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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출판문화회관 4층 강당에서는 (재)한국출판연구소 주최로 출판포럼이 개최되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1년 반이 경과되었으나 현재 정착되지 못하고 도서유통 질서의 혼란이 일어나는 등 법개정을 통한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히 요청됨에 따라 ‘도서정가제 관련법 개정을 위한 대토론회’를 주제로 개최된 이번 포럼은 부길만 동원대학 출판미디어학과 교수의 ‘도서정가제 관련법의 문제와 개정 방향’ 주제발표로 진행되었다. 이번호와 다음호 특집에서는 주제발표 내용의 전문을 게재한다. I. 머리말 IV. 도서정가제 관련법의 문제점 II. 도서정가제의 의의 V. 도서정가제 관렵법의 개정 방향 III. 역사적으로 살펴본 한국의 도서정가제 VI. 맺음말 : 도서정거제 정착을 위한 제언 |
부길만 / 동원대학 출판미디어학과 교수
Ⅰ. 머리말
도서정가제가 법제화되기 이전에 출판․서점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도서정가제도를 확립하여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바 있다. 197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실시된 도서정가제는 당시 극도로 문란해진 서적유통질서를 바로잡고 독서문화를 진작시키며, 출판산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케 하는 원동력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도서정가제가 2002년 8월에는 ‘출판및인쇄진흥법’에 포함되어 공식적인 법률로 확정되었고 2003년 2월 대통령령으로 시행령까지 제정되어 현재 시행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출판․서점인들은 물론이고 도서정가제의 입법화에 관여한 정책 담당자들의 노력이 컸다.
그러나 최근 도서정가제는 법제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봉착해 있다. 즉, 도서정가제가 법률로 정해져 있어 형식적 면에서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인 운영은 부실할 뿐만 아니라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우선 기초 작업으로서 도서정가제의 문제를 개념부터 시작하여 그 기능과 필요성 등을 검토하고 한국 도서정가제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현행 도서정가제 관련법의 문제점과 개정 방향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정가제 관련법의 바람직한 개정뿐만 아니라, 출판 및 서적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정책의 수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도서정가제의 의의
1. 정가제의 개념과 의의
정가제란 법률적․경제적 용어로는 재판매가격유지제도를 말한다. 재판매가격유지(resale price maintenance)란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이하 공정거래법) 1장 제2조 6항에 의하면, 상품을 생산 또는 판매하는 사업자가 그 상품을 판매함에 있어서 재판매하는 사업자에게 거래단계별 가격을 미리 정하여 그 가격대로 판매할 것을 강제하거나 이를 위하여 규약이나 기타 구속 조건을 붙여 거래하는 행위를 말한다. 즉 제조업자나 그 밖의 공급자가 자기제품을 재판매하는 유통업자들에게 일정가격이나 최저가격(때로는 최고가격)을 지정하고 거래중단 등의 제재 조치를 통하여 지키도록 하는 행위이다.
