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e |
마스터 |
Subject |
"중국군의 정치사회적 의미와 변천"(이동훈) |
[대륙전략] 제4호 중국논단 : “중국을 바로 알자”(2006. 04)
중국군의 정치사회적 의미와 변천
이 동 훈 (전 육사교수부장, 육사 명예교수)
Ⅰ. 머리말
중국 인민해방군(이하 중국군)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여기서 개괄해 보려 한다. 이유는 올해 중국군이 건군 77주년을 맞아 ‘科技强軍’을 내세우고 군사강국으로의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 ‘생산건설병단’과 같은 특이한 민군관계의 형태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군사 분야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군의 모습을 역사적 실체가 갖는 의미와 그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중국군의 특이한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중국 인민해방군 개요
가. 군대 건설과 현대화
중국은 1949년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을 건설하였다. 그러므로 2005년 8월로 건군 77주년을 맞게 된다. 1970년대 중반까지 중국은 자국의 인구와 국토의 효용성을 극대화한 ‘인민전쟁(人民戰爭)’ 전략 유지하였다. 1980년대 초반 이후 국가이익이라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早期戰, 全面戰, 核戰에 대비한 전력태세에서 국경지역에서의 소규모 분쟁과 제한적인 국지전(‘有限局部戰爭’) 대비로 전략적인 전환을 취하였다. 아울러 1991년 걸프전 발발 이후 현대전에 대응할 수 있는 ‘科技强軍’의 일환인 ‘첨단기술 조건하의 전략미사일 및 해․공군을 중심’으로 군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그 내용의 요지는 장차 군현대화를 통해 첨단무기를 구비하고 2008년 항공모함 건조, 2012년 대만 압도, 2015년 잠수함의 핵보복 공격 능력 확보 등의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분석된다. 동시, 미국에서 추진중인 군사혁신(RMA)에 많은 관심 표명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韜光養晦’(칼날의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름) 정책(鄧小平, 江澤民)에서 ‘和平崛起’(평화를 바탕으로 우뚝 솟아 일어섬- 胡錦濤) 정책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중국이 자신감을 대내외에 표방하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 군 구성과 특징
중국 군사력은 현역부대, 예비역부대, 인민무장경찰, 민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2년 12월 3차 헌법 개정으로 설치된 ‘중앙군사위원회’는 전국의 군사력을 통솔 총괄 지휘하며, 국방부는 국무원 산하기구로서 국무원내 국방건설 업무를 지도 감독한다. 현역부대는 국가의 상비군으로서 방위작전 임무를 주로 담당하고 있다. 필요시 법률규정에 의거 ‘사회질서 유지’에도 협조하게 되어 있다. 인민해방군의 총부는 중앙군사위원회 지휘하의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총장비부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위의 4개 총부를 통해 각 군 및 병과, 각 군구에 대한 지휘감독을 실시한다. 국방부의 실무는 4개 총부가 분담한다. 현재 중국군은 총병력 231만명, 7대군구(大軍區), 3개 함대로 구성되어 있고 국방예산은 328억 달러(약 34조원)에 이른다. 7대군구는 중국 동북부지역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선양(瀋陽)군구(5개집단군, 35만명), 지난(濟南)군구(4개집단군, 30만명), 난징(南京)군구(3개집단군, 32만명), 광저우(廣州)군구(2개집단군, 25만명), 청두(成都)군구(2개집단군, 25만명), 란저우(蘭州)군구(2개집단군, 28만명), 베이징(北京)군구(6개 집단군, 40만명). 북해함대(함정 926척), 동해함대(함정 945척), 남해함대(함정 768척)에 잠수함 70척 등을 보유하고 있다. 공군은 대부분 군구에 소속되어 운영되고 있다. 특별히 무장 경찰은 국무원(우리나라의 행정부에 해당) 소속으로 일반 경찰(중국에서는 公安)과는 구분된다. 공항, 항만, 중요 시설, 요인경호 등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군사작전을 위해서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있다.
