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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디딤돌! 원문보기 글쓴이: 예수중앙관리위원회
제5장 중세교회의 사회복지
제1절 시대적 배경
중세의 자선사업은 초대교회에서 행하였던 자기집단 내에서의 구제와는 달리 이민족․이교도에게까지 자선을 행하였으며 비교적 제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봉건제도의 확립으로 유럽 전역에 계급적 교권정치가 시행되어 민주주의 의식은 점차 사라져 가시 시작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걸인방지책을 내놓고 나그네, 병든 자, 순례자들을 위하여 구제기관을 이루었으며, 나중에는 직원들이 부패하여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중세시대에서도 노예제도는 있었으나 고대와는 달리 노예에 대한 대우는 매우 인격적이었으며, 교회에서는 일반인과 동격으로 예배에도 참석할 수 있고, 자유민과 결혼도 허락하였으나 봉건제도하에서의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노예 및 농노제도를 폐지하지는 않았다.
중세의 사상적 흐름은 과학적인 사고보다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고에 젖어 현세보다는 내세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사상은 스콜라(Scholasticism)철학이었다. 이 스콜라 철학은 중세의 전반(8세기-15세기)을 통하여 국민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특히 기독교의 신학으로서 서방 기독교의 대표적 사상이 되었다. 이 스콜라라는 말은 처음에는 구도자 또는 학자라는 뜻이었다. 그 다음에는 학자를 배출하는 학교를 의미했고, 그 다음에는 교수에 의해서 형성된 학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스콜라라고 하면 중세를 대표하는 학문이고 사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스콜라철학을 대표하는 안셀롬(St. Anselm AD1033-1109)은 그의 저서 ‘대화(Prosologium)’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는 그 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믿기 위하여 안 것이 아니고 알기 위하여 믿는다. 나는 믿는 내 마음이 아니면 알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실재는 심중에 있으나 때로는 마음밖에도 있다. 존재라고 하는 속성을 가지는 실재는 단순히 관념상의 실재보다도 우위에 있으며, 그러므로 신은 단순히 심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외부에도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외에도 그리스(Greece)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세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제2절 중세의 사회복지제도 및 시설
중세의 자선사업은 비교적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제도와 시설이 많이 설립되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제도와 시설은 구빈원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십자군, 수도원, 기사단, 공익 전당포 등이 중세 자선사업의 중요한 제도이며,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1. 구빈원
⑴ 구빈원의 기원과 의의
중세교회에 있어서 자선사업의 방법에는 개인들에 대한 무차별 구제와 집단적 수용시설에서의 구제 등 두 종류가 있었다. 구빈원은 후자에 속한다. 이 구빈원이 생기게 된 기원은 수도원에 부설되었던 숙박소에서부터인데 차음에는 순례자를 접대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나 나중에는 노쇠자, 병자, 과부, 고아 등 필요로 하는 자들 주거로 사용하는 종합수용시설 형태였다.
구빈원에 대한 어원은 "Hospital" "Spital" "Maison-Dieu" "Domus-Deus" 등으로 불리워졌으며, 영국에서는 "Almshouse"라고 하였으며, 불란서에서는 "Aumorerie" 라고 불렀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는 구빈원은 이름에 걸맞는 기능을 하기보다는 종교적인 시설로서 치료보다는 보호를 주로 실시하는 시설이었다. 특히 구빈원은 영혼의 휴양을 주목적으로 운영되었으므로 육체보다는 영혼에 과학과 기술보다는 신앙과 사랑에 주안점을 두어 운영하였다. 그 당시 유럽지역에는 이와 같은 시설들이 도처에 많았으며, 그 시설들이 자선사업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⑵ 구빈원의 조직과 관리
① 입원규칙
구빈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심사를 필요로 했다. 수용심사에는 ⓐ교회위원의 판단과 ⓑ보호자의 의사에 따라서 ⓒ이미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있다. 수용심사의 특색으로는 먼저 구빈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승인을 받게 하는 것이다. 즉 먼저 들어간 사람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입원지망자에 대한 입원료 규정은 현재의 양로원과 유사했는데 무료와 유료가 있다. 입원지망자의 형편과 재산 상태에 따라 유료와 무료가 결정되는데, 유료의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유료의 재원자가 사망할 시 그가 가지고 들어온 재산은 생존하고 있는 재원자들에게 분배해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② 직원의 임명과 임무
직원의 임명권은 원장, 수도원장, 관리자, 유지자 혹은 교구장으로 구성된 교회위원회에 있었다.