상품의 통상적인 유통경로는 제조업자 → 도매업자 → 소매업자 → 소비자의 단계로 구분된다. 제조업자가 도매업자에게 상품을 판매하게 되면 도매업자는 이를 구매하여 다시 소매업자에게 판매하게 되는데, 여기서 도매업자가 소매업자에게 판매하는 것을 ‘재판매’라 한다. 예컨대 제조업자가 도매업자에게 상품을 판매하면서 도매업자가 소매업자에게 판매할 가격과 소매업자가 소비자에게 판매할 가격을 미리 정하여 주고 도매업자와 소매업자로 하여금 그 지정된 가격대로 판매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이다. 이러한 재판매가격유지행위는 주로 제조업자가 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으나, 때로는 사업자단체, 도매업자 또는 수입자가 이를 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1)
우리 나라의 공정거래법에서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를 독립사업자들의 자유로운 판매가격 책정을 구속하여 가격경쟁을 제한하는 반경쟁적 행위로 보고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법정 재판’과 ‘지정 재판’의 경우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가 허용되고 있다. 법정 재판은 저작권법 제2조의 저작물로서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정 없이 재판매가격유지행위가 허용되며, 지정 재판은 일정한 요건(당해 상품의 품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용이하게 식별할 수 있을 것, 당해 상품이 일반소비자에 의해 일상 사용될 것, 당해 상품에 대해 자유로운 경쟁이 행해지고 있을 것)을 갖춘 상품으로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지정을 받은 경우에 허용된다. 현재 법정재판으로서 도서정가제가 시행 중에 있으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별도로 지정해 준 상품은 없다.2)
저작물의 경우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의 당연위법에서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저작권의 보호와 상품의 다양성 확보에 있다. 우리 나라에서 도서에 대한 정가제를 인정하는 근본 취지는, 서점에게 일정한 마진(margin)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라기보다는 문화적 배려 차원에서 저작자를 보호하여 창작문화를 창달하고 출판물의 거래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이다.3)
2.. 도서정가제의 의의
(1) 도서의 특수성
앞에서 보았듯이, 정가제 중에서도 도서정가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도서라는 상품의 특수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공정거래법상에서도 도서를 예외적으로 재판매가격유지행위의 대상으로 지정한 데에서 분명하다.
도서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독창적인 원고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막중하다는 점이다. 한 권 한 권의 도서가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왔음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이러한 도서의 상품으로서의 특징은 사용가치가 창출되는 도서상품의 근본적인 질(quality)이 비물질적인 것에 있다. 소비자의 사용가치는 도서의 종이나 모양 즉 매개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라는 비물질적인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특징은 빵이나 세탁기와 같은 물질적인 재화의 가치가 물질의 소비과정에서 발생하고 욕구가 있을 때까지 소비가 반복되는 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도서의 사용가치는 이질적인 소비자 욕구에서 나오기 때문에 상품 차별화는 가능하며 소비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준다.4)
이러한 도서는 판매 면에서도 다른 제품과는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5)
첫째, 출판물의 판매는 위탁 또는 상비임치제도(常備任置制度)로서 발전하여 왔다. 현금 거래만으로는 판매의 증진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성실하고 신용 있는 서점에 일정량의 책을 위탁하여 판매케 하거나 서점과의 합의로 일정량을 항상 보관토록 하는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둘째, 정가판매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법정재판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셋째, 시장조사가 어려운 상품이어서 수요 예측이 매우 곤란하다. 따라서, 적정 생산량을 측정하기도 어려우며 반품률이 매우 높다.
넷째, 유통업자에의 의존도가 높다.
다섯째, 상품의 단가가 다른 상품에 비해 낮지만, 품종이 많으므로 판매 과정에서 손이 많이 간다. 거기다가 광고 의존도도 강하며, 소비가 되풀이되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독자의 반복 구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2) 도서 정가의 책정
도서의 정가란 최종 소비자인 독자에게 파는 일정한 소매가격으로, 제조업자인 출판사가 소비자용으로 정한 소비자가격이며 소비자인 독자의 구매가격이다.
