 일련의 시, 즉 '이상한 가역반응'(1931.7),' '오감도'(1931.8),‘삼차각 설계도: 선에 관한 각서' 시리즈(1931.10),‘건축 무한 육면각체'(1932.7)와 연작시로 ゛조선중앙일보ゝ(1934.7.24~8.8)에 발표한 오감도 계열의 한글로 된 시들을 지칭한다. 이 중 오감도 계열의 총 15편의 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것으로 간주하지만,
) 오감도 연작시가 독자들의 항의로 시제15호를 끝으로 중단된 후 이상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글에서 오감도의 시들이 당초 2천 점에서 30점을 골라 발표할 계획이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김윤식은 오감도 15편이 1931년, 1932년에 씌여진 여러 권의 창작노트에서 골라서 발표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린 바 있다. 김윤식, ゛한국현대문학사상사론ゝ (서울: 일지사, 1992), p. 22.
본 연구의 논의상 시각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부 시(시제1호~시제5호)로 범위를 제한하기로 한다. 또한 연구자는 같은 시기 '카톨릭 청년' 등지에 이상이 발표했던 다른 시들도 연구의 범위에서 제외시키고자 한다.
II. 다다의 이념과 성격
과연 다다란 무엇인가? 규명에 앞서 먼저 전제해야할 것이 있다. 다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른 예술사조 또는 문학운동과는 달리 뚜렷하게 특정 '이즘' 또는 '운동'의 차원에서 일반화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20세기 초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유럽에서 일어난 여러 아방가르드 유파들의 크고 작은 실험들과 관련된 수많은 개인들에 의해 복잡하게 짜여진 일종의 거미줄과 같은 연결망이었기 때문이다. 다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태리 미래파, 프랑스의 입체파,
러시아의 구성주의와 입체-미래파(Cubo-Futurism), 독일 표현주의, 그리고 네덜란드의 데스틸(De Stijl) 운동 등이 제공한 비옥한 토양 위에서 배양되었다. 다다는 분명 이러한 모든 예술사조들의 스타일과 관계하고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변 예술사조들의 이념과 양식이 다다에 모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취해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어떤 다다이스트는 미래파의 급진주의적 이념 자체에 비중을 두었던 반면 어떤 이들은 미래파의 시각적 장치만을 받아들였으며, 입체파에 대해서도 꼴라 쥬 기법과 같은 형식적인 수단만을 받아 들인 결과 그 이상의 사회 비평적인 이념적 입장들은 수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다다의 선택적 특징이 다다를 특징적인 하나의 예술 사조로 구분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냐하면 다다는 다른 문학운동과 예술 사조들처럼 이념, 이론과 미학체계에 있어 일관된 성격 또는 시작과 끝이 '뚜렷한 형질'을 지닌 것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다는 '즉각성과 파괴의 중개체'
) Lucy Lippard, ed., Dadas on Art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1971), p. 1.
역할을 했던 모든 예술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무한대의 흡수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다에 대해서는 그것이 초현실주의로 향해가는 전단계라든지 표현주의의 말기적 증세라든지, 미래파의 정치적 과격성을 희석시킨 어떤 것 또는 구성주의의 변종이라는식의 소위 "이즘 x + α"라는 관계식의 설정만으로는 전체적인 다다에 대한 성격 파악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따라서 다다에 관한한 다른 예술 사조와 문학 운동들처럼 이념, 이론, 미학체계에 있어 일관된 성격 또는 시작과 끝이 '뚜렷한 형질'을 지닌 것으로 규정짓기가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누군가는 "다다가 미래파와 초현실주의 사이에 위치한 아방가르드 운동"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미래파는 다다가 결성된 후에도 수년간 계속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가 1924년 소멸하기 훨씬 오래 전인 1918년 만큼이나 일찍 시작된 운동이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각기 다른 예술사조들이 지닌 '특성과 차이점'을 강조하거나 '유사성'에 기반해 다다를 정의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다는 주변의 다른 운동들과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브루통, 엘뤼아르, 만 레이, 아르프, 또는 막스 에른스트가 언제부터 다다이스트이기를 그만두고 초현실주의자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입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학적 텍스트와 시각물에서 다다와 초현실주의 사이를 정확하게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다다를 뚜렷한 '이즘'의 차원에서 연결지으려는 모든 시도는 마치 트리스탄 짜라가 다다를 정의했던 말처럼 "빈껍질을 지닌 것으로부터 하나의 개념을 전개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은 웃기는 일" 이 된다. 왜냐하면 다다는 애초부터 "無"를 전제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다이스트들이 추구한 '무'에도 의미는 있었다.