구빈원의 직종은 원장, 목사, 수도승, 회계, 소사(召使)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원장, 목사, 수도승, 회계 등은 주로 목사가 임명되었으나 가끔 의사가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소사의 직종에는 요리사, 제빵사, 주조인(酒造人), 운전사, 세탁부 등이며 이들은 유급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구빈원에 입원하고 있는 재원자들도 무급으로 일정부분의 일을 맡아서 하였다.
직원의 업무분장인 정식직원은 관리, 행정, 상담 등을 맡았으며, 유급의 소사는 맡은 분야의 잡역을 맡았으며, 재원자 또는 외부 자원봉사 인력들은 기도와 동원에 참여하였다.
③ 구빈원 직원과 재원자의 생활
구빈원 설립 목적이 영혼의 휴식을 제일목표로 하기 때문에 구빈원의 직원과 재원자들의 생활은 당연히 종교생활을 하게 된다. 재원자들은 다양한 종교의식에 참여하여 품성을 높이며, 인격을 도야했다. 그들은 신체가 허약해짐에 따라 영혼을 위하여 내세에 대비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직원과 재원자들은 엄격한 기도생활을 하였다. 거동이 자유로운자는 모든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해야 하며, 병중에 있는 자는 같은 시간에 침상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구빈원을 설립한 설립자에게 감사하고 노쇠한 재원자들의 건강과 마지막 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감구하였다. 예루살렘에 창설한 대구빈원에서는 저녁시간에 특별한 기도를 드렸다. 이들은 로마교황, 국왕 및 제후, 순례자, 사라센(Saracen)인에게 포로된 자 그리고 구빈원에 물품을 기증한 자들의 행복을 빌었다.
④ 물질적 보호
영혼 보호에 중점을 둔 구빈원이긴 하지만 육체 보호에도 관심을 가지고 등한시하지 않았다. 구빈원에서 제공되는 음식물은 3가지가 있었는데 ⓐ수용자의 일상생활에 제공되는 것 ⓑ종교적 경축일에 공급하는 것 ⓒ일시적 체류자에게 공급하는 것이 있었다.
음식물 이외에 형광, 연료 등이 제공되었으며, 침대는 그리 흔하지 않았으나 기증품이 있을 경우 지급되었으며 그리고 구빈원에서는 목욕, 세탁, 이발 및 갱의를 시행하였으나 그렇게 청결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구빈원에서는 재원자들의 후생복리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오늘날과 같은 수준은 되지 못하였다.
⑤ 재정
구빈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는데 구빈원의 재정은 ⓐ기부금 ⓑ유언에 의한 기부금품 ⓒ자선시(Charity Bazaar) ⓓ입원료 ⓔ임의 및 강제의 의연금 등이 주된 수입원이었고, 그 외에도 왕령(王領)의 수익(영국), 토지로부터 생기는 지대, 사교직(司敎職) 결원시 보조금, 국왕의 하사금과 기부금, 일반인의 기부금 등이 있으며 그리고 재원자의 구걸, 징수원의 모금, 순례자의 기부금품 등이었는데 이들 기부금은 임의 혹은 강제 기부금이었다. 위의 기부금품 중에서 흥미가 있는 것은 자선시에 의한 기금모금이다. 자선시는 대부분 구빈원의 창시자의 축일에 행해지는데 그 기간은 2-3일이 보통이나 이익이 생길 수 있을 때에는 2주간 이상 계속되는 때도 있어 자선시를 통한 모금은 구빈원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⑶ 구빈원의 폐해
구빈원의 창설은 분명히 그 당시에 있어서는 요구호자에게 절실한 제도이며, 시설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관리상의 문제이다.
