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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나는 새로운 사고방식에 힘입어 기운을 내기 시작했으니, 나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말씀이 주시는 온갖 위로를 나의 현재 처지에 적용하였는데, 가령 어느 날 아침 몹시 슬픈 느낌에 젖어 있을 때 성서를 펼치자 내 눈에 들어온 말씀이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이라. 즉시 내게 떠오른 생각이, 이 말씀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내가 하나님과 인간의 버림을 받은 자처럼 내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이런 방식으로 내가 이 대목을 펼치게 됐겠는가? 라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비록 이 세상이 나를 버린다고 해도 그것이 어찌 불행한 일이요 또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반면에 내가 이 세상을 모두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잃는다면 그보다 더한 상실이 없지 않겠나,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
그런데 이때 뭔지는 모르겠으나 다음과 같은 생각에 내 마음속 충격이 느껴져 이 말을 입 밖에 차마 낼 수가 없었다. 나는 크게 들릴 정도로 말하기를, 아무리 내가 만족하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위선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서는, 이 대목에서 나는 그만 멈추고 말았는데, 하지만 그래도 나는 말로는 못해도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이곳에 나를 보내신 것에 감사하긴 했으니, 내 눈을 열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 아무리 고통스런 섭리를 통해서라 하더라도 나의 지난 삶의 형편을 깨닫고 나의 사악함을 개탄하고 회개하게 해주신 점에 대해서만은 진실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나는 내 성경책을 펼치거나 닫을 때마다 늘, 영국에 있는 내 지인이 내가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나의 다른 물품과 함께 성경책을 싸놓도록 인도하시고 또한 배가 난파된 후에 그것을 건져올 수 있게 도우신 것에 대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하여, 나는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나의 3년차 생활을 시작했고 이 해의 나의 작업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서 독자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으나 뭉뚱그려 말하자면, 나는 게으르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고, 내 앞에 펼쳐진 여러 매일의 업무에 따라 나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구분하였다. [...]
(<로빈슨 크루소>, 164-166)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해봤습니다. 책을 뒤적이다 고른 한 대목이지만 <로빈슨 크루소>의 대부분은 위와 같은 식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신의 섭리(Providence)를 인정할 때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라는 교훈입니다.
개인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는 어떤 '초월적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때, 그 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러한 힘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로빈슨 크루소>는 하나의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 이것이 로빈슨 크루소가 제시하는 답안입니다.
로빈슨이 내놓은 이러한 답은 무한 긍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운명'이나 '팔자'를 말하면서 자포자기하거나 절망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람직하다...' 고 했습니다만, 어떤 이들--특히 예술가들이나 철학자들--은 이 '바람직한 것'에 대해 반기를 들거나 딴지를 걸기도 합니다. 독자로서는 그러한 태도가 멋있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월적 힘'을 인정하지만 그것에 의지하거나 기대기보다, 반대로 '초월적 힘'과 당당히(혹은 무모하게) 맞서는 태도는 그 나름대로 멋집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엄청나겠죠. 신(또는 신의 섭리로 운행되는 세계 전체)와 단독으로 맞설 수 있느냐, 거기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우리를 살 떨리게 합니다(신과 단독으로 대면한 이들--가령 십계명을 받으러 간 모세라든가 가깝게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심정은 짐작조차 안 됩니다). 한편 어쩌면 그렇게 신과 단독으로 맞서는 게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신의 섭리'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위 인용문만 보더라도, 로빈슨 크루소 역시 흔들리고 있고, 스스로 '위선'이란 말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감사 기도로 마무리 되지만... 다른 장애물이 부딪히거나 시련이 찾아오면 다시 또 흔들리는 모습을, 신의 섭리를 의심하는 모습을, 달리 표현하자면 신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역시 인간의 마음은 갈대....
<로빈슨 크루소>는 어떤 면에선, '간증집'으로도 읽힙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간증집은 아니고, 인간의 약한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좀 덜 된(2% 부족한) 간증집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2% 부족한 부분이 <로빈슨 크루소>의 매력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디포는 최대한 솔직히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미셸 투르니에, 존 쿳시와 같은 작가들이 끌린 점 역시 바로 이 점이겠죠. 혹시 <로빈슨 크루소>에 끌리셨다면 [예고]에서 소개해드린 투르니에와 쿳시의 작품 역시 일독을 권합니다.