Ⅲ. 중국군의 사회적 임무와 특징 : “黨의 군대, 人民의 군대”
가. ‘爲民軍隊’와 ‘軍隊優先’의 특징
중국군 성격은 모택동 시기에 농민을 주축으로 ‘工農紅軍’에서 인민군대인 ‘紅軍’ 그리고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人民解放軍’으로 개칭(1948. 11)되었다. 그 역사적 과정의 뿌리는 “인민을 위하여 복무”라는 ‘爲民服務’로서 이는 중국군의 구호이기도 하다. 중국군의 임무는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란을 진압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중의 하나이다. ‘爲民服務’의 구호대로 인민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건 하는 조직이며 인민에 밀착된 군대라 할 수 있다. 몇 년전 중국의 양자강에 홍수가 났을 때 중국군이 손에 손을 맞잡고 홍수 속에서 둑이 터지는 것을 몸으로 막았다. 이는 좋은 例라 할 수 있다. 당은 군을 이용하고 군은 당과 인민의 옹호를 받고 있는 것이 중국군의 특징 중 하나이다. 중국의 대형 상점, 기차역 등에는 ‘軍人優先’이란 팻말이 걸려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군에서 제대하고 귀향할 때는 군악대까지 동원한 가운데 고위 지휘관을 포함하여 많은 장교, 동료들이 역에 나와 성대한 귀향 행사를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제대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고 조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면서 귀향한다. 귀향하면 해당 지방에서 우선적으로 직장을 알선해 준다. 이와 같이 우대를 받는 것이 군이기 때문에 군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매우 많다. 특별히 당원이 되기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군에 입대하여 충실한 복무를 통하여 군에서 추천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근 정예 중국군 양성이라는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 고학력 출신들을 병으로 영입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어 군 입대는 점차 경쟁이 심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爲民軍隊의 정신과 조직 등은 ‘인민해방군 정치사업조례’에 대부분 규정되어 있다.
나. ‘黨軍一致’, ‘民軍一致’의 성격
‘黨軍一致’의 정치적 성격이란 간부들은 필요시 당과 군을 순환하며 2중적 직책과 역할을 수행함을 뜻하며 이로써 중국군은 정치성이 강한 당의 군대라 할 수 있다. ‘民軍一致’ 지향의 군대적 성격은 ‘생산대’, ‘기업군’ 등의 성격이 강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회교육 및 일꾼 양성소 기능 등을 망라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요컨대, 위의 두가지 성격은 대민지원업무 강화로 국가경제건설에 기여하고 기타 민간부문의 공공복지, 환경보호, 토목공사, 사상교육 등에 기여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다. 동원체제와 대민지원
국가동원체제는 ① 각급 인민위원회가 지도하는 省軍區체계 : 병력과 인력 동원 책임, ② 각급 정부의 계획부문이 책임지고 있는 ‘경제동원체계’, ③ 각급 인민방공위원회(혹은 인민방공영도소조)가 책임지는 ‘人民防空체계’, ④ 각급 交通戰略領導小組가 책임지고 있는 ‘교통전략체계’ 등의 4개 분야로 요약할 수 있다. 1994년 국가국방동원위원회는 각 大軍區 및 縣 이상 각급 ‘국방동원위원회’를 창립하였다. 이 위원회가 국방동원업무를 통합 총괄하고 통일적인 인민무장, 경제동원, 人民防空, 交通戰備事業 등을 지도한다. 병역제도의 내용과 변천을 개괄한다. 지원병제와 의무병제를 동시 운영하며, 크게 사병-군관-민병(예비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55년 7월 인민무장기구 민병제 병역법을 반포하였다. 반포 후 점차 민병과 예비역으로 나누어 기능하게 되었다. 1978년 이후 후방역량 강화를 위해 전국 2천여개 훈련기지를 건설하였고 집중훈련을 실시하였다.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학생군사훈련이 실시되고, 민병 응급기동분대와 전문기술분대 편성, 예비역 부대 건설, 신무기장비 등을 구비하게 되었다. 군을 통한 인민동원의 대표적 사례를 최근 발견한 북경 지하갱도에서 알 수 있다. 최근 발견된 북경의 지하갱도는 만리장성과 맞먹는 대역사라고 말하듯이 1969년 모택동의 문화혁명시기 중소분쟁에 대비하여 건설한 10년 역사로 완성되었다. 물론 인민해방군 감독 하에 전 인민을 동원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에도 이와 같은 지하갱도가 다수 존재한다고 한다. 북경 지하갱도만 보아도 북경시내 18m 지하에 건설하여 30㎞ 길이의 거미줄 같은 갱도(높이 8m × 넓이 2m)로 되어 있다. 현재 외국인에게만 관람을 개방하고 있다.