구빈원 관리상의 문제가 되는 것은 구빈원의 보호자들은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구빈원 시설을 무료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또한 공무원들은 숙사를 무료로 이용하였다. 이와같은 과정에서 구빈원의 보호자는 봉사의 대가로 뇌물을 받고, 부식물을 판매하는 등 부패와 권력남용이 심했다.
「참고」보호자란 구빈원에 재원중인자의 법적 보호자를 의미함. 이 보호자는 당시 구빈원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하여 서기 1315년에 법령을 제정하였는데, 이 법령에서 ‘왕의 명에 의하여 부식물 판매를 금지한다.’고 규정하였다.
② 보호에 관한 소송 문제이다.
한편 보호에 대한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 설립자 대표와 후의 대표자와는 뜻이 맞지 않아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다. 1300년경 어떤 교회위원에 대한 조사에서 ‘그는 빈민으로부터 그 구제금품을 기만 편취하며 여행자와 병자를 수용하는 방을 폐쇄할 뿐만 아니라 예배당을 더럽혔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의회 혹은 행정당국이 조사한 바에 의하며 구빈원의 직원은 대다수가 방종한 생활을 하였으며, 구빈원 이외의 일에도 종사하여 구빈원 업무를 등한히 하였다. 그리고 많은 교회위원들이 임지에 거주하지 않고, 위원들 중에는 수 개의 구빈원을 담당한자도 있었으며, 포츠 마우스(Portsmouth)에서는 18세 청년이 교회위원에 임명되었고, 뉴톤 갈스(Newton Garth)에서는 16세 소년이 구빈원 원장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구빈원의 직원들은 권력을 잡기 위한 소송, 치부를 위한 부당한 행위, 2중직에 의한 업무소홀, 연소자 관리임명 등의 인사부조리가 만연하여 구빈원 원래 설립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구빈원이 당초와는 달리 12세기 이후에는 대부분이 사교의 감독밖에 놓이게 되어 감독 소홀을 틈타 관리자들은 구빈원을 수입의 재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③ 걸식 장려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설립한 구빈원이 도리어 걸인들을 양산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구빈원의 운영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구빈원에서는 빈궁한자이면 누구에게나 식물과 거처를 제공하여 주는 규정 때문에 그 규정을 악용하여 구빈원과 구빈원을 돌면서 걸인생활을 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성을 예방하지 못한 것은 체계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잘못된 구제는 걸인을 늘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2. 십자군
⑴ 십자군 창설의 의의
십자군은 중세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 성지가 이교도들에게 점령당하여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심지어 성지 참배자들이 부당한 학대를 받거나, 학살당하는 일까지 일어나서 유럽의 기독교들이 성지회복을 위하여 군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십자군 조직은 처음에는 단순한 종교적 의분에 의해서 생겨났으나 그 전쟁의 회수가 늘어남으로서 성지회복 이외에도 다른 목적들이 추가 되게 되었다. 그리고 십자군이란 이름은 이 군대에 종사하는 군인들은 모두 우측 어깨에 적십자 휘장을 붙이고 다녔으므로 십자군이라고 부르게된 것이다.
십자군에 의한 십자군 전쟁은 서기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약 2세기에 걸쳐서 원정에 의한 전쟁이 수행되었다. 원정군 가운데에는 왕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있고, 왕의 형제들, 아들들 심지어 소년들이 십자군에 참여하였다.
소위 성전(聖戰)이라고 하는 십자군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랐으므로 거기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⑵ 십자군 전쟁의 결과와 중세자선사업에 미친 영향
십자군 전쟁에 대한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가 있는데 본고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중세자선사업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① 교회의 재산이 증대되었다. 십자군에 출정하는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떠남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을 교회나 수도원에다 저렴한 가격으로 팔거나 위탁을 하고 떠났다. 그 결과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의 재산이 교회의 재산으로 되어 교회나 수도원은 많은 재산을 확보하게 되었다.
② 봉건제도다 무너지고 새로운 군주중심의 국가 형태로 변모하였다. 봉건제도의 약화는 곧 소시민과 중산층이 힘을 발하는 사회로 바뀌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새로운 군주중심의 정치는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③ 십자군운동으로 인하여 인구가 이동하게 되고 모슬렘 나라들과의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산업 도시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십자군의 활동은 중세자선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교회의 재정 확보는 교회로 하여금 자선사업을 수행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각종 교역의 확대는 전시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십자군은 중세의 중요한 자선단체라고 할 수 있다.
