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이 찬탄한 바다의 절경. 해운대
김 채석 (대준)
울산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타고 산과 바다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송정역을 지나 작은 터널을 지나면서 펼쳐지는 바다풍경은 영화의 또 다른 장면처럼 시원하게 그 속살을 드러내 놓는데 그곳이 바로 ‘해운대’이다. 자가 고운이며 해운이기도 한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 선생이 어지러운 세상의 여러 가지 번잡한 일을 피하기 위해 합천 해인사로 향하던 중 이 바닷가에 머물며 그 풍광에 감탄하여 자기의 호를 따서 동백섬 암반 위에 海雲臺’라 새긴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꽃이 피든 꽃이 안 피든 동백섬에 가보면 최치원 선생의 동상이 있다. 언제나 불운한 천재라는 수식어가 함께하는데 이것은 출신이나 이력에 비해 그만큼의 뜻을 펼치지 못하였기에 이르는 말일 것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출생지 또한 경주의 사량부에서 출생하였다. 6두품 출신으로 엄격한 골품제의 틀에서 6두품은 그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할지라도 6관등 아찬 이상 오를 수 없었기에 6두품 출신은 이런 신라의 분위기가 답답해서 지금의 이민자나 유학생처럼 그 틀을 벗어나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서라벌을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연고로 최치원 선생 또한 12세란 어린 나이에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당(唐)나라 유학길에 올랐으며 대단한 노력 끝에 6년 후 빈공과에 장원급제하며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으나 당나라도 당시 민란 등 어지러운 상태로 나라는 쇠태해지고 있었고, 신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사서감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오히려 진골귀족의 견제대상이 되었고, 결국 외직이라 할 수 있는 천령군, 지금의 함양군의 태수를 역임하지만 신라 또한 당나라처럼 나라의 운세는 기울어 가고 있었다. 선생은 진성여왕에게 개혁을 단행해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할 것을 진언하고 결국 아찬에 임명되어 개혁을 추진하는 일을 하였으나 중앙귀족들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고 개혁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래서 불운한 천재는 은둔의 길을 떠나며 잠시 해운대의 풍경에 젖어 감탄하며 많은 회안 속에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호 해운을 바위에 새겨 지금의 해운대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만약에 지금의 해운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바닷가 건축물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이 궁금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것은 세월의 무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듯이 결국 선생이 주창하신 개혁도 구시대의 잘 못 된 관행이나 행태를 새롭게 바꾸는 변화를 이끌어 내자는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이름의 유래가 된 해운대는 사시사철로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으로 동쪽의 미포에서 서쪽의 동백섬을 사이에 두고 마치 영화에서 보는 로빈 후드의 긴 활처럼 원만한 곡선을 이루는 백사장이 뒤편의 마천루 같은 현대식 건물들과 해운대의 진산격인 장산을 부챗살처럼 배경삼아 펼쳐져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해수욕장 중에서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달리 야경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은 인근의 광안리와 멀리 송도 해수욕장도 빼놓을 수 없지만 해운대가 주는 이미지는 유난히 차분하면서도 어머니의 손길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내가 해운대를 처음 찾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의 까까머리 고교생 시절의 여름방학 때이다. 광주에서 절친한 친구 덕범이와 여수와 남해, 하동을 거쳐 열차를 타고 새벽에 부산역인지 부산진역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래 되었지만 그 때의 행로는 비포장인 2송도와 태종대, 남포동과 용두산 공원, 수영비행장과 기껏 해운대를 경유하는 것이었지만 당시에 해운대는 해수욕장보다 온천이 더 유명했고,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지만 박정희가 묶었다는 극동호텔은 부산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의 동백섬은 그 때 기억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고백하건데 친구와 나는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아볼 요량으로 인어상이 있는 곳으로 해서 지금의 누리마루가 있는 곳 즈음에 도착했는데 철책과 철책사이 초소에서 근무하던 군인 아저씨가 어디서 굴러온 촌놈들에게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냅다 준 쌍안경의 화면에 소년은 바닷가에서 홍당무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긴 숨비 소리 내 뱉으며 물질을 마치고 올라온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었다. 학생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도 아니고 친구의 책가방에서 찾아낸 플레이보이 잡지책도 아니고 두 개의 광학렌즈에 의해서 여인들의 속살이 적나라하게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가장 호기심이 많을 까까머리 시절, 친구 집에 가기위해 고향의 역전 골목길의 사창가를 지날 때 짧은 치마에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누나들만 보아도 얼굴을 들 수도 없이 붉히곤 했는데 옆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던 군인 아저씨는 연신 “쥑이제 쥑이제”하며 배꼽을 잡으며 국방부 시계가 더디게 가는지 무료한 시간을 달랬고, 나와 친구는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해운대 하면 동백섬, 동백섬 하면 그 때의 일이 생각나 때론 혼자 그 장면들을 끄집어 내놓고 혼자 엉큼하게 웃곤 한다. 이번에는 나의 무촌과 함께 가면서도 동백섬 그 길에서 누리마루 쪽을 바라보며 들키지 않게 혼자 웃었다.
아무튼 나에게 있어서 동백섬은 최치원 선생 보다 은막 속의 마를린 먼로의 치마속이 더 궁금했던 시절로 회귀하는 곳으로 비록 불편한 추억이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을 보니 분명 대단한 일이었던가 보다. 그리고 동백섬은 섬이 아니다. 왜냐하면 육지화 되었으니까. 하지만 섬이다. 그것은 강원도에만 춘천(春川)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 해운대에도 춘천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춘천의 퇴적 작용, 즉 지각(地殼)을 이루는 암석 붕괴 물질이 물,·빙하,·바람 등에 의해 운반되어 어떤 곳에 쌓이는 현상으로 퇴적물인 모래가 쌓여 육지화 되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인위적인 삽질로 메워 놓고도 섬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목포의 삼학도가 그렇고 인천의 월미도가 그렇다.