Ⅳ. 중국의 軍産複合體
가. 중국 군산복합체의 특징
중국의 군산복합체는 인민해방군, 다양한 ‘국방공업부서’,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및 자회사 등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민해방군의 최고영도기구인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국무원과 협조하여 국방과학을 영도 및 관리하며, 국방 經費와 국방 資産을 관리한다. 특히 중국의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는 전체적인 방위산업 업무를 다루며 연구, 개발, 시험 및 평가 등을 수행하고 인민해방군과 각 국방공업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중국의 방위산업계는 관계가 복잡하며, 상호 견제와 이중적 통제체계를 갖추고 있다. 많은 방위산업기관들은 그 산하에 상거래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 기관들은 외화벌이에 정책의 최우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외화벌이나 외국 선진군사기술의 획득 등 과정에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개입이 많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군수공장을 통해 민수용품 생산량이 많은 편이다. 일종의 ‘스핀오프’ 현상을 보이고 있다. 민군겸용 기술인재 훈련의 수행 및 북경대군구 민간기술훈련센터의 운영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나. 군산복합체 최근 동향
중국군의 민간산업 경제분야 개입의 비중이 높아짐에 따른 부패 비리의 증가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속에서도 군의 정치화 견제 분위기 속에 군전문직업주의 성향이 점증하고 있다. 최근 언론 보도(연합뉴스, 2005. 5. 31)에 의하면, 중국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군사력 현대화 계획으로, 방위산업을 민간기업에 개방키로 결정하였으며, 중국은 2005년 6월부터 방위 산업 중 핵심 무기 프로그램, 기술 장비는 국가가 관리하고, 나머지를 민영ㆍ외자 기업에 개방한다고 선포한 바 있다. 중국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는 일정 자격을 얻은 민영ㆍ외자ㆍ합자 형태의 민간 기업들도 군수 산업 가운데 하부 시스템과 특수 부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허가 방침을 공표한 바 있다.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의 류둥쿠이(劉東奎) 경제협력국 국장은 민영․외자 기업들도 어떤 정책적 장벽 없이 제2 범주의 방위 산업에 진입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또한 향후 무기 개발과 방위 산업의 표준화를 돕고 업체 간 경쟁을 부추기는 한편 군수 산업의 수준을 향상시키고, 모두 300여 곳에 대해 무기 장비 생산 허가증 심사를 처리할 예정이라 언급한 바 있다.
