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석의 뉴욕이야기(9)
누차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미국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분단국가 출신인 한국인들의 고통은 이중적입니다. 만일에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을 방문한 친구나 친지들을 만나게 되면 한번 이러한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길 바랍니다. 지난번 갑자기 예상은 했었지만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을 6자회담 안에다가 가두어 두고서 중국을 압박하여 완전항복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방법이 북한에게 통하질 않았고 그래서 북한은 나름대로 생존방식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장거리미사일을 만들어 쏘기 시작했고 지난1998년에 한번 그리고 이번에 또 한번 미국 본토를 향해서 날렸지요. 미국은 모르면 겁을 먹고 적으로 간주를 합니다. 미국이 가장 잘 모르는 나라인 북한이 미사일로 미국을 크게 위협했습니다. 미국의 정치권 뿐만이아니고 일반 시민사회, 특히 주류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순식간에 미국속의 한국인들이 적국의 시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난주엔 워싱턴 DC를 끼고있는 매를랜드주의 주지사까지 지냈다는 현 감사원장이 북한의 미사일발사를 놓고서 그러니까 미국내 모든 한국인들은 어떠한 사회적 혜택도 주지 말아야 하고 가두어 고립시켜야 한다고 그러한 발언을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김동석은 흥분에 가깝게 열을 받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 그 감사원장 이번 선거에서 낙선시키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친구나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정말로 모국어가 있는 곳에서 살수있는것이 큰 복 이라고 할것입니다.사내중학교 동창들중에 나 말고는 모두 한국에서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여하튼 어떠한 이유로도 전쟁은 합당하게 설명될수 없는 일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화천군의 그 평화공원 조성하는 일에 우리가 참여해야 합니다. DMZ에 가까이 있는 그곳에서 북과 남이 공동으로 평화의 공원을 조성하게 되면 전 세계에 모범이 되겠습니다. 특히 미국에 보란듯이 화천군민의 뜻이 평화라는 것을 과시하게 됩니다. 이곳서 내가 몇몇의 정치인을 그렇게 설득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에 '평화'를 우선하는 시대적 과제는 없습니다. 전쟁은 원래 강자가 자기 과시욕에서 비롯된 탐욕이 동기 입니다. 미국은 제 나라에 있는 원유는 아주 먼 훗날 그야말로 원유가 거의 바닥이 날 때를 대비해서 최대한도 아끼고 지금은 세계 도처에서 막무가내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지요. 미국이 원유매장량은 세계 제1위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시추는 하질 않고 있습니다. 새롭게 원유를 시추하려면 법을 제정해야 하도록 그렇게 법으로 금지 해 놓았습니다. 그러니 중동에서 미국의 패권은 미국 내수경제에도 가장 민감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입니다. 미국을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는 세력이 중동에 국가권력으로 생기면 미국은 그것을 미국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형태로든 제압을 하려고 합니다. 원유의 최대 매장지역인 중동에서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 어느곳의 어느 국가에서도 이제는 미국의 이러한 횡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 지역에서는 각각의 나라들이 잘 연합해서 미국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유행처럼 일어났습니다. ‘유럽연합’ 이 그것이고 DJ가 주창한 아세안 연합(아세안경제협력기구)이 또한 그것입니다. 중남미 나라들도 모두가 다 미국을 대항해서 힘을 합하는 형태로 지역불럭이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움직임이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차이에서 생겨졌지만 이제는 그것이 해체되고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연합이나 넷워크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에 대항하는 현상을 유독 한국내에서만 마치 미국의 적대국가가 되는것처럼 과도하게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스스로 알아서 ‘주권’을 미국에 반은 갖다가 바치고 있는 나라라는 그런 조롱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필리핀이나 일본, 그리고 그외 동북.남아시아에서 미군기지를 옮길때엔 그 비용을 미군이 감당을 하는것에 비해서 한국은 새로운 기지의 터를 제공하기도 하고 기지 이전비용을 대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으로 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미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가장 모르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라는 그러한 이야기가 간간히 미국 주류미디어에 언급이 되기도 합니다.