인위적이든 자연현상이든 그 형질이 변했어도 섬은 섬인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그래도 원래 우리 땅이듯이 말이다. 하여간 2000년 하고도 10을 더한 해, 그 무더운 어느 여름 날 동백섬에서 바라보는 해운대는 유럽이나 기타 세계의 유명한 바닷가 휴양지처럼 비치파라솔 몇 개가 한가롭게 빈 공간을 채워주는 풍경이 아니라 마치 군복의 색상이 다른 부대별로 대형을 갖춘 독재자의 충성스런 부대가 사열대 앞을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하는 열병식 대형을 이루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로 잰 듯 반듯하게 꼽아 놓은 파라솔들을 어떻게 누가 꼽는지 신기할 정도로 해운대의 여름 풍경에 한 몫을 한다.
그러나 그 한 몫도 멀리서 보았을 때 이야기지 실제로 발을 들여 놓으면 풍경에 대한 상실감은 이루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하고 심난하다. 한번은 평소 착용하지 않는 샌들을 신고 바닷물에 발이라도 담글 요량으로 백사장에 발을 들여 놓고 용기를 내어 몇 발자국도 못가고 되돌아서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평소에 비위가 약한 나로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일회용컵라면 용기에 퉁퉁 불은 면발이 모래위에 넘어져 있고, 나뒹굴고 있는 수박껍질과 함께 치킨의 흔적인 닭 뼈다귀들이 난무하고, 여기에 각종 쓰레기가 뒤범벅이 되어 그야말로 모래 반, 오물이 반이다 할 정도로 심난했다. 그리고 도저히 낮이 뜨거워 부끄러운 마음으로 해운대를 떠났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경범죄 위반율이 이웃나라 일본의 44배라고 한다. 여기에서 경범죄라 하면 주로 소란 죄나 오물투기, 노상방뇨 등 기본적인 질서를 말하는데, 백사장에 버려진 오물들을 보면서 조사결과 오물투기가 한 해 일본이 98건인데 반해 우리는 6만940건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통계를 굳이 믿으려고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유독 피서 철 해운대해수욕장에 버려진 오물들을 보고 과히 부끄러운 일임에 분명하다고 고백한다. 이는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정신도 함께 건강해져야 하는데 부와 명예와 외적인 품위에만 올인 하려다 지적성장을 멈춰버린 결과와 같은 것으로 지금부터 라도 우리들의 고질적인 부끄러운 자화상, 달리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하는 행동을 자제하며 우리 모두 생활의 기본이 갖춰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해운대에 대한 글을 쓰다 보니 감춰두고 싶었던 이야기를 결국 하고 말았다. 아니 한번은 꼭 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피서 철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그런 일도 있었지만 잘못된 결과를 묵인한다면 그것은 더 나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해운대는 연가나 엘레지 같은 노래가 있고 영화가 있고, 낭만이 있고, 문화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무더운 여름이면 책을 읽으며 더위를 날려 보내기에는 추리소설이 제격인데 김성종의 ‘백색인간’이나 ‘국제열차살인사건’의 배경이 되는 곳이 해운대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상허 이태준의 ‘석양’, 향파 이주홍의 ‘음구’, 요산 김정한의 ‘그러한 남편’, 최해서의 ‘누이동생을 따라’ 등 다양한 작품들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까까머리 시절 부산에 처음 찾아와 도시와 바다가 어우러진 그 아름다움에 몰입되어 내가 크면 꼭 부산에서 살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이제 한두 해만 지나면 옛말로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삼십 여년을 살면서, 지금은 해운대와는 정반대편에 살면서 그래도 지하철 2호선을 이용해 무시로 해운대에 가보면 역시나 우리나라의 대표 해수욕장으로서의 손색이 없을 만큼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다양한 나라에서 찾아온 이방인들의 모습 속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주변의 건물들에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얼마 전에 무촌과 함께 다녀온 해운대는 바다와 구름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의 뜻에 어울리는 풍경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아름답고 경이로운 장면은 해무가 해운대의 건축물을 사이사이로 점령군이 진격하듯 순식간에 해변을 삼켜버렸지만 한마디로 그 풍경은 나로 하여금 무아지경에 이르게 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해운대에 오셔서 그 경이로운 풍경을 보고 가시는 행운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고운 최치원의 해운대를 그려보고 또 해운대의 정취와 함께 해운대의 매력에 빠져 있다 보면 동안 해운대를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와 함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약속을 못 지킨 사람이 있다면 백사장에 앉아서 그날의 맹서와 함께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며 옛 생각에 젖어보기 바란다. 왜냐하면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으로부터 혹여 상처받은 사람이 있지 않는지 돌이켜보고 반성해야 미래를 위해 긍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싶어서다. 그리고 그런 성숙된 마음으로 바라보면 해운대의 백사장과 파도 등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일 테니까. 또 오물도 함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니까. 아무튼 해운대에 오시면 잃어버린 낭만과 청춘의 문장과 같은 젊음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니 부디 한번쯤 오셔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바다구름이 달맞이 언덕을 넘고 빙딩숲 사이로 점령군처럼 진주해 가는 장관을 보세요. 바로 해운대랍니다.
아마 고운도 이런 모습을 보았을듯 싶습니다. 그래서 해운대라 했겠죠.
동백섬의 등대입니다.
누리마루 넘어로 광안대교가 보이는 군요.
아세아 태평양지역 정상회담이 열린 누리마루의 내부입니다.
다시 광안대교.
문명이 발달해도 자연 앞에 서는 무기력 할 것 같은 사진 이미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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