Ⅴ. 중국군의 특이한 민군통합체(1) : ‘人民公私’
가. 중국 사회주의 건설기의 민군통합체
군대의 생산과 건설 참여는 사회주의국가의 군대 운용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한 후 ‘사회주의 건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1958년부터 정치, 경제, 사회, 군대, 문화 등을 총동원하는 ‘대약진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대약진 총동원의 조직형태로 ‘人民公社’를 설치 운영하였다. 인민공사는 농업, 공업, 상업, 학교, 군대를 한곳에 모아 통합관리하는 집단거주형태(工農商學軍, 合在一起, 便於領導)로 초기에는 농촌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점차 기업들도 포함하는 도시 인민공사도 설립하여 전국적인 인민통제 조직이자 생활터전이 되었다. 1958년 10월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전국의 인민공사 숫자는 6천 578개 였으며, 인민공사에 포함된 인민의 농가수는 1억 2천 7백만호나 되며 인민공사에 포함된 인구는 총인구의 90%이상이었다. 인민공사의 조직화는 군대를 중심으로 당의 통제를 기반으로 군대식 훈련을 겸하는 것이었다. 인민공사의 원칙은 ‘생활집단화, 군사조직화, 전투식 행동’(生活集體化, 組織軍事化, 行動戰鬪化)이었다. 조직 방식은 ‘대병단작전’(大兵團作戰) 형태를 갖추었다. 이러한 군대식의 생활방식은 실제로 전 인민을 하루 종일 군대와 같은 생활을 강요하여, 논밭에서 식사하고, 공장 일터에서 자며, 모든 생필품과 식량은 배급제로 하며, 노동 시간에 따른 분배를 실시하는 제도였다. 인민공사의 결말은 참담하였다. 모택동 시대에 발전전략으로 택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조직화는 경제적 효율성 무시와 인민의 의욕 감소로 인해 경제적인 대실패를 가져와 4천만명이 넘는 아사자, 병자, 유랑자를 낳았다. 실제로 대약진운동의 대실패로 곤경에 처하자 劉少奇 등 실용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1959년 4월 모택동은 잠시 실각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1963년 5월 모택동은 권토중래를 위해 새로운 사상운동을 펼치면서 홍위병을 일으켜 문화대혁명을 통하여 복권을 하게 되는 과정을 걷는 것이 당시 중국의 역사이다. 인민공사의 평가는 다양한 편이다. ‘대생산병단’의 형태를 가진 중국의 인민공사는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이자 노력동원의 중요한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는 어느 면에서는 소련의 ‘스타하노브운동’과 ‘집단농장’,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협동농장’의 형태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인민공사는 생산력 증진을 위한 다소간의 개선과 병합 과정을 거쳤다. 결국 1980년대 후반 등소평 시대가 열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개혁 개방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점차 폐지되었다. 그러나 현재도 농촌지역에는 인민공사의 피폐한 흔적을 도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곧 허름한 농가들이 군집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공동경작을 하는 광경이 흔하게 보이는 것들이다.
Ⅵ. 중국군의 특이한 민군통합체(2) : ‘生産建設兵團’
가. ‘생산건설병단’과 민군관계의 특징
군대는 본래 전쟁에 대비하는 消費軍의 성격이 강하다. 중국에서 고대 군의 성격을 보면 軍閥 형태로 邊方軍 운영이 주된 형태였으므로 자급자족 형태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는 험준한 산맥과 하천 등으로 교통 왕래와 중앙 지원이 어렵기 때문에 생긴 것이며 또한 소수민족 문화의 다양성 등도 군벌 생성의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기간에 정규군의 경제활동 외에 국가경제건설에 전문적으로 참여해 온 조직형태로 ‘생산건설병단’이 존재하였다.
나. 新疆생산건설병단의 생성과 특징
가장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성장한 新疆생산건설병단은 특이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즉, 新疆省 자치구 ‘생산건설병단’의 생성 이유 및 그 중요성은 여러 방면에서 관심을 고조시키며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新疆省 자치구는 중국 서북쪽에 위치한 최대의 省(중국 전체의 1/6 면적)이며 사막과 험준한 산맥(崑崙山, 天山 등)으로 농사가 곤란하여 방목이 주 생계수단이다. 이 지역에는 주요 에너지(유전, 가스층, 석탄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13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위구르족이 주류를 이루며, 소수민족 분리독립 의욕으로 반란이 계속되는 지역이며 중앙정부가 진압하기 어려운 여건을 지니고 있는 편이다. 더욱이 중앙정부로서는 과거 중소분쟁의 충돌지역일 뿐만 아니라 변방지역의 수비 어려움이 존재하는 곳이다.
다. 군대의 경제 등 생활 참여활동의 역사적 경험
1) 중국 고대와 근대 경험 漢, 明 時代 대표적 사례를 고찰하면 漢代의 禁衛軍(왕궁 수비), 內地軍(內治 담당), 邊方軍(외곽지역 屯田兵 역할로 농민생계과 군량미 조달 및 치안 유지) 운영을 들 수 있다. 明代에는 內地衛所軍, 邊方衛所軍(내지와 변방의 각 병사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분배하여 자급자족 군대로 육성)이 운영되었다. 특히 屯田 형태는 淸代에 중지되었다가 중국 사회주의 혁명시기에 부활한 바 있다.