막막한 고전읽기@물푸레 2기 모험
3차 모임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20120905 WED
1. 로빈슨 섬 생활 간단 정리
* 이런저런 항해 2년, 모로코에서 무어인 노예로서 2년, 브라질에서 농장주로서 4년.
1659. 9. 30. 로빈슨 크루소 무인도 상륙. 공교롭게도 이날은 로빈슨의 26번째 생일.
* 1-2년차: 안전한 거주 공간 만드는 데 몰두.
* 3년차: 빵 만들 생각을 함.
* 4년차: 큰 보트 만들지만 너무 무거워 물에 띄우지 못함.
* 5-10년차: 작은 보트 만들어 섬 일주 여행하려 하지만 해류 떠밀려 암초 위기 겪고 바로 포기.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파이프, 그릇 등 제작 성공. 무인도에 있지만 가진 게 넘치도록 많음을 깨닫고 신에게 감사, 마음 평온 찾음(186-193).
* 11년차: 탄약 부족. 덫으로 염소 잡아 사육.
* 13-23년차: 발자국 발견(221), 마음 불안해져 굳건해졌던 신앙 흔들림. 이후 10년 이상 긴장 모드. 상상에 의한 공포에 시달림. 식인종 소탕 작전 세우지만 합리적 사고(식인종 죽일 권리 있는가)와 종교적 명상(판결의 권한은 신에게 있다) 통해 포기. 난파선 본 후 섬 탈출 계획에 들뜸.
* 25년차: 금요일이(프라이데이) 구출(288).
1687. 6. 11. 28년만에 영국 도착
2. 대니얼 디포(1660-1731)
혁명의 실패, ‘실낙원(Paradise Lost)’의 시대. ‘세속화(secularization)’의 시대. 1648년 30년 전쟁 종식. 교황권의 약화. 영국에서는 1660년 왕정복고(찰스 2세 즉위, * 1649 찰스 1세 처형, 1658 크롬웰 사망). 디포 자신은 비국교도(부유한 장로교도 상인 집안 출신). 스스로를 ‘상인(merchant)’라고 소개하곤 했으나 손댄 사업마다 실패. 생애의 가장 많은 시간을 글을 쓰는 데 보냈으며, <리뷰>라는 1인 신문을 십 여 년 간 편집 & 집필. 많은 정치 팸플릿을 통해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기초한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등장이 당시 지배적 종교관인 섭리주의(Providentialism)와 완전히 부합함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고 설득. 즉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종교적 관점에서 설파한 최초의 부르주아 지식인.
3. 소설 <로빈슨 크루소>와 대중
신화, 역사, 전설, 로맨스 등 기존의 산문 이야기와 구별되는 사실주의 소설(realist novel)의 원조인 <로빈슨 크루소>. 물리적 환경, 사건, 행위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하려 함. 전형이나 알레고리가 아닌 특수하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행위하는 특수하고 구체적 인물이 처음 등장. 예컨대 <로빈슨 크루소>의 섬-주거 공간은 일용품들로 가득 차 있고, 내면 감정 변화(특히 두려움)나 일상적 노동 행위들이 자세히 묘사된다.
덧붙여 이 시기는 인쇄기술 발전, 대중 구매력과 문자해득력 확산으로 대중출판문화가 본격 대두한 시기이기도. 즉 ‘구매력을 가진 계몽된 대중’의 등장으로 인해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등장할 수 있었고 반대로 소설이라는 문화적 생산물이 ‘계몽된 대중’을 적극 구성하였던 것. 1인 신문 발간한 디포는 오늘날의 파워블로거?
4. 자본주의-제국주의적 인간의 영웅적 승리
맑스는 로빈슨 크루소를 가리켜 “초기 자본주의 단계를 상징하는 원형적 자본가”라고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는 “이성적 동물의 영웅적 본능을 보여주는 제국의 예언자”이자 “영국 세계 정복의 진정한 상징”이라 불렀다. 즉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식민주의/제국주의 정신에 대한 문학적 표현의 정수인 것(지금까지는 이런 논의가 일반적).
5. 섭리주의: 문체도 내용도 ‘성경’
신의 섭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로빈슨 크루소가 고독과 공포를 이겨내고 삶의 의지를 확고히 하는 데는 신의 의도가 자신의 삶에 항상 개입하고 있다는 믿음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디포가 살았던 시기는 이러한 생각을 담은 이른바 ‘섭리문학’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신비주의적 요소를 담은 코엘료의 소설들이나 <시크릿>과 같은 영적 측면의 자기계발서들,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뉴에이지 문화상품들은 일종의 ‘섭리문학’이 아닐지.
