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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과정 : 소태산 대종사는 어떠한 성자인가?
김현 교무
1. 후천개벽의 성자
정산종사가 지은 대종사 비문에 보면 그 서두에 [대범, 천지에는 사시가 순환하고 일월이 대명(代明)하므로 만물이 그 생성의 도를 얻게 되고, 세상에는 불불이 계세하고 성성이 상전하므로 중생이 그 제도의 은(恩)을 입게 되나니 이는 우주 자연의 정칙이다. 옛날 영산 회상이 열린 후 정법과 상법을 지내고 계법 시대에 들어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의 고해가 날로 증심하였나니 이것이 곧 구주이신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연하시게 된 기연이다.]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중생구원의 큰 뜻을 가지고 말세중생을 구원하고자 오셨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정법 상법 계법으로 시대구분을 하는데 이를 3시설이라 한다. 각 시기를 1천년을 말하기도 하고 정법이나 상법시기를 오백년이라고 하는 설들이 있다. 정법시대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르게 시행되고 실천의 결과가 널리 시행되는 시기를 말하고 상법시대란 정법시대의연장이지만 증득함이 적고 생명력이 떨어져 형식화하는 시기라 하고 계법시대란 교법만 있고 수행과 증득이 없는 형식만 남는 시기를 말한다.
대종사님은 말법시대에 이르러 쇠퇴해가는 불법을 다시 일으키고 물질개벽으로 인한 문명적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대종사님은 대각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천명하는데 하늘이 열리고 땅이 뒤바뀔만한 대 변혁의 시기임을 말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18세기 산업혁명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봉건 군주사회에서 자유 민주사회로 계급적 신분사회에서 평등사회로의 전환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물질의 개벽은 사회개벽을 촉발하게 되고 문화의 개벽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벽의 핵심에 정신이 위치가 바로서지 못하면 물질에 종속되는 이른바 노예화를 면할 수 없게 된다.
대종사님이 탄생하신 20세기 초엽은 불교의 삼시설이나 동서 예언자들의 종말론적 변혁설이나 문명사적 현실에서나 개벽이라 이름 할 수밖에 없는 일대 변혁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소태산 대종사는 진정 인류구원의 사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2. 대종사의 탄생
대종사는 1891년 (辛卯) 음 3월 27일에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全羅南道 靈光郡 白岫面 吉龍里) 영촌(永村)에서 탄생하시었다.
부친은 박회경(法名晦傾 字成三)이시요, 모친은 유정천(江陵劉氏 法名正天)이다. 본관(本貫)은 밀양(密陽)이시니, 신라 밀성 대군(景明王長子密成大君)에 의하여 본(本)을 얻었고, 그후,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세거(世居)하다가, 대종사의 7대조 때 영광군에 이거하였으며, 처음에는 군서면 마읍리에 거주하다가, 대종사 탄생 전 7년(1884. 甲申) 길룡리로 이사하시었다.
부친은, 가난하여 학문은 없었으나, 천성이 명민하여 평생에 사람들의 경모함을 받았고, 모친은 이웃으로부터 덕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3. 우주 자연과 인간만사에 대한 관심(觀天 起疑相)
대종사는, 어려서 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도량이 활달하며, 모든 사물을 대함에 주의하는 천성이 있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함을 항상 범연히 지나치지 않았으며, 모든 언행에 묻기를 좋아 하시며, 남과의 약속에 한번 하기로 한 일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반드시 실행하는 성격을 지녔다.
대종사, 7세 되시던 해, 어느 날, 화창한 하늘에 한 점 구름이 없고, 사방 산천에 맑은 기운이 충만함을 보시다가, 문득 [저 하늘은 얼마나 높고 큰 것이며, 어찌하여 저렇게 깨끗하게 보이는고] 하는 의심이 일어나고, 뒤를 이어 [저와 같이 깨끗한 하늘에서 우연히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어나니, 그 바람과 구름은 또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심이 시작됨을 따라 모든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9세 때 부터는 나를 생각한 즉 내가 스스로 의심이 되고, 부모와 형제간을 생각한즉 부모와 형제간 되는 일이 의심이 되고, 물건을 생각한즉 물건이 또한 의심이 되고, 주야가 변천하는 것을 생각한즉 그것이 또한 의심이 되어, 이 의심 저 의심이 대종사를 답답하게 하였다.
