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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군과 크로아티아 간의 내전이 차츰 식어가던 1992년 3월 1일 사라예보에서는 길고 긴 살육전의 서곡을 알리는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 세르비아 인이 아들의 결혼식을 마치고 막 식장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하얀 장갑에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정장 차림이었다. 이 사나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세르비아 국기를 흔들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어디에선가 날아 온 총알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이 소식은 곧 입에서 입으로 급속히 전파됐다. 세르비아 인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미 사라예보에 조직되어 있던 세르비아 민병대들은 살기가 등등한 채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특히 이들은 검은 복면을 하고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이것은 대세르비아를 외치며 죽어 간 블랙 핸드의 복장 그대로였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총알을 발사했고 곧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피살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들어왔다. 보스니아의 여성 저격수. 이 여성의 목표는 곳곳에 숨어 있는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었다.
베오그라드의 연방군 지도부는 더 이상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같은 시각 사라예보 주둔 연방군 사령부는 즉각 병력을 투입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사건 발생 48시간 만에 사태는 진정되어 갔고, 이곳의 3대 민족인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 교도 지도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장래를 결정하는 협상을 유럽 공동체 중재로 계속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3월의 첫날 사라예보를 강타했던 그 총성은 여전히 혼미를 거듭했고 그 와중에서 유럽 공동체 중재의 3자 협상도 계속되었다. 모두가 전쟁이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폭풍 전야의 고요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역을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만약 보스니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복잡한 민족 구성 때문에 처절한 전쟁이 전개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특히 보스니아는 다른 공화국에 비해 민족 간의 결혼율이 상당히 높았다. 세르비아 인과 이슬람 교도, 세르비아 인과 크로아티아 인 등의 이른바 ‘다민족 가정’이 상당수 존재했던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이처럼 여러 민족이 섞여 살게 된 것은 이 지역 특유의 지형이 큰 몫을 했다. 발칸의 내륙 지방인 세르비아 쪽에서 보스니아에 이르는 지형은 큰 장애물이 없는 반면 아드리아 해 쪽의 헤르체고비나는 바다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북쪽의 크로아티아 쪽에서는 사바 강이 보스니아의 심장부로 흘러 들어갔다. 보스니아의 주변에 있는 국가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보스니아를 정복할 수 있었다. 사바강
그래서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 헝가리,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비잔틴 제국 그리고 마지막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입을 받았다. 침략 민족들은 후퇴할 때마다 완전히 철수하지는 않았고 항상 일부 부족이 남아 이곳에 정착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되듯이 그들은 서로 모여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결혼도 하면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구성은 일단 민족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재앙을 몰고 올 씨앗이 되었다. 1992년의 3월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보스니아 전역을 뒤덮고 있었다. 보산스키 브로드(Bosanski Brod) 시는 바로 세 민족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살고 있는 곳이었다. 보스니아를 뒤덮고 있던 고요도 마침내 이 보산스키 브로드에서 끝이 나고 말았다. 3월 말 세르비아측은 이 마을의 크로아티아 인과 이슬람 교도가 15명의 세르비아 주민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만행’을 응징한다면서 보산스키 브로드 시에 무차별로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다. 세르비아 인은 스스로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갈등은 내전으로 서서히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곳곳에서 살인, 강간, 방화를 자행했고 보스니아를 인간 도살장으로 변모시켰다. 보산스키 브로드 시
보산스키 브로드 시에 나타난 세르비아 민병대
보산스키 브로드 시에서 이슬람 교도에 의해 살해된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진 보산스키 브로드에서 박격포를 발사하는 세르비아 민병대 <뉴욕 타임스>의 존 번스 기자는 전쟁 중 21세의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 보리슬라브 헤라크를 사라예보에서 만나 장장 일곱 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여덟 차례나 아녀자를 강간한 후 잔인하게 살해했고, 그 밖에 모두 29명의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죽였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에 보도된 증언 내용을 간추려 보자.
나는 세르비아 인을 부모로 보스니아의 포발리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 후 사라예보로 무작정 상경해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1992년 5월부터 사라예보 근교에 주둔하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시작한 데에는 세르비아 방송의 영향이 컸다. 세르비아 방송은 이슬람 교도들이 보스니아를 회교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세르비아 인을 말살하려 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 나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슬람 교로 개종해야 될 것이고 결국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곳곳에 모인 세르비아 인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종 청소’하지 않으면 우리 세르비아 인은 결국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난 민병대원들은 이같은 얘기들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이슬람 교도로부터는 어떤 값진 것이든 탈취해도 좋고 이슬람 여자들을 강간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아이들도 세르비아 인이 되어, 결국은 세르비아 인의 수를 늘려 나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종 청소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6월에 민병대에 들어간 뒤 다른 두 명의 도료와 함께 이슬람 교도 지역인 보스니아 서북부의 아하도비치 마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한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두 명의 노파가 있었는데 한 노파가 가진 게 없다고 강변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 노파를 총의 개머리판으로 쳐버린 뒤 옷장을 열어 보니 여러 종류의 귀금속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 당시 집 안에는 모두 열 명의 이슬람 교도가 있었다. 나는 단 2초만에 14㎝의 칼로 한 사나이의 목을 베었다. 이미 나는 한 늙은 세르비아 민병대 병사로부터 목을 자르는 방법을 배웠었다. 어느 날 그는 나와 다른 세 명의 동료를 돼지 우리로 데리고 가더니 돼지 목을 어떻게 베어 죽이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기가 사로잡은 보스니아 이슬람 교도를 모두 그런 식으로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우리는 나머지 아홉 명을 모두 집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에게 벽에 기대라고 명령했다. 그 가운데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무서웠던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우리는 기관단총을 발사했다. 민병대 지휘관들은 이슬람 교도 한 사람을 죽이는 댓가로 6달러 50센트를 지불했다. 인종 청소가 끝나자마자 마을을 불질러 버렸다.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또다른 민병대원들이 1백여 명 가량의 이슬람 교도들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시체를 트럭에 실어 한적한 곳으로 옮긴 뒤 휘발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7월에는 또다른 회교 마을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30명의 이슬람 교도를 죽인 뒤 근처에 있는 용광로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때 몇 명은 신음 소리를 내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7월 초 나는 사라예보 근교에 있는 한 건물에 들어갔다. 이곳은 이슬람 여성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민병대원이 관리하고 있었다. 부코비치는 이슬람 여성을 강간한 뒤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그 수용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죽어 갔다.