3. 수도원
소도원은 중세자선사업의 중요한 시설이었다. 수도원은 6세기의 베네딕트(ST, B둗얓션. A.D 485-543)에 의해 창설된 이래 발전하여 가장 긴 기간동안 자선사업기관 및 시설로 존재해 왔다.
수도원은 교회가 발전하던 중세 초기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현실적 경향을 띄고 있을 때 공간적으로는 세속으로부터 떨어진 빈곤, 순결, 복종, 계율을 지키는 신앙적인 조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도원은 서구에도 있었는데 각파의 수도원은 그리스도적 생활로서 당연히 자선을 중시 여겼다. 베네딕트회에서는 수도원 수입의 10분의 1을 빈곤자 구제에 쓰도록 하고, 시여자인 승녀는 구제를 원하는 사람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금품을 시여하였다. 특히 축제일 전야에는 많은 시여를 행했다.
수도원의 자선 담당자는 신분이 높은 승녀가 많았으며 그들은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원조를 하였다. 자선은 당시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나타내는 대규모적인 자선이었으나 이러한 형태의 구제는 초기에 사교가 빈곤자를 숙지하고 행하던 때와 비교할 때 주관적이고, 비조직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중세말기 구빈법이 생성되던 때에는 무조직, 무분별한 수도원의 자선은 걸식을 구제하는 만큼 걸식을 증가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렇듯 중세말기에는 수도원이 많은 비난을 받았다. 14세기경부터 15세기에 이르는 동안에는 수도원의 관리를 맡은 수도승들은 태만하고 사치에 빠져 빈곤자에 대한 애정은 식었고, 이웃에 사는 빈궁한 그들에게까지도 무관심하여 문전에서의 무차별 구제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 및 행정부에서는 수도원을 비난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수도원을 모두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수도원 역시 앞에서 살펴본 구빈원과 마찬가지로 설립당시의 좋은 목적은 점차 사리지고 시간이 가면서 관리자의 태만과 부패 때문에 선량한 요구호자를 구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사회복지서비스를 수행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4. 기타 전문직 시설
중세 사람들은 정신분열자, 정신박약자, 한센병 등은 마귀 혹은 요괴(妖怪)에 걸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마술에 걸린 것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하여 조소를 받으면서도 부랑(浮浪)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해를 가할 경우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에 대한 치료는 고려하지 않고 다만, 공중의 안전을 위해 수용하고 풀어주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와 생각이 가득한 중세에서도 차츰 종류별 보호를 위한 시설이 생겨나서 점점 전문화되었다.
⑴ 정신이상자 분리 수용시설
정신이상자 분리수용시설은 정신이상의 경중은 구별할 수 없었으나 다른 환자와는 분리 수용하는 시설이다.
⑵ 정신병원 창설
서기 1409년에 서반아의 바렌시아(Valencia)에서 프라이 코퍼 길베르토(Fray Gofre Gilberto)가 정신병원을 창설하였다. 길베르토는 정신병원의 운영을 위해 우인협회(Association de Los Innocentos)를 조직하였고, 이외에도 1561년에 이태리에서의 중교우호단체는 최초의 정신병원이라고 할만한 기능을 했고, 1654년 모데나(Modena)에서는 정신이상의 우려가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시설이 있었고, 독일, 화란, 불란서에도 이런 유사한 시설들이 있었으며, 독일에서는 구빈원을 정신병원으로 전환하는 경우도 있었다.
