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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정, 정간을 떼다
때: 2003년 1월 25일(토)
장소: 충북 청주 우암정
1.정간이 말썽인 까닭은?
활터에 올라가면 맨 처음 배우는 것이 '正間'이라고 쓰인 판자때기에 대고 목례를 하는 것이다. 활터에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이 암암리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합의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도 그렇게 배웠다. 그런데 정작 우스운 건 그 다음이다. 왜 거기에 대고 인사를 하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딱 부러진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종교상의 정체성을 허물지 않는 선에서 애써 미신임을 믿으려 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은 그냥 터줏대감이나 성주신에 대고 예를 하는 것이려니 하고 지나친다. 그러나 끝내 미심쩍은 구석은 가시지 않는다. 활을 배우는 사람은 백이면 백 모두 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그러한 기이한 의문에 답을 찾아나선 사람은 없다.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나는 정간에 대해서 오래 활을 쏜 분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그러나 기가 막힌 것은 30년을 넘게 활을 쏜 사람들조차도 정간이 언제 생긴 건지, 왜 하는 건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국어사전에는 건축용어로 건물의 중앙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나와있다. 그렇다면 정간이란 말을 써놓고서 인사를 하는 것은 활터만의 일이며, 그것은 언어사회의 합의와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활터에서 그런 행위가 오래 행해져왔다면, 그래서 그것이 여타 부문에서도 인정하는 행위가 되었다면 그것은 언어사회를 구성하는 언중(言衆)의 동의가 얻어졌을 것이며, 그러한 동의는 낱말을 통해서 정착하고, 그 낱말은 국어사전에 오름으로써 이제 사회 전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공공언어로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활터에서 행하는 정간의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활터의 정간은 사이비 개념이거나 아주 최근에 생기기 시작한 말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간에 대고 목례하는 사람들은 이런 뜻을 모른다. 그리고 목례만 하면서도 배례[엎드려 절함]라고 말한다. 이 황당한 모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러한 암담한 현실에 한 가닥 빛을 던진 것은 성낙인 선생이었다. 성낙인 선생은 대한궁도협회의 전신인 조선궁술연구회장 성문영 공의 외동아들로 해방전에 황학정에서 집궁한 분이다. 성낙인 선생은 정간이라는 말을 아예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때 처음 듣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 황학정에는 지금도 정간이 없다. 그렇다면 정간은 활터 구성원들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사이비 예절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을 만나면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 분들의 고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간은 1970년대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전국으로 서서히 퍼져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갑자기 나타났을까? 이러한 의문에 처음 실마리를 던져준 분은 박병연(전주 천양정) 고문이다. 1960년대 중반에 집궁한 이 분에게 정간을 묻자 당연히 그때도 정간이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물은 것은 정간에 대고 절하는 것이 아니라 '正間'이라고 하는 현판의 등장이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박고문은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틀째 대화에서 세 번째 반복하여 질문한 끝에서야 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서 시원한 대답을 했다. 현판은 젊은 사원들이 하도 질문을 해서 나중에 걸었다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오래 전에 집궁한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정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나는 묻는다. 집궁무렵에 천양정에 가보셨냐고? 그러면 백이면 백 가봤다고 장담하는데 그 대답에서는 모종의 자부심까지도 느껴진다. 그러면 그때 천양정에 정간이 있었느냐고 또 묻는다. 있었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당연한 걸 귀찮게시리 뭘 재삼 묻느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다시 묻는다.
'1986년까지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게도 위풍당당하던 기억을 수습하느라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갈팡질팡 한다. 나는 이 분들이 보이는 기억의 혼돈과 자기기망을 아주 중요한 메카니즘으로 여긴다. 구사들은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정간을 내세워야 하는 어떤 절박함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그 절박함이란, 권위와 복종에 익숙하던 자신들과는 달리 신사들은 합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궁금증 많은 그들이 쉽게 복종할 수 있는 어떤 장치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의식의 해법을 정간에서 찾은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정간배례>는 퇴임 벼슬아치나 원로 구사의 영향력이 아주 강하던 전라도 지역의 고유한 풍속이었노라고 판단한다.