다다의 정신과 역사적 활동이 출현하게 된 배경은 1차세계대전을 둘러싼 당시 유럽의 분위기와 관계가 있었다. 전쟁을 전후로 유럽의 대부분 시인과 미술가들이 유럽 문화의 절정으로서 전쟁을 찬미하고 선동에 참여했었던데 반해, 다다이스트들은 대량살육을 조장했던 유럽의 모든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신화에 대해 공격하고 손상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정신적 기반은 모든 문화적 우상, 사회적 금기와 가치들에 대한 급진적인 회의와 탈신화였다. 전쟁은 당시 모든 유럽 전체의 공통적인 경험이었기 때문에 다다의 정신은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는 전유럽적인 현상으로 확산되어 갔다. 다다의 주된 활동 근거지는 쮜리히, 베를린, 콜론, 하노버, 뉴욕과 파리였으며, 이들 도시에서 다다이스트들은 다다 정신으로 서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빈번한 상호 방문을 통해 활동적인 동료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다다이스트들의 활동이 미래파, 입체파, 또는 초현실주의와 같은 주변의 운동들과 다른 점은 지역성, 지적-정치적 성향과 뚜렷한 각자의 개성에 따라 수많은 '다다의 방언'들이 표명되었다는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 다다에서 일정한 '표준어의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최초 쮜리히에 모여든 다다이스트들은 독일, 루마니아, 프랑스로부터 전쟁을 피해온 난민들로서, 휴고 발, 에미 헤닝스, 마르셀 쟁코, 트리스탄 짜라, 리하르트 휠젠벡, 발터 제르너, 한스 리히터, 한스 아르프와 그의 여자 친구인 소피 토이에버 등은 순수 예술 차원에서 당시 유럽국가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민족주의 대신에 국제적인 아방가르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짜라는 미래파에 심취되어 있었고, 아르프는 파리에서 모던 예술의 전방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꼴라쥬를 포함한 입체파와 가깝게 교류하고 있었다. 휠젠벡과 휴고 발은 베를린의 표현주의 단체와 뮌헨의 칸딘스키를 주축으로한 청기사파(Blaue Reiter)로부터 떨어져 나와 쮜리히로 왔다. 이들이 공유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혐오감과 전쟁을 불러일으킨 유럽문화와 관련된 사회적 관습과 제도로서 언어 자체에 대한 거절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록 각자의 표현 방식은 제각기 달랐지만, 언어는 다다이스트들의 경험에서 파괴되어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면서 자신들의 경험을 실어나르는 중요한 매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6년 카바레 볼테르에서 밤마다 행해졌던 이들의 공연은 당시 유행하던 프랑스와 독일시의 낭독, 아프리카 마스크를 쓰고 벌인 댄스, 중세의 신비적인 문헌 낭독, 휴고 발의 소리시, 짜라의 동시시, 아르프의 거친 문구로 범벅이된 광고 등을 포함했으며, 특히 휠젠벡의 연속적인 드럼 연타로 이루어진 불협화음은 아르프의 증언에 따르면 '완전 아수라장'을 방불케했다. 이러한 모든 다다이스트들의 방언들이 제시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과 문자의 관계 그리고 시각적 표의문자로서 알파벳에 대한 재인식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문자로 이루어진 글 자체가 강력한 '시각 매체'로서
자신들이 소리치고 사랑하고 숨쉬는 생생한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다다이스트들은 미래파가 보여준 낙관주의, 표현주의와 입체파의 이념을 아이로니, 무정부주의, 냉소주의의 언어로 대치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1917년 쮜리히에서 떠나온 휠젠벡에 의해 소개된 베를린 다다는 스위스와 달리 예술을 새로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정치 활동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소재와 스타일에 있어 훨씬 더 과격한 양상을 반영했다. 주된 다다이스트로서 하우스만, 헤르쯔휄데, 회흐 등은 신문, 사진, 신문헤드라인, 광고와 같은 일상 현실의 소재들을 사용해 꼴라쥬와 사진몽타쥬로 재배열하고 병치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활동을 표명했던 것이다. 특히 그로츠는 군국주의와 독일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풍자한 드로잉으로 명백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하우스만는 언어라는 선전 매체를 통해 '시각 음향시'를 시도했다.
콜론에서는 베를린 다다의 정치적 과격성과는 상관없이 화가 에른스트와 시인 바르겔트에 의해 정부와 예술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좌익 이념이 다다 정신으로 표명되었다. 이들은 유아적 드로잉과 수학적 모델을 포함해 모든 딜레탕트적인 그림과 사진들을 다다에 포함시켰고, 특히 바르겔트는 1920년 전시회에서 원형적인 초현실주의 계열의 쇼킹한 작품을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하노버에서의 다다는 쿠르트 슈비터즈(Kurt Schwitters) 한 사람에 의해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베를린 다다그룹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자 스스로 다다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전체 유럽 다다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었던 아카데믹한 모방 미학으로부터 과격한 단절을 시도하면서 '물질 미학'
) 독일에서 물질 미학의 기원은 19세기 전반 일명 비더마이어 양식(Biedermeierstil)으로 대변되는 생산 공정을 반영하는 직접적인 재료의 표현에서부터, 1914년 헤르만 뮤테시우스에 의해 결성된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의 객관성과 사실에 입각한 '卽物主義'(Sachlichkeit)적 태도와 바우하우스(1919-1933)의 생산철학으로 이어진다. 그것들은 모두 기계양식(maschinenstil)에 대한 미학적 반영이었다. 김민수, 앞의 책, pp. 72-82.
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향해갔다. 그러나 그가 채택한 방식은 물질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물질들 사이의 '조절과 제어'에 관한 관심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기존의 온갖 일상 소재와 폐품들을 사용해 재료들이 각기에 대해 서로를 조절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을 고안함으로써 일명 '릴리이프 꼴라쥬'를 창안해 냈다. 이러한 슈비터즈의 작업은 '다다'라는 명칭 대신에 新敎義로서 '메르츠'(Merz)라는 용어를 채택해 모든 예술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단순한 소음에서부터 음악, 회화, 조각과 문자로 이루어진 모든 재료들을 용해시키는 과정으로 향해 갔다.
) Kurt Schwitters, "Merz"(1920), The Dada Painters and Poets, Robert Motherwell, ed. (New York, 1951).