우리는 때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건 무엇 때문일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 질문 아래 깔려 있는 건 “아무 의미 없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다. 반세기 전, 문학· 철학·예술에서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시기에 이러한 불안은 극에 달했다. 오늘날에는 실존적 불안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 극에 달해 있다. “불안해하지 마. 절망하지 마. 네 삶은 어쨌든 소중하니까”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과 음악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들이 감동을 주며 인기를 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쩌면 우리는 불안해하고 절망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건 아닐까.
(앞으로 확인하겠지만) <돈키호테>에서 모든 게 ‘마법 탓’이라면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모든 게 ‘신의 뜻’이다. 둘 모두 개인 인간의 통제력(컨트롤) 바깥의 어떤 힘,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힘’을 가리킨다. 다른 건 그러한 힘에 대한 태도다. 돈키호테가 나쁜 마법=세상 탓=남들 탓을 한다면 로빈슨은 내 탓을 한다. 로빈슨은 현재보다 더 나쁜 상황을 그려보고(대차대조표(97-98)가 특히 인상적인데, 이러한 비교는 수차례 반복된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에게 있어 현재의 불운한 처지는 받아 마땅한 죗값을 치르는 것이다. ‘죄=감사하는 마음의 결여(188)’라는 점을 생각하면 신은 벌을 내린 게 아니라 오히려 은혜를 넘치게 베푼 셈인 것이다. 따라서 뉘우치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다. 평화는 ‘두려움’ 때문에 깨진다.
6. 두려움과 노동
로빈슨이 최우선시 하는 건 외부로부터의 가해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예방․방지하는 것, 완전히 근절=뿌리 뽑는 것이다. 어떤 사태가 발생하든 일단 경계 태세를 갖추고 보는 로빈슨은 유비무환 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한 ‘노파심의 화신’이다. 위험 신호가 감지되면 상상력을 발휘,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떤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 따위 절대 하지 않는다. 기질상 그는 모험가와는 거리가 멀다.
로빈슨은 ‘최대한 두려워하는 소심한 모험가’ 아니 모험가라기보다 ‘관리자’ 타입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물론 누구도 그를 소심하다고, 모험가답지 않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무인도에서 혼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하나의 알리바이가 아닐까. 정말로 로빈슨이 두려워하는 건 그가 혼자라는 사실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의 존재가 아닐까. 자기가 ‘군주’인 왕국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소유권과 통제권을 침해할까 두려운 게 아닐까. 그 증거로 그가 찾은 마음의 평온은 낯선 발자국 때문에 깨지며, 나중에 스페인 사람들과 영국인 선장에게는 절대 복종 및 작전통제권을 요구한다.
개인적으로 로빈슨이 부러운 건 그가 자신의 두려움을 최대한 드러내어도 좋은 환경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바로 이점이 신이 그에게 내린 가장 큰 은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령 “나는 네가 두려워”라는 말은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는 현대인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돈키호테 역시 두려움이 없다.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겐 상황 통제권이 없다.
무인도에서 로빈슨의 삶이 지속될 수 있었던 건 신의 은총만큼이나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계획적으로 엄청난 양의 노동을 해내는데 그건 두려움을 뿌리 뽑기 위해서다. 동료와 도구 없이 혼자서 맨손으로 하는 노동,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1-2년은 기본적으로 소요되는 노동, 문명 세계의 사람이 봤더라면 “삽질 하고 있네”라는 논평을 듣기 딱 좋은 방식의 노동을 가능케 하는 건 두려움이다. 그리고 두려움을 극복가능하게 하는 건 바로 노동 과정이 수반하는 시간의 통제, 곧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하고 있다는 감각일 것이다.
6. 관리와 정산에 능한, 정직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세계
‘모험가’라고 쓰고 ‘관리자’라고 읽는다. <로빈슨 크루소>는 17-18세기의 세계가 모험과 약탈, 일확천금 기회를 추구하던 세계에서 합리적 관리와 경영의 세계로 이행했음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스페인과 영국(네덜란드)이 식민지에서 부를 획득하는 방식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도 있겠다. 스페인은 식민지 현지의 부를 약탈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영국은 식민지에 농장(플랜테이션)을 세우고 경영, 식민지를 본국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로빈슨이 행한 일도 이와 정확히 같은 것이다. 더구나 배경이 무인도이기에 그의 방식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 인간적인 것, 궁극적으로는 신의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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