전라도 지역은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곡창지대다. 갑부와 농사꾼이 선명히 구별된 지역이었다. 활쏘기는 당연히 지배층인 양반의 놀이이다. 조선왕조의 후원을 받으며 때로는 국방의 무기로, 때로는 예절과 신분 구별의 방법으로, 때로는 백성을 순치하는 수단으로, 수 백년 동안 그렇게 이 지역에 정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풍토 위에서 활쏘기가 진행되었다. 활터와 활쏘기는 그곳 지배층과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바라보는 창구 노릇을 한 것이다. 활터에 드나드는 계층은 당연히 굉장한 신분이 아니고는 안 되었다. 이른바 정간에 어른들을 모시고 활을 쏘는 것과 어른들이 계신 곳에 공손하게 절하는 풍속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예절이 정간에 절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며, 전라도 지역에서 활을 배운 구사들은 신사들의 당돌한 질문에 자신의 기억을 속이면서까지 정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탓할 것은 없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의 활터에서 정간에 앉아있는 어른들에게 공손히 절을 하는 것과, 그것이 정간이라는 판자때기에 글씨로 박혀서 전국으로 퍼져가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전자가 자발성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강제성을 띤다. 활터 건물의 한 복판에 아무도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저 소일거리로 활을 쏘거나 아니면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에서 활을 쏘던 사람들에게 판자때기에 대고 절을 하라면 그들이 그걸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려면 그들이 아무런 반항 없이 받이들일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구성원들이 모두 합의할 때까지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정간에 대한 해석은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우선 기원부터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그에 대한 해석조차도 중구난방이다.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의 억지 해석만이 난무한다. 국궁계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에는 정간은 너무 부실하다. 부실하다 못해 한심하다. 그런 어설픈 논리와 설명에 고개 숙일 지성인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 절로 난다. 이미 지나간 세월의 그림자 끝자락을 붙잡고 한물 간 철학으로 고리타분한 세계관을 설명해보는 식이다. 이런 식의 설명과 개똥철학은 국궁이 세계로 뻗어갈 경우 독약이 될 뿐이다. 양약을 처방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굳이 독약을 뿌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종교인들의 믿음과 일정 부분 상충되기까지 한다. 무엇 때문에, 왜 정간을 모셔야 한단 말인가?
한 마디로, 정간은 구사들이 신사들 군기를 잡으려고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부적절한 권위와 강압 가지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설령 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잠시 뿐이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이 문제에 대해서 '디지털 국궁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 100명을 넘긴 현재(2002년 12월) 정간이 꼭 있어야 한다는 답은 26.1%로, 전체 응답자의 3할이 채 되지 않는다. 1980년대 들어 전국으로 퍼져간 정간이라는 망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활터 구성원들의 의지와 얼마나 무관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선명한 증거이다. 정간배례는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일 뿐이다. '그들의 정간'일 뿐인 것이다.
정간이 '그들의 것'이라면 전국의 활터에 두루 통하는 '우리의 것'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등정례(登亭禮)이다. 등정례는 "조선의 궁술" 에 자세히 나오고, 현재도 전국의 활터에서 두루 지켜지고 있다. 먼저 와있는 사람들에게 '왔습니다'고 하면, 먼저 와있던 사람들은 '오시오'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간단하면서도 얼마나 정겨운 인사인가! 활터에서 이 이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2.이론과 실천의 가려운 관계
정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나자 답은 간단해졌다. 정간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정간에 대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글로 정리해서 "국궁논문집"에 발표했다. 그리고 정간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도 하고픈 말도 없었다 그저 사실만 확인하면 된 것이었다. 궁금했던 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논문집을 읽은 어느 정의 사두 한 분이 전화를 걸어서 내 글에 많이 공감한다고 하면서 국궁계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우암정에는 정간이 있습니까?'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대로 있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간은 나 혼자만의 궁금증이었고, 그 궁금증을 혼자서 푼 것이었으며, 그 과정을 글로 정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질문으로 궁금증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으로 비화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 아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몸담은 활터에 내 생각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불성실한 회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결정이 어떻게 되든 일단 건의는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에 따른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라 활터의 주체인 우암정 사원들 전체의 몫임이 분명해졌다.
