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복음화율은 전적으로 문 전도사의 ‘영적 유산’이라는 것이 지역 교회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순교자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를 통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 말씀이 지금 증도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나눔의 교제를 들 수 있다. 이들 교회는 하나 같이 예배를 마친 후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누구는 쌀을,누구는 마늘을,또 다른 이는 고추장 된장 간장을,그리고 심지어 참깨까지 자신들이 때를 따라 수확한 농산물과 어패류를 예배 하루 전쯤 교회로 가져온다. 초대교회 당시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갖가지 정보를 교류한다. 교회 소식뿐만 아니다. 농사 짓고 고기 잡는 일에서부터 자녀들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털어놓으면서 식탁을 함께 한다.
가감 없이 털어놓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청취한 목회자는 성도 가정에 대해 기도 제목을 정하고 새벽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는다.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교육부. 역사편찬 위원회주최,
예수아카데미.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사업회 주관,
그리고 성결교회역사연구소, 크리스챤치유상담연구원,
CCC, 기성총회본부 , 기성성청연합회, 서울신대, 성결대의 협력과,
김해제일교회, 수유리교회, 성락성결교회, 당진동일교회,
연동중앙교회, 예수비전교회등의 후원으로
8월14일(월) -17일(목) 3박4일의 일정으로
임자에서 14-16일까지 증도에서 16-17일까지
계속되어질 영성캠프는 멀리 파주에서 부터 전국 각처에서
모여든 청소년들의 심령이 첫날 첫시간부터
강명숙 전도사의 찬양 인도로 뜨겁게 달아오름을 볼수 있었습니다
교단과 순교기념사업위원회는 이곳을 작은 순교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아직은 순교공원이라고 말하기에는 순교비가 전부지만 탁 트인 서해바다의 풍경과 시원한 바람은 순교공원으로 안성맞춤이다.
사실 문전도사는 명성에 비해 그를 기릴 수 있는 기념물은 별로 없다. 남겨진 유족도 아무도 없다. 시신도 소천한지 1년이 지나서야 수습할 수 있었고 이듬해 2월2일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됐다.
하지만 문전도사의 신앙과 열정이 넘치는 이곳 증동리는 섬 전체가 성지나 다름없다. 조그만 섬에 성결교회가 7개가 자리 잡고 있는데, 거의 문전도사가 개척했거나 순교 후 문전도사의 순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워졌다.
문전도사의 묘는 연초록 실록이 싱그러운 빛을 발하고 있는 마을 뒷산에 있다. 그 아래에는 문전도사순교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교파를 초월해 문전도사의 신앙과 삶을 추앙하는 많은 기독인의 모금으로 세워졌으며, 매년 3월15일 이곳에서 순모예배가 열린다.
이곳 증도에 있는 6개 교회는 경상비 0.5% 등으로 선교, 장학, 구제사업 등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문전도사의 고귀한 뜻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섬 교회의 힘만으로는 순교비를 복원하고 보존하는데는 역부족이다. 특히 순교기념관을 순교정신을 잇는 수련장으로 개발하는 숙원을 가지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시들지 않은 순교의 꽃으로 우리 곁에 있는 문전도사의 고귀한 순교정신은 성결교회와 성결가족들에 의해 영원히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김두학장로(신광교회·79세)는 문준경전도사의 순교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자이다.
1950년 김장로는 증동리교회 집사이자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한국전쟁이 터지자 증동리에도 공산세력이 들어와 문전도사를 비롯한 성도들을 반동으로 내몰아 무수히 괴롭혔다고 한다.
“문전도사님은 목포로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는데, 연합군이 상륙해 풀려났으나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증동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10월4일 저녁에 공산당원들이 다시 지도 본도로 압송한다고 마을 앞 모래사장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사형장이나 다름없던 모래사장에서 문전도사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면서 공산군에게 당당히 맞섰다고 김장로는 증언했다.
“새벽 3시에 새끼줄에 묶인 채 모래사장에 끌려갔는데 그 때 공산군은 문전도사님을 죽창으로 찌르고 발길로 차고, 총대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전도사님은 ‘나는 죽이더라고 성도들은 죽이지마라’고 간청했습니다.”
어느새 김장로의 두 눈물에는 눈물이 맺혔다.