그 후 10세 때 부터 부모의 명에 의하여 겉으로는 비록 한문 서당에 다니시었으나, 글 배우는 데에는 뜻이 적으시며, 오직 이 수많은 의심을 풀어 알고자 하는 한 생각으로 마음이 차 있었다.
4. 깨달음을 향한 고행
1) 산신을 향한 기도(蔘嶺祈願相)
대종사, 한번 의심을 발하신 후로는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밤낮으로 오직 의심을 해결할 길을 찾기에 노심(勞心)하였다. 그러던 중 11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선산 묘제(先山墓祭)에 참례하였다가 선조를 제사하기 전에 산신께 먼저 제사함을 보고 친족 중 한 사람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그로부터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나의 의심을 산신에게 물으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그 날 부터 산신을 만나기로 작정하였다.
그 후로 마을 뒷산 [삼밭재에 올라가 거기의 넓직한 바위 [마당바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전후 사방을 향하여 종일토록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이러한 정성이 5년여를 일관하는데 처음에는 부모 모르게 그 일을 시작하시었으나, 차차 알게 되고 부모님들도 그 정성에 감동하여 많은 후원을 하시었다.
2) 스승을 찾아 정성을 드림(求師苦行相,)
부모의 명에 의하여 면내 흥곡리의 규수 양 하운(濟州梁氏 法名夏雲)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때의 나이가 15세였다. 이듬해 정월, 새해 인사차 처가에 가셨다가, 마침 마을 사람이 고대 소설(朴太傳傳 趙雄傳등) 읽는 것을 들으시는 중, 그 소설의 주인공들이 천신만고 끝에 도사(道士)를 만나 소원을 성취하는지라, 대종사는, 나도 이제 부터는 저 소설의 주인공 같이 도사 만나는데에 정성을 들인다면, 도사는 사람이라 반드시 없지도 아니하리라] 생각 하시고, 전날의 결심을 도사 만날 결심으로 돌리시었다.
그 후로는 길에 이상한 사람이나 걸인이 있어도 그가 혹 도사나 아닌가 하여 청하여 시험해 보시며, 또한 어디에 이인(異人)이나 은사(隱士)가 있다고 하면 반드시 찾아가 보시고, 혹은 청하여 같이 지내시며 시험해 보기도 하여, 그 후 6년 간 도사를 찾아 일천 정성을 다 들이시었다.
3) 대종사의 입정(江邊入定相)
대종사가 이처럼 글공부와 살림에는 뜻이 없고, 오직 도(道)구하는 데에만 뜻을 두자, 부친께서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다가, 마침내 대종사의 정성에 감동되어 그 구도를 적극 후원하셨으며, 대종사께서 20세에 이르도록 도사 만날 소원도 이루지 못함을 보시고는 [마당바위] 부근에 초당을 지어 심공(心功)을 들이게도 하는등 뒷받침을 해주었다. 그러던 중1910년(.庚戊) 10월 별세하시었다. 생활과 구도의 후원을 일시에 잃게 되자 22세 때 부터는 도사 만날 생각도 차차 단념하고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하는 한 생각만 점점 깊어져 갔다. 세월이 갈수록 다른 생각은 다 잊으시고, 오직 그 한 생각으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고 저녁에서 아침에 이르시며, 때로는 저절로 떠오르는 주문(呪文)도 외우시고 한때는 고창 연화봉(全北 高敞郡 心元面 蓮花峰) 초당 등으로 장소를 옮기어 정신을 수습도 해 보았으나, 25세 때 부터는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하는 그 생각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어, 점점 행하여도 행하는 줄을 모르고, 말하여도 말하는 줄을 모르며, 음식을 드시어도 드는 줄을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5. 대종사의 대각
이러한 입정상태가 계속되다가 원기 원년(1916.丙辰) 음 3월 26일 이른 새벽에 우연히 정신이 쇄락해 지며, 전에 없던 새로운 기운이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시어 밖에 나와 사면을 살펴보니, 천기가 심히 청랑하고 별과별이 교교(皎皎)하였다.