그는 모든 물질을 추상적 관계로 환원시킴으로써 물질과 정신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슈비터즈의 릴리이프 꼴라쥬는 시의 형태로도 전환되어 그의 시 '꽃같은 안나'(Anna Blume)에서 그는 시가지의 전차에서 우연히 본 광고 문구로된 낭만적 사랑시의 파편들을 수집해 '메르츠'시켰다. 또한 하우스만의 음향시의 영향을 받아 슈비터즈는 그의 '元소나타'(Ursonate)에서 소리 실험의 정점을 이룩했다.
일차세계대전 중 뉴욕은 스위스 쮜리히와 함께 듀샹과 피카비아 같은 유럽
의 평화주의자들과 전쟁에 저항했던 자들의 피신처였으며, 이들은 만 레이와 더불어 1921년 뉴욕 다다를 조직했다. 이들 중 듀샹은 '레디 메이드'로 미술의 성격과 문화적 규범 생산의 매카니즘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제기했다. 1차세계대전 직후 파리는 다다이스트들의 마지막 국제적 중심지가 되었는데, 여기서 다다는 초현실주의로 향해 불꽃을 태웠다. 이들 중 전쟁에 참여해 전쟁의 대량살육 현장에서 역겨움을 느끼고 돌아온 브루통, 아라공, 수뽀 등은 1921년 새로운 문학저널 '리떼라뛰르'(Litt鳆ature)를 창간했다. 그들은 예술과 문학에 대한 강한 부정을 드러냄으로써 짜라의 1918년 선언문에서 표출된 "파괴에 대한 위대한 부정"이라는 이념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러나 짜라식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싫증을 냈고, '리떼라뛰르' 그룹은 좀더 의미있는 행동을 위해 언어적인 혹은 시각적인 착란성을 유발하는 '자동기술법'과 '데페이즈망'과 같은 초현실주의 작업논리를 개발해 내기 시작했다.
이상과 같이 간략하게 살펴본 각기 다른 다다의 근원지에서 나타난 다다이스트들의 활동과 성격은 대단히 다양하면서도 복잡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다다라는 것을 쉽게 일반화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다의 놀라운 복잡성은 분명히 전쟁을 야기시킨 모든 문화적 가치를 철저히 거부하고 "백치상태로 비워진 후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허무주의, 무정부주의, 볼세비키즘, 비합리주의, 향락주의, 구성주의, 신비주의, 원시주의로만 간주될 수 없는 엄청난 의미와 여파를 현대 예술에서 조장했다. 다다이스트들이 보여준 다양한 시, 회화, 조각, 필름, 사진, 그래픽과 타이포그라피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다다 이념의 거대한 호수로부터 흘러 나온 여러 갈래의 지류들이었다. 따라서 다다의 산물은 서로 다른 예술영역에서 별개로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으며, 바로 이점이 다다와 관련된 이상의 시가 시각예술의 차원에서 함께 논의되어야하는 명백한 이유인 것이다.
III. 한국 다다이즘과 이상
그동안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다루어진 다다의 수용과 비판에 관계된 대부분의 태도들은 엄밀히 말해 '이즘으로서의 다다,' 즉 '다다이즘'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 다다이즘은 1920년대 초 일본에서 '딜레탕트적인 향락주의,' '허무주의,' 또는 '현실주의'라는 소개로부터 발단되어 2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뚜렷한 유형 또는 유파적 이즘으로 소개되었다.
) 조은희,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다다이즘·초현실주의 수용양상에 대한 연구," ゛현대문학연구ゝ 제72집, 1987,
같은 태도가 최근까지도 이어져, 대부분 한국의 현대 문학사가들은 특히 이상을 논할 때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중간에 위치된 특이한 존재로서 그를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관점에서 규명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이러한 시각들은 통사적인 관점에서 다다이즘이라는 한국 현대 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파를 위치시키는데는 많은 공헌을 했지만 유형학적 산물로서 스타일 분석의 태도가 갖는 한계점 때문에 이상의 作詩 행위와 관련된 '생성논리'와 다다적인 스타일 내에서 그의 시가 갖는 특수한 차이점을 규명하는데는 다소 미흡한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그동안 이념적 관점에서 비교되었던 '다다이즘과 이상'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 예술적 감수성과 작업 논리라는 관점에서 이상 시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요구된다.
이상이 다다적 감수성을 갖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시각의 수많은 연구들을 통해 제시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詩史的 맥락에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상의 시가 1930년대 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시 자체의 미적 순수성을 지향하는 주지적 태도
와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도시문학의 일종으로서 미적 가공기술의 혁신과 언어의 세련성을 추구하는 미학개념의 전개
) 서준섭, ゛한국 모더니즘문학 연구ゝ (일지사, 1988).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달리 말해 일차적으로 20년대 3.1운동 이후 문화정치가 시작되면서 사실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과 같은 본격적인 외국사조들이 수입되고, 일차세계대전을 전후로 나타난 표현주의, 입체파, 미래파 등의 현대 아방가르드 예술사조가 유입되었으며, 이차적으로는 2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KAPF) 이후 3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이 역사의 표면에서 후퇴된 체제순응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문학과 현실을 분리시킨 이른바 예술지상주의의 표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 조은희, 위의 글. p. 2.