“모래사장에 끌려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군은 ‘반동의 씨암탉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처형한다’며 문전도사님을 총살했습니다. 나머지 주민들도 몽둥이로 맞아 죽었고요.”
그때 순교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김장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사형장을 도망쳐 마을 깊숙한 곳에 피신했다”고 한다. 그 경험때문에 김장로는 “문전도사님은 선한 싸움 싸우고 믿음을 지키셨으므로 순교하셨지만, 나는 미숙한 사람되어서 순교 반열에서 제외된 줄 알고 문전도사님의 순교정신을 따라 가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이후 김장로는 “덤으로 얻은 생명을 죽도록 충성하다가 주 앞으로 가겠다는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회고했다
2007년 성결교회 선교 100주년을 앞두고 성결대 신학전문대학원생,이 대학 연구기관인 ‘성결교회와 역사연구소’(소장 정상운) 연구원들과 함께 최근 국내 성결교 순교현장을 답사한 정상운 소장은 17일 역사기행 소감을 이렇게 털어놨다.
문 전도사는 신유 은사로 정신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쳐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문 전도사는 1943년 12월 일제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됐을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를 외치며 일제의 고문을 견뎌냈다.
그후 문 전도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5일 증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공산당원들에게 뭇매를 맞은 뒤 총에 맞아 순교했다. 당시 공산당원들이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먼(전도활동을 열심히 했다는 뜻)”이라며 몽둥이찜질을 가하자 문 전도사는 “아버지여,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총에 맞아 숨졌다는 것.
정 소장은 돌아본 순교유적지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문 전도사가 헌신한 증도라고 단언한다. 정 소장은 “문 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30배,60배,100배의 열매를 거뒀다”며 “현재 11곳의 교회가 있는 증도는 장로교회 한 곳을 제외한 교회 10곳이 모두 성결교회이고 섬 전체 인구의 90%가 예수를 믿는 신앙촌이 됐다”고 평가했다. 또 “문 전도사는 잠시 몸을 피해 죽음을 모면할 수도 있었지만 양떼들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면서 “문 전도사의 영향으로 김준곤(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이만신 목사 등 교계의 지도자가 나왔다”고 말했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다.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을 치료해 주고 사랑이 가득 담긴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일제시대에 장티푸스가 나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가족도 환자곁에 가지 않는 가운데 “나는 죽어도 홀몸이니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본 이야기는 유명하다.澎?1주년이 된 전도사님의 환갑날,장례추모식장에는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김구선생 장례식 보다 추모인파가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추모와 사랑과 존경을 전도사님의 영전에 드린다.(김준곤목사)
이판일 장로는 1898년 이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는 13살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하여 자녀도 낳고 살았지만 술 버릇 때문에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은 이미 진실교회에 출석하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어린 것들 보기에도 딱했던지 어느 날 "아버지, 함께 교회에 가셔요. 교회에 가면 술, 담배가 딱 끊어진대요"
"정말, 그래?" 하고 반문하자 옆에 있던 부인도 강권했으나 "이 나이에 무슨 교회요, 교회는? 술, 담배는 둘도 없는 내 벗인데..." 하고 묵살하고 말았다.
문준경 전도사가 끈기와 설득으로 전도를 했다.
듣고만 있던 이판일이 벌떡 일어섰다. 다 틀렸구나! 생각하는 순간 그는 담뱃대를 우지끈 꺾어 버리고 아궁이에 집어 던진 채
"그래, 한 번 믿어보자. 전도사님, 이제 믿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는 얼마 후 동생 이판성의 집으로 달려가서 "동생! 나 예수 믿기로 했네. 교회에 가보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어.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네" 이렇게 하여 동생도 나란히 교회에 출석했고, 1934년 11월 추수 감사절에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일제의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다. 진리 마을에서 6 시간 걸려 도착한 목포 경찰서에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주님의 이름으로 욕을 당하면 더 이상 기쁨이 없다고 했으니 주님만 믿고 살렵니다."라며 그에게 고통이 가해지자 웃음으로 견디고, 오히려 서장에게 전도하자 정신 이상자 취급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진리교회는 경방단 사무실로 접수되어 예배 처소를 잃게 되자 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밤이나 ,낮이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이같이 주님 고대가를 부르다가 8. 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1946년 임자도에서 초대 장로가 되었으며, 이 섬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1950년 6. 25 전쟁이 발발하고 설마 하던 인민군이 이 곳까지 밀어 닥쳤고, 교회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빼앗겼다. 공산당은 이 장로 형제를 불러 협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두 주인을 못 섬긴다" 하고 복음을 전하자 형제를 잡아 목포 정치 보위부로 이감 시켰다.