김동석은 20년 이상을 미국 한복판의 뉴욕에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이곳을 제나라 같이 그렇게 생각하질 못하고 있는것이 정직한 고백입니다. 언젠가는 한국으로 가야만 하는것 같고 이곳에 잠깐 나들이 와 있는것 같은 그런 생각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내중학교 2학년때에 춘천으로 전학을 하고선 지금까지 정말로 오랫동안 객지 생활의 연속입니다. 나중에 온 집안이 춘천으로 이사를 했지만 그래도 연휴고 방학이면 광덕리의 집으로 가야 하는것으로 늘 그렇게 생각을 해 왔습니다. 20년 이상 이곳에서 별일을 다 겪으면서 이곳에서 세금을 내면서 이렇게 살았고, 그리고 살아가지만 꼭 남의 집에 그리고 남의 동네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그런 생각입니다. 나는 팔자가 이렇게 객지로 떠 도는 그런 팔자인가 봅니다. 정말로 하루에도 수차례씩 ‘이곳이 내 나라고 내가 이곳의 주인이다. ‘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나는 늘 새로운 곳에서의 적응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결심을 하면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이 낮설어도 논리적으로 합당하면 누구보다도 배짱과 오기가 커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광덕국민학교를 졸업하고서 사창리로 중학교에 입학을 하니까 처음엔 정말 낮설었습니다. 사창리엔 전기가 들어오고 자동차도 많았으니까 당시에 내가 느끼기엔 사창리 아이들에 비해서 우리는 정말 촌놈이었습니다. 1학년1반 영어시간에 유덕상 영어 선생님이 최문경이를 일으켜 세워서 ‘너는 집이 명월리인데 어제 저녁시간인데 어떻게 사창리 시내에 있었는가..?’ 물으셨습니다. 최문경은 목욕탕에 목욕을 하러 왔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오히려 칭찬을 했습니다. 그렇게 위생적으로 깨끗하게 생활해야 한다고… 그런데 그 당시 나는 목욕탕에는 가 본적이 없었고 목욕을 돈까지 내고 어디에 가서 하는지를(들어서는 알았지만..)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인데요..국민학교때 광덕리서 동네에서 목욕을 하려면 물론 겨울이었지요(여름엔 발가벗고서 늘 개울에서 살았으니까..특별히 몸을 닥는다고 목욕이라고 없었지요) 동네 공회당에는 V자형의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있고 솥의 바닥에는 나무판(송판)을 깔았습니다. 겨울 오후에 하루종일 개울에서 물을 길어다 붇고서 저녁5시나 6시부터 불을 땜니다. 물을 데워서 밤중에 그 안에 들어가서 목욕을 합니다. 공회당은 하나 있었는데 동네 반장을 통해서 순서를 받고(신청)…그렇게 목욕을 합니다. 그때 우리야 어렸지만 동네 청년들(중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형들…)은 처녀들이 목욕을 할라치면 그것을 좀 들여다 보려고 아우성을 쳤고 그래서 동네 어른들(엄마들…)이 망을 보고 처녀들은 목욕을 했었습니다. 광덕리 출신의 동창들은 모두들 기억이 날 것입니다. 우리야 몸을 청결하게 한다고 해도 그 당시에 목욕은 겨울에 한.두번 정도 그렇게 하거나 집에서 물을 데워서 부억에서 간단히 씻는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문경이는 중학교 1학년때 자전거를 타고 사창리 목욕탕에 목욕을 하러 다닌것을 보니까…나보다야 수준높은 문화생활을 영유 한것이 분명합니다. 원래 중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처음 문경이를 볼때엔 (정말로 그랬던것 같은데)겉으로 보기엔 걔네 가정 형편이 좀 부유하게 보였었습니다. 