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ko.wikipedia.org/wiki/이아주> 를 참조바랍니다.
용인이씨종보에, 인촌 김성수 님의 부인 이아주 님에 관한 글이 있어서, 갈무리하여 게시합니다.
글쓴이: 이진강님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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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선생과 이아주 여사
나이 80세가 된 지난해 2023년 3월 14일 인촌기념회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의미 있는 공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노년에 주어진 영예로운 직이지만 그만큼 할 일이 많고 중요한 자리여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일하고 있다. 인촌기념회는 구한말,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살아오면서 나라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에 크게 기여하신 인촌 김성수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1966년 5월 9일 설립된 재단법인이다. 인촌 선생은 1891년 10월 11일 전북 고창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의 고등학교,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후 1915년에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민족자립교육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그때 인촌은 약관의 나이 24세였다.
1919년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20년 4월에는 민족언론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30세 이전에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사학의 명문 고려대학교로 발전시켜 민족사학의 터전을 닦고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해방 후에는 그동안 축적한 재력과 인재를 기반으로 이승만, 김구 등 임정 요원의 귀국을 돕고 그들이 마음 놓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거처를 마련하여 줌과 아울러 필요한 자금을 후원하였다. 뜻있는 정치인들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인 정당정치의 초석을 세웠다. 헌법학자 유진오로 하여금 제헌헌법의 초안을 만들도록 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골격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헌법에 경자유전의 조항을 삽입하게 하여 농지를 산업자본화함과 아울러 사회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획기적인 농지개혁의 길을 열었다.
좌우대립이 극심한 어려운 정치상황에서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초심을 잃고 독재의 길로 나가자 야당 출신 부통령으로 독재에 항거하기도 했다. 인촌 선생은 그야말로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으로 일생을 사신 분이다. 인촌 김성수 선생의 부인이 아주 여사다. 이아주 여사는 1899년 음력 7월 19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용인이씨 38세손 함흥파 이봉섭의 딸로 태어났다.
18세에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에 입학한 여사는 1919년 3. 1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 대열에 앞장섰다.
이 만세운동으로 여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사를 변호하던 김우영 변호사의 권유로 인촌 선생이 그 재판을 방청하게 되었다. 재판을 지켜본 인촌 선생은 여사의 의연함과 독립정신에 감명을 받고 그때부터 재판에 도움을 주고 옥바라지는 물론 석방 후 여사의 병간호에도 힘을 쏟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촌 선생의 마음속에는 이 여성과 함께라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민족의 독립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생겨났다. 1년 전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고광석을 대신하여 집안을 이끌어 갈 김씨 집안의 여주인이 바로 이 여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여사와 결혼할 결심을 하고 정신여학교 교장 김필례 선생에게 중신을 부탁했다. 석방 후 고향 강계에 내려가 있던 여사는 김필례 선생으로부터 김성수의 청혼 의사를 전달받고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자 하였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여사는 부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는 인촌 선생의 진심을 알게 되고 자신의 생각도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런 마음이 큰 힘이 되어 부모님을 끝까지 설득하여 결혼승낙을 받았다. 두 사람은 1921년 1윌 13일 결혼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과 이아주 여사의 결혼은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이나 집안 간의 인연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완수하고 큰일을 해나가고자 하는 동지적 결합이었다. 두 분은 결혼 후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현재의 고려대학교로 발전시키고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인촌 고택에 가보면 사랑채에 독립자금을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금고가 보물처럼 보존되어 있는데 그 금고와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이 에피소드는 추후에 지면이 허락되면 종보에 게재할 수 있다)
이아주 여사는 슬하에 5남 3녀 8남매를 두었는데 전 부인 소생의 4남 1녀를 포함하여 13남매를 잘 키워서 모두 큰 인물로 성장시켰다. 여사의 손자인 고려대학교 전 총장 김병철은 할머니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의 앞가슴에는 일경에게 채찍으로 맞아 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부잣집 며느리이자 부통령을 지낸 분의 아내이지만 늘 겸양과 겸손으로 검소한 생활을 해 오셨다. 할아버지 인촌 선생이 세상을 뜨신 후에는 매일 같이 소복을 입으시고 고려대학교 교정 뒷동산에 있는 묘소에 들러 풀을 뽑고 관리하면서 참배를 하셨다. 필자가 고려대학교 재학 중 인촌 묘소 앞 벤치에 앉아서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소복을 입은 여인이 묘소에 와서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 김병철 총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여인이 바로 용인이씨 문중의 이아주 여사였는데 그때 알아 뵙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촌기념회 이사장직을 맡고 20여 일이 지난 2023년 4월 3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에 있는 이아주 여사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남향받이 넓은 자리묘소에 설치된 용인이씨아주 여사지묘 (龍仁李氏娥珠女史<진강 이사장 이아주 여사 묘소 참배>之墓) 비석 뒷면에 다음과 같은 행장이 실려 있다. "선비 이아주 여사는 용인 이봉섭 공 유인 김해김씨의 따님이시다. 서기 1899년 을해음 7월 16일에 나시어 22세에 선고 전 부통령 인촌 김성수 공의 후배 되시다. 선비는 학창시대 3.1독립운동 헌신 분투하시어 여러달의 옥고를 겪으셨으며 부자(남편)의 광복운동과 육영 및 산업, 언론사업에도 내조의 공이 많으셨다.
1968년 무신 윤 7월 19일에 돌아가시니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벌에 안장되셨다. 장남 상만 차남 상기 상선 상흠 여 상옥은 전배 장흥고씨의 소생이요 상오 상종 남 상석 상겸 여 상림 상현 순민은 선비의 소생이다." 인촌기념회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이아주 여사의 묘소를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다.
용인이씨 문중의 인연과 고려대학교 졸업이라는 학연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나라의 독립과 교육,언론, 사업발전에 큰 공적을 이루신 인촌 김성수 선생과 이아주 여사의 삶을 짧게나마 살펴보게 된 것이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다.
용인이씨 문중에 이처럼 훌륭하신 조상님이 계심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아주 여사님에 관한 새로운 자료와 정보가 입수되면 종원 여러분들께 신속히 알려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인촌기념회 이사장
용인이씨 37세 손
이진강
*편집자 주: 전.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출처: 용인이씨종보 제150호(202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