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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go 듣go 읽go 쓰go … Today도 걷는다!)
어느 날 아침 문득 느꼈다.
추리닝 입고 운동화 끈 조여 매고 달리다가 문득 느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은 마음뿐 다리는 생각보다 무거워져 있었다.
이제 달리기는 끝났다 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걷기다.
달리면 다리도 무겁고 숨도 가 빨라지는데 걸으니까 편하다.
느리게도 걸어보고
천천히도 걸어보고
보통으로 걸어보고
빠르게도 걸어본다.
어느 걸음을 걸어도 편하다.
엊그제 모임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하였다.
-나는 이미 정치활동, 경제활동을 졸업하였다.
-나는 이제 문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지난 세월, 나는 수많은 모임에 나갔었다.
-정치모임, 경제모임, 문화모임에 나갔었다.
-그러나 이제 문화모임에만 나간다.
사람의 활동은 대개 정치활동, 경제활동, 문화활동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사람의 모임은 대게 정치모임, 경제모임, 문화모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모임의 근저에는 욕구가 있다.
정치모임에는 저 밑바닥에 출세의 욕구가 있고,
경제모임에는 뭐라고 해도 돈의 욕구가 있고,
문화모임에는 자아의 성찰, 발견 이라는 욕구가 있다.
사람은 혼자만 살수 없다.
사람은 가족하고만 살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모임을 가진다.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 사람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 제일 즐겁다.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 내가 생각해 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롭다.
문화모임에서는 특히 이야기를 듣는 것이 큰 기쁨이다.
나는 클래식 얘기에 심취하는 타입이다.
그리스 고전, 이집트 고전, 인도 고전, 중국 고전을 들으면 푹 빠진다.
우리나라의 고전 이야기에도 푹 빠진다.
고전에 나오는 철학, 종교, 과학, 예술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실증이 나지 않는다.
고전이 왜 좋은가 하면, 천 년이 지나고 이 천 년이 지나도 거침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노자의 ‘道德經’ 공자의 ‘大學’ ‘中庸’ 우리나라의 ‘天符經’은 내가 제일 가까이 하는 고전이다.
또, 서역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지 않고는 나를 발견하자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캐물어야 한다.
나는 묻기 위해 문화모임에 나간다.
최근, 어느 강좌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인간에게는 食慾, 性慾, 物慾이라는 3가지 욕망이 있는데, 이게 전부 죄라고 하면서, 이 3가지 악마를 모두 짓밟아야 한다고 들었다.
그럴 듯 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물욕이 죄가 되는 것은 알겠는데, 식욕과 성욕이 왜 죄가 될까 하고 의문이 갔다.
過猶不及이라는 말이 가르쳐 주듯이, 물욕과 탐욕은 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밥을 먹고, 결혼한 부부가 아내와 또는 남편과 같이 자는 것이 왜 죄가 되어야 하는 지,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스승의 설명이 나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날의 스승은, 자신은 一日一食을 한다면서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며, 그런 욕망은 내 속에 있는 악마라고 일러주었다. ‘악마는 늘 집에 있느니라’ 하는
싯다르타는 1일1식을 하였고, 간디도 1일1식을 하였고, 다석
1일1식을 하여도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사실이란다.
총탄을 맞고 암살당한 간디를 제외하면 모두 여든을 넘기었다.
싯다르타는 83세,
조선의 우리선비들은 하루 2끼의 식사를 했다.
조선의 왕도 하루2끼의 식사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왕들은 간식을 3번씩이나 요구하여 하루 5번 수라상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왕들은 단명하였다.
가장 오래 산 임금은 영조대왕이다.
그는 원칙을 지켜 하루 2번 수라상을 받았다고 한다. 83세에 승하하였다.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장수왕 다음으로 오래 산 왕이었다.
식욕에 대해서 나의 경우를 고찰해 보면,
나는 하루 3끼를 챙겨 먹는다.
저녁은 가급적 일찍 먹으려고 한다.
늦어도 6시경이면 먹는다.
그리고 많이 먹지 않는다.
성욕에 대해서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화목한 가족을 가졌다.
물욕(탐욕)에 대해서 나의 경우를 성찰해 보면,
월급쟁이 생활 40여 년(1961-2001)에 기본적으로 근검절약성실의 토대 위에서 큰 굴곡 없이 이루어졌다고 회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평일과 주말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아서, 일주일은 언제나 ‘월화수목금금금’ 으로 출근하는 날로 차 있었다.
그래도 출근하는 아침마다 마냥 마음이 설레었다.
항상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집요하게 출세하려는 애 살이 없었고, 큰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욕심도 없었던 것 같다.
직장의 어느 상사로부터 “당신은 왜 그렇게 애 살이 없어?” 하고 핀잔을 들은 일이 있었다. 모두 윗 전(당신)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을 꼬집어서 한 말이었다.
돈에 대한 집착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욕심이 있었다면, 돈 벌 수 있는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월급과 해외수당으로 밥 먹고 잘 살고, 아이들 공부도 잘 시켰다.
물욕의 정의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으나, 솔직히 내가 탐욕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어 지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조건에서, 성의를 가지고, 성실한 직장생활과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그날 스승의 강의는 나의 생활 철학을 살찌게 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어느 다른 모임에선가, 우리나라 고전 공부하다가 배운 것 중에,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들어 온 외국 종교는 도교 임을 알았다.
그리고 불교가 들어 오고, 유교가 들어 오고, 가톨릭이 들어 오고, 개신교가 들어 오고, 이슬람이 들어 왔단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면서 종교적 존재다.
