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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3. (안양대 맹문재 연구실)
1> 구성 : ‘박인환 편’은 3〜4개의 장으로 나뉘어 구성됩니다.
․ 1장 : 작가의 생애
영상의 특징을 살려 특이한 활동이나 이력을 부각시킵니다.
․ 2~3장 : 작가의 문학세계
짧은 생애를 문학적으로 분류해서 소개(2장)하고,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과 근대성을 당시의 문단의 분위기, 시대상황 등과 연결시켜 설명(3장)하고자 합니다.
․ 4장 : 판본의 변화에 따른 표기 방식의 차이 등 서지적 측면의 내용
2> 질문
1. 박인환 시인의 생애 중 본 영상을 통해 부각시켜야 할 부분이 있다면요?
박인환 시인은 자기에게 친한 사람에게는 책도 빌리고 돈도 빌리고 했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물 한 잔도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다는 점이지요. 정신적인 귀족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김규동 선생님께서 살아 계실 때 들려주신 얘기인데요, 가령 명동에서 길을 가다가 저 앞에서 노천명 시인이 걸어오면 인사를 하지 않으려고 옆길로 도망갔어요. 왜 인사를 하기 싫어했느냐 하면 노천명 시인이 친일문학 활동을 했기 때문이지요. 박인환 시인은 친일문학 활동을 한 시인들을 시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만큼 옳고 그른 일에 대한 기준이 분명했던 것이지요.
김규동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또 다른 얘기인데요, 어느 날 캐롤 리드 감독이 만든 「제3의 사나이」란 영화를 다른 문인들과 함께 보러갔어요. 영화사에서 문인들을 초청해 영화 시사회를 연 것이었지요. 그런데 영화가 한참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박인환 시인이 일어나 뒤에 앉아서 영화를 보던 백철 문학평론가를 가리키며 “백철 씨, 바로 저거예요. 저걸 알아야 해요!”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모두들 웃을 수밖에 없었지요. 아마 박인환 시인에 보기에 어떤 장면이 아주 멋있던 것이지요. 즉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새로웠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참지 못하고 일어나 “백철 씨!” 했던 것이지요. 당시 백철 문학평론가는 박인환보다 18살이나 많고 중앙대 교수이고 문학평론가였으므로 문단의 중심이었는데, 박인환 시인은 보수적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공격성이 들어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처럼 박인환은 할 말을 하는 성격이어서 어떻게 보면 건방지고, 어떻게 보면 눈치가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싱겁기도 했지요. 그날 백철 문학평론가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요. 그래도 무던한 성품이어서 그냥 넘어갔지요.
2. 박인환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관계에 대해서
흔히 박인환과 김수영의 관계에 대해 관심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두 시인을 절대적으로 비교하려고 하는 점이 문제이지요. 따라서 두 시인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을 고려해야 하고, 두 시인 간에 어느 시인의 시가 더 좋은가 따위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요. 우선 박인환은 1926년에 출생했으므로 1921년에 출생한 김수영 시인에 비해 다섯 살 아래예요. 등단도 김수영 시인이 1946년 1월 1일 『예술부락』으로 했으므로(지금까지 1945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판권에는 1946년이므로 바로잡을 필요가 있지요.) 1946년 이후에 등단한 박인환 시인보다 좀 더 빨랐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단은 박인환 시인이 주도했지요. 박인환 시인이 1956년 타계할 때까지 81편의 시를 발표했는데 김수영 시인은 50편의 시를 발표한 사실이 그 증거이지요. 뿐만 아니라 박인환 시인은 모더니즘 동인지인 『신시론』이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주도했는데 김수영 시인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시를 발표할 정도였으므로 두 시인의 문단 위치를 가늠할 수 있지요. 이와 같은 면들이 김수영 시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어요. 나이도 많고(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아주 중요하잖아요.), 등단도 먼저 했는데 오히려 문단의 주도권을 박인환 시인이 쥐고 있으니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시인에 대해서 4편의 산문을 썼습니다.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는 자신의 등단작인 「묘정(廟廷)의 노래」가 『예술부락』에 실리지만 않았더라도 “인환으로부터 좀 더 <낡았다>는 수모는 덜 받았을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술부락』은 1946년 1월에 창간된 잡지로 해방 직후 좌익문인들의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의 기치로 조연현을 중심으로 발행했던 잡지이지요. 따라서 박인환은 순수문학 내지 보수주의를 들어 김수영을 공격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또 다른 산문으로는 1966년에 발표한 「박인환」을 들 수 있어요. 내용은 김수영 시인이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나와 박인환을 만나 글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글의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낱말을 지적했을 때, 박인환이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새로 생긴 말”이라고 오히려 반격을 가하여 그대로 가져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산문은 역시 1966년에 발표한 「마리서사(茉莉書舍)」였어요. ‘마리서사’는 박인환 시인이 해방이 되자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가 그만두고 상경해서 종로3가 낙원동 입구에 개업한 서점이지요.