이미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서 내전이 계속되면서 보스니아의 분위기는 서서히 악화되어 갔다. 가장 중요한 사태 발전은 보스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세르비아 인이 1991년 11월 세르비아 인만의 ‘국민 투표’를 실시해 일방적으로 연방에 잔류하겠다고 선언한 점이다. 그들은 독립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결코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 같은 세르비아 인의 이니셔티브는 보스니아에서 합법적 선거를 통해 정부를 이끌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rgovic; 이슬람 교도) 보스니아 대통령의 협상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도전이었다.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세르비아 인의 ‘국민 투표’에 앞서 보스니아는 세 민족간의 느슨한 국가 연합을 골격으로 한 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이를 위해 협상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Radovan Karadzic)는 국경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우면서 협상 제의를 받아들였다. 1991년 11월의 세르비아 인 단독의 ‘국민 투표’는 바로 카라지치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 자신이 대세르비아주의를 실현하는 블랙 핸드의 선봉이라는 것을 내외에 밝힌 하나의 사건이었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라트코 믈라디치(왼쪽)와 라도반 카라지치(오른쪽)
크로아티아에서의 내전이 차츰 식어 가면서 한숨을 돌린 유럽 공동체 측은 협상 노력을 보스니아 확전 방지에 집중하고 있었다. 1992년 2월 유럽 공동체 측은 보스니아 정부로 하여금 연방 잔류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를 실시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 같은 발상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상황을 너무나 낙관적으로 보고 있던 결과였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인은 이미 연방 잔류 의사를 ‘국민 투표’ 형식을 빌려 공식 선언한 상태였고, 크로아티아와 이슬람 교도 측은 분리 독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장래를 결정할 국민 투표가 그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투표 결과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투표는 의미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이미 연방 잔류를 결정한 세르비아 인은 국민 투표 결과에 관계없이 그들의 연방 잔류를 행동으로 밀고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말해 세르비아 인이 투표 결과에 결코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분명해보였다. 유럽 공동체 협상 중재자들의 비현실적인 권고가 받아들여져 1992년 2월 보스니아가 연방에 잔류할 것인지, 아니면 독립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나빴다. 세르비아 인이 대부분 기권을 해 국민 투표 자체의 정통성을 훼손해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가 진행된 직후 세르비아 인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쟁도 불사할 듯이 격렬한 항의를 되풀이했다. 연방군은 아직 세르비아 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인의 시위는 곧 수습되었고 선거는 분리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이 시점에 실시된 국민 투표는 양측의 감정만을 자극했을 뿐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보산스키 브로드 사태를 기점으로 보스니아의 각 지역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와 이슬람 교도 간의 총격전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는 이슬람 교도 밀집 거주 지역인 비옐리나(Bijeljina)를 점령했고 수도 사라예보에 대한 무차별 박격포 공격을 감행했다. 여기에서 유럽 공동체는 또 한 번 실수를 한다. 즉 유럽 공동체 지도자들은 3월 이후 확산되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총격전이 보스니아 독립을 가로막기 위한 조치로 착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보스니아 독립을 조기 승인함으로써 전쟁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4월 6일 미국와 유럽 공동체는 보스니아에 대한 공식 승인을 하게 되었다. 1992년 3월 31일 비옐리나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 살해된 주민
비옐리나에서 죽어 가는 이슬람 여인을 발로 차는 세르비아 민병대원. 이 사진이 공개되자 세르비아 민병대는 이 사진을 찍은 기자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
세르비아군의 무자비한 박격포 포격으로 길거리에는 희생자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세르비아군의 박격포 포격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 소년을 유엔군이 황급하게 호송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승인이 결정되면서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던 유고 연방군은 완전히 전쟁 쪽으로 그 방향을 결정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이 기정 사실화된 마당에 보스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세르비아 인의 생활 영역 확보라는 대세르비아주의의 실현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 조짐은 연방군 통제 하에 있던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민병대가 보스니아로 투입되면서 확연해졌다. 미국과 유럽 공동체측이 보스니아 독립 승인을 한자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기
크로아티아 지역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이 지역에서 활약하던 세르비아 민병대가 보스니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 민병대는 이미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인 민병대가 장악한 비옐리나를 거점으로 남진해 즈보르니크(Zvornik)로 진출했으며 세르비아 공화국과 가까운 포차(Foca)와 비세그라드(Visegrad)로도 일부 진출해 있었다. 비세그라드-포차-즈보르니크를 연결하는 전선은 바로 대세르비아주의가 자리할 수 있는 대세르비아 연방의 분기점이었으며, 그 의도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지역과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지역을 종횡으로 연결한다는 전략이었다. 즈보르니크에서 학살된 보스니아인 700명의 유해 발굴 현장
포차의 학살 현장
4월 초부터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정부와 연방군은 보스니아에서 싸우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측에 적극적인 지원을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보스니아 동부 지방도 차례로 세르비아 민병대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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