한국문학에서 다다이즘의 수용은 조은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921년 玄哲(본명 曉哲鍾)이 당시 일본문단에서 소개되기 시작한 다다이즘에 대해 "인상주의 또는 자연주의에 대한 특징적인 개별명사, 내적 생명의 표현에 불과한 그러나 보통의 표현주의와는 그 취향이 다른 것"이라는 비평을 하기 시작한 이래, 1924년 9월 高漢容이゛개벽ゝ에 발표한 최초의 본격적인 다다이즘론인゛다다이슴ゝ을 통해 다다이즘의 정의와 표현양식, 서구에서 그 운동의 발단, 트리스탄 짜라의 선언문 인용과 그 운동의 의의가 소개되면서 이루어졌다. 고한용은 1920년 다다이즘에 심취되어 다다이스트가 된 다까하시 신끼치(高橋新吉)로부터 받은 영향과 교류를 통해 '조선 최초의 다다이스트'가 되었지만 실제 작품의 예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고한용의 글이 나오고 2달 후 김기진(金基鎭)이 조선일보(11월 24일자)에 '본질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다다이즘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최초로 가해졌다. 김기진은 그의 글에서 다다이즘을 "도시인의 관능적 감수성과 생활의 불안정으로부터 자라난 프롤레타리아의 아리스토크라틱한 감정의 소산물"이며 "도회지에서 일어난 기형적인 과도기 현상"이라고 공격함으로써 다다이즘을 '20세기의 고질병적인 기형적 유파'로 간주했던 것이다. 한편 김기진의 글이 실린 같은 일자 동아일보 지면에는 無爲山峰고사리의 다다이즘론 '゛다다?ゝ?゛다다ゝ!'가 발표되었다. 이로써 20년대 중반 한국 문단에 다다이즘에 대한 개념적 논의가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조은희, 앞의 글.
이러한 논의와 함께 실제 작품에서 다다풍의 시가 출현한 것은 정지용이 '學潮' 창간호에 실은 초기시 '슬픈인상화,' '파충류 동물,' '카페 프린스'(1926.6), 김니콜라이(박팔양의 필명)의 '윤전기와 4층집'(1927.1), 김화산의 '악마도'(1927.2), 임화의 '지구와 빡테리아'(1927.8)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들 다다풍의 시들이 지닌 공통점은 언어에 대한 자각과 시각 효과를 위해 기존의 시가 지닌 언어 구조와 문법 체계를 파괴함으로써, 시가 이미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無爲山峰고사리가 다다 시의 특색을 "재래 언어와 문장과 표현을 탈피한 표현추구"
) 無爲山峰고사리, "゛다다?ゝ?゛다다ゝ!," 동아일보, 1924.11.2.
에 있다고 파악했듯이, 위의 시들에서는 소리, 억양, 리듬 등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배제시키고 대소문자와 부호를 사용하는 이른바 '음향시 또는 소리시'의 요소가 나타나고,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는 '동시시,' 그리고 불규칙한 단어의 배열과 숫자와 등식부호를 사용한 그림문자화된 '시각시'의 형태 요소들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시각적 효과를 위해 언어파괴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언어의 조직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즉 시에 적용된 대소활자의 활용과 추상기호의 사용은 엄밀히 달해 기존의 단어를 부분적으로 대치했을 뿐 아직 내용에 있어 기존의 시형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다다풍의 초기시들은 원래 다다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반예술적 또는 反詩的'인 다다미학에 도달한 것이라기 보다는 기존 시에 대한 반항의식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20년대 국내에서 출현한 초기 다다풍의 시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 30년대 초 이상이 도달한 일련의 시들은 어떤 의미에서 서구의 다다이스트들 조차도 미처 실현하지 못한 철저함을 보여준다. 특히 이상의 시는 '내용을 지닌 사고'를 위한 전달체로서라기 보다는 '구체적 재료'로서 언어를 사용하여 '분석되어질 뿐만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 재창조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 다시 언어가 그래픽 이미지와 대립됨으로써 소위 '동시적 운동 효과'와 더나아가 '의미의 의미'가 계속적으로 지연되면서 파생되는 '해체미학의 다중성'을 허용했던 것이다.
IV. 다다와 이상의 구체시
다다 미학의 최고 경지는 일찍이 다다이스트 한스 리히터가 '대립의 통합'이라고 말했던 '반역의 변증법'을 통해 트리스탄 짜라가 말한 '無'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히터는 우연의 법칙에 의존하면서 같은 논리로 우연의 법칙을 의미있게 하는 '규칙'의 법칙이 있어야 함을 인식했던 것이다.
) Hans Richter, "Introduction to 'G', ゛Formゝ, No. 3, 1966, p. 27.
다다에서 질서에 대한 법칙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의 법칙에 대한 또다른 상대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다이스트들이 추구한 대립에 대한 통합 의지는 미술사가 미셀 쏘포가 말한 예술이 추구하는 '전형과 울부짖음 또는 법칙과 파열'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취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Michel Seuphor, ゛La peinture abstraiteゝ (Paris: Flammarion, 1964), p. 62.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예술사조들은 양 극단 사이에서 주로 한 극단만을 주로 선택한다. 예를 들면 입체파, 구성주의, 미니멀리즘 등과 같은 예술사조들은 주로 '전형과 법칙'을 선택했던데 반해, 야수파, 추상표현주의, 파괴적인 행위예술 등은 '함성과 파열'로 향해갔던 것이다. 결국 짜라가 다다를 가르켜 모든 '이즘 중의 이즘'이라고 공언하면서 그것은 '無를 의미한다'고 했던 것은 다다가 법칙과 파열 사이의 양극단 사이에서 한쪽만을 선택한 예술사조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대립의 통합점을 지향했기 때문이며, 일단 통합된 대립양상은 다시 부정의 변증법으로 거부됨으로써 '無의 단계로 환원'되야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다다의 개념을 예술가의 작업 논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다다의 최고 경지로서 '부정의 변증법'이 나오기까지 대략 다음의 세가지 창조적 작업 논리가 존재해야한다. 첫째는 절대적인 논리적 질서에 대한 추구, 둘째는 절대적인 비논리적인 무질서 또는 우연에 대한 추구, 그리고 셋째는 이와 같은 두가지 대립양상을 통합하려는 또 다른 시도이다. 그러나 실제로 다다이스트 시인들이 보여준 우연시 또는 동시시들은 대부분 절대적인 우연에 대한 실험에 의존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트리스탄 짜라 자신이 어떻게 우연詩에 도달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다다이스트의 시를 위한 처방'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作詩法에 대해 "신문을 줏어 들어라. 가위를 들고, 시를 지으려고 계획하고 있는 기사를 선택하라. 그것을 가위로 오려내라. 그리고 오려낸 각기의 단어들을 봉지에 넣고 마구 흔들어 섞어라. 그리고 단어들을 하나하나 봉지에서 꺼내고, 꺼내진 순서대로 단어들을 옮겨 적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 Tristan Tzara, ゛Lampisteries précédés des manifestes dadaゝ(Paris: Pauvert, 1963), p. 64.