문경이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는 3000리호 신사용 새것 이었구요 교복도 엘리트 학생복지(당시에 그것이 가장 고급이었으니까…)로 맟춘것이었습니다. 잉크도 문경이는 꼭 빠이롯트(50원짜리)를 썼었구요 도시락 반찬도 걔는 늘 계란이나 생선이 있었습니다. 나는 명월리 보다도 훨씬 거리가 먼 덕골에서 형들이 타던 자전거를 탔는데 그것은 너무나 투박하고 무거운 짐차용 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짜증스러운 일은 자전거의 체인이 늘 쉽게 벗겨졌습니다. 체인받이도 없어서 내 교복의 오른쪽 바짓 가랭이는 늘 시커멓게 기름칠이었습니다. 한번은 그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서 교문을 들어서는데 내 바짓가랭이에 기름 덩이가 붙어서 있었고 마침 교문을 통해서 이정재 음악선생님이 츨근을 하시다가 나한테 가까이 오시고 나를 불러서 휴지를 꺼네서 웃으시면서 그 기름덩이를 닦아 내 주셨습니다. 내가 사내중학교를 떠나 오고서도 그 이정재 선생님이 그렇게 해 주신것을 정말 황송할 정도로 감사하게 오랫동안 그렇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정재 선생님은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그렇게 음악의 이론도 잘 아셨고 노래도 잘 하셨고 정말 잘 가르치셨습니다. 나에게 특별하게 잘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고 정말로 음악성적이 좋았습니다. 춘천의 강원중학교에 전학을 가서도 거긴 학생수가 한 학년이 500여명이 되는데도 음악은 내가 단연코 톱 이었습니다. 이정재 선생님을 오랫동안 정말로 좋아했습니다. 그분이 말씀을 하시거나 노래를 하실때에 입술사이로 내 비치는 그 금니빨이 그렇게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 쌍동이 형들을 정말 아끼고 잘해 주셨었구요 그래서 여름방학때엔 직접 덕골로 우리집을 찿아 주시기까지 했는데 저는 정말로 그것이 가장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때에 광덕리 아이들은 모두가 다 종덕이의 성품마냥 모두가 조용했었는데 원래 그랬던 것이 아니고 명월리나 다목리, 그리고 사창리에 비해서 좀 가난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창리는 도회지이고 그래서 장사를 하는 집이 많았고 명월리와 용담리에는 27사단 78, 79연대의 본부가 있었으니까 군인가족이 많았습니다. 광덕리는 군인은 가끔 훈련할때 주둔하는 것 말고는 27사단 경계지역 이라서 검문소 하나 덜렁 말고는 사태골의 유격장이 전부였습니다. 군인가족이나 장사하는 가족은 현금이 좀 도는 그런 형편이 되었습니다. 가장 가난한 것은 아버지의 직업이 농사인데 소유한 땅이 없는 화전농이 가장 가난했습니다. 산간지방이라 논은 없고 대개가 화전밭의 약탈 농업에 의존 했으니까요… 광덕리 아이들 중에는 명호네 아버지가 군인이셨고 정자네가 가게를 했고 그리고는 모두가 다 농사였습니다. 모두에게 정말로 쌀이 귀했습니다. 쌀이 모자라서 한때 정부에서 혼식과 분식을 장려했고 학교에선 도시락 검사를 해서 쌀밥만 갖고오면 선생님이 혼내주기도 했던것을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그때에 쌀로만 밥을 해 먹는 집도 있구나…오히려 그것이 신기 했었습니다. 보리밥도 귀했었지요. 보리쌀도 모자라서 그릇에 밥을 풀때면 보기에 한 그릇을 만들려고 감자 하나를 밥그릇에 넣고 밥을 담습니다. 나중에 밥 그릇에서 감자를 골라내고 보면 정작 밥은 두 숫가락 남짓합니다. 매번 그럴때면 정말로 마음이 상하곤 했었습니다. 나는 그럴때의 그런 기분이 아주 기억에 또렷합니다.