통상적으로 도서의 정가를 좌우하는 것은 책의 크기, 편집 방법, 인쇄 방법, 제책 양식, 종이의 질과 두께 등 자재의 차이, 페이지 수, 출고 할인율, 저작권 사용료, 광고비, 발행부수, 이윤 등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자의적인 판매 예측에 의한 발행 부수가 정가 책정의 가장 큰 요소가 된다.6) 그러나 출판사에서 실제로 정가를 매길 경우 대개는 이런 제작비나 기타 경비를 중심으로 산출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도서의 정가를 원가만 염두에 두고 결정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7)
도서는 그 특성상 생활필수품으로 취급되지 않기 때문에 소비자인 독자들은 정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실질적인 생산자인 출판사와 도서의 소비자인 독자와의 구체적인 만남은 도서의 정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8) 좀더 부연하면, 도서의 정가는 출판물의 독자적인 내용의 실질적인 효용가치와 이에 대한 독자의 평가․기대 등이 상응하는 가운데 구매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9) 결국 이러한 도서의 정가 책정에는 독자층에 대한 고려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밖에 출판사의 방침이나 경영 및 영업방침에 대한 정책에 따라 원가를 무시하고 저정가정책을 쓰는 경우도 있다.10) 특히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서나 학습참고서의 경우는 정가를 매우 낮게 매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른바 저정가정책이다. 반면에 내용이 전문적이어서 특정 소수를 대상으로 하는 서적의 정가는 매우 높게 매기는 것이 보통이다. 이른바 고정가정책이다. 그러나 이것도 의식적으로 정가를 높게 매기는 정책이라기보다 부득이 그렇게 매기는 것이며, 발행부수와 제작비 등을 고려하게 되면 오히려 적정가정책(適定價政策)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11)
(3) 도서정가제의 기능과 필요성
앞에서 보았듯이, 도서는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이면서도 특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정가책정에서도 독특한 속성이 있다. 이러한 도서의 기획과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출판산업 역시 일반산업과는 다른 특수성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출판산업은 교육․문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문화기반산업으로 단순한 시장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수산업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도서정가제의 기능 역시 공익성의 확보에 그 근거를 두게 된다.
특히 도서의 경우는 수요 예측이 매우 곤란하고 수급 상황도 개별 도서마다 각각 달라지게 되므로 정가제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수요 강도가 다른 여러 가지 품목을 생산하는 업체는 소매업자로 하여금 수요가 적은 품목의 재고유지 비용을 보상할 수 있도록 판매 속도가 빠른 인기품목에 대하여 충분한 이익률을 보장하는 선에서 재판매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출판물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공익성이 큰 상품으로서 사회적 관점에서 재판매가격을 허용하는 예외로 그 타당성이 인정되고 있다.12)
공익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도서정가제는 일반산업의 경우와는 달리 출판산업에서 다양한 긍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한국출판연구소의 조사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낸 바 있다.13)
첫째, 출판산업에서 도서정가제는 출판산업의 시장 실패를 일정부분 방지해 둔다.
둘째, 도서정가제는 경쟁 촉진 효과를 가져온다. 즉, 재판매가격유지제도가 시행되는 상황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출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규 기업의 진입도 용이하게 해준다.
셋째, 재판매가격유지제도는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해준다. 즉, 재판매가격이 효과적으로 유지됨으로써 신인 저자의 등장을 용이하게 해준다. 할인 판매시 서점은 이윤이 많이 남는 기성 저자의 책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기성 저자의 책은 저자의 유명도에 따라 다시 말해서 독특한 상품차별화로 말미암아 서점에서 낮은 할인율로 독자에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재판매가격유지제도는 일반산업에서와는 달리 상품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준다. 만약 할인 가격 제도가 시행되는 상황이라면, 상품도입 초기에는 경쟁으로 인하여 상품의 가격이 싸지는 효과가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독점기업이 등장하게 되어 상품의 가격이 앙등하게 된다. 독점기업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과점기업간 담합에 의하여 가격은 앙등하게 된다.
다섯째, 출판산업에서 재판매가격유지제도는 국민의 고급 정보복지의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국민의 정보복지는 지방과 중앙과의 격차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할인 가격 제도가 도입되는 상황에서도 지방의 독자들은 중앙의 독자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불해야만 도서를 접할 수 있어, 지방의 독자들은 더욱 더 열악한 정보복지 환경에 빠져든다. 지방 독자들의 연간 소득이 중앙의 독자들보다 적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중앙과 지방간의 정보복지의 불균형은 더욱 심각해진다. 그러나 재판매가격유지제도는 전국 어디서나 동일가격을 유지하므로 중앙의 독자나 지방의 독자나 동일가격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정보복지의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여섯째, 중소서점의 생존을 보장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할인 제도의 경우, 일반 독자는 할인율이 높은 서점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아 중소서점은 경영의 악화가 초래될 우려가 있고, 문을 닫는 서점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대형 할인매장만이 이득을 보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독자들은 대형 할인매장까지 가야 하는 간접비용을 더 물게 될 공산이 크다.