짜라의 방식과 유사한 작업 논리가 아르프, 휠젠벡, 듀샹 등과 같은 다른 다다이스트들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이들의 시에 나타난 우연성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단어와 문장들의 파편과 '기성품'의 꼴라쥬를 통해 계속해서 관찰된다. 아르프는 "신문과...광고로부터...취해진 단어와 문장은 내 시의 기반이며, 이러한 재료들은 전적으로 임의적인 자세로 선택되었다"고 고백한다. 즉 그가 선택한 시의 요소들은 "눈을 감고... (신문과 광고문구의) 단어와 문장을 연필로 찍어 선택했다"는 것이다.
) Hans Arp, quoted by Herbert Read, ゛Arpゝ (London: Thames and Hudson, 1968), p. 142.
마찬가지로 휠젠벡의 드럼연타에 의한 소음시와 듀샹의 '레디 메이드' 등은 모두 같은 방식에서 취해진 결과였다.
한편 만일 다다이스트들 중에서 절대적인 논리적 질서를 추구한 경우는 슈비터즈의 작업에서 발견된다. 슈비터즈의 시는 위에서 설명한 다다이스트들의 경우와 달리 '논리적으로 일관된 시'였다. 그의 시에서는 어떤 절대적인 명료함이 '물질 미학'의 차원에서 반영됨으로써 단어에 드러난 의미와 내재된 의미가 모호한 이른바 추상회화에서 발견되는 '조형적'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슈비터즈가 '문자' 또는 '숫자' 자체를 어떠한 소리 또는 개념적 내용을 갖지 않는 具體的 오브제(concrete object)로 보았기 때문이다.
) Kurt Schwitters, "Logically Consistent Poetry," in Richter, 앞의 책, pp. 147-9.
이로 인해 슈비터즈는 그의 '그림으로 구성된 詩'에서 문자와 숫자를 병치시키거나 단순한 단어들의 순서를 바꾸어 사용함으로써, '절대적으로 논리적인 시'를 가시화했다. 이와 함께 그의 음향시는 위의 세가지 시들의 속성을 모두 반영하면서 마치 추상회화와 같은 기하학적인 질서와 비례를 드러내는 현대의 '具體詩'가 지닌 미학적 특징을 반영했다. 이와 같이 슈비터즈의 작업논리는 '절대적인 논리적 질서'를 추구하는 추상회화적 속성을 지닌 구체성에 기반했기 때문에, 다다의 일반적인 우연성에 의존한 양상으로부터 차별화를 시도하기 위해 스스로 '메르쯔'(Merz)라는 新敎義를 내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그는 具體 문자와 숫자만을 사용해서 언어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물질들이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기존의 관습과 문화적 규범을 해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점은 아직 여전히 남아있었다. 슈비터즈의 소위 '논리적으로 일관된 시'는 순수하게 타이포그라피만으로 이루어진 구체시였지만 우연적 가치에 대한 시적 잠재력을 통합하는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다의 작업논리에 근거해 다다의 최고 경지인 '부정의 변증법'이 어떻게 이상의 시에서 통합되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상의 초기시에서 부정의 변증법은 시의 구조에서 그가 사용한 몇가지 대립과 통합 방식
증법'이 어떻게 이상의 시에서 통합되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상의 초기시에서 부정의 변증법은 시의 구조에서 그가 사용한 몇가지 대립과 통합 방식으로 나타났다. 첫번째는 시각적 이미지와 문자적 어휘사이의 상호대립과 재통합, 두번째는 시각적 기호 또한 도상적 문자 언어 내의 상호대립과 통합, 세번째는 순수 시각 이미지의 구조 내에서 발생한 추상성의 대립과 이에 대한 반전을 통한 통합양상이 바로 그것이다.
첫번째 방식인 시각적 이미지와 문자적 어휘 사이의 상호대립과 재통합은 ' 三次角 設計圖' 중 '線에關한 覺書1'에서 최초로 제시되고, 이 구조로부터 파생된 유사 개념들이 '異常한 可逆反應'과 '線에關한覺書 4' 등과 같은 시들에서 문자적 언어만을 사용해 '설명'된다. 먼저 '線에關한 覺書1'을 살펴보자
) 1931년 10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관지 '조선과 건축'에 발표되었던 日文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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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宇宙는 冪에依하는冪에依한다)
㉡ (사람은數字를버리라)
㉢ (고요하게나를電子의陽子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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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펙톨
㉤ 軸X 軸Y 軸Z
㉥ 速度etc의統制例컨대 光線은梅秒當三00000키로메-터달아나는것이確
實하다면사람의發明은梅秒當六00000키로메-터달아날수없다는法은 勿論없
다.그것을幾十倍幾百倍幾千倍幾萬倍幾億倍幾兆倍하면사람은數千年數
百年數千年數萬年數億年數兆年의太古의事實이보여질것이아닌가,그것을
또끊임없이崩壞하는것이라고하는가,原子는原子이고原子이고原子이
다.生理作用은變移하는것인가,原子는原子가아니고原子가아니고原子가
아니다.放射는崩壞인가,사람은永劫인永劫을살릴수있는것은生命은生도
아니고命도아니고光線인것이라는것이다.
