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 대간 7구간 산행기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경이가 느껴지고…
일시 : 2002년 2월 19일 날씨 : 3 ℃ ~ -12.3℃ 구간 : 7구간 (통안리-동엽령-백암봉-대봉-신풍령)
도상거리 및 시간 : 16.5km.8시간50분 누계 도상거리 및 시간 : 80.6km.37시간37분 총 683.4 km중 80.6 km완주 11.8% 차 례
1.7구간 산행 지도 2.7구간에 대한 소개 3.7구간 주변의 인문 및 역사 소개 4.산행기 5.산행 소감 6.참여 대원 7.후기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달 밝고 여름에는 맑은 바람 겨울에는 눈 내리니 부질 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으면 이것이 인간 세상의 좋은 시절 아닌가
1.7구간 지도 2.7구간에 대한 소개 전북 무주군 안성면 통안리에서 칠선 계곡을 따라 약 1시간 30여분 오르다 보면 동엽령에 도달한다. 백두대간 주능선 길에 들어선다. 주능선에서 대간을 전면으로 좌로는 무주군 안성면,설천면이 자리잡고 우로는 거창군 북상면이 자리잡고 있다.백암봉에서 덕유산 상봉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향적봉은 백두 대간에서 좌로 비켜 있다. 대간길은 우측으로 계속 능선을 타고 가면 신풍령까지 가는 길이 있다.
3. 7구간 주변의 인문 및 역사 소개
무주군 설천면 무주군의 동부에 위치한 설천면의 면적은 157.89㎢이다. 소백산맥 중의 산간지대에 위치하여 북쪽은 충북 영동군, 남쪽은 경남 거창군과 접하며, 동쪽은 무풍면(茂豊面), 남서쪽은 안성면, 서쪽은 적상면, 북서쪽은 무주읍과 경계를 이룬다.대부분이 화강암질편마암으로 구성된 해발고도 700∼1,000m의 산지이며 남대천(南大川) 주변에 해발고도 300∼600m의 좁은 평지가 있다. 서쪽의 두문산(斗文山 : 1,051m) 동쪽에 800∼1,000m의 고원이 전개되며 이곳에 심곡리 마을이 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 외에 고랭지 채소가 생산된다.덕유산(德裕山 : 1,614m)에서 나제통문(羅濟通門)까지 25km 길이의 남대천 상류에는 물의 소용돌이에 의해서 기반암에 형성된 인월담·비파담 등을 비롯한 무주구천동의 33경이 있어 덕유산국립공원의 중심을 이룬다. 소천리(所川里)에 있는 나제통문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던 곳으로, 이를 경계로 동부와 서부의 언어·풍속이 아직도 다르다. 또 여기서 무주∼무풍, 무주∼구천동 도로가 갈라진다. 청량리∼소원리 남대천 일대는 천연기념물 322호 반딧불과 그 먹이 다슬기 서식지이다.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원당천(元唐川)과 무풍 대덕산에서 발원한 남대천이 소천리에서 합류하여 청량리와 기곡리를 거쳐 무주읍쪽으로 향해 흐르다 금강에 합류한다.설천면은 마한과 변진에 속하였는데,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해 신라와 국경을 이루었다. 즉 백제의 변방인 적천현의 가장 끝머리에 위치하여 신라의 무산현과 국경선을 이루게 되어 양국간의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병사들의 생사가 갈렸으며 국경선이 달라지기도 했던 고장이었던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다고 하는 라제통문(羅濟通門) 아래로 흐르는 개울은 양국의 군사들이 싸우다가 숨진 시체들로 온 개울을 메웠고, 피비린내에 모여든 파리 떼들이 들끓었던 곳이라 하여 파리소라 불리웠다. 통일신라 때에는 단천현에 고려 때는 주계현에 속하면서 전주(全州)와 청주(靑州) 또는 상주(尙州)와의 경계를 이루었다. 조선 초에도 주계현에 소속되어 무풍현 또는 금산군에 속하던 횡천면과 경계를 이루었다. 조선 태종 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무풍현과 주계현이 통폐합되면서 설천은 무주현에 소속되어 풍서면(豊西面, 지금의 소천리·대불리·미천리·장덕리)이 되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종전의 신동면(新東面)이었던 신풍면(新豊面)의 기곡리·길산리·청량리와 종전의 금산군에 속했었던 구천동 지역, 즉 횡천면의 삼공리·심곡리·두길리를 통폐합시켜 설천면으로 편재되었다. 그후 1963년 면출장소 설치조례(面出張所設置條例)가 공포되어 삼공리(三公里)에 구천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98년 11월 6일 폐지되었다. 2001년 현재, 설천면의 행정구역은 10개 법정리(法定里), 행정상 25개 리(分里), 75반(班), 52개 자연부락으로 구획되어 있다. 설천면의 지명 유래는 2가지 설로 정리된다. 하나는 조선 영조 때의 문관(文官)인 이봉상(李鳳祥)이 이 고장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설천(雪川)이라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이 고장에 9천명의 승려들이 수도하였는데, 이들의 밥을 짓기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던 하얀 쌀뜨물이 계곡을 온통 눈과 같이 하얗게 흘러내렸다 하여 설천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도 한다.