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모던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점이었는데,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는 장소가 되었지요. 마리는 한자로 말리(말리 말, 말리 리. 상록 관목)로 읽어야 하는데, 모던함을 추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리라고 했어요. 김영철 문학평론가이자 건국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박인환』(건국대학교출판부, 2000)에서 ‘마리’는 자유로운 환상으로 야수파적 화풍으로 그렸던 프랑스 여성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5~1956)을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마리의 한자어 표기를 위해 일본 모더니즘 시인인 안자 후유에[安西冬衛]의 첫 시집 『군함 말리(軍艦 茉莉)』에서 빌려온 것이구요. 김수영 시인은 「마리서사」에서 박인환 시인이 자신도 모르는 식물, 동물, 기계, 정치, 경제, 수학, 철학, 천문학, 종교 등의 현대 용어를 마구 나열하여 난해하다고 평하고 있어요. 마지막 산문은 「벽(壁)」이란 작품으로 박인환의 삶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 글입니다. 박인환이 “부부란 자식 때문에 사는 것”이라고 말한 일이 이상하게도 기억된다고 하면서도, 박인환이 실천하지 않고 31살에 세상을 뜬 것을 보면 진정성을 가지고 한 말은 아니라고 폄하하고 있지요.
이상의 산문에서 보면 박인환은 김수영의 시어 등에서 시가 낡았다고 비판한 것이고, 김수영은 이 점에서 열등의식을 지녔던 것이지요. 김수영 시인은 그리하여 4편이나 되는 산문을 통해 박인환 시인을 비판한 것이지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이란 작품에서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사석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을 이렇게 공개한 의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의 이와 같은 평가는 박인환 시인에 대한 후대인들의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한국 시단의 거장이 된 김수영이 박인환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크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김수영이 박인환을 네 편의 글을 통해 비판했다는 것 자체가 서로 경재(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반증하지요. 만약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면 관심을 갖거나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와 같은 면은 박인환이 1956년 타계한 후에도 마찬가지였지요. 박인환 시인은 타계했지만 여전히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김수영 시인이 4·19혁명 이후 참여시로 전향하면서 속어, 비어, 구어, 외래어 등 시어를 과감하게 사용했는데, 그것이 박인환 시인의 영향은 아닌지 생각해볼 점이지요. 김수영 시인은 박인환 시인을 삼류 시인으로 비판하면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김수영 시인은 시작품 「거대한 뿌리」에서 박인환 시인을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고 부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박인환 시인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면을 띠고 있지는 않아요.
3. 박인환 시인의 짧은 생애를 문학적 경향의 변모로 나누어 설명한다면요?
박인환 시인의 문학적 경향의 변모는 한국전쟁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고, 혹은 한국전쟁을 포함시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지요. 편의상 두 시기로 나누고 전반기와 후반기로 부르기로 하지요. 박인환 시인의 전반기는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가 해당되겠지요. 이 기간 동안 시 13편(산문 12편)을 발표했습니다. 주로 『신천지』와 『민성』에 발표했고 나중에 모더니즘 시 동인들의 합동시집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재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동인을 결성하는 등 모더니즘 시 운동에 열성적이었지요. 그런데 작품 세계는 정치적인 인식이 강한 면을 드러냈어요. 가령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에서는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아온 인도네시아 민중들이 단호하게 대응해 민족해방을 추구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야만적 제재는/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라고 외친 데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해방도 추구한 것이지요. 「남풍」에서는 포르투갈, 영국,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말레이시아며,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캄보디아며, 중국과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베트남의 민족 해방을 위한 민중들의 항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르키의 달밤」에서는 레닌이 총상을 당해 처음 휴식을 취한 곳이자 생을 마감한 후 묻힌 고르키(모스크바에서 35킬로미터 떨어진 곳. 레닌의 사후에는 고르키레닌스키예로 바뀜)를 제재로 삼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노동자 계급의 혁명에 의해 막으려고 했던 혁명가의 삶을 가슴에 품고 이상 세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박인환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해방 인식을 매우 강하게 추구했지요. 「정신의 행방을 찾아」에서는 파미르 고원이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인 투르키스탄을 선량한 우리의 조상들의 근대정신이 발생된 곳으로 노래했지요. 그리고 「인천항」에서는 “밤이 가까울수록/성조기가 퍼덕이는” 해방 후 인천항의 모습이 포르투갈, 영국, 일본 등의 지배를 받아온 홍콩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박인환 시인은 진정한 민족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나라도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제국주의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지요. 