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숨쉬는 ‘안성 5일장’
◇ 2·7일마다 열리는 안성 5일장은 전주, 대구와 더불어 3대장으로 손꼽혔다. ⓒ끼뉴스
안성 5일장에는 따끈따끈한 추억이 묻어 난다. 흥정을 하며 건네는 훈훈한 덤이며 장돌뱅이들의 거친 고함소리들이 겨울의 문턱을 더욱 훈훈하게 만든다. 2·7일마다 열리는 안성장은 조선시대부터 전주, 대구의 장과 함께 3대 장으로 손꼽혔을 만큼 규모가 컸다. 안성이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인데다 질 좋은 유기와 가죽 꽃신으로 이름난 고장이었기에 전국 각지의 장돌림이 한 번씩은 다 들렀다. ‘한양장보다 한두 가지는 더 있다’고 자랑할 만큼 물건이 많고 싸기로 유명했던 장터가 바로 안성장이었다.
뜨거운 순댓국밥 한 그릇 먹겠다는 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찾은 안성 5일장. 그때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추억 속의 장터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을 파는 가내수공업형 할머니들은 시장의 입구와 끝,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레미와 홍두깨, 촘촘히 잘 엮은 키 같은 시골 어른들이나 쓸 것 같은 생활도구를 파는 상인도 있고, 또 5,000원 하는 스판 청바지며, 요란한 무늬의 티셔츠, 삼중 보온 메리야스를 파는 곳도 있다.
팔딱팔딱 튀는 민물새우, 껍데기 깐 다슬기, 피라미 따위를 파는 어물전 상인도 보인다. 여기에 어슬렁거리며 생선 대가리 한 점 주워 먹으려는 누렁이와 엄마 손 붙잡고 장터 구경 나온 코흘리개도 장날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다.
안성시외버스터미널 뒤편에 자리한 장터는 ‘Y’자 모양으로 생겼다. 약 200m에 걸쳐 장이 들어선다. 외장꾼(외지에서 온 상인)은 장터 골목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 큰 공간이 아니기에 어물전, 채소전, 육전 등의 구분은 없다. 노란 양은냄비 파는 좌판, 그 옆에 생선 좌판, 또 그 옆에 곡물 좌판이 있는 식이다.
■ 빨간치마 엿장수 웃음바다
집에서 쑤어 온 도토리묵을 파는 아줌마는 “한 번 묵어봐” 하면서 묵 한 조각을 뚝 떼어 입에 넣어준다. 말캉말캉 부드러운 도토리묵은 씹을 새도 없이 ‘쏙’ 목으로 넘어간다. 3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안성장에 출근 도장을 찍은 이 여인은 난전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사남매를 모두 시집 장가 보냈다. 하루에 보통 얼마나 파느냐는 질문에 “2만원도 좋고, 3만원도 좋아. 많이 파는 날엔 5만원도 벌지” 하고 넉넉한 웃음을 짓는다.
장터 입구에는 어느새 ‘뽕짝’과 요란한 가위질 소리로 무장한 엿장수가 등장했다. 슬슬 몸을 풀던 엿장수가 갑자기 윗옷을 벗는다. 구경꾼들이 갑자기 “와~” 하고 웃어젖힌 건 그때였다. 잔뜩 ‘뽕’을 넣어 부풀린 브래지어에 쫄쫄이 티셔츠 그리고 빨간 치마 차림이다. 비록 겨드랑이의 수북한 털은 감추지 못했지만, 완벽하게 여장을 한 엿장수는 빨간 입술에 뺨까지 붉게 칠한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바탕 엿 가위질이 장터 사람의 혼을 쏙 빼놓더니 이번엔 ‘가수’가 등장한다. 어깨에는 신곡 제목을 써넣은 띠를 둘렀다. 빨간 양복을 입은 가수는 마이크를 잡고 새로 나온 자신의 곡이라며 간들간들한 목소리로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는 2집까지 발표한 어엿한 중견 가수다. 시장에서 노래한 지는 3년째. 왜 하필 장터냐는 질문에 그는 “서민과 함께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노래를 부르는 그의 곁에는 열심히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신씨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파는 ‘매니저’가 동행한다.
■ 대형마트에 치여 장사 뚝
난전에서 민물고기를 파는 할머니는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며 푸념이다. 그녀는 장터 한가운데 들어선 대형 마트를 가리키며 “저런 것들 때문에 우리 같은 장사치가 다 죽는다”고 원망했다. 할인점에서 원체 싸게 물건을 팔다 보니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는데다 요즘 젊은 사람은 말끔히 손질된 것만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장터 물건은 쳐다보지도 않는단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따뜻해서 장을 보러 나온 사람이 많은 편이란다.
울상 짓는 상인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벌써 겨울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떨이요, 떨이”를 외치는 상인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채 팔지 못한 물건들을 보따리에 챙기는 사람들과, 군불에 손을 녹이며 마지막 흥정을 하는 사람들이 뒤엉키며 5일장의 하루해는 아쉽게 저물어간다.
여행 팁
◆가는길=경부고속도로 안성IC에서 빠져나와 우회전. 38번 국도를 따라 시내로 진입한 후 시외버스터미널을 찾아간다. 터미널 건너편에 저렴한 가격의 공용주차장이 있다. 3시간에 5,000원 정도. 안성시 관광정보센터(673-0824)
◆먹을거리=시청에서 추천하는 4군데의 안성쌀밥집에서 제대로 된 쌀밥정식을 맛볼 수 있는데 죽산면 당부리의 걸미골(674-1843)의 쌀밥정식이 맛이 좋다. 안성국밥(674-9494)도 옛날 장터국밥 맛을 재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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