⑶ 시각장애인시설
시각장애인시설은 다른 시설에 비해 늦게 설치되었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교육과 보호는 중세에 거의 개인의 자선이나 구제에 의존해 왔으나 1785년 자선협회가 12명의 시각장애인 청년에게 생활비를 지급한 것이 시각장애인에 대한 공적 지원이었고,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방직, 제봉, 자수, 가구, 장식, 인쇄, 음악 등의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⑷ 농아자 교육
농아자(聾啞者)의 교육은 수도승인 페트로드 폰세(Pedro de Ponce)가 농아자를 이성이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여 농아자 교육을 실시하게 됨으로서 시작되었다. 폰세는 1570년에 4명의 농아아동에게 발음법을 교수하였고, 1620년에 쥬안 파브로 보네(Juan Parblo Bonet)는 알파벳 문자의 간단화 및 농아자가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방법의 저서를 내놓았다. 이 책에서는 손시늉, 필기문자, 형시(形示)언어, 후음(喉音)문자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후 1660년에 옥스포드 대학의 교수인 죤 월리스(John Wallis)는 수명의 아자(啞者)에게 말을 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외에도 촬스는 몸짓 시늉 방법을 발달시키고 전동 발음법을 사용하여 농아자들의 의사소통 교육을 발전시켜 나갔다.
⑸ 기아양육원
기아양육원에 수용되는 어린이들은 주로 사생아였으나 적출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수도원, 구빈원, 교회 등의 문전에 방치되어 있었다. 방치되는 아동들이 늘어나자 구라파 전역에 기아양육원이 생겨났다.
⑹ 이상에서 설명한 시설 외에도 중세말기에 와서는 많은 요보호시설들이 생겨났다. 즉 아동, 임산부, 전염병환자, 정신병자를 위한 병원, 시각장애인, 농아자, 허약자를 위한 보호시설, 청소년을 위한 교육시설, 성인을 위한 수산(授産)시설, 고아원형 아동보호시설 등이다.
제3절 중세의 길드제도와 자선사업
중세의 일반인들은 장원제도와 교구제도에 의해 살아왔는데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각종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에 의해 동서간 교역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산업이 발발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같은 직업 또는 같은 종류별로 결사체가 구성하게 되었다. 중세에서 중요한 상인길드, 수공업길드, 종교길드를 들 수 있다.
1. 상인길드
2. 수공업길드
3. 종교길드
제4절 중세도시의 발달과 사회문제의 대두
1. 중세도시의 발달
중세의 도시는 오늘날 현대도시와는 규모면이나 기능면에 있어서 비교가 안될 정도이지만 전원적 생활을 하던 중세인들에게는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중세봉건세대에서는 도시의 존재 이유가 거의 없었고, 중세인들은 전원적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13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나타난 상업의 발전이 도시를 발달케 한 주요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도시의 발달을 가져오게 한 구체적인 사건은 영주가 영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귀족에 의해서 열어놓은 시장에 사방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소금, 고기, 철 등을 사고 팔고, 때로는 농산물을 물물교환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거래가 점점 활발해지므로 상품의 증가와 더불어 외국과의 무역이 발달하고 소규모의 공장이 생겨나게 되었다.
도시는 게르만 민족의 침략에 별영향을 받지 않은 이태리에서 먼저 발달하였다. 이에 십자군에 의해 생겨난 신상업 무역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태리 귀족들은 타국의 귀족과 같이 전쟁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자본을 신흥무역회사에 투자하는 것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불란서의 왕후는 귀족을 없애기 위하여 도시를 이용하였으며, 독일의 도시는 황제와 귀족이 서로 치고 막는 것처럼 서로 투쟁하는 곳이며, 영국에서는 도시를 재정적 이유에서 조성하였다.
이러한 도시들은 대부분 상인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러므로 길드에 가입된 시의 취업 및 생활 전반에 있어서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국 런던의 경우는 큰회사가 런던시장을 뽑는 특권을 갖게 되기도 하였다.
초기 도시는 장원과 같이 고립되지는 않았으나 역시 제한된 구역 안에서 활동하는 상업중심지였다. 그리고 중세도시는 15세기까지도 이러한 경향을 띄고 있었으며 국외자(局外者)에 대하는 배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외국에서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상인들을 막아달라는 청원서가 있었다.