안성면 무주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면적은 97.33km이다. 동쪽은 두문산(斗文山 : 1,051m)·덕유산(德裕山 : 1,614m) 등을 경계로 설천면(雪川面) 및 경남 거창군 북상면(北上面)에 접하고, 서쪽은 진안군 동향면(銅鄕面), 남쪽은 장수군 계북면(溪北面), 북쪽은 오두치(烏頭峙 : 590m) 등을 경계로 적상면(赤裳面)에 접한다. 소백산맥 중의 덕유산 줄기 서쪽 사면의 분지에 있다. 동부와 남부에 덕유산을 비롯한 해발고도 1,300∼1,500m의 산지가 솟아 있는데 이 일대가 덕유산국립공원이다. 덕유산의 북서쪽 사면에는 해발고도 400∼550m의 넓은 분지가 전개되며,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명천(明川)과 통안천(通安川)이 장기리에서 합류하여 구량천(九良川)을 이룬 다음, 진도리를 지나 진안쪽으로 곡류(曲流)하여 금상상류를 이룬다. 분지의 지질은 화강암질편마암이 심층풍화한 뒤, 구리향천에 의해 개석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3단의 단구상(段丘狀)을 이룬다. 한국 남서부 내륙분지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모식적인 분지이다. 북쪽에는 무주군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농업·상업의 중심지를 이룬다. 쌀·보리 농사 외에 잎담배·인삼·약초·고랭지 채소가 많이 생산되며 이들은 장기리(場基里)에서 집산·유통된다. 동향∼안성 간 도로, 진안∼장계(長溪)∼무주 간 국도가 통과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남동쪽에 용추폭포와 칠연폭포가 있고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남쪽 입구에 해당하므로 관광지로서도 발전하고 있다. 안성면의 경지 면적을 보면, 농경지가 밭보다 많을 뿐 아니라 논의 비율 역시 무주군에서 가장 높으며, 전체 경지면적 역시 무주군의 다른 읍·면에 비해 압도적으로 넓다. 안성면은 본래 대곡소(大谷所)·횡천소(橫川所)와 함께 부리현(富利縣)에 속했던 안성소(安城所)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백제 때에는 진내군(進乃郡), 통일신라 때는 진례군(進禮郡), 고려 때는 금주군(錦州郡) 또는 부리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산군(錦山郡)에 속하였으며, 현종 15년(1674) 적상산사고와 관련하여 무주현이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면서 횡천면과 함께 무주부에 소속되었으며, 일안면(一安面)과 이안면(二安面), 그리고 횡천면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행정개편 시 일안면과 이안면 전역을 중심으로 유가면의 오동·진원·물리.도치 등 4개 리와 적상면의 사교(斜郊)·사전(斜田)·구교(鳩郊) 등 3개 리를 편입하여 8개리로 개편하고, 옛 안성소의 이름에 따라 안성면이라 하였다. 2001년 현재, 안성면의 행정구역은 8개 법정리(法定里), 행정상 36개 리(分里), 115반(班), 61개 자연부락으로 구획되어 있다.