2) 모택동 시기 紅軍 경험 1930-40년대 모택동의 ‘自力生産’, ‘自給自足’ 정책에 따라 旅團 단위 자급자족은 물론 八路軍에 물자를 공급하였다. 중국공산정권 수립이후 모택동의 ‘군대의 생산건설 참여에 대한 지시’(1945)에 따라 1956년 정부의 農墾剖 창설을 비롯하여 ‘생산건설병단’ 운영 등을 시도하였다. 新疆의 특수한 환경이 생산건설병단식 운영의 계기가 되었다. 이는 병단조직의 군사화, 생활의 집단화, 생산건설과 정규군의 對소련 합동 방어, 소수민족 정치교육 및 同化, 농기구 기술교육 및 대여, 주민통제와 민병 교육, 주민반란 진압 등의 역할을 하였다. 병단 인원은 경보병무기를 소지하고 1일 8-9시간 노동과 기회교육(정치교육 및 군사교육)이 주어졌다. 1956년 이후 본격적인 생산건설병단 운영은 소수민족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漢族의 강제 이주가 이루어 졌다. 下放靑年(사상개조 등 이유로 청년들을 시골로 내려 보내는 정책을 말함), 제대군인, 실업자, 勞改犯과 약간의 기술간부 등이 대상이었다. 1962-69년 시기 중소관계 악화 및 충돌이후 병단은 무장을 대폭 강화하였다. 이 때 실제로 소련은 풍부한 지하자원에 대한 유혹을 가졌으며, 생산건설병단을 對蘇牽制의 방식으로 인식하였다고 한다.
라. 생산건설병단의 평가
생산건설병단은 주로 변방지역 방위와 경제개발을 겸하며,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혹은 반발에 대한 치안, 주변국 견제라는 다양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생산건설병단은 흑룡강성 생산건설병단(대소련 견제 및 경제건설), 내몽고 생산건설병단(국경, 베이징 수비 및 경제건설), 西藏-티베트 생산건설병단(국방 및 인도국경 수비 및 소수민족 분리독립 견제), 광동성 생산건설병단(해남도 경제가치 등) 등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 기능이 점차 없어졌고 新疆생산건설병단이 가장 활발하고 모범적 형태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마. 최근의 新疆자치구 생산건설병단 운영
1) 소수민족과 분리주의 문제 중국 정부의 체제불안 요인 중 하나로 등장한 소수민족과 분리주의 문제로 주시 받고 있는 곳은 주로 몽고(몽골족), 新疆(위구르족), 西藏(티베트족), 회족과 대만 독립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新疆의 위구르족, 西藏의 티베트족이 강한 편이며 주요 원인은 민족과 종교문제이다. 이 지역은 중국 국경지대에 있다. 탈냉전 후 소련연방 붕괴로 독립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국가들은 新疆의 위그르족과 같은 터키계 이슬람 민족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이들이 위구르 독립을 자극하며 무기, 자금 및 훈련 등을 지원하는 것으로 중국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개혁 개방과 함께 농촌의 빈곤, 노동자 실업, 부정부패, 파룬궁(法輪功)의 확산 등 다양한 불안 요소가 증대되고 있다. 이 지역은 중동과 유럽 진출로(新疆)이자 인도 등 주변국의 통로(西藏)로 연계되는 교두보로서 중요한 곳이다. 특히 新疆은 타림분지 부근에 3대 유전과 천연가스 등 풍부한 에너지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아울러 타림분지의 대량 매장된 가스층으로부터 동부로 수송하기 위한 소위 ‘西氣輸’ 공정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길이가 무려 4,200㎞여서 지하 만리장성이라 불릴 정도이다. 또한 西藏의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인도의 ‘망명정부’ 등도 최근 중국 정부 통치권위의 정당성 문제의 한 시험대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 최근 중국의 우려와 원칙 중국은 新疆을 체제위협의 제일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다른 민족에 도미노 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는 공권력 행사로 강제적 통제와 동시에 적극적 개발전략으로 불만의 빌미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최근 이 병단지역에 중국 ‘서부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재정지원 등 중점 육성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부개발의 일부 목적은 소수민족 통일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중앙부서와 新疆의 동일 유형의 사업에 짝짓기 지원을 함으로서 ‘발전’과 ‘안정’이란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하면서 ‘당근’과 ‘채찍’의 동시 사용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최근 동향과 대책 1997년 新疆의 최대 소요가 있은 후 강경 대응조치가 취해졌다. 