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관순열사(柳寬順) 열사(烈士) 추모제(追慕祭)
2008년 9월 28일은 류관순 열사가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서대문 감옥에서 세상을 뜬지 88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날을 추모하기 위하여 11시에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서 천안시(天安市)와 류관순 열사 기념사업회의 주관으로 추모제가 열렸다.
추모제는 개식에 이어, 류근창 류관순 기념사업회 회장이 내빈소개를 하고, 국민의례, 류관순 열사에 대한 추모의 글짓기 대회 입상자에 대한 시상, 성무용 천안시장의 추념사, 국가보훈처장, 천안시의회 의장, 광복회장의 추모사, 자우선진당 심대평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내빈 및 유족의 헌화 및 분향, 천안시립합창단과 국악단의 아우내 노래 합창, 추모의 글 입상자의 추모의 글 낭송, 류관순 노래 제창, 폐식의 순서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류관순 열사는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한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병천, 수신, 동면, 목천 등 인근 주민들 3,000여명이 아우내(並川) 장터 한복판에서 류관순 열사가 만든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운동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평화시위를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본 헌병들은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 대어 류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주민 3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때 류관순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모두 천안헌병대로 체포되어 갔고, 공주형무소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치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류관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음에는 3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다가 일본 재판관의 말을 듣지 않고 매일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7년으로 늘어났고 형기를 반도 채우지 못한 채 혹독한 형벌로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순국하게 되었다. 이 날을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다.
이 날의 동정을 사진으로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류관순 열사 추모각 입구의 조형물
류 열사가 매봉산에서 봉화를 들고 있는 것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류관순 열사 초혼묘 봉안기념비
류열사 추모각 입구에 세움
류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 끝에 끝내 숨을 거둔 뒤 이태원 산기슭에 매장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오래 흐른 뒤에 찾으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찾지 못하고 고민을 하던 끝에 혼을 불러 모시는 ‘초혼묘’를 쓰기로 하고 추모각 뒤쪽 오른쪽에 모시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류관순 열사 동상
류 열사의 동상은 원래 아우내 장터 동쪽 끝에 세웠었으나, 장소가 좋지 않은데다 부실하게 세워져 그것을 없애고 추모각 왼편에 다시 세운 것임. 장충체육관 인근에도 류 열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각 초등학교에도 류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자그마한 동상이 많이 세워졌다.
류관순 열사의 발자취를 사진과 함께 쓴 판
류 열사의 순국(殉國) 88주기를 추모하기 위하여 추모각 입구 광장에 류 열사 수난의 일생을 간략하게 소개한 사진과 역시기 이젤에 걸려 있다.
류 열사 추모 백일장 및 사생대회에 모인 학생들
해마다 류 열사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추모제를 택해 초․중 ․고등학생들의 백일장과 사생대회를 개최한다. 금년으로 제34회째를 맞이했는데, 추모제행사에서 시상을 한다.
류관순 열사 기념관과 타임캡슐
류열사에 관계되는 사료를 모은 기념관이다. 기념관이라고는 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자료가 남아 있기도 어렵지만, 수집하기도 힘들어 변변치 못 하다. 유 열 사에 대한 소설, 동화, 시, 등도 여기에 수집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류 열사 기념관 앞마당에 천안시에서 설치해 놓은 타임캡이다. 2003년 4월 1일 설치해 놓은 것으로 꼭 100 년 뒤에 열어 보도록 한 것으로 2102년 4월 1일에 개봉할 것이다.
추모각에서 바라본 아우내(並川) 장터
처참했던 옛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평온하기만 하다. 그 당시에는 초가집이었으나 초가의 모습은 간 데 없고 기와집과 큰 건물이 들어서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 일깨워 주고 있다.
류열사 추모각 전경과 추모제에 모인 추모객
추모식에 참석한 내빈과 해군사관학교 생도들
남자 생도들 사이에 여성생도도 10여명 참석해서 더 뜻 깊은 추모행사가 되었다.
추모식에 참석한 11명의 일본인 여성들
이들은 해마다 참석하여 류 열사의 뜻을 기린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국민의례 모습
대한민국 경찰의 조총(弔銃) 발사 모습
성무용 천안시장의 추념사 장면
류근창 류관순 기념사업회장이 조의를 마치고 내려오는 모습
류관순 열사 영정(影幀)
전의 영정은 류 열사가 감옥생활을 하면서 고문을 받아 부은 모습을 근거로 그린 것이어서 부은 모습을 한데다 나이가 든 아주머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실제 모습에 가깝도록 이 영정으로 다시 그려 모셨다.
류관순 기념관과 추모각 사이에 있는 “매봉우물”은 오염되지 않은 아주 시원한 우물로 관람객들의 오장육부를 시원하게 해 준다.
초혼묘(招魂墓)
류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7년 형을 받고 복역 중 매일 같이 일경에 저항하고 만세를 불러 감옥살이하는 사람들이 따라 불러 류 열사가 있는 동안은 조용해 질 수 없다 하여 육시(戮屍)를 당한 후 이태원에 매장했다고 한다. 아무리 가서 찾아보려 했으나 찾을 길이 없자, 고민 끝에 혼백이라도 모셔야 한다고 하여 초혼묘를 모시게 되었다.
류관순 열사 봉화탑(烽火塔)
류 열사가 인근 각 지역에 다음날 독립 만세 운동이 있을 것을 알리는 봉화를 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탑이다.
이화여고 학생들의 시비(詩碑)
이 시비는 류 열사가 이화학당을 다녔으므로 그 후배들이 류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이화여고 학생들이 시비를 만들어, 추모각에서부터 매봉산 봉화탑에 이르는 길가에 세워진 것 중의 하나다.
류관순 노래
우리가 어렬을 적부터 불러 온 노래로서 이 노래 이후에는 류관순 열사는 만인의 언니요 누나가 되었다.
첫댓글 류관순 열사는 만인의 언니요 누나입니다. 그의 정신을 길이 빛내야겠습니다.우리는 아직도 그 뜻을 잊고 있지나 않는지.?..
나는 누나라고 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할머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열사나 의사의 집안은 잘 된 집이 없습니다. 류 열사의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참 지천님은 류열사님의 집안인고로 할머니이지만 (저도 할머니라 하지만) 류관순 열사는 만인의 언니요 누나입니다. 그 뜻만은 길이길이 이어 받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