2002년 9월 월례회 때(2002. 9.28.) 정간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정간의 발생과정을 설명하고, 폐지하는 것이 국궁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한 정간무관심론자가 정간폐지론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제안에 대한 우암정의 선택은 역사의 몫일 것이었다. 그러자 우암정 사원들의 의견은 뜻밖이었다. 나는 그렇게 제안하는 순간 거절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다만, 정간에 대한 회원들의 인식이 정확하지 못하니, 정간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정간의 모든 것을 글로 정리하여 다음 달에 다시 논의하자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10월 월례회 때(2002.10.19.) 다시 유인물을 만들어서 사원들에게 돌리고 자세하게 설명했다.(그때의 유인물 보기) 그리고 이 논의는 충분히 검토하고 논의하여 석달 뒤 정기총회에서 매듭을 짓기로 하였다. 총회 때까지 사원 중에서 내가 밝힌 정간에 대해서 토를 다는 사람도 없었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2003년 1월 11일 우암정 정기총회가 열렸다. 이런저런 문제를 상의하고 맨 끝으로 정간 문제를 상정했다. 그런데 9월 10월에 정간에 대해 설명할 당시에 월례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총회 날 대거 참석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정간에 대해서는 이미 두 차례나 설명을 했기 때문에 굳이 다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러자 9월 10월 월례회에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이 그때까지 해온 관행을 문제삼아 그대로 두자는 쪽으로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뜻밖의 상황으로 급전하는 순간이었다. 손들기로 표결에 부치자 찬성과 반대, 그리고 기권으로 비슷하게 나뉘었다. 이 황금분할을 보면서 나는 아득했다. 이미 암암리에 합의해 놓은 일이 이렇게 엉뚱하게 빗나갈 수도 있으며 한 번 잘못 들인 관습을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결국은 떼자 두자, 어느쪽으로도 결말을 보지 못하고 총회를 마감했다.
이틀 뒤에 임원 편성을 위한 임시 이사회가 열렸다. 정간 얘기가 다시 나왔다. 총회가 끝난 다음날 활터에서 벌어진 상황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간 존폐를 놓고 회원들은 이틀째 온종일 격론을 벌였고, 이것을 이대로 놔두다가는 정에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주요 논제로 떠올랐다. 결국은 정간 문제를 어정쩡하게 이대로 덮어둘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간 껀은 의사 결정 정족수인 참석인원 과반수를 넘긴 쪽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논의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고, 오래 끌수록 정의 분위기만 험악해질 것이며, 결론이 떼는 쪽으로 나든 붙이는 쪽으로 나든 무언가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에도 활터에서는 정간을 두고 일대 격론이 벌어졌다. 자칫하면 정에 내분이 일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매일같이 그런 격론은 활터에서 반복되었다. 상황은 9월과 10월 이후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을 끌수록 정 분위기에 깊은 주름이 생겨날 뿐이다. 이런 상황의 위험성을 재빨리 간파한 신임사두 장영학은 임원편성 승인 건 때문에 열리는 18일 임시총회에 정간문제를 함께 올리기로 하고 총회 소집 공고를 냈다. 불필요한 갈등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18일 토요일. 월례대회가 끝나고 어둑해질 무렵 임시총회가 열렸다. 임원편성에 대한 승인이 끝나고 정간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다. 먼저 정간을 떼자고 건의한 내가 정간이 왜 문제인가를 긴 시간 동안 설명을 했다. 정간이 발생한 기원부터 정간이 전국으로 퍼져간 시기, 그리고 그 의미와 작용까지 설명했다. 설명의 방법은 10월 월례회 때 나누어준 그 유인물을 토대로 그 동안 더 밝혀진 정간에 대한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정간은 1970년대 말에 전남 남원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발생하여 전북을 거쳐서 서서히 전국으로 퍼져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임종남이 정리한 "한국의 궁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문과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의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을 한 뒤 표결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는 떼자였다. 국궁계에 새로운 역사의 지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3.정간을 떼다
2003년 1월 22일 오후 여섯 시. 우암정의 정간이 벽에서 떨어졌다. 장영학 사두와 박종만 부사두가 의자를 딛고 올라가서 무겁게 매달려있던 정간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태극기를 걸었다. 밖에는 흰 눈이 온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조용히 조용히......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일을 만든 사람이 푼다는 뜻이다. 우암정의 정간은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건이다. 우암정은 1950년대 초창기부터 눈비만 피할 수 있는 가건물로 있다가 1990년도에 전국체육대회를 주최하게 되면서 정부의 지원으로 활터 건물을 짓고 정식으로 입주했다. 정간은 1980년대 중반 임시 건물 때 사대 가림막에 걸렸던 것을 새로 입주하면서 옮긴 것이다. 당시에 한상수(사두), 신재우(부사두), 김연문(부사두) 같은 분들이 그 일을 주관했다. 이 분들은 모두 30년 넘게 또는 가까이 활을 쏜 구사(舊射)들로 충북 국궁계의 산 증인들이다.