이러한 국외자에 대한 대항과 방어는 시민을 결합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고 공동생활에 있어서 정신적 유대를 깊게 하는데 공헌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신흥중세도시는 민주주의 제도라고 볼 수 없으나 봉건제도 아래서의 조직이 더욱 확대되었으며, 장원 길드는 일정한 구역 내에서 같이 사는 사람들만 만날 수 있었으나 도시보다 광범위하고 복잡하며 단위가 크다. 또한 도시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같이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상업상의 기능과 역할이 증대하였고, 중세의 집단생활을 발달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중세도시의 사회문제
⑴ 인구의 감소현상
14-15세기 도시는 대부분이 오늘에 비해 작은 도시이며, 도시인구 측정이 거의 불확실한 상태이다. 그 이유는 2-30년마다 전염병이 돌았으며, 기근이 주기적으로 엄습하였고, 개인끼리의 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등 인구감소 요인이 많아 인구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여름철에는 인구감소율이 더욱 높았다.
⑵ 신생아 사망율의 증가
중세인구의 감소 요인중에 또 하나가 신생아 사망율의 증가이다. 중세에서는 생산율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나 의학의 미발달과 불결로 인해 신생아 사망율은 매우 높았다. 특히 첫째날에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⑶ 남․여 성비의 불균형
남녀성비의 불균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이 남성보다 수명이 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불균형의 예는 세금징수권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385년의 어느 징수권부에는 남자납세자 1,000대, 여자납세자 1,100으로 기록되어 있고, 1475년에는 1,000대 1,140으로 기록되어 있어 남녀성비는 점점 그 간격이 넓어졌다.
이와같은 현상으로 당연히 독신여성의 수가 늘어 나므로서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빈곤여성들을 위한 자혜원(慈惠原)을 설립하고, 그들에게 주거를 제공하고 기타 필요한 생활비를 제공하였다.
⑷ 시민의 건강상태 불량
당시 시민의 건강상태는 극히 불량하여 한센병자, 정신병자, 시각장애인 등은 물론 농아자, 폐질자 등 정신적․신체적 불구자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불구자의 증가는 시민들의 과잉과 결핍, 폭음과 기근, 음란 및 금욕과 같은 생리적 요인의 비참할 정도의 잔학과 각종 폭행, 학살, 사투(私鬪), 악역(惡疫) 등과 종교적인 미신과 무자비한 재판 등이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⑸ 빈부차의 심화
중세도시에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시민계급간의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평생동안 상류계급으로 올라갈 수 없는 직인(職人)의 증가에 따라 이들의 상층계급에 대한 반항과 적대감 등이 사회불안의 한 요인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중세도시의 사회문제는 새로운 도시구빈사업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3. 중세도시 문제에 대한 대책
중세에 도시가 팽창해짐에 따라 갖가지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그 문제의 해결책으로는 소극적인 대안으로 걸식의 금지와 적극적인 구제책으로 기근시의 곡물 급여와 구빈원 관리의 개선 그리고 원외구호(Outdoor relief)를 실시하였다.
⑴ 걸식의 금지
1359년 런던의 포고령에서는 부랑자들이 걸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들을 시로부터 즉시 퇴거할 것을 명하였다. 만일 명령을 듣지 않을 때에는 발을 묶는 형벌을 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375년에는 수세공(手細工) 또는 근로에 의하여 생활할 수 있는 자는 걸식을 하거나 노동불능을 위장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교구장에는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걸인 특히 무뢰한, 도박자, 건강한 부랑자들을 시당국에 보고할 의무와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이방인들은 시내를 통과할 때가 그곳에서 구걸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시내에 지체할 수가 없었다.
1523년 루터가 제정한 자선상(慈善箱)의 규정에 의하면 「구걸은 엄격히 금지하여야 하며 노쇠자 및 허약자가 아닌자는 누구든지 노동을 해야 하며, 교구에 속하지 않은 자는 어떠한 구걸이나 체류도 허락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아우그수부르그, 브레스라우 등은 1523년에, 라티스본 및 마그데부르그에서는 1524년에 구걸과 불법체류를 금지하였다.