일곱째, 출판산업에서 재판매가격유지제도는 국토지리적 규모가 작고, 위탁판매가 일반화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필연적이다. 미국의 경우, 할인판매제도가 일반화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국토지리적 규모가 커 매절판매가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도서정가제의 필요성은 우리 나라에서 이미 역사적으로도 증명된 바 있다. 1970년대 후반 도서정가제가 정착된 이후 출판계와 서적유통계가 발전한 바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도서정가제의 정착에 대하여 공정거래위원회와 일부 유통업계에서는 단순한 경제논리를 내세워 정가제 철폐를 주장해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도서정가제가 폐지될 경우 출판계는 물론 우리 문화 전반에 끼칠 악영향은 여러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나름대로 간략히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14)
첫째, 책값의 상승이다. 베스트셀러를 중심으로 일부 내려가는 것도 있겠지만, 정가책정시부터 할인가격을 염두에 둔 명목상의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둘째, 서점 수의 감소를 가져올 것이다. 도서 가격의 자율화는 서점에 있어 고정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할인 경쟁을 유발해 대부분의 영세 서점은 도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서점에서의 적극적인 도서 임치가 불가능해지고 이에 따라 출판종수가 감소하고 책의 다양화가 막히게 될 것이다.
넷째, 창작의욕, 특히 신인작가의 창작의욕 상실을 초래할 것이다. 도서를 할인하여 판매하게 된다면 출판물의 판매 예측 불확실성과 정가의 잦은 변동으로 인하여, 서점에서는 불확실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신인작가들의 저작물은 적극적으로 임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균형 있는 지역 문화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면 지방 독자는 물류 비용의 부담으로 인해 같은 종류의 도서를 도시 독자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으로 살 수밖에 없어 교육, 문화, 정보의 향수 기회를 제한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출판사, 도매서점, 소매서점 각 분야에서 집중화가 진행될 것이다. 또한 출판시장의 개방으로 외국의 다국적기업이 무차별적인 가격 파괴, 덤핑을 자행할 가능성을 열어 줄 것이다.
III. 역사적으로 살펴본 한국의 도서정가제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도서정가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기를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서정가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1977년 12월 1일과 법제화되었던 2002년 8월 26일이라는 두 기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77년 11월까지, 제2기는 1977년 12월부터 2002년 8월 도서정가제 법제화 이전까지, 제3기는 도서정가제 법제화 이후부터 현재까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기구분의 기준은 정가제를 통한 도서유통질서의 확립과 출판문화의 발전이란 측면에 의한 것이다. 각 시기별로 나누어 도서정가제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 제1기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77년 11월)
제1기는 6.25전쟁으로 인한 도서유통 질서의 문란과 덤핑서적시장의 형성,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출판인들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우리의 도서 시장은 수개월간 판매자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지만, 1946년 가을 이후부터는 경기침체와 심각한 용지난으로 인하여 서적판매 시장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도서유통 질서도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6.25전쟁 이후 서점과의 거래는 더욱 악화되고, 책값 회수도 극히 불량한 가운데, 할인율 문제, 도서 정가의 문제가 크게 악화되었다. 6.25전쟁 직후에는 출판계에 어음제도가 생겼는데, 기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부도사태가 일어나고 혼란이 커졌다.15) 이 판매문제와 대금 회수문제는 출판계의 사활문제가 되어 출판인들은 누차 회의를 갖고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출판인들은 부채에 쪼들리게 되어 책을 헐값으로 투매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의 동대문시장에는 노점서적상들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소매상은 할인 판매로 살길을 찾고 도매상은 속속 문을 닫게 되고 출판업자는 덤핑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서울 동대문시장에는 덤핑서적시장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초반 서적덤핑상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도서정가제 운동이 전국서적상연합회(이하 서련)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마침 정가제를 강조하는 정부시책에 맞추어 출판사와 서적상들이 일치해서 도서정가제를 시도하였다. 이 무렵 정부에서는 도서정가제의 관철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하였고, 그런 방침에 따라 정부는 출판사로부터 부당한 정가를 기재하여 할인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당국의 강경한 입장과 출판․서점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할인판매 행위가 뿌리 깊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도서정가제는 성공을 거두기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16) 더욱이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전반적인 출판시장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더욱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출판계는 1950년대 후반까지도 계속되는 불황과 판매대금 미회수 및 서점과의 거래 악화로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1958년 출판계에서는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출판계 스스로 탈피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졌다. 즉, 대형 기획물의 발간과 외교방문 판매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이러한 외판 방식은 60년대에도 계속 발전해 나가 출판산업의 활로 개척에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지만, 서점의 발전과 도서정가제의 시행에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런 속에서 1960년대 후반, 서점은 영세화하고 위축되어 문을 닫는 곳이 많아졌다.