올해도 장마의 피해가 크다고 그렇게 소식을 듣고 걱정이 많고 마음을 조리게 됩니다. 화전밭 농사에서 유일하게 돈을 만드는 방법은 봄철과 여름철에 화전으로 일군 땅에다가 ‘무’를 심습니다. 아직도 그런 농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당시엔 그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하루가리(?), 이틀가리(?) 라는 단위의 밭면적을 일구어서 씨를 뿌려 비료를 주고 두벌까지 김을 매 줍니다. 무에 밑동이 생기면 그것을 뽑아서 직접 자동차를 대절해서 서울 경동시장에 직접 내다가 차떼기로 팝니다. 나는 그때에 화물자동차의 크기를 무게로 보다는 바퀴의 숫자로 구분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마도 아직까지 농사를 짓는 친구들은 알겠지만 삼발이(그때 이것을 삼륜차라고…), 사발자동차 , 육발이…그리고 제무시라고 했는데 그것을 지금 알고보니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GM사에서 나온 트럭(그래서 자동차 앞에다 GMC라고 썼습니다)을 이야기 할때 일본식으로 제무시라고 했던것 같습니다. 트럭에 무를 잔뜩 싣고서 저녁시간에 트럭을 타고 서울로 갑니다. 12시가 넘어서 서울에 도착을 하면 새벽에 그 무를 중간상인에게 판다고 하는데 한 트럭에 잘 팔면 3, 4만원씩 받았었습니다. 자동차가 서울로 가다가 장마비에 발이 묶이면 그 무가 차에서 그냥 썩어서 그렇게 힘들게 한 농사를 쫄당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빈손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한탄을 하던 매일같이 술타령을 하시던 그런 동네 어른들의 대상없는 분노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합니다. 그 때에 그러한 농사를 지어서 그 많은 자식들을 객지의 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신 분이 나의 어머님이십니다. 지금은 80이 훨씬 넘어서 새다리 같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노구를 지탱 하시면서 뉴욕인근 롱아일랜드의 양로원에 계십니다. 어제 토요일 아들 녀석을 데리고 어머님을 뵈러 갈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두통이 심하게 왔고 그래서 전화로만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그렇게나마 그 많은 학비를 감당할수 있는 그런 농사방법이 있었으니 자식들을 볼때마다 그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그야말로 참혹하게 뼈를 깍는 고생을 감내하신 것이 우리 모두의 부모님들입니다. 우리들 부모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그 시절을 운명처럼 달게 받아서 겪으셨습니다. 정말로 이보다 더 훌륭한 그런 순종하는 순박한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중학교 동창회를 하면서 고향에 살아계신 동창들의 부모님들 만이라도 한자리에 초청해서 우리가 부모님들의 그런 고생을 늘 기억하고 있다고 그렇게 생존에 계실때에 말씀이라도 드릴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어 봅니다.
문경이가 지금도 동창들의 모임에 많은 정성을 쏟고있고 그리고 그때의 당당함을 잘 살려서 이번엔 스스로의 자리에서 지도력을 잘 발휘하고 있으니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옥이는 공무원노조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겠습니다만, 이 '노동조합'은 정말로 없어서는 안되는 조직입니다. 자본가에 대항하는 계급이 노동자이고 더구나 공무원 관료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상명하복만을 요구하는 시회에선 이 노동조합이 없으면 순식간에 인격의 침해와 차별이 발생하는데...문제는 그것을 해결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선 선진국으로 향한 경제개발의 논리와 명분으로 노동조합 없이 기업이 성장했기 때문에 기업조직의 맨 나중에 이 노조가 형성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기업내분의 원인이 노조 때문인것 같이 비추어 지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한국의 대기업의 문제는 노동문제가 아니고 기업주의 사회기여도 정신이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어마어마한 탈세를 하면서 자식에게 그 큰 재산을 나라의 예산에 비견되는 그러한 큰 재산을 제 자식에게만 물려주려고 하다가 들통이 났습니다. 노동자들의 노동분쟁, 그 단체교섭권을 갖고서 요구하는 지분은 기업주의 상속에 비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요구입니다. 지난 5월에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뉴욕엘 왔습니다. 삼성, 현대가 세계적인 기업이고 그러한 기업이 단지 국내의 상속문제로 휘청거린다면 국가차원의 손해를 어떻게 할것인가…? 라는 순진한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분은 ‘삼성이나 현대는 이제 한 개인의 재산차원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그런 문제가 아니다. 