거창군 북상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안현에 속했고, 고려시대에는 감읍현에, 조선시대에는 안의현에 속함.서기 1911년 이전에는 안의군 북상면에 편입되고 1914년 3월 행정구역 조정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름.거창읍으로부터 마리면과 위천면을 경유하여 18km의 거리에 군의 최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함양군, 북쪽으로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위천면, 고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 330m의 산간 오지와 높은 산들이 많으며 대표적인 들로서는 약 40ha의 용문들이 있으며 남덕유산과 접하여 있는 지역으로 깊은 계곡 및 울창한 수목림의 산촌지로서 면적은 126.4㎢로 거창군전체 면적의 15.7%로 가장 큰 면적을 보유하고 월성계곡 및 덕유산은 전국의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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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산행기 오늘은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이다.아침부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쳐 산행의 불안감을 준다.오늘부터는 그동안 광양제철소 백운아트홀에서 07시 정각에 출발하던 것이 06시00분에 출발한다.한시간 앞 당긴 것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겠지만 생활의 리듬이 깨져 불편함이 매우 크리라 생각된다.아니나 다를까 등반 대장께서 지각을 하고 또다른 대원이 지각을 하여 15분 늦게 광양제철소 백운 아트홀을 출발한다. 광양제철소 백운 아트홀 출발 : 06시 15분 버스는 옥곡 인터체인지로 진입후 남해 고속 도로를 통해 진주 방향으로 향한다.다시 대전 진주간 고속 도로에 진입후 무주 방향으로 달린다. 버스 내부를 보니 모두들 단잠에 들어 있다. 마침 나의 옆에는 강성호 부회장이 자리 잡고 있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백두 대간 입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모든것이 계기가 있겠지만 강 부회장은 1991년부터 수원지검에서 구두를 닦고있는 장용호씨와 아들 조혜와 함께 진부령에서<아빠랑 나랑 백두대간종주>를 시작하여 종주기를 책으로 펴낸 "아들아 세상을 품어라”란 책을 읽고 거기서 너무 감동을 받아 백두 대간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대간을 종주하려고 고소용 경량텐트,동계용침낭,고도계,나침반,등산복,각종 산행에 대한 것을 준비하고 1997년 10월 발행한 조선일보사의 '실전 백두 대간 종주산행'을 구입하여 백두 대간에 대한 지식과 내장된 지도를 외우다 시피하고 인터넷으로 여려 관련 종주 싸이트를 방문하여 백두 대간에 정보를 섭렵했다고 하니 그 감동이란 한 인간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 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역시 한비야의 “바람의 딸,우리 땅에 서다”를 읽고 우리의 땅을 종주하고 싶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백두 대간 종주란 기회가 나에게 찾아와 오늘 이렇게 대간을 종주하고 있는것이다. 책이란 이렇듯 사람의 생각과 인생을 바꾸니 좋은 양서야 말로 우리의 거름이 아닐 수 없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버스는 덕유산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무주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조금 가니 전북 자연 학습원 이정표르 보고 우회전하여 들어서니 빙판길이 여기 저기 보인다.
안성 매표소 도착 : 08시05분 매표소에서 하차하여 짐을 정리하고 매표소를 보니 아직 담당자가 보이지 않는다. 입장료 1300원,단체 1100원 오늘 인원이 40여명 되니 44000원을 아끼게 되었다. 동엽령으로 오르는 길은 칠연 계곡을 계속 옆에 두고 같이 간다.눈은 아직 녹지 않아 빙판길을 이루고 있으며 가는 걸음 걸음이 부자연스럽다.칠연 계곡은 전국적으로 소문이나 여름철에는 피서객으로 인산 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칠연 계곡은 칠선 폭포,용추 폭포,칠연의 총이 있어 계곡의 아름다움과 역사의 혼을 더해준다. 칠연 계곡은 덕유산 능선의 동업령 서쪽 골짜기에 위치한 칠연계곡은 심산유곡의 반석위로 흐르는 맑은 찬물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기암 괴석 사이를 해집고 흘러가며 칠연폭포, 용추폭포, 명제소, 문덕소, 도술담등의 아름다운 비경을 만들며, 금강상류인 구리향천으로 흘러간다. 칠연폭포가 있는 곳이 라서 이름붙인 이곳은 조선말기 일본군과 싸우다가 숨진 150여 의병들의 무덤인 칠연의 총이 있고 젊은 이들이 자연과 더불어 호연지기를 기를수 있는 전라북도 자연학습원이 자리하고 있다. 