新疆에 대한 한족들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혹은 무장경찰을 배치한 것이다. 2002년에는 新疆 총인구의 13.1%에 이르는 14개 사단에 250만명 규모로 증가되었다. 그 임무도 역사적으로 변화되었다. 50년대는 주로 생산건설에, 60-70년대는 국경수비, 80년대 이후는 反분리주의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9년 5월 우루무치의 소요 발생이후 그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임무도 국경지역 안정, 민족간 단결 도모, 경제발전 명분하에 공권력이 행사되었다. 1994년 4월 중앙 정부는 생산건설병단을 통한 新疆지역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병단 산하에 학교ㆍ건설ㆍ무역ㆍ호텔ㆍ병원ㆍ농업과 방직업ㆍ광업 등 각종 공업을 관장하며, 新疆 총수출액의 절반을 떠맡을 정도의 조직력을 갖추게 되었다. 특히 ‘3個隊 4個役割’이란 기능과 역할은 잘 알려져 있다. 즉, 生産隊 , 工作隊 , 戰鬪隊로 구성(3개대)과 생산건설 역할, 국경수호 역할, 사회안정 유지, 민족단결 촉진(4개 역할)이 그것이다. 생산건설병단은 黨,政,軍,企 합일의 조직체 250만명 중 소수민족은 11% 비율 정도밖에 안되며, 漢族인 新疆자치구 당서기가 병단의 제1당서기 겸 제1정치위원을 겸하고 있다.
4) 西藏의 분리주의와 연계 西藏의 분리주의 추세는 달라이 라마 중심의 비폭력 원칙도 점차 무장독립 투쟁으로 변화되었다. 1996년 라사에서 3차례 폭발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80년대 이후 新疆과 연계한 분리주의 운동이 극렬해 졌다. 특히 西藏문제의 국제화로 미국 등이 개입한 ‘西藏인권문제’를 1993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한 바도 있다.
5) 문제와 전망 분리주의 운동의 ‘과격화’, ‘連帶化’는 중국 정부의 최대 우려의 대상이다. 사실상 중국 정부는 국제적인 건설효과 홍보와 주변국 설득외교에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소수민족은 자원개발에 중앙 정부 지원이 필요하나 일자리를 한족에 빼앗긴다는 인식이 고조되어 있다. 또한 중앙 정부에 대한 자원 약탈 등의 불신과 中國化에 반발하는 경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에 주목하며 그 해결책에 골몰하고 있다. 중국 정부측에서 볼 때는 병단은 인민해방군, 무장경찰, 공안, 당조직 등과 함께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최대의 억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원유 소모량이 급증하면서 이슬람교도인 위구르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중동 원유수입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이 우려(1997년 2월 이닝 인종충돌사건, 위구르 무슬림 2명 사망)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대중국 경고, 터키의 중국 비난 등도 고조되는 추세이다. 최근 중국 정부의 위상이 제고되면서 중국과 인도간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국제적으로 중국에 협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어 新疆과 西藏 문제도 개선 조짐은 있으나 뿌리깊은 불신과 반목은 여전히 화약고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바. 최근 新疆생산건설병단과 우리나라와의 관계