㉦ 嗅覺의味覺과味覺의嗅覺
㉧ (立體에의絶望에의한誕生)
㉨ (運動에의絶望에의한誕生)
㉩ (地球는빈집일境遇封建時代는눈물이날이만큼그리워진다)
゛線에關한 覺書1ゝ은 전체 구조에서 가로와 세로축을 이루는 1에서 0까지의 숫자로 이루어진 좌표에 각기 점들이 표기되어 있는 도표와 같은 그림으로 제시되고, 다음으로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행들이 뒤따라진다. 애초에 도상적 이미지는 다음과 같이 마치 지표면에 박혀질 어떤 건축물의 100개의 기둥들을 위한 평면 좌표와 같이 보여짐으로써 삼차원을 이루는 입체 구조를 제시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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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미지는 어떠한 언어적 설명에도 의존하지 않고 마치 추상 그래픽과 같이 기하학적인 공간적 질서를 드러내는 具體的 오브제일 뿐, 절대 공간 속에서 우연성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 이러한 고도의 추상성을 이상이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경성고공 재학시절(1927-29) 받은 교육적 배경에 기인한다. 당시 경성고공에서 건축사와 건축장식을 가르친 藤島亥治郞과 野村孝文은 동경제대 공학부 건축과 출신들로서 당시 동경제대의 소장학파의 학풍인 분리파(secession)운동을 흡수한 사람들이었음이 최혜실의 연구에서 밝혀진바 있다(゛한국모더니즘소설연구ゝ, p.64). 최근 다른 연구에서 필자가 직접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 건축계의 분위기는 분리파 운동 이상이었다. 예를 들면 체제는 달랐지만 동경미술학교(현 동경예대) 건축과 졸업작품 수장자료에는 이미 1926년경(大正15년)부터 분리파 운동에서 벗어나 바우하우스 스타일로 향해진 흔적들이 뚜렷히 발견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 주류 건축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말해 준다. 즉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인 최초로 미즈타니 다케히코(水谷武彦, 1898-1969)가 1927년에서 29년까지 실제로 독일 데싸우시절 바우하우스에서 정규교육을 받고 돌아와 동경미술학교 건축과에서 건축실기를 가르칠만큼 분리파 운동 이상으로 향해진 모습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감수성은 이미 1925년 데싸우에서 절정기를 맞고 있던 바우하우스의 조형성에 근거했음을 알 수 있다 (김민수, "한국현대디자인과 추상성의 발현:1930년대~60년대,"゛조형ゝ, 제18호, 1995., p. 50.). 결정적인 예가, 최혜실이 위의 연구에서 밝혔듯이, 일련의゛조선과 건축ゝ권두언과 시에서 이상이 표명한 모홀리-나기의 저서゛The New Visionゝ(1928)과 관련된 내용과 시어들에서 나타난다. 1923년에서 28년까지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던 교수로서 모홀리-나기의 책이 최초로 출판된 해가 1928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상은 1928년에서 31년사이에゛The New Visionゝ이 출판된 직 후 경성고공 재학 시절 또는 졸업후 총독부 건축과에서 같이 근무했던 일본인 건축가 누군가의 소개로 이 책을 읽어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와 같은 사실들은 이상이 추상성이라는 근대적 조형감각에 대해 미비한 식민지교육을 받아 어설프게 흉내낸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점은 이상이 1932년゛조선과 건축ゝ의 표지 공모에서 4석 입선으로 당선된 표지 디자인의 모습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그것은 당시 한국 디자인계의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절대추상의 경지였으며 195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유래가 없는 그래픽이미지였다.
그러나 절대적인 공간 질서는 뒤따라진 다음의 시행들에 의해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 (우주는 冪에 의하는 冪에 의한다)
㉡ (사람은 數字를 버리라)
㉢ (고요하게 나를 電子의 陽子로 하라)
시행 ㉠는 앞서 제시한 도상 이미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명제로서 '멱(冪, 10n)에 의하는 멱[(10n)n]'에 의한 우주는 삼차각의 입체라는 물리적 고정성으로부터 '영겁'을 의미하는 무한 공간으로 해체된다. 다음으로 해체되기 위한 전제로서 이상은 위의 시행 ㉡을 제시했다. 십진법의 좌표에 의해 한정되었던
) 여기서 1~0까지의 숫자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단지 이미지의 절대 구조와 비례를 가시화하기 위해 취해진 조형적 수단일 뿐이다.