칠연 폭포는 울창한 수림사이를 비단결같은 암사면을 타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패인 일곱개의 못이 한줄로 늘어서서 칠연을 만들었고 옥같이 맑은 물이 일곱개의 못에 담겨 잠시 맴돌다가 미끄러지기도 하고 쏟아지기도 하면서 일곱폭의 아름다운 폭포를 만든다. 선경으로 이름난 칠연폭포는 물도맑고 차거니와 주위를 둘러싼 노송과 단풍림이 울창하게 장관을 이루어 여름철 피서객과 가을 단풍객들의 발길이 그칠 날이 없다. 용추 폭포는 칠연계곡 도슬담에서 맴돌던 물이 흘러 내리다가 우거진 노송사이 층층바위 암벽을 타고 쏟아지는 비폭이 용소로 떨어지며 이르키는 물파래가 장관이다. 칠연의 총은 일본의 강압으로 정미 칠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장교 신명선은 의병장이 되어 150여명의 의병을 모으고 덕유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싸워 수많은 공적을 남기고 장열하게 전사하여 이곳에 묻히니 이곳이 곧 칠연의총 이다.동엽령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며 계곡에는 얼음이 얼어 그 아래로 흐르는 물이 백두 대간의 정취를 더 해준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대간길이 아니다. 백두 대간길 즉 동엽령에 가기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동엽령까지의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속 오르막 길이다. 동엽령 가까이 도착하니 능선은 눈꽃으로 장관을 이룬다.여기 저기서 감탄사가 연발이다.그렇다 돈주고도 아깝지 않다고 어느 누가 말하고 또 어떤 대원은 일만 오천원 주고 십만원짜리 구경한다고 한다. |
지도에 보면 대봉에서 바로 우측으로 꺽여져 내려가는데 삿갓봉에서 우측으로 꺽여져 내려간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지도는 월간”사람과 산” 2001년 10월 별책 부록의 백두대간 지도와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실전 백두대간종주산행'의 지도를를 사용한다. 이 고장 사람들이 삿갓봉이라 세웠으니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삿갓봉 통과 : 16시00분 여기서 부터는 계속 내리막 길이다.거의 수직에 가까운 내리막 길이 있으니 위험하기도 하다.저 멀리 신풍령 고개 도로가 보이고 앞에는 몇 개의 봉우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진력을 다해 본다.
몇 개의 봉우리를 넘으며 우리 대원중의 열성 대원을 소개 할까 한다. 이번 대간을 종주하기 위해 기십만원이 넘는 등산복과 오바트라우져 그리고 배낭,등산화,모자 그리고 백두 대간 지도를 구입하여 연구와 열성을 다하고 있는 김명순 대원이다.김명순 대원은 작년 낙남정맥 종주시부터 이런 테마 산행에 참여 왔다. 이러한 대원이 있기에 오늘날의 백두 대간 테마 산행이 더욱 빛나지 않나 생각 해 본다.이러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신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야호를 연신 외쳐 본다. 헬기장 통과 : 16시40분 신풍령 도착 : 17시05분 신풍령에 도착하니 향적봉을 경유하지 않는 강성호 부회장이 기다린다. 신풍령 휴게소에서 자리를 펴고 가져온 전도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잔술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서로의 정을 나누어 본다. 신풍령 출발 : 17시30분 하산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집을 향하여 버스는 출발한다.
백운아트홀 도착 : 19시48분 서로 악수를 하며 다음에 볼 것을 약속하며 헤어진다 5. 산행 소감
6.참여 대원 조정출(팀장),정점덕(등반대장),김종우(총무),주영환(구호대장),강성호(부회장),김동희,김명순,김상욱,김영창,김용희,김윤구,김정석,김화식,남희우,문창식,박만복,박흥순,백승구,서승만,성관제,소재호,소재술,심우섭,양동하,양진영,연성주,연성주+@,염복균,오길환,유인찬,이영화,이영환,이용정,장일태,주명춘,최영출,최영출+@,황인영,전영선(기록)(이상39명)
후기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그만큼 더 힘이 든다. 우리가 가는 길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주어진 시간을 좀더 알차고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 백두 대간 종주란 테마를 정해 종주하고 있는 것이다. 편하게 살기 위해서 라면 집에서 쉬는 게 편하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사는 것이 아니다.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여 그 길을 가다가 목표를 달성했을 때 그 희열이란 맛보지 않는 자는 모르고 또한 행복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그 달성 과정에서 좌절도 있을 수 있고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우린 해낼 것이다.종주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