이에, 맑은 공기를 호흡하시며 뜰 앞을 두루 배회하시더니, 문득 이 생각 저 생각이 마음에 나타나, 그동안 지내 온 바가 모두 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며 고생을 면하기로 하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며, 날이 밝으면 우선 머리도 빗고 손톱도 자르고 세수도 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 조반 후, 이웃에 사는 몇몇 마을 사람이 동학의 [동경대전]을 가지고 서로 언론하는 중, 특히 [오유영부 기명선약 기형태극 우형궁궁(吾有靈符其名仙藥其形太極又形弓弓)]이란 귀절로 논란함을 들으시매, 문득 그 뜻이 해석되는지라, 대종사 내심에 대단히 신기하게 여기시었다.
얼마 후, 또한 유학자 두 사람이 지나다가 뜰 앞에 잠간 쉬어 가는 중, [주역]에 [대인 여천지합기덕 여일월합기명 여사시합기서 여귀신합기길흉(大人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이라는 귀절을 가지고 서로 언론함을 들으시매, 그 뜻이 또한 환히 해석 되시었다.
이에 더욱 이상히 여기시어, 전 날에 생각하시던 모든 의두를 차례로 연마해 보신즉, 모두 한 생각에 넘지 아니하였다. 드디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대종사의 심경은 날이 갈수록 명랑해지고, 얼굴과 몸에 기혈이 충만하여, 그간의 모든 병증도 차차 저절로 회복되니, 보는 이들 누구나 정신이 황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종사의 생장하신 길룡리는 산중 궁촌으로, 견문이 심히 적었고, 대종사께서도 글 공부한 시일이 2년에 불과하였으므로, 그 동안 어떤 종교의 교의(敎義)와 역사를 듣고 배우신 바가 없었으나, 듣고 보신 바가 없이 스스로 원을 발하시고, 스스로 정성을 다하시고, 스스로 정(定)에 드시고, 스스로 대각을 성취하여, 필경은 천만 교법의 대소 본말을 일원의 이치로써 관통하시었으니, 이는 곧 영겁에 수도의 종성(種性)이 매(昧)하지 아니한 까닭이라 할 것이다.
6.불교와의 만남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마음에 홀로 기쁘고 자신이 충만(心獨喜自負)하여, 그 경로를 생각하시되 [순서 알기가 어렵다] 하시고, [강연히 말하자면 자력으로 구하는 중 사은의 도움이라] 하시었다.
대종사,교서를 한 번 참고하여, 나의 얻은 바에 대조하여 보리라] 하시고, 종래의 여러 경전들을 구하여 열람하시었다.
당시 열람하신 경전은, 유교의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불교의 금강경(金剛經). 선요(禪要). 불교대전(佛敎大全). 팔상록(八相錄), 선가(仙家)의 음부경(陰符經). 옥추경(玉樞經), 동학의 동경 대전(東經大全). 가사(歌詞), 기독교의 구약(舊約). 신약(新約) 등인 바, 그 중 특히 [금강경]은 꿈으로 그 이름을 알으셨다 한다.
대종사, 경전들을 열람하신 후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 바는 옛 성인들이 또한 먼저 알았도다] 하시고, [모든 경전의 뜻이 대개 적절하여 별로 버릴 바가 적으나, 그 중에도 진리의 심천(深淺)이 없지 아니한 바, 그 근본적 진리를 밝히기로는 불법이 제일이라, 서가모니 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시었다.
대종사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 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 본다면 모든 일이 은연 중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하시고,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고, 모든 교법도 마땅한 바를 따라 응용하여, 완전 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고 내정하시었다.
7. 최초의 법어
대종사,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하신 후, 다시 밖으로 시국을 살펴 보시어, 정신 도덕의 부활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느끼시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시니, 이것이 곧 개교 표어이다.
대종사, 다시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을 최초 법어로 발표하시니, 곧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다.