그런데 정간을 떼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그 주장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 분들이 바로 이분들이었고, 총회에 참석해서 투표를 했으며, 결과는 위와 같이 되었다. 정간을 걸었던 그분들의 합의와 지지로 정간이 다시 내려진 것이다. 이 결자해지야말로 우암정의 자랑이며 역사의 진보와 승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맺음말
모든 풍속이나 문화가 오랜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뀐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사회 구성원들 누구나 합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일반 상식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특수한 구조나 특별한 권위에 의존하는 풍속은 그 특수함과 특별함이 사라지면 함께 사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 활쏘기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활쏘기는 스포츠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반 토대 위에 서 있지만, 활터의 문화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럴 경우 활터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불합리한 것들을 정리하기 위한 논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합리한 모순은 구성원들의 갈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국궁계 전체를 도탄에 빠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정간은 국궁의 미래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활터에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는 관습이 뿌리깊게 남아있다. 이것은 미풍양속을 보존하는 좋은 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발전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활터의 현재 모습이 완벽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대도시에서는 옛날 시골의 인간미 넘치는 풍속을 찾아볼 수 없지만, 대도시의 활터에서는 아직도 옛날의 시골 사랑방 같은 아늑한 분위기가 남아있어서 옛날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나 낙원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낙원이나 천국이 활을 스포츠로 접근하려는 젊은 세대와 여타 사회에 대해 배타성을 드러내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그러한 배타성 때문에 활터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물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다 결국 활터를 떠나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그같은 활터 풍경은 거기에 몸담은 사람에게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국궁의 발전과 세계화를 저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현재의 모습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국궁의 발전에 장애로 작용한다면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 다정다감한 옛날 사랑방 분위기에 안주하는 것이 많은 활터의 분위기이다. 이것이 국궁계의 한 자화상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거기에다 국궁의 장래를 내맡길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는 현재이고 미래는 미래이다. 미래는 현재와는 또 다른 논리과 세계관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미 지나간 세월에 기대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저버릴 수는 없다. 따라서 활터 풍속에 대한 가치판단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기준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를 기준으로 볼 때 현재의 활터 풍속은 많은 부분 재고되어야 하며 정간은 그러한 것들 중 한 가지이다.
정간은 국궁계에서 논의를 거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활쏘는 사람들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정간에 대해 절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정간 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다. 모든 예절은 구성원들의 합의에서 나와야 하며, 최소한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정간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공개된 장소에서 논의된 적이 없으며, 그에 대한 어떤 합의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정간은 구성원들의 합의 사항일 뿐 강요사항이 아니다.
그런데도 활터 중앙에 현판으로 나붙은 두 글자는 활량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호령하는 것이다. 합의를 해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아주 몹쓸 인간으로 취급하거나 마치 패륜아라도 되는 듯이 나무란다. 그리고 그런 불필요한 권위의 희생양은 대부분 신사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사들이 마음으로 승복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왜 정간에 절대의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구사들은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래가지고는 활량들 간의 불신과 갈등만 조장할 뿐이다. 정간이라는 현판은 그러한 갈등의 근원이다.
청주 우암정은 신중한 논의를 거쳐서 국궁의 장래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정간을 떼어 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사건에 불과한 것 같지만, 불합리한 권위로 세계화에 장애가 될 가능성이 많은 조건 하나를 국궁계에서 제거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논의와 결정은 활쏘기가 세계 모든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국궁인들 모두가 노력해야 할 몫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지금도 바람직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으며, 청주 우암정은 그러한 노력에 동참한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심정은 처음부터 정간을 걸지 않았다.
현재 청주지역의 활터에서는 정간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정간의 불합리성을 인식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른 결과로 앞으로 국궁계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과 실천은 청주 지역의 활터에 새로운 풍속으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도 활터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인식에 공감하고 스스로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사례이다.
그리고 국궁의 장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이러한 노력들이 활터 구성원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만 다가올 미래사회에 바람직한 풍속으로 정착하여, 그를 바탕으로 국궁의 세계화라는 커다란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청주 지역의 활터는 정간을 과감하게 없앰으로써 그러한 가능성을 한 발 더 앞당겼다는 점에서 적극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5-1. 뒷이야기 하나 : 정간의 종말 - 도끼에 찍히다!
