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한 엄마생각
문 남선
가을이 꼬리를 감출 무렵. 회사의 교육 과정 중 유성 연수원에서 보내는 일정이 있었다. 남편과 기말 고사 중인 두 아들, 그리고 댄디(강아지)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청주를 지날 무렵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쌓인 은빛 풍경에 무겁던 마음도 어느새 녹아버렸다.
교육 프로그램 중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안내자에 의해 30분 정도 걷는 장애 체험이 있다. 그런데 갑작스레 닥친 장애와, 눈을 떴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 탓에 매 순간 판단이 서지 않고 황당하기만 했다.
검은 안대를 쓰고 안내자에 이끌려 가는 중 나는 여러 풍경을 감상했다. 후끈한 열기를 느낀 장소에서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께서 쇠죽을 끓이시던 가마솥 모습과 또 1984년에 갔던, 산기슭에 김이 모락모락 나던 동경하꼬네의 정경이 보였다. 그리고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던 곳에서는 설악산과 동해의 해변이 펼쳐지며 파도소리도 들렸다. 해변을 거쳐 이동한 곳은 허리를 굽혀야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곳이었는데 그 곳은 놀이동산의 귀신 집 같기도 하고 울진의 성류굴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를 내며 도착한 곳은 낭떠러지 같았는데 헛디뎌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발을 떼지 못하자 안내자는 자신을 믿어 보라는 사인을 몸으로 연신 전했지만 그에게 나를 맡기기엔 내 믿음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보지 못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은 더 답답했다.
이렇게 답답한 여행을 하는 동안 검은 안대 속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 ‘엄마!’ 하고 나직이 불러보았다. 일본의 전문학교를 나오시고도 평생 얼룩진 삶을 사신 어머니! 20대 초반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아픔과 그리움으로 심장병을 얻으신 어머니! 심장병은 다시 당뇨 망막증으로 이어지고. 심장병 탓에 보행조차 불편하셨던 한 많은 어머니는 그렇게 4년을 암흑 속에서 살다 가셨다.
그러던 어느 봄날 고향에서의 아버지 생신 때였다. 자식들을 모두 만난 기쁨에 어머닌 즐거워하시며 우수개 소리도 곧잘 하셨는데 그 다음날 영면(永眠)하셨다. 호전된 듯 한 어머니 건강에장모님 한 2년은 더 사실 것 같아.하던 남편의 말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귀경 다음날 어머니 전화를 받았을 때다. 아마 그때 어머니는 자신의 생이 끝남을 영감으로 느끼셨던 모양이다. 단지 손가락 감각에 의해서 다이얼을 돌리며 자식들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계실 때, 주식 시황판을 보느라 정신없던 나는 어머니 전화에엄마! 지금 바빠요 나중에 전화할게 끊어요.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불효막심한 말이 이승에서 어머니와 내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으니….
먼 길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는 느낌 속에서, 어둠 속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돌리셨을 다이얼에,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죄 하나를 또 저질렀다. 회한에 쌓인 가슴안고 통곡하며 고향집에 내려갔지만 이미 먼 곳 떠난 어머니는 싸늘한 체온으로 우릴 맞으셨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버리신 것이다.
어머니 제삿날엔 사월 초파일이다. 그 날이 공휴일이라 어머니 제삿날이면 형제들이 쉽게 모여 부모님 이야기를 하며 옛일을 회상하곤 한다.
30분의 짧은 시간이 내겐 하루 이상으로 체감되어 답답하기만 했는데 어머니는 어찌 그리 오랜 시간을 암흑 속에 사셨을까? 걸을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언제나 당당하셨던 나의 어머니! 자신의 장애에 불편함을 호소하신 적 한번 없이 늘 뛰어난 화술로 주변을 웃게 하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나는 약간의 불편함만 있는 줄 알았지 한 번도 어머니 입장이 되어 헤아리지 못했었다. 오히려 가난한 6남매의 장남 며느리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를 자주 어머니께 풀며 투덜대고 짜증만 내곤 했었다. 하지만 장애체험을 통해 어머니의 아픔과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눈 가리고 느꼈던 세상을 이제 안내자가 되어 경험할 때였다. 앞, 뒤 옆으로 전개되는 장애인의 모습이 다양하다. 평지인데도 발자국 떼기를 거부하는 사람, 발바닥 감각으로 연신 땅을 다지듯 걷는 사람, 걷기 두려워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걷는 사람……. 여러 유형의 장애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아! 그런데 그곳에도 어머니의 모습이 여기저기 있었다. 화장실을 가시기 위해 벽을 더듬던 모습, 더듬거리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훌훌 물에 밥을 말아 드시던 모습, 계단 난간을 잡고 힘들어하시던 모습, 업히라고 권해도 무겁다며 사양하시다가 결국 내 등에 업혀 미안해하시던 모습 등. 겹쳐지는 어머니 모습에 눈물이 났다.