기업주가 그것을 자손대대로 소유하려고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니까 해외에 뻐쳐있는 자기소유의 기업의 힘을 통해서 국가외교 차원에서도 압박을 한다고…그래서 이것은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위에 관련되게 되는 문제라고…’ 그런 설명을 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30여년 동안 전체 국민들이 정말로 혹독한 어려움을 잘 참아내며 국민전체가 일구어 낸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노동자가 관리자가 기업주가 그리고 국가권력이 함께 공감하는 수준에서 운영해 나가야 하는 것 이라고 그렇게 판단해야 하는 문제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명순이도, 옥이도, 용하나 종덕이도 그리고 우리세대 모두가 그런 경험이 있었지만 ‘저축’ 이란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으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정해준 그런 저금을 하지 못했다고 정말로 여러번 공부하는 도중에 집으로 쫒겨 오곤 했습니다. 공부시간에 저금을 안했다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손을 들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벌을 섰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입학해서 6학년 까지 그리고 중학교 3년동안 우리는 선택이 없이 6년, 3년의 장기저축을 했습니다. 이것이 전체 국민이 그렇게 했습니다. 은행으로 모아진 돈을 지금의 삼성이나 현대, 그리고 금성, …그런 4, 5개의 대기업이 몽땅 걷어다가 투자를 하고 기업에 유용 했습니다. 나는 오늘의 눈부신 발전의 한국의 기초는 온 국민이 모두 똑같이 노력해서 이루어낸 성취물이란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창리서 그렇게 어렵게 열심히 공부한 그런 노력의 댓가가 우리뿐만이 아니고 우리들 부모들이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한 그런 댓가가 오늘날 ‘우리나라’라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문경이가 나보다 키가 좀 컸었고 그래서 걔는 내 오른편의 뒤의 뒷줄에 앉았었습니다.
어릴적의 생각중에 가장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서 두.세달 동안의 일입니다. 햇골 삼거리가 정말로 큰 경사였구요..그곳을 지나면 학교 였습니다. 수용이네 집이 그 삼거리에 있었는데 두부공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걔네는 송아지 만한 개를 키웠고 정말 무서웠습니다. 자전거를 타면 그 경사를 내려오는 기분이 최고인데 그 수용이네 개가 무서워서 그 신나는 경사를 정말로 화딱지 나게 내려서 살살 끌고 왔으니까요... 용담리나 명월리 사창리 쪽에서 오는 아이들은 사창리 시내 검눈소를 지나고서도 한참을 걸어 와야 하지만 나한테는 햇골도 정말 멀었습니다. 자전거로 통학을 하려면 길이 평지 이어야 좋은데 햇골서 덕골까지는 벼락바위를 지나서 광덕리 반암까지가 겨우 평지고 거의 전체 거리가 다 경사였습니다. 내 몸무게 두배가 되는 짐차용 자전거를 그것도 고장이 잦아서 타고 가는 경우보다 늘 끌고 다니던 그 자전거 통학이 정말 지겨웠습니다. 아마도 우리 아버지는 너무 먼곳에 걸어서 다니게 한다는 말을 들으실까봐 그냥 그 자전거를 얻어서 주셨던 것 같습니다. 검단리의 전대우와 전용환이는 정말로 좋은 신사용 자잔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나하고 비슷한 짐차를 탄 아이는 종덕이었는데 종덕이의 큰 자전거도 내것 보다는 새 것 이었고 그래서 고장이 덜 났습니다. 광덕리 반암(아는 아이는 알겠지만 공덕학교. 검문소가 있는 곳을 반암이라고 했습니다)을 지나서 안골로 갈라지는 맹대를 지나고 그리고 서울쪽 길과 유격장이 있는 사태골과 검단리와 갈라지는 곳까지 거기까지 종덕이와 같이 갔습니다. 종덕이가 자기 자전거에 내 가방을 잘 실어 줬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광덕리나 사창리서 종덕이하고 정말로 소주 한잔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50 이 되어서 국민학교때의 추억을 이렇게 간직하고 소줏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그것 또한 아무나 누릴수 있는 행운이 아닐 것 입니다. 지난번 까페에 종덕이는 오디와 산딸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서 나는 정말로 코끝이 시쿤둥 할 정도로 그때의 그곳이 그리웠습니다. 그때엔 온통 산딸기 였고 넝쿨에 털이 많이 난 크기가 큰 그런 딸기를 양딸기라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산딸기만 많아서 그때 나는 집에서 따로 텃밭에서 기르는 딸기가 더 고급이고 좋은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미국에서는 그때 그 집에서 재배하는 딸기는 아주 흔한데 종덕이가 이야기한 그때 그 산딸기는 정말로 귀해서 가격이 훨씬 비쌉니다. 비싸도 나는 그때의 생각을 하면서 산딸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산딸기를 따다가 딸기주를 담그면 그것이 손님대접으론 정말 최고급 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옛날 어릴적 우리 동네의 술문화는 정말로 고급이었습니다. 딸기주,머루주,다래주…이곳서 포도주에 비하면 모든것이 훨씬 비싼 술입니다. 올해 종덕이가 다른것은 몰라도 그 머루주와 다래주는 좀 담가놓길 바라겠는데…정말로 올해 한번 그곳을 가야 하겠습니다.