2003년 9월 21일, 청주 우암정에 잠시 내걸렸던 정간이 도끼에 찍혀 박살난 채 떨어져 나갔다. 정진명 접장이 대회 도중에 도끼로 정간을 찍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각 정 사두들의 지휘 아래 철수해버렸고, 대회는 그대로 중단되었다.
청주 우암정에서 실시된 이 대회는 정확히 '제2회 청주 시장기 차지 도내 궁도대회'였다. 작년에 한 차례 열렸는데, 그것은 우암정이 충북의 수사정이면서도 도내 대회를 유치하지 않는다면 체면이 안 선다면서 농담 비슷하게 다른 정의 사두들이 몇 년째 계속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런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전임 한상수 사두 때부터 시청의 협조를 얻어서 개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에는 청주시장과 시의원, 도의원을 비롯하여 외부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다. 이 행사는 올해 취임한 장영학 사두한테도 똑같은 행사가 주어졌고, 예정대로 열린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대회 며칠 전부터 장사두에게 이상한 협박성 전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간을 달지 않으면 대회를 보이코트 하겠다느니, 정간을 왜 떼었냐느니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항의가 들어온 것이다. 우암정에서는 그런 간섭을 당연히 일소에 부쳤다. 정간은 우암정 내부의 문제로, 제3자가 나서서 어쩌구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암정 회원들이 결정하여 떼면 떼는 것이지,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당연한 이 상식을 무시하고 남의 집 잔치에 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초대받은 사람들이야 오기 싫으면 관둘 일이지, 잔치상에 뭘 차려달라느니 어떻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 간다느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잔치상에 뭘 차려주지 않으면 안 간다는 억지는 코흘리개 개구장이들도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 짓이다. 비유하자면 손님인 우리가 모두 애꾸눈이니 주최측인 당신들의 눈 한쪽을 뽑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겠다는 식의 발상과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이상스런 요청이 두어 정의 임원들한테서 나온 것이다.
처음엔 일소에 부치던 장사두도 충북궁도협회의 핵심 임원까지 나서서 그런 의사를 부추기자 긴급 임원회를 소집했고, 그것을 일단 논의에 부쳤다. 한 시간이 넘는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정간은 달지 않는다는,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었다. 애꾸눈들이 멀쩡한 우리에게 눈 한 짝을 빼라고 요구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대회를 치러야 한다면, 예절상 까짓 눈알 한 짝을 못 뽑을 것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내 눈알 한짝을 뽑는 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눈알을 뽑고서 그들과 같은 애꾸가 된다고 해도, 내 자식들은 멀쩡한 두 눈으로 태어날 테니까. 내 자식에게 활을 가르치려면 자식의 눈알 한 짝을 뽑아야 할 테니까... 정간은 그런 것이다. 흥정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간을 달 수 없다고 통보했다.
그리고는 대회 참석 인원을 확인하기 위하여 각 정의 사두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회 사흘 전의 일이다. 그러자 사호정과 탄금정은 정간을 달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했고, 의림정은 전화할 당시 사두가 자리에 없어서 신재유 접장이 대신 받았는데, 당일날 참석은 하겠지만 대회에 참가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는 답을 했다. 이날 확인한 바에 의하면 괴산 사호정과 충주 탄금정만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했고, 나머지는 모두 몇 명씩 참석하겠다고 인원수까지 분명히 밝혀왔다. 따라서 참가하지 않겠다는 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구차한 소리를 하지 않고, 참가하는 정만으로 대회를 진행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1개 정이 오든 2개 정이 오든 우리 방식대로 진행한는다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대회를 몇 시간 앞둔 바로 전날 밤, 예의 그 자들이 장사두에게 전화로 다시 협박을 했다. 정간을 달지 않으면 개회식 직전에 모두 철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회 전날 늦은 밤에 다시 이사회를 소집했고, 정간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그날 대회에는 청주시장을 비롯하여 많은 지방자치단체장과 시도 의원이 참가하고, 특히 학생들에게 국궁을 보급하는 데 적극 협조한다는 뜻을 전하러 충북교육감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다른 정 사원들이 철수해버리고 개회식이 틀려지면 충북국궁의 앞날까지도 엉망이 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충북 국궁의 앞날을 뒤바꿀 수도 있는 이 중요한 순간을 볼모로 삼고서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기겠다는 야비하기 짝이 없는 요구 앞에 우암정 이사들은 치를 떨었다. 대회에 참석하겠다고 전전날 뜻을 밝힌 대부분의 사두들이 갑자기 의사를 바꾼 것이다.