일단 석방이 되어 목포에 있는 아들 집으로 갔다가 서울이 수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9월 29일 이 장로 형제는 서둘러 임자도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임자도에는 적기가 휘날렸고 분위기는 살벌했다.
10월 5일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그를 죽창을 든 청년들이 강제 결박하고 78세의 노모와 아들, 그리고 동생 이판성 집사도 묶어 연행했다.
10 리도 채 안되는 해변에 구덩이를 파놓고 100 명씩 생 매장 시키고 어린애들은 가마니에 돌과 함께 쳐 넣어 바다에 던졌다.
이 장로는 마지막 가는 이 길 노모를 우리 형제가 한번씩 업고 가게 해 달라 했으나 듣지 않았다. 현장에서 이 장로 식구들이 기도하자 극악 무도한 공산당들은 죽창으로 찌르기를 시작했다.
이 장로와 식구들은 "나! 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는 ..." 찬송가를 부르며 순교했다. 이들은 5살 짜리 막내 아들도 다시 찾아다가 죽였다.
100주년기념 순교지 전국 도보 순례 출정예배 문준경 전도사님 순교지 그리고 해단식 예배를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1. 감사드립니다.
계 6장 10절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말씀이 떠 오릅니다. 너무도 소중한 보배들을 오랫동안 묻어 두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참고 참으시다가 서울 북지방의 한 분의 목사님을 충동하여 결국은 전국의 목사님들의 마음을 흥분시켜 이 큰 일을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보니 서울 북지방의 한 분 목사님의 발상은 하나님의 소원의 "북" 을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천하에 울린 격이 되었으니 이일에 북채를 잡으신 목사님들 그리고 700여명의 단원들께 감사드립니다.
2. 교단의 자부심을 되찾았습니다.
존 하가이 박사는 그의 저서 세계적인 고전이 되어온「미래는 진정한 리더를 요구한다」에서 고 한경직 목사님을 지금 이 시대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옳은 말씀입니다. 1990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소감에서 "저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저는 죄인 입니다." 라고 고백하시므로 오히려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는 이 어른을 금세기의 산 순교자의 표상, 표본이라 하겠습니다.
6.25 때 공산당에 의해 문준경 여자 전도사님께서 순교하신 것에 대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음이 놀라왔고 가슴이 아픕니다. 일년에 고무신 9켤레를 신고 전라도 섬지방 여기 저기 다니시면서 전도하셔서 "알을 많이 까는 씨암탉." 이라는 죄명으로 죽창으로 찔리시고 몽둥이로 매 맞으시고 그래도 숨이 끊어 지지 않으시니 숨통에 총 뿌리를 대고 쏘아 죽임을 당하신 장하신 하나님의 종 우리 전도사님! 이 어른의 열매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가 100여개 교회요, 도서주민의 70%가 복음화가 되었으며 그 어른이 섬기시던 증도에는 우상이나 이단이 없고 증도 마을까지 성결한 분위기임을 느꼈습니다. 증도에 교회가 11개 있는데 그 중에 성결교회가 10곳이요 도서 지방에서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이 나왔다는 사실! 이만한 영향을 끼친 분이 한국교회에 몇분이나 될까요? 여자 전도사였기에 섬지방의 교회였기에 그렇게 감추어 있었나요?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3. 쉬지말고 널리 알려야 하겠습니다.
강단에 서시는 교수님들 역사를 편찬하시는 위원회 전국의 목회자님들 총회임원님들 그리고 성결가족 우리 모두는 사명감을 가지시고 역사를 바로잡아 알리셔서 100주년기념 순교지 도보 순례자들의 장정 1500km를 땀흘려 걸으신 그 노고가 밑 거름이 되어 360명의 고귀한 순교자들을 보유한 우리 교단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기틀 근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