우리나라 사람은 도, 불, 유, 가, 개, 이 의 삶을 살아 온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바로 우리 조상의 삶은 모두 종교적 삶이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의식 속에는 유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도교도 있고, 가톨릭도 있을 것이다.
나는 모태 가톨릭 신앙이다.
그날의 스승은 교회에 나간다고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니라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바로 내 안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내 안의 악마를 짓밟아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온다…. 그래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다…. 예수가 누구인가? 자기 속의 악마를 이긴 자다. 그래야만 세상을 이긴 자 가 된다….”
“예수의 부활이 뭔가?
예수의 몸이 다시 살아 났다 해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다.
예수가 무덤에서 걸어 나오든, 안 걸어 나오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살아야 한다…. 종교는 지행합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된다….”
스승은 한국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구도자답게 정정한 목소리로 강조 하였다.
그날 스승의 강의 중에서 “예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니다” 라고 하는 말에 수긍이 갔다.
그런 말은 물론 처음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적 지도자 오쇼 라즈니시의 강의에서도 나왔던 말이다.
오쇼 라즈니시는 “예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 부활이다” 라고 강조했다.
교과서에는 인류의 4대 성인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인류의 4대 성인으로서 소크라테스, 공자, 싯다르타, 예수의 이름을 외워왔다.
이중에서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역사적 인물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들의 생애에도 아무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이 두 사람의 삶은 신화적(뮈토스) 색갈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고, 그들의 생애가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스승으로서 이성(로고스)의 화신이었다.
“네 자신을 알라”며 아테네 시민의 의식개혁을 주도 하다가 ‘사약’을 받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공자는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사상가로서 열국을 주유하면서 자신의 정치관, 경제관, 교육관을 펼치려고 애 섰고, 육예(六藝)와 육경(六經)에 밝은 대학자요 위대한 교육자였다.
역사적 인간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싯다르타’와 ‘예수’다.
싯다르타의 경우, 마야 부인이 하늘의 계시를 받고 남편과 성적교접 없이 처녀임신 상태에서 태어났다(아함경)고 하는 이야기와 태어나자 마자 일곱 발자국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오지만, 이는 싯다르타에 부쳐진 재미있는 신화적 양식의 설화에 그칠 뿐으로, 누구도 그것을 사실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비한 ‘기적’의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는 4세기경부터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싯다르타와 신비한 추상적 인물이었던 싯다르타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
구체적 인물을 색신(色身)이라 부르고, 추상적 인물을 법신(法身)이라 불렀는데, 역사적 인격체로서의 불타(色)와 추상적 진리를 구현하는 불타(法)를 나누어서, 색신은 색신대로 법신은 법신대로 각각 발전해 나가도록 혼돈을 배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싯다르타의 문제는 역사적 인간의 문제로 인식이 종결되었고, 그가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열반하여 극락에 올라 영원한 삶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색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법신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류의 4대 성인 중에서 역사적 실존의 인물(사람)이냐, 신비적 기적의 인물(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는 문제로 인류에게 부담을 주는 성인은 예수뿐이다.
예수에 관한 기록은 구전되어 오던 유대인의 이스라엘 민족신화를 기록한 ‘구약성서’와 ‘복음서’라는 예수의 전기문학에 기록되어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수많은 복음서(마가 복음, 누가 복음, 마태 복음, 요한 복음, 도마 복음 등)와 외경으로 남아있는 야고보 복음, 빌립 북음, 니고데모 복음, 베드로 계시록, 에녹서, 희년서, 에스드라, 토비트, 유딧, 모세의 승천, 이사야의 승천, 시빌의 신탁, 솔로몬의 시편, 열 두 족장의 언약서, 탈무드 등에서, 예수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예수의 인성(人性)에 착안하여 인간적 생애에 주안점을 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또 하나는 예수의 신성(神性)에 오리지널을 두어 삶의 행적 자체가 기적을 이루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그 두 번째 이다.
두 번째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천사의 은총을 받은 마리아가 남편과의 성적교접 없이 처녀임신 하여 낳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천당에 올라갔다고 하는 신비적 삶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귀신을 내쫓고, 불치의 병을 고치고,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 바다 위를 맨발로 걸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죽은 후에 부활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의 생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부활’이다.
부활의 전재가 없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가 되어 교인들의 구세주가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인과법칙에 의한 사실이 아니라, 초기 교회의 일방적인 선포양식을 빌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된 것이다.
인성의 예수와 신성의 예수가 동일하다.
역사적 예수와 신화적 예수가 혼합되어 있다.
여기에 역사와 신화의 고뇌가 성립한다.
인간적 예수와 신화적 예수가 상존한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 예수’는 ‘부활의 예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다.
신화적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날 수 있지만, 역사적 예수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광범위한 초기 기독교운동의 저변에는 예수가 확고한 역사적 인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역사적 인물이었던 예수에게 기적과 부활의 신화적 요소가 입혀진 것은 예수의 전기문학을 담당한 복음서의 편찬 자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가 죽고 난 뒤 400 여 년이 지나서였다.
편찬 자들은 ‘니케아 공회’에서 당시의 로마 황제(콘스탄티누스)의 명을 받아 인간적 예수의 기록을 쓴 복음서들을 배제시키고 신화적 예수의 기록을 쓴 복음서들을 채택하였었다.
불교가 싯다르타의 역사적 인성과 신화적 신성을 확연히 구분한 것처럼, 기독교가 예수의 역사적 인성과 신화적 신성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면, 인류는 4대 성인을 모두 인류의 역사적 스승으로 모시는데 부담 없이 열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和元
첫댓글 독서량이 엿보입니다. 한 공부 잘 하고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