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 시기 환관의 권세에 의지해 붕당을 조성해 권력을 향유한 집단을 소위 '엄당(閹黨)' 이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환관들의 정치집단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나라 시기의 환관들은 타 왕조의 환관들에 비해서 비교적 그 권력이 강성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일찍이 영종(英宗) 시기의 환관 왕진(王振)이나 헌종(憲宗) 때의 왕직(汪直) 같은 이들에게는 이미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고 무종(武宗) 때에 이르면 환관 유근(劉瑾)이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농락하며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모아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소위 '팔호(八虎)' 라고 불리우는 환관들이 그들인데 영수격인 유근을 필두로 마영성(馬英成), 고봉(高鳳), 나상(羅祥), 위빈(魏彬), 구취(邱聚), 곡대용(谷大用), 장영(張永)이 그들이다.
유근은 환관들을 관리하는 최고기관인 사례감(司禮監)을 장악하고 마영성은 동창(東廠)을 곡대용은 서창(西廠)을 각기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학사(大學士) 초방(焦芳), 유우(劉宇), 이부상서 장채(張彩), 병부상서 조원금(曺元錦), 금의위(錦衣衛)의 지휘사(指揮士) 양옥(楊玉), 석문의(石文義) 등이 모두 이들과 결탁하여 정치적 붕당(朋黨)을 조성하니 이것이 세칭 엄당으로 불리우는 환관중심의 정치파벌이다. 이들은 우두머리인 유근을 정점으로 그의 심복으로서 활동하면서 자기들과 한통 속이 아닌 이들은 철저히 배격하고 그 권력을 무기로 삼아 뇌물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정권을 농단하며 사사로이 권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환관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인 엄당의 발호는 헌종 시기의 위충현(魏忠賢)의 득세로 그 절정기를 구가한다. 이 시기의 엄당의 구성원을 보면 수령인 위충현을 위시하여 왕체건(王體乾), 이조흠(李朝欽), 왕조포(王朝輔) 등 30여명의 환관이 있고 조정의 신료들 중에는 대학사 구병겸(丘秉謙), 위광미(魏廣微)와 문신인 최정수(崔呈秀), 전길(田吉), 오순부(吳淳夫), 이기룡(李夔龍), 예문환(倪文煥)이 있었다. 특히 최정수, 전길, 오순부, 이기룡, 예문환 등은 '오호(五虎)'라 하여 무리의 주모자(主謨者)들로 유명하였다. 그외에 무신으로는 전이경(田爾耕), 허현순(許顯純), 손운학(孫雲鶴), 양환(楊寰), 최응원(崔應元)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표(五彪)' 로 불리우며 주로 완력을 쓰거나 칼을 휘두르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 밑으로는 십구(十狗), 십해팔(十孩八), 사십손(四十孫) 등으로 불리우는 무리들이 있어서 상층부의 지시를 실질적으로 시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이들의 세력은 내각의 육부(六部)에서부터 외방의 총독, 순무 등 아니 미치지않는 곳이 없었다.
위충현은 이런한 충복들을 조종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혀갔으며 그와중에 반대파들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자신을 고발한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를 몰아내기 위해 구병겸, 위광미를 동원해 일을 꾸며 결국 그들을 옥에 떨구었으며 최종목표인 동림당의 척결을 위해 '이궁안'(移宮案)을 빌미로하여 반대당인 동림당을 무자비하게 핍박한다. 그 결과 고반룡(高攀龍), 양련, 고순창(高順昌), 위대중(魏大中), 고대장(顧大章) 등의 동림당의 주요세력들이 죽임을 당했다. 거기에 최정수 등은 위충현에게 '삼조요전(三朝要典)'을 받치며 동림당을 와해시킬 계획을 권한다. 그러나 희종이 죽고 숭정황제가 즉위하여 위충현은 그 죄상을 추궁받아 죽게되고 그와 연루되어 처벌을 받은 이들이 260여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