우리나라 100만 장애인 중 85%는 후천적 장애인이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문제다. 유명한 헬렌 켈러의 사흘 이야기가 생각난다.내가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준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 둘째 날은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서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을 맞이하고 싶다. 셋째 날은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찾아가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별 감정 없이 맞는 우리들의 아침이 어머니나 그녀에겐 하나의 소망이고 기적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께 보이지 않는 불운이 닥친 몇 달 후 장손이 태어났을 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여보! 완섭이 어떻게 생겼어요?하고 자주 물으셨다. 그때마다 아버진 아들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시며 남동생과 똑 같다고 설명하셨다. 어머닌 잦은 유산과 사산으로 10번째야 지금의 동생을 얻었다. 아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손자의 모습을 그리셨을 어머니는, 헬렌켈러가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는 것을 소망했듯 손자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셨을 것 같다.
우리에겐 자신이 누리고 있는 축복의 크기를 가늠하지 못하는 눈먼 구석이 있다. 사지가 멀쩡하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는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는 장애 말이다.
이번의 장애 체험을 통해 장애자의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 잊고 있던 어머니를 만난 이번 교육을 통해 매일매일 시작되는 하루에 감사하며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01년 10월
첫댓글 김 수환 추기경님이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두 사람에게 각막을 기증하시고 밝은 빛을 선사하며 가셨습니다. 남편과 시누이의 무모한 객기(?)로 인해 엄청난 빛더미를 떠안고 정말 죽자사자 일을 해야했던 오랜 시간이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은 우리들이 지키기 힘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떠나셨습니다. 오늘은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추운날 전방에서 고생 할 우리 큰 아들이 더욱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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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문우들과의 모임이 있어서 밤 늦게까지 놀았더니 몹시 피곤했다. 난 술을 못하는데 술마시고도 담날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강한 체력을 가졌는지 궁금하구나. 지금 잠도 안오고 몸도 무겁고 목이 뻣뻣하다. 너도 기분이 꾸리꾸리한 모양이지만 오늘 온종일 기분이 나도 별루다. 온종일 맥을 못추고 낮잠을 잤더니 잠도 안온다. 외숙모도 한이 많았을게다.큰 아들먼저 보내고 딸년이고 아들이고 죄다 브라질 가 있어서... 외숙모도 참 불쌍하게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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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하고 당뇨하고 관련이 디게 많어. 운동을 열심히하면 당은 떨어지고 몸이 좋아지지만 금방 갑상선 저하증이 온다(신지로이드란 갑상선 약발이 다 소모가 되어서) 그러면 무쟈게 피곤하다. 많이 피곤하면 짜증이 나고 또 당이 오르고. 아침에 혈당이 좀 높아서 좀있다 형부랑 오늘은 산이나 국립묘지 한바퀴(세시간 정도) 두르고 올까해. 그리고 안먹고 살 빼는 건 안좋다. 먹는 것 규칙적으로 먹어라.
언젠가 나에게 줬던 내용인데 다시금 읽어보니 가슴 뭉클한 효심이 가득 합니다. 우리 입산국민학교 어른 이셨는데..우리 담임은 안하셔도 내 동생 경옥이 담임을 하셨고 내가 전교 회장을 했으니 끔찍이 아껴 주셨지요.
저가 글을 쓰던 초창기 작품입니다. 이글을 쓰던 그땐 참 힘이 들어서 엄마 아버지에게 밥도 한 끼 제대로 사드리지 못했어요. 늘 식구많은 시댁 치닥거리에다 그것도 모자라서 남편이 부린 객기(?)의 직격탄에 참 오랫동안 힘들었어요. 이런것 저런것 생각하면 억울하고 화가 날때가 참 많아요. 난 정말 시댁에 한것 1/20도 친정에 못했어요. 부모님이 너무 일찍 가셔버려서.....
내하고는 정반대 같다..나는 처가에 한다고 해도 좋은 소리 별로 못듣고 있는데..안씨 가문 아제가 우리 집안 욕 먹이네.. 그놈의 장손이 뭔지..자고로 옥 봤습니다. 그 덕에 이제는 유명인사가 되잖여..
오빠? 누가 유명하게 됐단 말이여? 욕먹은 사람이? ㅋㅋㅋㅋ
어머님은 형이하학적인 현실의 눈보다 형이상학적인 마음의 눈이 더 밝으신 분이니 아마 어머님은 정정했던 젊은시절보다 더 많이 보고 계셨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덕이 가득한 분이라 하늘나라에서도 학을타고 여행하고 계실 것입니다.