그래서 세 시간 가까이 끌어간 회의 결과, 모든 문제를 장사두에게 일임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즉, 내일 아침에 사두들이 몰려와서 협박을 하면, 정간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것과, 그런 억지 주장으로 인하여 앞으로 초래되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한 각정의 사두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설명해주고, 그래도 달아달라고 한다면 달아준다는 것이었다.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깨우쳐주는데도 남의 집 제사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 결정을 내릴 때의 이사들 심정이고 믿음이었다. 그리고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정도의 판단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한테나 있는 그 '상식'의 힘을 믿으며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다음날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침에 우루루 몰려온 각 정 대표들이 회의를 마치고 통보해온 결과는, 어이없게도 '정간을 달아달라!'는 것이었다. 국궁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우암정의 한쪽 눈깔이 뽑혀나갔다.
오전 10시. 정간이 내걸리고 개회식이 치러졌다. 초대된 손님들이 식을 무사히 치르고 간단한 회식까지 마치고 돌아갔다. 12시 40분 경. 점심 끼니 때문에 심판 교대를 한 정진명 접장은 도끼를 들고와서 우암정 외벽에 삐딱하게 붙어있던 정간을 도끼로 찍었다. 마침 정 건물 안에서 그것을 본 장사두가 뛰쳐나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져 물었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장사두가 동요하지 말라고 애타게 만류했지만, 대회는 그대로 중단되었다. 흥분한 각정 사두들의 지휘를 따라서 사람들이 철수했다.
그날 오후 5시경, 청주시궁도협회 이사회 겸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정접장에 대한 징계가 결정됐다. 제명이었다.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정에서 주최한 대회를 무산시켜서 정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 징계사유였다. 정접장은 이 결정에 대해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제명' 결정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번 사건을 면밀히 살펴보면 아주 중대한 사실이 발견된다. 우암정의 정간을 뗄 때부터 정간이 도끼에 찍혀나간 뒤까지 일련의 움직임과 논쟁이 인터넷 상에서 뜨겁게 달아올랐고, 나아가 이와 관련하여 앞의 설명에서 보듯이 대회에 참가하려던 사두들을 충동질하여 우암정에 협박을 가한 어떤 세력이 이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쟁은 주로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와 디지털 국궁신문의 게시판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은 숫자 같지만, 실은 극소수가 이름을 바꿔가면서 수작을 부렸고 지금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사실은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의 맞춤법과 구조, 그리고 내용의 전후 문맥에서 드러난다. 맞춤법과 문장의 구조는 그 사람만의 표정이 있다. 틀린 곳을 계속해서 같이 틀리고 같은 문장구조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 버릇은 지문과도 같아서 이름을 바꾸어도 자신의 고유한 문장 특성은 알게 모르게 드러난다. 범인이 지문을 놓치고 가듯이 이 버릇은 글을 쓰는 한 속일래야 속일 수 없다. 글쓰기를 전공한 사람이면 어렵지 않게 밝혀낼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써댄 글만 가지고도 이것은 똑부러지게 밝힐 수 있다.
사실 우암정의 정간이 떨어져나가든 말든 그건 남의 일이기 때문에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타정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려고 하지도 않을 일이다. 정간을 구워먹든 삶아먹든 그게 아무리 못 마땅해도 남의 정 일인 이상 기껏해야 그저 정간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올리는 정도가 남의 집 잔치를 구경하는 안타까운 충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견 피력에 그치지 않고 우암정을 싸잡아 욕하면서 상식 이하의 헐뜯기 발언을 서슴치 않는 경우가 인터넷 글에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글들 중에는 우암정의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사실의 일부만을 확대해서 인용하는 아주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논쟁에 참여한 자들의 정신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저질 글들은 국궁계 전체의 수준을 몇 단계 떨어뜨리는 자살골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 실로 낯뜨거운 일이었다. 그런 글들의 특징을 잘 살펴보면 두 사람 정도의 글로 압축된다. 그들이 쓴 글의 내용을 종합하여 추적하면 이런 자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현재 우암정 사원이거나, 한때 우암정 사원이었다.
2)한 사람은 2002년도 정기총회에는 참석했지만, 정간을 떼기로 결정한 2003년도 임시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두 번 다 참석하지 않았다.
3)온깍지궁사회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거나 서운한 감정이 있다. 그러나 온깍지궁사회에 대해서는 내부 사정까지도 아주 잘 안다.