이와 같이 박인환 시인이 사회 참여 의식이 없는 모더니즘 시를 발표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오히려 해방기의 그 어떤 시인보다도 현실 인식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인환 시인의 후반기는 한국전쟁이 끝난 뒤부터 1956년 타계할 때까지입니다. 이 기간 동안 시 54편(한국전쟁 동안 시 7편)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1955년(10월 15일)에는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선시집』(산호장)을 간행했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집의 제목은 원래 『검은 준열의 시대』라고 하려고 했었는데, 영국의 시인으로서 사회의식이 강했던 스티븐 스펜더의 영향을 받고 바꾸었어요. 스펜더의 시집 제목이 『선시집』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처음 나온 시집은 인쇄소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몇 권 못 건지고 이듬해에 다시 출간했어요. 1월 27일 동방문화회관에서 시집 출간 기념회를 가졌는데, 당시에는 책을 출판한다는 자체가 아주 어려운 시기였고, 또 모두들 외로워서 서로 격려해주는 차원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리곤 했지요. 박인환 시인이 남긴 시작품은 2008년 현재 총 81편(산문 포함 총 173편)이므로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 시세계의 본령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시기의 작품 세계는 그의 『선시집』 후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박인환은 후기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전쟁은 박인환 시인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박인환 시인은 그와 같은 충격과 상처에 함몰되지 않고 시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나갔습니다. 시인은 『선시집』 후기에서 또한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지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라고 토로했는데 그와 같은 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제8연 중 제2연) 같은 작품에서 “전쟁 때문에 나의 재산과 친우가 떠났다./인간의 이지를 위한 서적 그것은 잿더미가 되고/지난날의 영광도 날아가 버렸다./그렇게 다정했던 친우도 서로 갈라지고/간혹 이름을 불러도 울림조차 없다./오늘도 비행기의 폭음이 귀에 감겨/잠이 오지 않는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는 물론 소중한 재산과 서적마저 잃어버린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잠이 오지 않는다”라고 토로한 것이지요.
후반기의 활동 중에서 관심이 가는 또 다른 일은 미국 여행을 다녀온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1955년 3월 5일부터 4월 10일까지로 한 달 남짓 다녀온 것이지요. 박인환 시인은 다녀온 뒤 『조선일보』(5월 13일/17일)에 「19일간의 아메리카」라는 기행문을 발표했고, 『선시집』에는 ‘아메리카 시초’라는 부류로 총 11편의 시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 미국 여행은 박인환 시인에게 나름대로 의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이란 시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먼 나라로/여행의 길을 떠났다/수중엔 돈도 없이/집엔 쌀도 없는 시인이/누구의 속임인가”라고 토로했듯이 다소 우연히 가게 된 여행이었지만, 시인에게는 미국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조국의 상황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국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시인은 한국전쟁 후 황폐해진 조국의 상황을 잊지 못하고 “서울로 빨리 가고 싶다”(「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는 바람을 나타내었다.
4. 1950년대의 시대적 상황, 문단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전후의 시대적 배경과 문단(시단) 상황을 박인환 시의 특징과 연결지어 설명한다면요?
박인환 시인이 활동한 1950년대는 한국전쟁으로 시작되었는데, 어느 누구도 그 짙은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이전까지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가치관이며 관습이며 계층구조 등을 뿌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남한에서의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체제가 수립된 것이 그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산물인 것이지요. 그리하여 문학사에서도 그동안 지속되어 왔던 우익과 좌익 간의 대립이 한국전쟁을 통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남과 북이라는 공간에서 상이한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지요. 북한의 경우 전후 복구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실천하는 데 문학이 동원되었다면, 남한의 경우는 주로 전쟁이 초래한 불안함과 실존적 위기감을 작가들이 그려냈지요.
이처럼 1950년대의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이 키워드였던 것인데, 남한의 경우 한국전쟁이 가져온 죽음이나 폭력이 큰 영향을 끼쳤지요. 그리하여 많은 작가들이나 시인들이 실존주의 사조에 빠져들게 되지요. 사르트르나 까뮈 등이 주도한 프랑스 실존의 철학과 문학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불안과 상실감에 젖어 있는 작가나 시인들의 정신을 휩쓴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와 같은 현상은 작가나 시인들이 실존주의에 함몰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불안과 허무감 등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지요.