1960년대 후반 제1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도서 판매시장도 조금씩이나마 매년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점은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를 거듭해갔고, 서점계의 판매질서나 거래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서적상계에서는 도서정가제의 실시를 연구하고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도서유통 체계의 개선을 위한 효과적인 도서공급 기구를 설립하자는 논의도 병행되었다. 이때 출판계에서는 출판금고 직영으로 모델서점을 전국적으로 설립하여 도서일원공급기구의 기간조직으로 만들자는 계획이 나왔고, 그 일환으로 1972년 9월 서울에 중앙도서전시관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전시관에서는 전국적으로 만연된 고질적인 타성인 할인판매를 지양함으로써 서점운영에 새바람을 불어넣고자 하였는데,17)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판매량이 매년 늘어났고 참여하는 출판사 수도 증가하였다.18) 중앙도서전시관에서의 이러한 정가판매제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에 확립된 도서 정가판매 제도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19)
그러나 당시에 대부분 서점들의 유통질서는 여전히 문란하고 할인판매가 성행하였다. 심지어 가격의 덤핑은 물론 동일 종류의 도서를 선물로 주는 극단적인 판매방법까지 등장하였다. 심지어 가격 책정 자체를 덤핑화하여 내놓은 염가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출판․서점계에서는 유통질서의 확립을 위한 일차적인 과제로서 도서정가제의 실시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는데, 도서정가제 실시의 걸림돌은 가격 책정이었다. 정가제가 결과적인 가격 인상이 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는 언론과 국민들의 오해를 불식시킬 필요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서적상인들은 출판인들에게 지금까지 시장에 나와 있는 도서 가격을 조정(인하)해줄 것을 요청하여, 민중서관, 동아출판사, 교학사, 시사영어사 등 상당수 출판사들로부터 협조를 이끌어내었다.