[수신의 요법]은, 시대를 따라 학문을 준비하고, 수양 연구 취사를 놓지 아니하여야 새 세상의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제가의 요법]은 실업과 근검 저축, 교육과 의견 교환, 도덕과 정치 복종, 희망과 방법 참조를 주의 하여야 새 가정 새 국가를 이룩한다는 것이요, [강자 약자의 진화상 요법]은, 강자는 자리이타로 약자를 진화시키며, 약자는 강자를 선도자로 삼아, 강약이 서로 진화하는 길로 나아가야 상극없는 새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이요,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은, 이상 지식을 가지고, 신용을 잃지 말며, 사리를 취하지 말고, 지행을 대조하여야 제생 의세의 경륜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8. 첫 제도의 방편과 구인제자
대종사, 표어와 법어를 발표하신 후,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이제 나의 안 바는 곧 도덕의 정체(正體)요, 나의 목적하는 바는 곧 새 회상을 이 세상에 창건하여 창생을 낙원으로 인도하자는 것인즉 회상을 열려면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가운데도 혈심제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해(원기원년.1916) 12월 경, 특별히 진실하고 신심 굳은 여덟 사람을 먼저 선택하시니, 곧 김 성섭(金成燮). 김 성구(金聖久). 박 한석(朴漢碩). 오 재겸(吳在謙). 이 인명(李仁明). 박 경문(朴京文). 유 성국(劉成國). 이 재풍(李載馮) 등이었으며, 그 후 송 도군(宋道君)을 맞으시니, 이들이 곧 새 회상의 첫 구인 제자이다.
9인 중 첫 제자는 김 성섭이니, 그는 본래 대종사의 가정과 교의(交誼)가 있어 친절함이 형제같은 중, 대종사의 입정 전후에 많은 보조가 있었고, 박 한석은 대종사의 친제(親第)요, 유 성국은 외숙이요, 박경문은 족질이며, 이 인명. 김 성구. 오 재겸은 모두 근동 지우(近洞知友)이고, 군서(郡西)사람 이 재풍은 오 재겸의 인도로 처음 만났으며, 송 도군은 경북 성주 사람으로, 정법을 찾아 방황하다가 원기 3년(1918.戊午) 3월에 대종사께 귀의하였다.
9. 새회상의 정초
1) 저축 조합 운동
원기 2년(1917.丁巳) 8월에, 대종사, [저축 조합]을 창설하시고, 단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장차 시방 세계를 위하여 함께 큰 공부와 사업을 하기로 하면, 먼저 공부할 비용과 사업할 자금을 예비하여야 하고, 예비를 하기로 하면 어떠한 기관과 조약을 세워야 할 것이므로, 이제 회상 기성(期成)의 한 기관으로 저축 조합을 실시하여 앞 일을 준비하려 하노라] 하시었다.
이에 모든 단원이 술.담배를 끊어 그 대액(代額)을 저축하며, 의복.음식 등에 절약할 정도가 있으면 그 대액을 저축하며, 재래의 여러 명절 휴일을 줄여 특별 노동 수입을 저축하며, 각자 부인에게도 끼니마다 시미(匙米)(후일 報恩米)를 저축케 하며, 그 간 실행해온 천제(天祭)도 폐지하여 그 소비 대액을 조합에 저축하기로 하고, 대종사, 친히 조합장이 되시어 그 실행을 장려하시니, 불과 몇 달에 저축된 금액이 상당한 액수에 달하였다.
2) 정관평 방언 공사
원기 3년(19189.戊午) 3월에, 대종사, 저축 조합의 저축금을 수합하신 후, 조합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어떠한 사업이나 가히 경영할 만한 약간의 기본금을 얻었으니, 이것으로 사업에 착수하여야 할 것인 바, 나의 심중에 일찌기 한 계획이 있으니, 그대들은 잘 생각해 보라] 하시고, 길룡리 앞 바닷물 내왕하는 간석지를 가리키시며 [이것은 모든 사람의 버려 둔 바라, 우리가 언을 막아 논을 만들면 몇 해 안에 완전한 논이 될 뿐 더러 적으나마 국가 사회의 생산에 한 도움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척 사업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아감이 어떠하냐] 하시었다. 조합원들은 원래 신심이 독실한 중에 몇 번의 증험도 있었으므로, 대종사의 말씀에는 다른 사량 계교를 내지 아니하고 오직 절대 복종 하였다. 이에, 일제히 명을 받들어 오직 순일한 마음으로 지사 불변(至死不變)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다음날로 곧 방언 공사에 착수하였다.
조합원들이 공사에 착수하니, 근방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냉소하며, 혹은 장차 성공치 못할 것을 단언하여 장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그 비평 조소에 조금도 끌리지 아니하고, 용기를 더욱 내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일심 합력으로 악전고투를 계속 하였다. 삼복 성염(三伏盛炎)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삭풍 한설에는 추위를 헤치면서, 한 편은 인부들을 독촉하고 한 편은 직접 흙짐을 져서,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아니 하였다.