1950년의 한국 시문학사는 전쟁시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종군작가단에 가입해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대부분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북한 쪽에 적개심을 드러내었지요.
전후의 문단(혹은 시단) 상황은 크게 문단(시단)의 재편성과 세대교체를 들 수 있지요. 우선 한국전쟁으로 인해 시단이 재편성된 점을 들 수 있지요. 남한과 북한 간에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어남으로써 시단에서 재편성이 일어나 김기림 시인처럼 납북되거나 정지용 시인 등처럼 월북했고, 양명문, 박남수, 구상 시인 등은 월남한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시단의 세대교체가 일어난 점을 들 수 있지요.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 구세대 시인들이 여전히 시단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현실 인식에서 긴장감을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세대교체의 결과 이전 시대에는 우익과 좌익이라는 대결 구도였는데, 이후에는 전통주의 시와 모더니즘 시의 대결 구도를 가져온 것이지요. 그 상황은 모더니즘 시 계열의 시인들이 구세대 전통주의 시를 비판하면서 촉발된 것이었어요. 1950년대의 전통주의 시 계열로는 박재삼, 이동주, 박용래, 이형기 등을 들 수 있고, 모더니즘 시 계열로는 박인환, 김경린, 김규동, 조향 등의 후반기 동인을 들 수 있지요. 또한 송욱, 전봉건, 김종삼, 김구용, 김춘수 등도 모더니즘 시 계열로 넣을 수 있지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좌익 계열의 문학은 발을 붙일 수 없게 된 것이지요.
5. 박인환 시가 지닌 서정성과 근대성을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국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전통이나 가치 체계가 소멸한 것을 목도한 전후 신세대 문인들은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당대의 현실을 황무지나 화전민 의식(이어령)으로 비유한 것이 그 여실한 면이지요. 물론 전후 상황에서 신세대 문인들의 기대를 통어해줄 수 있는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집단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전후의 상황을 청산하기 위한 새로운 감각이 요구되는 시기이기도 했지요. 비인간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전쟁이며 문명을 비판한 박인환의 시는 이와 같은 전후의 상황을 뚫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달 남짓 미국을 다녀온 경험도 문명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박인환의 작품들은 근대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박인환 시인의 작품들은 서정성을 띠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박인환 시인은 이론적으로는 문명에 대한 인식이며 비판성으로 동시대의 모더니즘 시 운동에서 가장 전위적인 위치에 섰다고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전후에 발표한 작품들은 감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박인환 시인의 시론과 시작에 괴리가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보기보다는 좀 더 긍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이나 허무감은 오히려 전후의 상황에서 중요한 주제로 취급해야 할 면입니다. 따라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목마와 숙녀」는 단순하게 센티멘털(감상적)하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고 시대인식 혹은 근대인식과 서정성을 함께 획득한 뛰어난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고 시작하는 이 작품은 분명 버지니아 울프나 목마나 숙녀의 시어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주의 시들과는 다른 모던한 면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잔의 술이며 옷자락을 이야기하는 등의 작품 내용과 문체는 서정성을 띠고 있습니다. 단순한 감상성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감이 지배하는 시대 상황을 여실하게 담아낸 것이고, 그러면서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한 잔의 술을 마신다는 것은 센티멘털하거나 경박한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의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동시대인들의 기대를 반영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6. 박인환 시인의 영상자료를 만들면서 구성상 꼭 들어가야 할 내용, 주안점을 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요?