4)문장의 특성으로 보아 온깍지궁사회에서 내는 국궁논문집에 글을 실은 적이 있다.
5)실명을 밝힐 경우 국궁계의 활동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적 문제라든가 하는 민감한 문제가 걸려있는 경우이다. 그래서 계속 이름을 바꿔가면서 글을 올린다.
6)우암정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다. 그것도 극히 최근의 일로.
7)자신들의 말발이 국궁계에 먹혀들지 않자 초조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름을 바꿔가면서 글을 올려 여러 사람이 반대한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8)우암정에서 당당하게 발언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신사이거나 현재 우암정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내놓고 떠들 수 없는 것이다.
9)궁도가 일본말이라고 밝힌 사람들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러 궁도인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10)1년된 전통도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가 정간을 옹호하는 근거가 된다.
11)정간에 대한 자신의 논리가 워낙 빈약해서 정간을 문제삼지 못하고 괜시리 정간을 뗀 과정을 물고 늘어진다.
5-2.뒷이야기 둘 : 청주로 모인 사연
국궁계의 이야기가 일간지에 오르는 일은 별로 없다. 국궁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노인네들이나 하는 한물간 오락 정도에 머물러 있는 데다가, 스포츠계의 관심이 국제경기가 있는, 그래서 국위선양을 하여 그 공로로 연금을 탈 수 있는 일반 스포츠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론에서 이런 무관심한 분야에 지면을 할애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번 정간 사건은 일간지에 2단기사로 보도되었다. 제목은 <"정간이 뭐길래" 궁도협회 내분>이었다.(한겨레 2003년 9월 19일 금요일)
"정간이 뭐길래" 궁도협회 내분
충북 청주시궁도협회가 대회 기간 중 정간(正間: 활쏘기 전 목례를 하며 예를 갖추는 현판) 훼손 사건을 놓고 심한 갈등을 빚고 있다.
청주시궁도협회는 지난 14일 청주 우암정에서 제2회 청주시장기 차지 충북 지역 궁도대회를 열었으나 행사 도중 한 간부가 궁도장에 설치된 정간을 도끼로 부수자 대회가 중단됐다.
청주, 괴산 등 충북지역 곳곳에서 모인 130여명의 궁사와 관람객 등은 협회 등 대회 주최측에 항의하다 자진 철수해 대회는 자연 무산됐다. 청주 우암정 소속의 해당 간부는 우암정 회의를 통해 제명됐지만 대회에 참석했던 다른 궁사 회원 등은 대한궁도협회 홈페이지 등에서 사이버 시위를 하는 등 협회 차원의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장영학 회장은 18일
"평소 활터에 정간을 다는 것을 반대해온 한 간부의 우발적 행동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파장을 우려해 곧 상벌위원회를 열어 처벌 수위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청주/오윤주 기자
10월 4일은 토요일이다. 3일이 개천절이고 5일이 일요일이니, 주5일 근무제가 확산 중인 요즘 모처럼 맞이하는 연휴인 것이다. 그런데 그 황금 같은 연휴에 온깍지궁사회 회원들이 청주 나들이를 나섰다. 부산에서 이석희 행수 부부가 이자윤 명무와 함께 대구로 가서 주말부부인 신해준 명궁의 차를 타고 왔고, 서울에서는 이경희 여사를 영부인한 남상인 명무가 성순경 명무와 함께 아침 일찍 청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강경의 한영국, 유근상 두 접장이 왔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그 전전주에 육사대회에 참가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우총무가 우암정에서 제명되었다는 소식이 전국의 회원들에게 퍼지자 어리둥절한 회원들이 육사대회 때 만나서 자세히 알아보자는 얘기를 했고, 그 때문에 이석희 행수가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렸던 것. 황학정의 온깍지 회원들을 만나서 활을 쏘고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우총무가 도끼로 정간을 찍게 된 사연을 세세히 전한 것이다. 그러자 한 회원들이 우암정을 방문해서 상심해있을 우총무를 위로하자는 얘기를 했고, 이런 분위기가 순식간에 번져 너도나도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청주행은 그렇게 결정된 것이었다.