2. 제2기 (1977년 12월부터 2002년 8월 법제화 이전)
제2기는 70년대 후반 정가제 실시와 함께 출판산업의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할인매장의 등장으로 도서정가제가 흔들리게 되자 다시 이를 살려내고자 애쓴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12월 1일을 기하여 정가판매제를 실시하였는데, 기대 이상으로 규칙을 어기는 곳이 거의 없이 성공을 거두었다. 서점업계는 이제 단합과 협동을 통하여 판매질서가 확립되고 상도의가 세워졌다. 정가제 실시 이전 고객 뺏기 경쟁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립하던 때에 비하면, 일신된 분위기가 완연했다.20)
서점들이 자구책으로 실시했던 정가제 실시는 독서문화와 서점계에 다음과 같은 영향을 끼쳤다.21)
첫째,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권위를 새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둘째, 서점 경영주들에게 의욕을 불러일으켜 경영자세의 개선과 운영의 합리화를 이루게 하였다. 셋째, 서울의 일부 지역과 지방도시에서 판을 치던 덤핑 서적들이 줄어드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도서정가제의 성공이 갖는 의미는 서점의 적정 마진 확보로 인한 재무구조의 호전과 운영의 원활, 출판사에 대한 거래조건 개선 등에 의한 출판사 자금회전 기간 단축과 대손(貸損)의 감소, 이들 거래의 활성화와 경영합리화에 따른 독자 서비스 증대, 도서유통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점이라는 평가도 있었다.22)
그런데, 한국에서 도서정가제의 성공은 그 과정이 외국의 경우와도 달랐다. 영국이나 일본에서는 출판계가 주체가 되어 국가의 법적 보호를 받으면서 출판사, 서적도매기구, 서적상조합의 3자가 협의기구를 조직, 진지하게 문제 하나하나를 풀어나간 협동적인 노력의 소산인 데 비해, 한국의 경우는 법의 보호도, 협의기구도 없이 서련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낸 것이 특기할 점이라 하겠다.23)
도서정가제 실시 이후 서점계의 분위기가 바뀌고 거래질서가 개선되면서, 서점 수의 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70년대 초에 줄기 시작했던 서점이 부가가치세 면세의 힘과 도서정가제 실시로 인하여 활기를 찾기 시작하여 주요 도시에서 크게 늘어났다.
서점수의 증가와 함께 서울의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등과 같은 서점의 대형화 현상도 시작되었다. 도서정가제의 효과는 서점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으로도 나타나서 이제는 서점 자체에서 책의 선전을 위한 행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981년 한국출판판매가 창립 20돌 기념으로 ‘서울북페어’를 연 것을 시작으로 교보문고, 종로서적, 중앙도서전시관 등에서 계속적으로 자체 행사를 벌여 독자들을 책방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하였다.
도서정가제가 정착되어 가고 있을 무렵인, 1980년 12월 31일 정부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을 제정․공포하였는데, 이는 도서정가판매제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법률이었다. 공정거래법 제20조에서는 재판매가격유지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 다만 “대통령이 정하는 저작물에 대해서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명확히 규정하였다. 시행령 확정을 거쳐 1981년 4월 1일부터 발효된 이 공정거래법에 따라 출판물은 정가판매 허용상품으로 법적으로 지정되어 정가를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도서정가제가 실시된 이후 도서 발행량도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신간 발행종수는 1977년 9,090종에서 1978년 9,813종으로 증가하고, 1979년 11,164종, 1980년 13,062종, 1981년 13,618종으로 계속 증가하여 1986년 2만 종을 넘어서게 되어 양적으로는 세계 10대 출판대국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유통시장에는 ‘가격파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장과 백화점, 슈퍼마켓 정도로 구분되던 국내 유통업계에 창고형 도매점, 할인점, 양판점 등 새로운 형태의 판매점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상품가격의 체계를 뒤흔들어놓았다. 특히 유통시장의 전면 개방과 함께 외국의 가격파괴 업체가 한국시장으로 진입해 오면서 도서정가제를 위협하였다. 그동안 대형할인점 등에서만 도서 할인판매가 이루어지던 것이 사정이 이렇게 되자 서울 일부지역의 서련 회원사들까지 도서할인판매 경쟁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특히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유통질서의 혼란으로 도서의 할인판매는 공공연하게 성행되었다. 1990년대 상반기에 전집이나 베스트셀러를 중심으로 편의점이나 대형 창고형 할인점에서 자행되던 가격파괴 현상이 1990년대 후반에는 학습참고서, 사전, 전집물, 단행본 등 출판물 전분야에 걸쳐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24) 1990년대 후반이후 시장 규모가 계속 커져나간 인터넷서점에서는 가격 할인을 내세우며 도서정가제를 근간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한편 1986년 이래 법적인 뒷받침을 받아 왔던 도서정가제의 시행을 축소 또는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공정거래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 당국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왔고, 출판․서점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자유시장 경제논리를 내세운 공정거래위원회 측과 문화상품의 논리와 함께 현실적 성과를 내세운 출판․서점계 간의 갈등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에, 도서정가제를 지키지 않는 일부 할인판매업체와 외국 도서유통업체의 도전을 받게 된 출판․서점계에서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도서정가제의 법제화를 시도하게 된다.