방언 공사는 이듬해인 원기 4년(1919.己未) 3월에 준공되니, 공사 기간은 만 1개년이요 간척 농토 면적은 2만6천평(坪)이었다.
3) 구인 단원의 기도
원기 4년(1919.己未) 3월, 방언 공사를 마친 후, 대종사, 9인 단원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물질 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
옛 성현들도 창생을 위하여 지성으로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天意)를 감동시킨 일이 없지 않나니, 그대들도 이 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에 감동이 있게 하여 볼지어다.
그대들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라, 마음이 한번 전일하여 조금도 사(私)가 없게 되면, 곧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을 합하여 모든 일이 다 그 마음을 따라 성공될 것이니, 그대들은 각자의 마음에 능히 천의를 감동시킬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며, 각자의 몸에 또한 창생을 제도할 책임이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하시니, 9인은 황송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제히 지도하심을 청하였다.
이에, 3월26일에 시작하여, 10일간 재계(齋戒)로써 매 삼륙일(每三六日)(6일.16일.26일)에 기도식을 거행하되, 치재(致齋)방식은, 첫째 마음 정결을 위주하고, 계문(戒文)을 더욱 준수하며, 육신도 자주 목욕재계하고, 기도 당일에는 오후 8시 안으로 일찌기 도실에 모여 대종사의 교시를 받은 후, 9시 경에 기도 장소로 출발하게 하였다.
기도는, 10시 부터 12시 정각 까지 하며, 기도를 마친 후 또한 일제히 도실에 돌아오되, 단원들이 각각 시계를 가져, 기도의 시작과 그침에 서로 시각이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장소는 각각 단원의 방위를 따라 정하되, 중앙봉으로 비롯하여 8방의 봉우리(峰巒)를 지정하고, 단기(團旗)인 팔괘기(八卦旗)를 기도 장소 주위에 세우게 하며, 기도식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향촉과 청수를 진설하고 헌배와 심고를 올리며, 축문을 낭독한 다음 지정한 주문을 독송케 하였다.
원기 4년(1919.己未) 7월16일에, 대종사, 단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이 지금까지 기도해 온 정성은 심히 장한 바 있으나, 나의 증험하는 바로는 아직도 천의(天意)를 움직이는 데는 그 거리가 먼듯하니, 이는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아직도 어떠한 사념이 남아 있는 연고라, 그대들이 사실로 인류 세계를 위한다고 할진대, 그대들의 몸이 죽어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정법이 세상에 드러나서 모든 창생이 도덕의 구원만 받는다면 조금도 여한 없이 그 일을 실행하겠는가] 하시니, 단원들이 일제히 [그러하겠읍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10일간 치재를 더하게 하시어, 다음 기도일(7월26일)을 최후 희생일로 정하고, 그 날 기도 장소에 가서 일제히 자결하기로 약속하였다. 7월26일(음)에, 9인은 모두 만면(滿面)한 희색으로 시간 전에 일제히 도실에 모이는지라, 대종사, 찬탄함을 마지 아니하시었다.
밤 8시가 되매, 대종사, 청수를 도실 중앙에 진설케 하시고, 각자 가지고 온 단도를 청수상 위에 나열케 하신 후, 일제히 [사무여한]이라는 최후 증서를 써서 각각 백지장(白指章)을 찍어 상(床)위에 올리고, 결사(決死)의 뜻으로 엎드려 심고(伏地心告)하게 하시었다.
대종사, 증서를 살펴 보시니, 백지장들이 곧 혈인(血印)으로 변하였는지라, 이를 들어 단원들에게 보이시며 [이것은 그대들의 일심에서 나타난 증거라] 하시고, 곧 불살라 하늘에 고(燒火告天)하신 후 [바로 모든 행장을 차리어 기도 장소로 가라] 하시었다.
대종사, 한참 후에 돌연히 큰 소리로 [내가 한 말 더 부탁할 바가 있으니 속히 도실로 돌아오라]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 신명이 이미 감응하였고 음부 공사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 부터 비롯하였다.
이제 그대들의 몸은 곧 시방 세계에 바친 몸이니, 앞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비록 천신 만고와 함지 사지를 당할지라도 오직 오늘의 이 마음을 변하지 말고, 또 가정 애착과 오욕의 경계를 당할 때에도 오직 오늘 일만 생각한다면 거기에 끌리지 아니할 것인즉,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 하시었다.