성환아! 니 그리 얘기 해주니 고맙다. 엄만 진짜 참 똑똑한 분이셨던것 같아. 20살까지 한국말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1년도 안되는 기간에 한국말 터득하고 남을 가르치고... 그리고 하도 책을 많이 읽으셔서 한국사 동양사에 거의 모르는게 없을 정도로 해박하셨어. 논리에도 어찌나 밝으셨던지 말싸움을 하면 엄마 상대가 안 되는 난 늘 성질만 북북내고 했었어. 말로는 못당했으니 말이야. 난 엄마를 기억해주는 이곳이 그래서 참 좋단다.
나도 예전에 그랬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탓을 할 때가 많단다. 하지만 자식 키운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명백하게 알게 된 진리 한가지는 자식이 잘 되고 못되는 건 100% 자식탓이 아니란거다. 100% 부모탓이야. 우리 아이들이 무진장 똑똑했다가 다시 그 반대가 됐다가 다시 원 위치를 찾아가고 있는 것 또한 늦게나마 내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란 걸 깨닫고 내가 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야. 무조건 사랑해주렴. 미운 부분까지 사랑해주렴. 그러면 그 자식은 너에게 한없는 기쁨을 줄거야. 알았징?
선배님...선생님을 떠올리면서 우리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 아들을 교통 사고로 잃고 유복자인 손주를 키우면서 잠도주무시지않고 생으로 앓으시다가 어느날 병원에서 당뇨병 진단을 받으시고 화병으로 아들 떠난지 3년만에 하늘 나라로가신 어머님 생각이났읍니다....자식의 입장이 아닌 부모의 입장이 되니 이해가 갑니다........엄마란....무엇이간데..... 우리 아들 이 수험생 이었거든요....내 아들이 내가못다한 공부 ..내가 못이룬꿈 이루어 줄수있을거라고 생각 했답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욕심이 강해 한보름동안 많이 앓고 많이 울고 이젠 털고 일어 나려고 해요....선배님 나 선배님께 위로 받고 싶어요''''
춘화네 어머니도 많은 아픔을 겪으셨구나. 그리고 아들이 고3 이었나보구나. 너무 속 끓이지마라. 뒤돌아보면 후회될일도 또 가슴아픈 일들도 많지. 그리고 닥친 일에도 숨이 막힐정도로 힘든 일들도 때로는 생길거야. 나도 그랬으니깐. 보름을 앓아누웠었니? 난 서너달을 울고 몸부림치고 ... 힘들어했었다. 그때 그 시점에 암도 발병했었지. 춘화야! 스트레스 받지말거라. 지천명(쉰)을 넘긴 지금 생각해보니 인간지사 새옹지마더라. 잘됐다고 계속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못됐다고 또 계속 못되는 것도 아니더라. 김수환 추기경님도 그랬단다. 친한 친구 서너명 중 공부는 제일 꼴찌셨지만 교구장으로 선택받으신 건 제일 먼저였다더군.
그래서 그때 말씀하시며 웃었다더군. 꼴찌가 일등되고 일등이 꼴찌되었다고.... 아픈만큼 성숙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 그말은 정말 맞는 말이란다. 어머니를 통한 너의 아픔. 그리고 유복자 조카를 바라보는 너의 아픔, 너의 아들에 대한 한없는 기대, 행여나 아들이 너를 실망시켰을 때 느끼는 또 다른 아픔.... 이 모든 아픔이 시간이 지나면 보다 더 크고 찬란한 무엇을 얻기위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단다. 아픔이 없고 실패가 없고 부모 속을 썪이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란 ... 분명 한계가 있단다. 아주 크게 될 확률은 없다고 보면된다. 단 한가지 네게 애기해주고 싶은 건 <아들의 못난 부분까지 무조건 예뻐해주거라>
아이를 키운지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나도 알게 된 진리하나. 자식의 잘됨과 못됨은 100% 부모책임이란 점이란것이다. 그 똑똑하던 우리 아이들이 한동안 삐딱선을 탄 것도 나의 잘못이었고 그나마 늦게라도 다시 원위치를 향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것 또한 나의 노력의 결과란다. 무조건 사랑해주거라. 미운 부분까지 속깊이 사랑하다보면 자식의 단점보단 장점이 많이 보일거야. 그러면 칭찬해주거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그 자식이 너에게 많은 웃음과 행복을 선사 해 줄거야. 알았징?