지금까지 시문학사에서는 박인환 시인의 시세계를 전후 모더니즘 시의 기수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답처럼 인정하고 있는 이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박인환의 시 세계를 모더니즘 시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박인환 시인이 시를 쓰면서 모더니티를 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모더니즘 시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모더니티를 추구한 것이 모더니즘 시가 될 수는 있지만, 모더니티를 추구한 것이 모두 모더니즘 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이 점이 중요한 것은 그동안 박인환 시인이 모더니즘을 추구했으므로 사회의식이 없다고 왜곡되게 평가되어 왔기 때문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박인환의 모더니티를 추구한 시는 결코 정치의식이 없는 순수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해방기 이후 1950년대까지 그 어떠한 시인보다도 사회의식이 강했던 시인입니다. 그와 같은 면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수영 시인의 폄하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대중문화의 인기도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앞에서 소개한 박인환 시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목마와 숙녀」는 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1960년대 이후 젊은이들이 모두 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잖아요. 그때는 테이프에 건전 가요가 들어가야 했는데, 흔히 테이프의 B면 제일 마지막에 수록되었지요. 그런데 건전 가요 대신 시 낭송이 들어 있기도 했는데, 대부분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가 실렸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가수나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시낭송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 시를 사랑을 노래한 작품으로 알고 있어요. 사실은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과 허무감을 노래한 아픔이 짙은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작품인데 말이지요. 결국 이와 같은 대중성이 박인환 시인의 시작품 세계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와 같은 점에서 모더니즘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종식과 함께 꽃을 피우게 된 사조이지요. 세계대전은 인류의 문명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었고 기존의 가치관도 붕괴시켰습니다. 19세기까지 팽배했던 과학적 합리주의는 더 이상 인정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더니즘의 특징은 전통과의 단절, 개인주의, 문학의 독자성, 실존적 인생관 등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특성이 우리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는 그동안 팽배했던 과학적 합리주의가 세계대전으로 인해 무너지고 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인식으로 모더니즘이 출현했다면, 우리의 경우는 그와 같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배경이 다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의 모더니즘 시인들이 기존의 전통이나 관습을 비판한 것은 문명 비판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극히 세대 간 차이 내지 이념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서구의 모더니즘 개념을 박인환의 시세계에 적용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7. 보충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금까지 박인환 시인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확인해본 결과 정답처럼 알고 있는 이 사실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국제신보』는 지금 부산에 있는 『국제신문』의 전신인데, 1947년 9월 1일 『산업신문』이라는 제호로 창간되었습니다. 그런데 3년 뒤인 1950년 8월 19일에 『국제신보』로 제호를 바꾼 것이지요. 『국제신보』는 한국전쟁 동안 발행부수가 10만부에 이를 정도로 큰 인기가 있었어요. 『산업신문』의 창업주인 김형두 씨는 『수산신문』과 다른 지방지인 『동아산업신보』를 병합해 창간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박인환 시인의 등단 연도며 등단 매체며 등단 작품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거리」를 등단작으로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1946년에 존재하지 않은 『국제신보』를 등단 매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실적인 차원에서 보면 1947년 4월 『신조선』에 발표된 「인천항」이 등단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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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현 대 문 학 관
Museum of Korean Modern Literature
100-855 서울시 중구 장충동 2가 186-210
186-210, Jangchung-dong 2ga, Jung-gu, Seoul, Korea
Tel.(02)2277-4857~8 Fax.(02)2277-4859
2012년 6월 15일
문서번호 : 제 12-06-08호
수 신 : 맹문재 시인님
제 목 : <시인 박인환 편> 영상자료 제작에 자문을 부탁드립니다
1. 건필을 기원합니다.
2. <한국현대문학관>에서는 근현대 문학 자료를 영구히 보존하고, 영상세대에게 문학에 대한 흥미와 깊이를 전하고자 <문학인 영상자료>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2006년 <시인 한용운․정지용, 소설가 채만식․이효석 편>, 07년 <시인 윤동주․이 상, 소설가 김유정․이태준 편>, 08년에는 <시인 김영랑․이육사, 소설가 김동인․염상섭> 편, 09년에는 <시인 최남선․김소월, 소설가 이광수․현진건> 편, 2010년에는 <시인 박목월․유치환, 소설가 박태원․심훈> 편, 2011년에는 <시인 김기림․서정주, 소설가 김동리․황순원> 편을 제작하였습니다.
2012년에는 <시인 김억․박인환, 소설가 김기진․홍명희> 편의 영상자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본 자료는 국․공립 도서관 및 각급 학교에 무료로 배포되어 교육 자료로 활용됩니다.
3. <시인 박인환 편>의 영상자료 제작을 위해 박인환 선생님을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자료 제작에 반영하고자 합니다. 자문받고자 하는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내 용 >
1. 인터뷰 : 시인 박인환 선생님과 관련된 연구 내용
(*질문내용을 다음 장에 첨부하였습니다!)
- 선생님께서 인터뷰하시기에 편하신 날짜를 알려주시면 본 문학관 담당자(서영 란, 02-2277-4857)와 영상자료 제작팀(나태민 PD)이 찾아뵙고 말씀 내용을 촬영하 고자 합니다. 인터뷰 시간은 3~40분 내외입니다.
재 단 법 인 한 국 현 대 문 학 관 이사장 강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