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蘭)을 분갈이하면서
張 炳 善
마음눈이 어두웠다. 사물을 겉만 보고 속을 잘 보지 못한 탓으로 고생을 시켰다. 우리 집 난에.
호접란(胡蝶蘭), 그 화분 하나를 들여놓은 지 3년이 됐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정성 들여 키웠다. 봄여름에는 햇볕이 내리는 베란다에 내어놓고 5〜6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겨울엔 아파트 거실로 옮겨 햇볕 드는 방향으로 옮겨주면서.
그랬더니 보답이라도 하는 듯 지난 3월 어느 날, 구둣주걱 같은 여덟 개의 잎 사이로 꽃대를 올렸다. '올해는 꽃을 피우나 보다.'라며 눈길이 거기로 자주 간다. 날마다 조금씩 꽃대를 뻗더니 어느덧 50cm 정도의 높이로 자랐다. 두 줄기에 열두 꽃망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꽃망울이 벙글더니 하얀 꽃잎에 빨간 점이 알알이 박힌 꽃을 피운다. 그윽하게 풍기는 난향을 맡고자 즐거운 마음으로 화분 곁에 다가간다. 외출할 때도, 집에 돌아와서도 인사하듯 바라본다.
난이 제 열매를 맺고자 꽃을 피우지만, 나까지 즐겁게 해 주니 고맙다.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제 열매(결실)를 맺고자 하는 일이 남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어떻게 사는 게 그럴까. 좋은 작품을 쓰는 것, 그것이 내겐 열매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난처럼 보는 이(독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K 회장(기업 경영인)을 만났다. 내 나이 또래인 점잖은 인상의 그 사람과 가까이해 온 사이였다. 만날 때마다 서로 반갑게 대하던 이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30층에 닿자 서로 먼저 내리라며 양보하다가 내가 앞서 내리면서,
"저희 집에서 차 한잔하실까요?"
"예, 그러지요."
거실로 안내하는데 그는 탁자에 놓인 화분 앞으로 다가간다.
"고운 난입니다."
"네, 10여 일 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꽃을 바라보던 K 회장이 주춤거리며 말한다.
"저도 난을 키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 정도 자랐으면 분갈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요. 고맙습니다."
차를 마시며 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 시선은 화분에 가 있다. 난의 잎과 줄기(꽃대)에 비해 화분이 적어 보인다. 목 부분 지름이 7cm 정도의 잘록한 선물용 화분 속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연하디연한 새 뿌리가 얽히며 화분 벽에 닿아 아파했을 것이다. 꽃만 보고 즐거워하던 내게 난은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준 난이었다.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난이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난초가 '군자의 격'이라 하더니 가히 그렇다.
"두어 달 즐기겠습니다."라며 K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인사한다. "오늘 난에 대한 설명을 잘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내 방으로 가서 컴퓨터를 켠다. '분갈이'를 검색하니 주르륵 자료가 뜬다. 2년마다 한 번씩 해야 할 분갈이를 3년이 지나도록 그냥 두었으니 미안한 마음이다. 배양토(培養土)의 양분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좁은 집에서 많은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비단 분갈이만이 아닐 것이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도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입지나 심기를 읽지 못한 채 내 주장만 내세웠을 것이다. 지금 어떤 환경에 처하고 있는지 살피지 못하고, 내 처지로만 생각하고 대하지 않았는지. 좁은 식견으로 사려 깊은 관찰과 이해 없이 살아온 근시안적인 ‘마음눈’ 때문일 것이다.
사람도 그러하지만 생물도 그렇다. 성장하면 옷을 갈아입는 게 당연한 것이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전체를 보지 못하고 눈앞의 부분적인 현상에만 집착하여 제때에 분갈이를 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자책감 때문인지 그 이튿날 서둘러 꽃집을 찾는다. 점원에게 난의 현 상황을 설명하니, 청자색 사각 도자기 화분(가로세로 13cm, 높이 20cm) 하나를 추천해 준다. 그 화분과 분갈이할 재료(배양토, 나무껍질, 물이끼 등)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꽃집에서 받은 분갈이 유인물에 적힌 요령에 따라 상한 뿌리를 잘라내고, 큰 분에 옮겨 심으니 마음이 가뿐하다. 마치 내가 넓은 새집으로 이사해 온 듯, 흐뭇한 기분이다.
잘 휘는 공예 철사를 사다가 축 늘어진 꽃줄기를 받쳐주고, 배양토 습기가 쉬 마르지 않도록 흰 돌도 구해다가 화분 윗부분 흙에 촘촘히 깔아준다. 때때로 창문을 열어 환기도 시켜준다. 그동안 좁은 집에서 발(뿌리) 뻗기가 불편했을, 아팠을 난에 대해 미안한 생각으로, 변변하지 못한 주인에 개의치 아니하고 고운 꽃을 피워 준 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우리 집 난처럼, 그동안 피상적으로 대해 온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애들에게 꾸중하던 내 모습도 스친다. 그들의 입지와 환경을 살피지 않고, 드러난 사실만 보는 근시안적인 자신이 아닌가. 속속들이 깊은 내면을 꿰뚫지 못하고, 얕은 지식으로 글을 쓰니 독자에게 공감이나 즐거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참에 내 심안(心眼)의 분갈이도 해야겠다. 대상을 ‘통찰(洞察)하는 보다 밝은 눈’으로.
* 月刊文學(2012. 11월호) 게재분
<읽은 이의 평>
1) 서병태 전 창작수필문인회 회장 (2012 11. 6)
옥고 읽고, 졸고 ‘계주(繼走}’를 보냅니다. 결구 ‘이 참에 내 심안(心眼)의 분갈이도 해야겠다. 대상을 통찰하는 보다 밝은 눈으
로.’가 백미(白眉)네요.’
2) 최재길 수필가 (2012 11. 20)
뒤늦게 월간문학을 뒤적이다가 부회장님의 작품 <난을 분갈이하면서>를 읽었습니다. 작품 속에서 난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습
니 다. 이 작품을 생활문학 홈페이지 <아름다운 글>란에 올리고 싶습니다.
3) 김혜식 수필가 (월간문학 12월호 294면에 게재된 월평, 2012 12. 01)
난을 분갈이하면서 그 동안 겉만 보고 그 이면을 보지 못했던 자신의 근시안을 탓하는 글, 장병선의 「난을 분갈이하면서」의
작 품도 호감이 간다. 자신의 잣대로 세상사를 함부로 잰 지난날에 대한 자책 또한 설득력 있는 내용이다. ‘이 참에 내 심안의 분갈
이도 해야겠다. 대상을 통찰하는 보다 밝은 눈으로’라는 끝부분의 내용이 글의 품격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물상의 이면을 꿰
뚫는 것은 헤안이다. 그 혜안을 독자에게 올바로 전이시키는 것도 수필가의 역할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