먼저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는 1999년 7월 ‘저작물의 정가유지에 관한 법률(안)’을 문화관광부에 제출했고, 이것을 여․야 의원 28명이 11월 22일 발의해 입법화가 추진됐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반대하는 가운데 열린 1999년 12월 13일 문화관광위 소속 소위원회에서는 법안 상정 유보를 결정함으로써 입법화는 무산되었다. 법안 상정을 위한 논의 과정에서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사이버 서점의 할인판매 허용여부였다. 일부 의원들이 무조건 할인판매를 금지할 경우 사이버 서점의 존립근거가 없어진다며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25)
같은 해, 출판계 자체에서도 한국출판인회의를 통해 도서정가제의 당위성을 주장한 문건을 입법의 1차 자료로서 문화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전달했다.
3. 제3기 (2002년 8월 법제화 이후부터 현재)
제3기는 도서정가제가 ‘출판및인쇄진흥법’에 포함되어 법제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그러나 도서정가제 법률은 불완전한 형태로 제정․시행된 관계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1) 李南基, "經濟法-公正去來法․消保法․約款․割賦去來法․訪販法", 서울:박영사, 1999, p.291.
2) "공정거래백서", 과천:공정거래위원회, 1999, p.185.
3) 전영표 외, <출판진흥법(안) 제정을 위한 조사․연구>, 문화관광부, 1999, pp.39~40.
4) 도서의 사용가치에 대한 설명은 김경희 외, <한국 도서유통의 문제점 및 개선방안 연구 - 도서정가제를 중심으로>, 문화체육부, 1995, pp.72~73 참조.
5) 김성재, "출판의 이론과 실제", 서울:일지사, 1987, pp.266~279.
6) 도서정가의 책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김성재, 앞의 책, p.247 참조.
7) 김종수, “학술 출판의 현장에서:저자․출판사․독자”, <출판연구>, 제6호, 1994, p.94.
8) 西谷能雄, "本の定價とは", 東京:日本エデイタ-スク-ル出版部, 1990, p.32.
9) 이두영, “코스트업 시대의 책값 적정화의 탐색”, <출판문화>, 1992. 10., p.17.
10) 西谷能雄, 앞의 책, p.32.
11) 김성재, 앞의 책, p.250. 도서의 정가정책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윤청광 외, "세계의 도서정가제 현황 연구", (재)한국출판연구소, 2000, pp.12~13 참조.
12) 安基龍, <재판매가격유지의 경제적 효과분석>, 서울: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석사학위논문, 1995, p.7.
13) 김경희 외, 앞의 책, pp.3537.
14) 김경희 외, 앞의 책, p.37 ; 나춘호, “한국 출판산업에 있어서의 정가제의 필연성”, <출판문화> 1996. 6. ; 김병준, “도서정가제는 출판문화의 맥”, <출판저널>, 1998. 3. 20.
15) 金源大, “8.15후 도서유통과정의 변천”, <출판문화>, 1981. 8., p.7.
16) "대한출판문화협회 40년사", 대한출판문화협회, 1987, pp.325~326.
17) "대한출판문화협회 40년사", 대한출판문화협회, 1987, p.158.
18) <출판문화>, 1977. 9., pp.14~15.
19) 백운관․부길만, "한국출판문화변천사", 서울:타래, 1997, p.226.
20) <한국출판연감> 1981, pp.67~68.
21) <한국출판연감> 1979, p.71.
22) 임인규, “도서의 정가판매”, <출판문화>, 1977. 12., p.1.
23) 陣昌甲, “정가제도와 對讀者 봉사”, <출판문화>, 1984. 8., p.5.
24) 전영표 외, 앞의 책, p.36.
25) <출판저널>, 2000. 1. 5.,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