위의 도상적 이미지에서 '숫자를 버림'으로써 이미 확정된 시행 ㉡에 제시된 이미지에 어떠한 변화가 오는지 다음의 그림을 눈여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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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에 따른 결과로서, 위의 그림은 숫자가 버려졌을 때 미확정적인 미립자와 같은 수많은 점들의 관계성만을 남겨 놓는다 (이상은 '마음의 눈을 통해' 그려보았을 것이다). 이는 좌표에 의해 '확정되었던 물질성'에 대한 엄청난 부정으로서 다음에 따라오는 시행㉢과 관련된다. 시행 ㉢은 시행 ㉠과 ㉡의 결과가 물질이라는 것과 인간(이상 자신인 '나') 존재에 대해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질이 원자적인 기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는 고전물리학 체계에 대한 부정이면서, 결과적으로 데카르트식의 근대적 자아개념에 대한 전면 부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뉴우튼의 우주관은 모든 물리 현상이 발생하는 본질적인 기반으로서 고전 유클리드 기하학에 입각한 3차원 공간과 시간에 대한 견해였으며, 공간과 시간은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적인 것이면서 고정된 것으로 간주했다. 이로 인해 고전물리학의 체계는 모든 물질과 물리 현상이 기본적으로 단단한 결정체인 원자들 사이의 엄격한 인과성에 기인한다고 설명해 왔다. 그러나 고전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원자 구조에 관한 이상한 현상이 'X-레이'의 발견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방사능 물질의 원자들은 매우 다양한 종류의 방사선을 放射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른 물질들의 원자들로 그 자체를 변형시키는 현상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물리학자 러더포드(E. Rutherford)는 방사능 물질로부터 放射되는 미립자들은 亞원자 크기의 '고속 투사체'들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이러한 미립자로 이루어진 원자에 충격을 가했을 때 완전히 예기치 않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 냈는데, 그것은 바로 각기 원자들은 핵 주위를 움직이는 '전자'라는 미립자들이 '운동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러더포드의 실험은 1920년대 보어(Niels Bohr) 등의 양자물리학 이론에 의해 최초로 정립되게 된다. 양자이론은 물질의 기본 단위로서 원자가 쪼개질 수 없는 존재라는 고전물리학의 오류를 대치하면서, 물질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입자'일 수도 있고 '파장'으로도 보여질 수 있음을 제시했다. 물질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추상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달리 말해 광자기적 파장이면서 미립자들의 형태를 취하는 이러한 물질의 이중적 성격의 실체는 '빛'으로 이루어진 에너지 다발이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빛 에너지의 다발을 '양자'라 규정했는데, 양자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미립자로서 부피가 없이 언제나 빛의 속도로 여행을 하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제 '광자'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상은 바로 이러한 고전물리학을 대치시킨 현대물리학의 '물질적 존재성'에 대한 새로운 입장을 표명한 양자 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시행 ㉢에서 "고요하게 나를 電子의 陽子로 하라"는 것은 이상 자신이 결정체적인 원자적 존재로서 '나'가 아닌 감지하지 못하는 '빛의 속도로 고요하게 여행하는' (전자적 미립자와 파장의 이중 성격을 지닌) 양자적 존재임을 표명한 일종의 '새로운 自我 宣言文'이였던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뜨의 결정론적 자아 개념에 대한 전면 부정을 뜻한다. 즉 데카르트에 의해 소개된 근대적 자아 개념은 궁극적으로 우연에 대한 이성의 통제, 또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극복이라는 성격으로 표명된다. 이는 모든 철학적 사유가 이성이 통제하는 것의 합법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짐을 뜻하며, 모든 철학적 목표는 자치적인 이성적 존재의 설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명제에서 '나'는 그 자체가 전적으로 의식적인 존재임을 지칭하며, 자치적이고 내적으로 통합된 존재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제는 의식에 대해 모순되는 또는 다른 정신 영역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닫혀진 체계'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구분된 '나'와 '세계'사이에서 세계는 '나'라는 인간 관찰자에 대한 어떠한 언급 없이도 객관적으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상은 시행 ㉣과 ㉤의 대비를 통해 그러한 양자적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빛의 스펙트럼 분광효과를 파장의 순서대로 배열하는 시행 ㉣의 스펙톨
) 이말은 이상이 경성고공의 물리실습실에서 보았던 분광기(spectral apparatus)를 지칭하는 '스펙톨' 실험기기를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 뿐, 다음의 시행 ㉤에서 제시된 축 X,Y,Z의 삼차원을 지닌 유클리드 기하학의 입체가 아님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시행 ㉥은 위의 시행들에서 제시된 양자이론을 보완하는 상대성이론에 관한 부분이다.
실제로 현대 물리학에서 양자이론이 형성된 바로 직후에 원자핵 현상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양자이론과 함께 상대성이론이 통합되어야 한다는사실이 밝혀졌다. 1930년대초 현대물리학자들은 원자의 세계를 벗겨낸 후,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자연현상을 서술하기 위해서는 상대성이론이 고려되어야함을 깨닳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원자핵을 대치하는 양자, 중성자, 전자, 그리고 수많은 亞원자 상태의 미립자들이 빛의 속도에 필적할 만큼 엄청나게 빨리 운동하고 있는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이와 같이 운동하는 미립자들의 상대적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즉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4차원의 연속체이며, 만일 서로 다른 관찰자들이 동일한 사건에 대해 상대적으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면 사건은 서로 다르게 보여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때 시공간 상에서 취해지는 모든 측정들은 절대적인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상의 ゛선에관한각서5ゝ(조선과 건축/ 31년 10월)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사람은光線보다도 빠르게달아나면사람은光線을 보는가,사람은光線을
본다,年齡의眞空에 있어서두번結婚한다,세번結婚하는가,사람은
光線보다빠르게 달아난다..
未來로 달아나서 過去를본다,過去로달아나서未來를보는가,未來로
달아나는것은過去를달아나는것과同一한것도아니고未來로달아나는것
이過去로달아나는것이다擴大하는宇宙를憂慮하는者여,過去에살으
라,光線보다도빠르게未來로달아나라....(이하 생략)..