햇골에서 광덕리로 접어드는 그 병기중대 직전에서 77년대 본부가 있는 수밀리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명호네가 광덕리 반암의 다리건너에 살다가 아버지가 군인을 제대 하시고 그 수밀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돼지사육을 시작하시려고 그랬던것 같은데요…그 수밀리를 통해서 그 소문난 높은산인 화학산을 가는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 수밀리 입구에 흥남상회가 있었는데 거기가 손칠성이네 집이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직전에 가게의 이름은 기억에 가물가물한데 배용운이네 집이었습니다. 손칠성이, 배용운이 소식도 궁굼합니다. 손칠성이네 누나가 우리보다 2년 위 이고 아주 얌전했고 가끔 나하고만 마주치면 길가의 호떡집에 데리고 들어가서 5원짜리 호떡을 사준적이 있어서 그것이 정말 맛이 좋았기 때문에 아마도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배용운이네 누나도 같은 학년인데 ‘배복실?’인가가 이름이었던것 같습니다. 용운이네는 형이 있는데 우리 쌍동이 형보다도 1년이 위였고 나는 국민학교때 말로만 형한테서 들었습니다. 이름은 ‘배선운’이고 지도부장을 했기 때문에 형들도 아주 무서워 했었습니다. 중학교 전교생의 관심거리는 학생회장 보다도 지도부장 이었습니다. 우리 1학년때엔 스케이트를 잘 타고 축구를 잘하던 박중근형이 했고 1년 위에선 윤치중인가 우리상회집의 김종성인가가 했던것 같습니다. 그 김종성인 늘 야구방망이를 들고 다녔었는데 왜 그랬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때엔 누가 지도부장을 했는지…그것은 내가 전학을 간 후였고…듣기에는 우리 1년 후배때엔 정자동생인 이선중이가 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중이의 이름은 원래는 이영호(?)였던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축구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나는 걔하고 좀 친하게 지냈던적이 있고 결국엔 걔도 성균관대학교를 입학해서 ROTC를 했습니다. 선중이가 대학때엔 중량천 근처의 휘경동에서 하숙을 했는가(친척집이었는가…) 그랬는데 나는 성북의 형님네 집에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토요일엔 선중이가 있는 곳에 가기도 했는데 한번은 중량천에서 깡패를 만나서 자전거를 빼앗겼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어려서 그 신사용 자전거에 한이 맺혔었는데 그래서 형을 졸라서 아주 좋은 5단 기아로 된 신사용 자전거를 샀는데 그만 일주일만에 그렇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선중이가 보고 싶습니다. 지난번 서울서 전화로만 통화를 했습니다.
지루한 장마가 끝이 났는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홍수피해를 생각하면 1970년 정도인가…우리가 국민학교 때 입니다. 전국에서 사내면의 장마피해가 가장 컸었습니다. 라디오 뉴스에 그렇게 우리동네가 많이 나온적은 간첩이 나타났다는 그런 뉴스를 빼고는 그때까지 그리고 그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때의 물난리 때문에 작고 아기자기했던 개울이 그렇게 넓어졌습니다. 웬만한 집들이 모두 떠 내려갔고 산사태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학교로 몰려와서 약 2주일간을 합숙을 했습니다. 수재민을 돌 본다고 서울서 정일권 국무총리가 헬기를 타고 찾아 오기도 했습니다. 나도 학교에서 자고먹고 했는데 그것이 그렇게 신이나고 재미가 있었습니다. 마루바닥에 금을 긋고서 너네집 우리집 했으니 그야말로 동네의 어른들도 모두 함께한 소꼽놀이 였습니다. 수재민을 위해서 집을 지어 줬는데 그래서 사내면에 갑자기 유리창이 있는 빨간 기와의 벽돌집이 생겨 났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보기엔 그럴듯 했지만 통나무 흙집에 비해서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그런 엉터리 집 이었습니다. 미닫이 유리문을 열면 눈앞의 안방과 왼편, 아니면 오른편에 작은 방한칸이 더 있는 그런 방 두칸의 집 이었습니다. 다세대를 이어서 그렇게 지어서 수재민에게 나누어 줬는데 …장마철 홍수피해가 강원도에 특히 심하다고 하니까 그때의 생각이 납니다.