한편 영국에서는 걸인을 추방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발사를 고용하여 부랑자의 머리를 짧게 깎게하여 부랑인임을 시민이 알게 하였고, 걸인의 우두머리를 세워 특별한 제복을 입히고 이들로 하여금 걸인을 단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걸인 추방과 비슷한 제도로서 한센병자의 처리를 규정한 법률이 있는데 런던시에서는 1276년에 「나환자는 시중에 거주하여서는 아니 되며 또한 체류 시켜서는 아니된다」고 포고령을 내렸다. 이러한 법률에 영향을 받아 한센병자는 시․읍의 문 내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으며, 한센병자가 우연히 문 내에 들어가게 되었으면 순시관은 즉시 그들을 문밖으로 추방하여야 하고, 만일 한센병자가 완강히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그의 옷을 벗겨 소각하고 알몸으로 문 밖으로 추방하여 문밖의 일정한 장소에서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걸식방지와 걸인의 추방 등은 유럽 전지역에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유럽 전지역에서 시행된 걸인 추방제도는 왜? 생겨났을까? 고금을 막론하고 빈곤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사회복지의 제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안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 빈곤 문제를 잘 다스리지 않으면 악순환을 거듭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중세도시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늘어난 가는 부랑자와 한센병자에 시민의 건강이 위협받게 되고, 노쇠자, 병자 진짜 빈곤자에게 돌아갈 구제물이 낭비되는 상황을 맞게 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구걸을 금지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걸금지와 같은 소극적인 방법만으로는 중세도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⑵적극적인 구제
이장이나 시의 고급관리들 심지어 시자치제가 스스로 구치원(救治院)이나 학교에 재산을 기부하고, 시설을 증설하고, 거기에 필요한 물질을 시여하고, 나아가서는 시재정에서 자선비를 분담하기도 하였다.
그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첫째, 기근시의 곡물 급여가 있었다. 1391년 영국의 런던시장 아담 벤(Adam Bamme)은 대기근을 만났을 때 해외로부터 수입한 곡물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곡물은 시의 공공기금으로 구입하였는데 비교적 넉넉한 편이어서 인근 도시에까지 나누어줄 수 있었다. 한편 런던시장은 곡물가격의 조정을 통하여 시민이 염가로 곡물을 살 수 있게 하였으며, 시에서는 이를 위하여 시영 곡물창고를 설치하여 임의 기부를 받는 등 곡물관리와 가격 조정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인구가 많았던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도 이행되었다.
둘째, 구빈원 관리의 개선이다. 구빈원의 설립과 관리는 대부분 교회 또는 길드가 하였는데 중세도시 사회에서는 점차 구빈원 관리를 도시당국에 이양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변화의 주원인은 많은 도시들의 사설 구빈원이 시민평의회를 조직하는 등 구빈원 운영을 공식화 한데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양과정에서 임의로 이양한 경우도 있고, 권유에 의한 경우도 있다.
관리권을 이양 받은 시당국이나 시민단체들은 관리책임자 및 직원의 임명, 운영지도 및 감독, 예산지원 및 기부금 전달, 요보호자의 보호실태 확인 및 감독을 통해 구제의 질을 향상시키고, 교회나 길드가 운영하는 동안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는데 노력하였다.
셋째, 원외구호의 실시이다. 중세의 대부분의 자선사업은 원내보호였다. 그러나 도시의 발달로 인하여 원내보호 뿐만 아니라 원외구호를 필요로 하게 되어 도시당국은 원외구호제도를 만들어 실시하였다.
이 원외구호는 오늘날 재가복지와 유사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이 프로그램 가운데는 ①불쌍한 처녀에 대한 구호가 있었는데 불쌍한 처녀에게 주거, 의복, 식물, 기타생필품 등을 제공하여 생계를 보호하였고 ②모금활동을 통해 모금한 돈을 시설에 수용되지 않은 요구호자의 생계를 돕는데 쓰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도시의 구빈제도는 중세의 일반적인 자선사업이 그 주체가 교회인 점에 비해 세솟적인 정부기관이 맡아서 실시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5절 중세기독교 자선사업의 공과
중세의 자선사업은 기독교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중세라는 시대의 특성상 교회는 모든 사회영역에서 그 주체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이나 제후들이 교황이나 교회지도자들의 지도하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중세의 자선사업과 행정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하여 시행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따라 행해진 기독교 자선사업은 일에 그 공과(功過)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 기독교 자선사업이 중세사회에 미친 좋은 영향
중세 자선사업의 주요 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