선배님 감사 합니다.... 내가 너무 기대가 컸거든요....가까운곳에 등록했어요 자기도 미안했던지 큰집으로 피신했어요....위의 조카랑 4촌이지만 친 형제 처럼 지내거든요
엄마의 기대와 욕심이 아이를 크게 만들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단다. <괜찮다. 괜찮다. 다시 이 시점에서 조금씩 조금씩 날아보자..> 하면서 데리고 오너라. 지금 아들이 생각하는 정 반대방향의 엄마로 변신하면 아들은 반드시 성공할거야. 아이가 바뀌길 바라지말고 엄마가 바뀌어야한다. 속이 쓰려도... 그리고 기본 80이상 사는 긴 수명에 이제 20살정도인 아들에게 남은 앞으로의 60년 이상 아니 80년이상이 될수도 잇는 그 긴 시간에 수없이 많은 기회와 변화가 올것이다. 앞으로 오는 좋은 기회들을 잘 활용할 수 잇는 사람으로 만들면 그것이 가장 성공하는 길이야. 그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부모이고...
언니 저도 새마을 연수 갔을때 그런 경험을 한적 있어요 잠시라도 갑갑하고 암흑 천지가 된 기분 어찌 말을 다 그ㅡ수 있을까요 이선생님의 그런 아픔속에서도 자식들의 걱정땜에 불편함을 표현 안 했을 뿐이지......그때는 먹고 사느라고 시골에 가서 한번 찾아 뵙지도 못하고 정말 그립습니다
장애란건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에겐 일상이지만 장애자들에겐 우리의 일상이 곧 기적이란다. 그런데 우린 그런 마음이 들엇다가도 자주 까먹고 하지? 3월 9일부터 일주일간 봉사활동을 신청해 놓았단다. 자비원이란 기관의 시각 장애우 몇명과 결손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곳에. 둘째가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데 난 아직 한번도 못해봣다. 그래서 한번쯤 그런 기회를 접해보려고... 그리고 바쁜 일이 대충 끝나고 건강이 좋아지면 일주일에 한번씩이라고 고아원같은데서 장기 봉사를 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잇단다.
참나~~~이런 아픈글은 정말 안읽고 싶은데 또 읽고 말았네.언니야~그저께밤에 아버지가 오셨어.들어 오시라고해도 안오시고 도망가시듯이 가버리시더라............ㅠㅠ엄마도 아버지도 봄이 오니까 더욱더 생각난다.집안 구석구석 아버지의 흔적이 없는곳이 없고......너무 깔끔하게 집을 보존하셨던 아버지 뒤를 이어 나갈래니깐 난 힘든다 ㅎ부지런해야만 하는데 아버지 따라하진 못하겠다.언니야~엄마 보고싶어 미치겠다.
까페 대문 쫙 열면 성환이 오빠야가 입산 초등학교 제 1회 졸업사진 올려놨다 아이가. 그거 걸려있는 동안이라도 많이 보라며. 아까적에 엄마 한참 쳐다봉께 나보다도 훨씬 젊은 엄마가 날 보고 맨날 정신없이 산다꼬 뭐라카더라. 봄이 오면 엄마 아부지 보러 함 내려가긴 가야는데 계획을 아직 못잡고 있다. 나는 엄마보다는 아부지가 더 보고 싶은데...
나도 엄마보담 아버지가 더보고싶을때가 더많어 ㅎㅎ울엄마 서운하겠다.엄마나 아버지나 우리한테는 소중하신분 들이니깐~~~
순희언니는 요즘 언니 뒤 안따라다니네 ㅋㅎ
순희 요새 시간만 나면 뒤비잔다더라. 내 따라댕길 시간없을끼다.
zㅋㅋ그랬구나~
뒤비잘 시간이 어딧노 일해야지 나 바쁘다 먹고살기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디비자는거 싹 없어져 버렸다 우리 남편이 걱정할 정도다 밥도 잘 안먹힌다 이건 너무 잘된거야 내가 그동안 너무 잘 먹었거던 ㅎㅎㅎ
그래도 안먹고 빼는 살 몸에 무리간다. 밥은 많이 먹어라.
순희 언니야 보고싶당~~~~~~~
위의 글 다 읽어 보았는데 장애 체험 내용이 새롭고 깊은 생각이 들던데요,,, 우리들은 사지가 멀정 하면서도 내 생할에 투덜 대던 것이 어리석었던 같군요 ,,,,,,,,,,,,,아쿠아 누나 올린 글들 한번씩 전부다 읽어 봐야것다 내용이 알차고 재미있어서 그런데 한작품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러서 천천히 세밀하게 봐야것다,,, 누나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종순아! 시간이 나면 한편씩 읽어보거라. 자랑은 아니라도 내가 너 보다 더 오래 살앗고 더 경험도 많을거고 .... 그래서 수필 한편 속에 네걸로 만들고 싶은 부분이 한부분씩은 있을거야. 나의 경험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니까..... 벌써 넌 너의 건강한 몸에 대해 감사하고 있잖니?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