따라서 시행 ㉥에서 만일 '사람'이 빛의 속도를 '...幾兆倍'해서 달아날 수 있는 '발명' 을 한다면 시간을 초월해 과거 '태고의 사실'을 볼 수 있지만 결국 그러한 시점 또한 끊임없이 '崩壞'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는 물질이 미립자이면서 미립자가 아닌 빛으로 운동하는 파장으로 이루어졌을 때 "원자는 원자이고..."와 "원자는 원자가 아니고..."라는 문구를 대비시켜 사용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광선'에 의해 '방사'되는 운동은 물리적 시공간에 닫혀진 사람을 '永劫'의 무한 시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이때 이 세상의 모든 것('생명')들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는 '붕괴'됨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서 유래하는 부정 논리는 다시 물질에 대한 최종 결론으로 이어져 이질적인 것 모두가 지각하는 상대적 위치에 따라 '후각의 미학'이 될 수 있고 '미각의 후각'이 될 수 있는 시행 ㉦로 옮아갔다. 이러한 논리의 후속적인 전개가 ゛異常한 可逆反應ゝ(조선과 건축, 1931. 7)의 제목과 내용 전체를 통해 계속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애초에 이상이 입체 도형의 기본 구조 이미지로 제시한 절대적인 유클리드 기하학, 뉴우튼의 고전물리학, 또는 데카르뜨의 근대적 자아개념에 대한 첫번째 부정논리로부터 나온 것이다(시행 ㉧). 그러나 주목할 것은 시행 ㉧이 '운동에의 절망에 의한 탄생'이라는 시행 ㉨과 대립됨으로써 이제껏 부정해온 시행 ㉧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부정의 부정' 논리가 제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이상은 이제까지 자신이 부정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부정하고 마지막 시행 ㉩의 "지구는 빈집으로..."라는 無의 세계로 환원시키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상은 이러한 '절망의 단계'
) 대부분의 이상 연구에서 이러한 이상의 절망 상태를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그의 삶의 특수한 상황들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예들을 흔히 보게된다. 그러나 필자는 위에서 보여준 이상의 '절망'은 철저한 철학적 사유와 인식론적 사고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며, 결코 병리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에 도달해 물질에 관한 지식이 더이상 직접적인 일상 감각을 통해 경험될 수 없으며, 이러한 초감각의 세계를 일상의 보통 언어로 서술하는데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리학적인 무한 세계에 깊이 들어 갈수록 보통의 언어적 개념과 이미지를 폐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線에關한覺書1ゝ은 철저한 인식론적 사고의 흐름에 의해 '선언문'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에 전개될 이상 문학 작품들의 기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실제로 이 시는 1931년 10월 ゛조선과 건축ゝ에 발표되었지만 시에 표기된 날짜는 31년 5월 31일로 되어 있어서 첫번째 시로 밝혀져 있는 ゛이상한 가역반응ゝ(31.7.) 보다 앞서 쓰여진 시이다. 이점은 김윤식의 연구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김윤식, "이상문학의 기호체계" 「한국현대문학 사상사론」(서울: 일지사, 1992), p. 27. 또한 필자의 견해로 ゛이상한 가역반응ゝ의 제목과 내용은 ゛선에대한각서1ゝ중에서 다루어진 양자이론과 상대성 이론으로부터 유추된 것이라는 점에서도 사고의 흐름상 일치한다고 본다.
다음으로 이상시의 두번째 특징인 시각적 기호 또는 도상화된 문자 언어내의 상호 대립과 통합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경우의 시로는 ゛...覺書2ゝ 와 ゛...覺書3ゝ, 烏瞰圖 중 ゛詩第1호, 2호, 3호ゝ 등이 있다. 이중 시각적 기호 내에서 발생하는 상호대립과 통합의 양상은 ゛...覺書2ゝ와 ゛...覺書3ゝ에서 보여지며, 도상화된 문자언어 내의 상호대립과 통합은 오감도 중 ゛詩第1호, 2호, 3호ゝ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시들은 제시된 시의 구조와 형태에 있어 약간씩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앞서 설명한 ゛...覺書1ゝ에서 표명된 초감각적인 세계를 드러내기 위한 연속적인 실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즉 이상은 ゛...覺書1ゝ에서 기존의 언어를 통해 설명식의 진술을할 수 밖에 없었던 애초의 표명들을 시각적 장치(기호, 부호, 등식, 도상화된 단어와 어구) 만으로 제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線에關한覺書2ゝ(1931.10)는 바로 이러한 실험을 위해 취해진 것이며, 형태상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한 대립과 통합구조를 갖는다.
㉠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 線上의一點 A
線上의一點 B
線上의一點 C
㉢ A+B+C=A
A+B+C=B
A+B+C=C
㉣ 二線의交點 A
二線의交點 B
二線의交點 C
㉤ 3+1
1+3
1+3 3+1
3+1 1+3
3+1 3+1
1+3 1+3
1+3
3+1
위의 시에서 시행 ㉠ 내의 숫자 1과 3의 기본 조합에 의해 파생된 기본 등식(1+3 또는 3+1)들은 다음의 그림 A에서와 같이 대립되는 등식(3+1 또는 1+3)들과 함께 하나의 대립쌍을 이루고, 이는 다시 다른 대립쌍들에 의해 계속해서 대립되는 모습을 형성한다. 같은 방식의 대립 구조가 아래의 그림 B를 형성하고 이는 다시 첫번째 그림 A와 대립하게 된다. 그림 C는 이 대립방식을 보기 쉽게 유니트의 조합으로 도해한 것이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