우총무는 벌써 3주째 두문불출이었다. 그러다가 토요일 오전에 전화를 받고 오랜만에 활터를 나갔다. 그랬더니 마침 신사인 이세희 접장의 오중례를 하는 중이었다. 우암정에는 최근 들어 입사한 신사 중에 이세희(李世熙)라는 사람이 둘이다. 한자까지 똑같다. 그래서 나이많은 사람을 큰세희, 적은 사람을 작은세희라고 부르며 웃고는 했다. 그 중에 작은 세희가 첫몰기를 한 것이다. 그래서 잔치 분위기였다. 가족까지 동원하여 불고기와 찌개를 차려놓고 막걸리와 소주를 돌리며 한층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러는 중에 성순경 남상인 두 명무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갑게 맞으며 악수했다. 그리고는 활을 얹어서 우암정 사원들과 함께 활을 냈다. 그런데 대구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충북의 매포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다시 충주의 호반도로를 타고서 오는 중이라서 돌아도 한참을 에돌았으니, 저녁 6시경에 겨우 도착했다.
어둑해질 무렵에 용암동의 정할매집으로 옮겨서 황태 구이 정식을 먹었는데, 도중에 행수가 짱뚱이 요리를 잘 하는 곳이 진해에 있다는 얘기를 꺼내더니 밤 10시가 다 된 시각에 그리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 얼굴을 마주보던 회원 중에는 여기에 동조하는 분위기까지 갔는데, 그 분위기가 가게 밖을 나서자 노래방으로 흘렀다. 그래서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열창을 했다. 자꾸 시간을 연기하는 바람에 자정이 넘어서야 나왔다. 그 안에서 벌어진 광란의 춤과 노래는 더 이상 묘사하지 않겠다. 청주 해장국 집으로 가서 늦은 밤참을 먹고 용암 백두산 사우나로 향했다. 거기서 목욕을 하고 찜질방으로 가서 몸을 뉘었다.
다음날 아침은 우총무의 집에서 먹었다. 우총무 때문에 온 분들인데, 그냥 보내서는 안 된다며 우총무의 어머니가 초청을 한 것이다. 아침을 먹고 성명무는 성당으로 가고 나머지는 강경에서 오실 분들을 맞으러 우암정으로 올라갔다. 집에 남은 이행수 부부와 이경희 여사는 오전 내내 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오후 1시. 활터로 올라가니 덕유정의 두 접장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활을 내고 있다. 그래서 배고프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한영국 접장의 제안으로 두부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며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하하 깔깔 온 방안이 들썩들썩 했다. 활쏘는 일이 이렇게 좋으면 좋으련만, 어딜 가나 시끌시끌하니......
아쉬운 작별. 다들 떠나고 부산으로 갈 분들만 모시고서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표를 끊고 보니 1시간 가량 여유가 있어 근처 빵집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켜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행수와 이명무는 이렇게저렇게 말을 돌려가며 우총무를 어떻게든 잡아두려고 하는데, 이미 식을대로 식은 마음에 다시 군불이 들어올지 어떨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이미 떠나버린 마음에 온기가 돌려면 어차피 세월이 필요한 일이었다. 누구도 이렇다고 말할 수 없는 답답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망상으로 헤매는 우총무의 커피잔도 차츰 식어갔다.
5-3. 뒷이야기 셋: 천양정 이야기
전주 천양정은 정간을 전국으로 퍼뜨리는 데 크게 기여한 정이다. 1970년대부터 전국대회를 열었고, 1980년대 이후 정간이 걸린 것을 보고 전국의 활터에서 뒤따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양정은 10년 넘게 붙어있던 이 정간 현판을 2001년에 뗐다. 그 자세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내걸렸던 현판이 떨어진 것이다. 이제 재미있는 일이 충북에서 일어날 것이다.
우암정에 정간을 내렸다고 공갈 협박을 하던 사람들이 전주 천양정의 전국대회에 참가를 한 것이다. 작년에도 했고, 우암정 정간 사건이 일어난 며칠 후에도 전주 천양정 대회가 열려서 거기에 충북의 많은 한량들이 참여하고 왔다. 그런데 이 지독한 자기 모순에 대해 반성은커녕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우암정에 대해서는 거품을 물고 협박을 하던 사람들이 천양정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슬그머니 가서 활을 쏘고 온 것이다. 정간이 없는 곳에 가서 말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천양정에 대해서도 대회 참가 전에 정간을 걸어달라고 요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우암정 대회 도중에 정간이 없다고 짐 싸들고 돌아간 사람들은 천양정 대회에 참가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입을 열어야 한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의 자질 문제이다. 충북 국궁계는 그 자질을 검증받을 상황에 스스로를 올려놓았다. 그 답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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