1) 우리나라 KAIST와 新疆생산건설병단 간의 상호 MOU 체결 2005년 5월 2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기술창업지원단(단장 오준호)은 중국 정부 국무원 직속 新疆생산건설병단(총사령관 張敬儷)과 국내 벤처기업의 중국 제품판매, 기술교류, 기술이전 등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이로서 국내 벤처기업이 중국 서부 대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볼 때, 신강생산건설병단은 독자적인 예산편성과 집행, 사업투자 권한을 갖고 있다. 지역 내에서 附帶개발사업의 핵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고 일반기업 2000개, 상장기업 8개를 산하에 갖고 있음이 알려 졌다. KAIST와 병단은 이번 MOU체결을 계기로 사업 프로젝트 정보 교류, 한국내 중국진출 희망기업에 대한 지원, 중국 서부 대개발 관련 사업 추진과 한국내 기업 참여 협의, 벤처기업 및 벤처투자자의 상호 교류 등을 적극 추진키로 하였다. 국내기업의 중국 진출과 중국 프로젝트의 국내기업 참여를 지원키 위해 병단은 KAIST 신기술창업지원단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중국진출 기업을 적극 발굴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KAIST 신기술창업지원단 보육벤처인 카보텍(대표 임재신)과 건설병단 산하 신강농간천신국제무역유한공사간에 10년간 2,330억원 규모의 농작물 신선도 장치 ‘에틸렌스톱’의 공급계약을 체결하였다.(디지털타임스 2005. 5. 3 기사)
Ⅶ. 맺는 말
본 원고는 논문 형식의 글도 아니고 체계적인 논리도 부족한 글이다. 필자의 과거 학위논문과 관련 자료 그리고 최근의 인터넷 자료들을 연결하여 중국군의 정치사회적 측면을 중심으로 집필중인 ‘중국의 군대와 사회’라는 주제의 책에서 간략히 발췌해 본 글이다. 요컨대, 중국 인민해방군은 원래부터 ‘당군일치’, ‘민군일치’와 같은 원칙에 충실하면서 사회주의 군대로 육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 인민해방군의 ‘爲民服務’ 정신은 현재도 매우 충만하며, 아울러 인민들도 ‘軍隊優先’의 존경과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방대한 영토와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복잡한 상황은 각종 재난과 위기를 극복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며, 이러한 위기관리의 방식은 군대의 동원체제 확립과 재난구조에의 참여 등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의 직속으로 운영되는 ‘新疆생산건설병단’은 오랜 전통적인 중국군 운영 형태 혹은 ‘인민공사’ 취지 등과 부합하는 면이 있으며, 현재 新疆자치구의 생산건설 역할, 국경수호 역할, 사회안정 유지, 민족단결 촉진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生産隊, 工作隊, 戰鬪隊 등으로 구성된 병단이다. 그렇지만 최근 우리나라와 경제 및 기술 교류를 체결할 정도로 생산적인 병단이기도 한 특유한 형태의 조직이다. 현재의 중국 인민해방군은 생산건설병단 형태인 인민들과의 군집생활 지역을 떠나 군구별로 군사기지를 형성하여 ‘科技强軍’을 내세우며 부국강병에 치중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新疆생산건설병단 같은 조직형태를 운영하고 있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중국 정부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대에 따라 변형시킨 ‘싸우며 생산ㆍ건설하는’ 군 운용의 형태는 중국군 이해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참고자료> 이동률, “소수민족 분리주의에 대한 중국의 인식과 대응”, 국가전략 제10권 3호, 세종연구소, 2004. 이동훈, “중국과 북한의 동원 기능과 효과 비교 분석”(중국어의 번역), 중국 대만국립정치대학 박사학위 논문, 1985. 이동훈, 중국의 군대와 사회, 야베스 출판사, 근간예정. 차영구, “新疆省軍區 생산건설병단 창설 및 성장배경”, 중국문제,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1979. 디지털타임스, 2004.5.3. 연합뉴스, 2005.5.3. 軍事科學出版社, 中國大百科全書 - 軍事(8), 北京, 1987. http://www.xinhua.org/mil (신화사 군사자료) http://military.china.com (중국 군사 사이트) http://www.baidu.com (중국 종합검색 사이트, ‘인민해방군’ 검색 가능) http://www.peopledaily.com.cn (인민일보사) http://www.chinasite.com (차이나사이트-영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