올해 뉴욕은 좀 불안합니다. 기후도 그렇지만 정세가 그렇습니다. 중동에 전쟁이 터지니까…유가가 급등하고 미국내 내수경제가 불안해 집니다. 서민층이 위축되고 극빈자들이 범죄화의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은 고국이나 여기 미국이나 거의 같은 수준일 것입니다. 세상에 나눌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릴적 생각을 하면 지금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나만의 생각이 아닐것입니다.
오늘(7월23일) 일요일 오후는 내내 이렇게 옛 일을 생각하면서 꿈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횡설수설 한 것 같은데…이런저런 기억에 나는 일들을 바로 잡아 주길 부탁합니다.
뉴욕서 김동석이가…
첫댓글 아이참~ㅎㅎ 어쩜 시시콜콜 기억하는게 많으니? 몇반인것도 기억하니? 난 내가 몇반이였나 했었는데..ㅋㅋㅋ
이제동석이가기억할수있는거바닥난거아니야?나도내가몇반이였는지기억이가물가물한데...동석이기억이다맞아..인숙이는황근이하구난혜경이하구많이붙어다녔지..황혜경이는지금국내에없구엄마하고만가끔통화해배용운이는인천에살고있구연락도가능하구..용섭이소식은아는친구가없는것같애..긴글쓰느라고생한동석이애게박수를보낸다
동석아 줄기에 털이 숭숭난 넝쿨 딸기가 바로 복분자야, 그왜 정력에 좋다는 . 그래 한국에선 술로 만들어 팔고 있어. 집에서 직접 담근 것 만이야 할까마는 왠만한 식당엔 모두 팔고 있지. 어쨌든 명월리 우리집 앞 바위밑에도 큰 넝쿨이 있어서 즐겨 따먹곤 했었지. 아 ! 입안에 침돈다. 글 잘 읽었다.
그래. 올 겨울에는 머루주, 다래주에 개구리 안주로 한잔 하자꾸나. 가물가물한 옛 이야기 더듬으며 가끔은 눈물도 곁들이며 말이다. 막연히 미국 놈 나쁜 놈 했는데, 다시금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니 가슴이 더 아프다. 좋은 글 감사하고, 내내 건강해라.
정말 잘 읽었어.웬 기억이 그리 좋은가.그 때 쓴 일기장을 아직도 갖고 있다가 펼친 것인가? 인간이 아닌가 보다.감탄만 하다 가네.두통 심해 엄마 못 뵈었다니 안쓰럽고 건강 잘 챙기길...선중이가 이 글 읽으면 좋아 하겠네.
대단한 기억력이네.. 울집도 햇골 수용이네집 옆에있었는데 수해때그만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목공소가 그만 급 물살에 집과함께 모두 쓸려 나갔단다, (아냐? 햇골 목공소)그후 다리건너에 수해민주택을 정부에서 지어줘 그곳으로 이사를했었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한 수마가 원망 스럽기도해.물은 정말 무~~써~~워..
정말 대단하네. 기억력도 글 올린 정성도 말이야, 동석인 울 카페에 보배다.
동석이 후배 혹시 4회 김명희 동생이 아닌지?
동석이후배가 우리동창 명희동생이 맞는구만 반가우이.. 황현숙동생 황혜경후배는 미국L.A에살고있고 가끔 서울송파에 계신어머니를 만나러오며 혜경이딸 미선이도 어머니와 살고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