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현종은 전쟁 중 베트남에서 시작된 불교이다. 이것은 '서로의 안에 존재하다'는 의미를 가진 종교이며, 동시에 참여 불교의 한 형태이다. 산 속에서 은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불교인 것이다. 이것은 원래 중국의 임제종에서 나왔으며, 그 학파의 42대이다.
'접接'은 '접촉을 갖는다'는 뜻이다. 참여의 뜻이 이미 이 글자에 담겨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기 자신과 접촉을 갖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자기 자신과 접촉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을 잊기 위해 종교, 정치, 운동, 책과 같은 다른 것들과 접촉을 갖는다. 자유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어떤 다른 것을 우리 안에 초대한다. 텔레비전에게 우리 자신을 열어 그것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를 지배하게 한다.
그러므로 '접촉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지혜와 이해와 자비의 근원을 발견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접촉함을 말한다.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이 곧 명상의 의미다. 그것은 그대 몸 안에서, 그대의 느낌 안에서, 그대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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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現'은 현재의 시간,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해야만 한다. 오직 이 순간만이 진정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천국에 태어나기 위해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평화롭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자비롭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기쁘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이다.
'현'은 또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 현실로 나타내는 것, 깨닫는 것'을 뜻한다. 사랑과 이해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그리고 세상 속에서 실현되는 진정한 것이라야 한다. 그것이 '현'이라는 글자의 뜻이다.
영어나 불어에는 접현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다. 접현은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어울려 존재하다 interbeing'라는 단어와 그 정신이 같다. 이것은 영어에서는 새로운 단어다. 우리는 하나 속에 있는 여럿, 여럿 속에 있는 하나에 대해 말했었다. 한 장의 종이 속에서 우리는 구름, 숲, 벌목꾼 등 다른 많은 것들을 본다. 그러므로 내가 곧 그대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곧 나이다. 그것이 '서로의 안에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다. 우리는 서로의 안에, 서로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의 안에 존재함을 일깨우는 이 종교에는 몇 가지 계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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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불교적인 것을 포함해 어떤 교리, 어떤 이론, 또는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말라. 어떤 것도 우상화하지 말라. 모든 사상과 생각들은 단지 길을 가리키는 수단일 뿐,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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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율은 그 깊은 의미에서 생명 가진 것들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포함하고 있다. 인류는 관점에 대한 집착 때문에 너무도 많이 고통받고 있다.
"네가 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난 너의 목을 베겠다."
진리의 이름으로 우리는 서로를 죽이고 있다. 세상은 지금 그런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시즘이 인간의 정신에서 나온 최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미친 생각에 불과하다고 여기며,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붙잡혀 있다.
진리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붓다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가 있다. 평화는 오직 하나의 관점에 집착하지 않을 때만이 가능하다. 광신주의에서 자유로울 때만이 가능하다.
'둘째, 그대가 현재 지니고 있는 지식이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현재의 관점에 얽매이거나 마음이 좁아지는 것을 피하라.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관점을 받아들이도록 자신의 관점에 집착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수행하라. 진리는 삶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관념적인 지식 속에 있는 게 아니다. 그대의 삶 전체를 통해 배울 준비를 하라. 그대 자신과 이 세상 속에서 언제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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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통해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도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자신의 관점과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관점에 대한 무집착이야말로 깨달음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셋째, 그대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아이들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말라. 어떤 권위나 위협, 돈, 선전, 심지어 교육을 통해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자비로운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광신주의나 편견을 버릴 수 있도록 도우라.'
'넷째, 고통과 접촉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고통 앞에서 그대의 눈을 감지 말라. 이 세계의 삶 속에 있는 고통의 존재에 대해 자각을 늦추지 말라. 개인적인 접촉이나 방문, 그림이나 소리 등 모든 수단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 그런 수단들을 통해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고통의 실체에 대해 그대 자신과 타인들을 일깨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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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행한 최초의 설법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고 불린다. 그 첫 번째 진리가 고통의 존재이다. 그대는 고통에 대한 그런 종류의 접촉과 자각이 필요하다. 고통이나 아픔과 만나지 않는다면, 그대는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이나 아픔의 원인을 찾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심리적인 사실 때문에 고통받는다. 우리는 자신의 바깥으로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고통받는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속에 있는 고통과 접촉한다면, 그리하여 그 고통에 마음이 움직인다면, 우리는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이다. 그때 우리 자신의 고통은 말끔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다섯째, 수백만 명이 굶고 있는 동안에는 부를 축적하지 말라. 생의 목표를 명예나 이익, 재산, 또는 감각적인 쾌락에 두지 말라. 단순하게 살고, 그대의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라.'
한 경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소유를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결코 만족을 모른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이는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며, 자족의 원리를 따른다. 그는 진리의 길을 따르기 위해 단순한 삶을 산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의 실현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
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단순한 삶은 파괴적인 기계들로부터 가능한 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스트레스, 우울증, 고혈압, 다른 현대적인 질병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삶을 채우고 있는 압력과 불안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만 한다.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더 적게 소비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다.
'여섯째, 분노나 미움을 지속하지 말라. 분노와 미움이 일어나자마자 그 분노와 미움의 원인이 된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비에 대해 명상하라. 자비의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라.'
'자비의 눈으로 생명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라'는 구절은 불교 경전 <연화경蓮花經>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을 써서 그대의 방에 걸어 두라. 원래 중국어로는 다섯 글자다. '생명을 바라보는 사랑의 눈 慈眼視衆生'이 그것이다.
'일곱째, 주위의 소란스런 환경 안에서 그대 자신을 잃지 말라. 몸과 마음의 평화를 되찾고, 깨어 있음을 실천하기 위해, 그리고 집중과 이해를 키우기 위해 호흡 명상을 하라.'
이 계율은 전체 계율의 중간에 있다. 이것은 열네 가지 계율의 심장부이며, 가장 중요한 계율이다. 다시 말해, 깨어 있음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계율이 없이는, 깨어 있음 없이는, 다른 계율들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이것은 어깨에 메고 다니는 긴 장대와 같다. 동양에서는 장대를 어깨에 메고 양끝에 물건을 매달아 지고 다닌다. 이 계율은 그대가 어깨에 메고 다니는 장대의 중심부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