단원들에게 법호(法號)와 법명(法名)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의 전 날 이름은 곧 세속의 이름이요 개인의 사사 이름이었던 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세계 공명(世界公名)인 새 이름을 주어 다시 살리는 바이니, 삼가 받들어 가져서 많은 창생을 제도하라] 하시니, 이것이 거룩한 백지 혈인 (白指血印)의 법인 성사(法認聖事)였다. 9인의 법호 법명은 일산 이재철(一山李載喆). 이산 이 순순(二山李旬旬). 삼산 김 기천(三山金幾千). 사산 오 창건(四山吳昌建). 오산 박세철(五山朴世喆). 육산 박동국(六山朴東局). 칠산 유건(七山劉巾). 팔산 김 광선(八山 金光旋). 정산 송규(鼎山宋奎)였다.
4) 교강 선포
원기 5년(1920庚申) 4월에, 대종사, 봉래산에서 새 회상의 교강을 발표하시니, 곧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이었다. 사은은,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으로서, 그 피은(被恩) 보은(報恩) 배은(背恩)을 말씀한 것이요, 사요는 그 후 누차 연마하여 완정하신 바, 남녀 권리동일 지우차별(智愚差別) 무자녀자 타자녀교양(無子女者他子女敎養) 공도헌신자 이부사지 (公道獻身者以父事之)니, 이는 인생이 마땅히 행할 바 도로서 세상을 구원할 요법이 되고, 삼강령은, 정신 수양 사리 연구 작업 취사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서,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정.혜를 단련하여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八條目)은 신(信) 분(忿) 의(疑) 성(誠)과 불신(不信) 탐욕(貪慾) 나(懶) 우(愚)니, 삼강령 공부를 운용하는 요법이 되는 바, 그 강령이 간명하고 교의가 원만하여, 모든 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과 편벽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도(大道)에 들게 하는 새 회상의 기본 교리이다.
10. 익산총부 건설
1) 새 인연들과의 만남
대종사 송규를 진안(鎭安) 지방에 보내시어, 만덕산(萬德山) 미륵사(彌勒寺)에서 최도화(崔道華)를 만나게 하시고, 그 해 12월, 오창건. 송도성(宋道性)을 데리시고 친히 가시어, 최 도화. 전 삼삼(田三三). 전 음광(全飮光). 노 덕송옥(盧德頌玉) 등을 만나신 후, 이듬 해(원기8년.1923) 3월에 봉래산에 돌아오시어, 5월에 김제 서 동풍(徐東風). 서 중안(徐中安) 형제를 만나시었다. 이 밖에도, 원평(院坪)의 구 남수(具南守). 이 만갑(李萬甲). 장 정수(張正守). 장적조(張寂照) 등과, 전주 문정규(文正奎). 박호장(朴戶張), 이리(裡理) 박원석(朴元石) 등 초창의 주요 인연들을 차례로 만나시었고, 원기 9년(1924.甲子) 2월에는 정읍 내장사에서 송 만경(宋萬京)을 만나시었으며, 이어, 최도화의 안내로 서울에 가시어, 박 사시화 (朴四時華) 형제와 성 성원(成聖願). 이 동진화(李東震華). 김삼매화(金三昧華)를 만나시고, 그후 이 공주(李共珠) 등을 차례로 만나시었다.
원기 8년(1923.癸亥) 6월에 서 중안이 부인 정세월(鄭世月)과 함께 다시 봉래 정사에 와서 사뢰기를 [이 곳은 길이 험난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장소가 협착하오니 마땅히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택하여, 모든 사람의 앞길을 널리 열어 주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하며, 대종사의 하산(下山)을 지성으로 간청하였다.
2)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
원기 9년(1924.甲子) 3월에, 서중안 등 7인(별록5)이 발기인이 되어 [불법연구회] 창립 준비를 토의할 제, 대종사, 총부 기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리 부근은 토지도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無産者)들의 생활과 각처 회원의 내왕에 편리할 듯 하니 그 곳으로 정함이 어떠하냐] 하심에, 일동이 그 말씀에 복종하였다.
또한 창립 총회 개최 장소는, 이리 부근 보광사(普光寺)로 예정하고 총부 건설지는 후일 실지 답사 후 확정하기로 하였다. 원기 9년 4월 29일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총회를 열어 종래의 기성 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으로 새 회상을 내외에 공개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원불교 교사에서 발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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