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의 섶길답사 -원효길 마린센터에서 평택호예술관 구간
1.폭풍전야의 해맑음
태풍 볼라벤이 올라온다고 난리다. 그것도 두 개가 한꺼번에 불어 닥친다고 한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의 하늘은 폭풍전야처럼 해맑았고 오후의 태양은 강렬했다. 오후 1시 30분 전화벨이 울렸다. ‘뭐하슈’. 답사가자는 장국장의 말투다. 표현은 투박하지만 준비는 철저한 것이 장국장의 특징. 퍼뜩 조정묵 대표의 부탁이 생각나서 서둘러 음악 CD를 구워들고 아파트 입구로 내달렸다.
지난 원효길 답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거센 빗방울로 차창 밖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길을 잘못 들어 생명의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희곡리~평택호 구간의 답사가 전체적으로 부실했다. 그 뒤로도 재조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런 저런 일정으로 쉬 날짜를 잡지 못했다.
오늘은 본래 비단길 답사를 계획했었다. 평택호~구진개 구간을 직접 걸어보고 세밀하고 구체적인 노선을 잡자는 것이 취지였다. 하지만 평택호에술관에서 기산리 방향으로 접어들기 전 장국장이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폭우로 답사가 부실했던 원효로 마린센터-평택호예술관 구간을 먼저 답사하자는 것이다. 일행은 저번 답사의 미진함이 가슴에 남아 있던 터라 흔쾌히 동의하였다.
2.평택호 예술관~ 장수리 구간(4.5km)
우리는 평택호예술관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혜초비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대중적 인지도에서 가장 앞서는 평택호예술관이 적격일 듯 싶었다. 예술관 뒤편으로 넘어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눠진다. 좌측 붉은색 아스팔트길은 39번 국도와 연결되는 숲길이고, 정면으로 내려가서 우측으로 꺾어지는 좁은 길은 기산리 방향으로 연결되었다. 생각 끝에 우리는 기산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8월 말 들녘은 풍요롭다. 지난여름 불볕더위 덕분에 들판의 벼들도 알차게 익고 있었다. 평택호예술관에서 권관3리 방향으로 연결된 도로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구불구불한 도로도 특별했지만, 길가의 둥구나무, 군데군데 자리 잡은 자그마한 마을들도 조화로운 풍경을 뽐냈다.
권관3리는 모두 5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었다. 평택호예술관 옆에 붙은 작은 마을은 ‘돌곶이’이고, 둥구나무를 지나 맞닥뜨리는 마을은 황소울이다. 황소울에서 보리미고개를 넘어서면 문여울(문곡)마을이고, 그 너머는 고잔이다. 고잔은 본래 ‘곶(串)’의 사투리로 농업과 함께 어업이 발달했던 마을이었다. 고잔교회와 느티나무 정자를 지나 39번국도 지하암거를 통과하니 문곡1리 상하동이다. 상하동은 전주 이씨와 수성 최씨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산다. 100여 년 전에는 천도교인들도 많았고, 3.1운동 때는 마을에 거주하던 천도교의 접주 이민도가 옥녀봉과 계두봉에서 평택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민도의 아들은 손병희 선생의 비서를 지냈으며 천도교 부교령과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병헌이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황씨와 같은 천도교인들이 몇몇 있었고, 안중에서는 매 달 모임도 갖고 예배도 드렸다고 한다.
답사팀의 조사는 황소울→문여울→고잔→상하동 순서로 이뤄졌다. 황소울과 문여울 사이에서 장국장이 39번 국도와 한국소리터를 연결하는 산길을 활용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아무래도 마을을 거쳐 옛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중론에 밀려버렸다. 황소울 기찬서(63세)씨는 우리가 걷는 길이 권관리의 옛 중심가로라고 말해주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동쪽으로는 기산1리 원기산을 거쳐 2리 물미마을과 권관4리 가사까지 연결되었으며, 서쪽으로는 상하동을 거쳐 장수리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도로에는 간간이 자동차가 지나갔지만 걷기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 중간 중간의 둥구나무와 오래된 집의 처마 밑은 나그네의 적당한 쉼터 구실을 하기에 적당했다.
고잔에서 지하암거를 통과하여 상하동으로 넘어갔다. 상하동 입구에는 화성아파트가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아파트는 20여 년 전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아파트 주민들은 마을주민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활한다. 그래서 종종 마을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화성아파트 주민들은 다른 아파트와는 달리 마을주민들과 화복하게 지낸다고 하였다. 화성아파트 입구 느티나무는 상하동마을의 쉼터였다. 우리가 그곳을 지나칠 때도 노인들 너 댓 명이 더위를 식히고 있었는데 품성이 넉넉하여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길은 상하동을 휘돌아 장수리로 넘어갔다. 상하동과 장수리는 제법 먼 거리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서니 제법 너른 들판이 나왔고, 건너편 언덕빼기를 넘어서니 또 다른 들판이다.
첫 번째 들판까지가 권관리 땅이고 두 번째 들판은 장수리 금댕이다. 길은 들판과 구릉 가운데로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다. 들판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은 참 아름답다. 곡선의 미학이랄까, 전통적으로 곡선의 부드러움을 사랑했던 우리민족의 정서도 저와 같은 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금댕이를 넘어서면 은석골과 수릿골이다. 이 지역은 본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가였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국영 마장(馬場)도 설치되었고 소금을 굽고 어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은석골과 수릿골은 1970년대 경지정리와 야산개발로 논농사지대로 변했다. 은석골을 지나면 돌다리가 나온다. 장수리 오영환(74세)씨에 따르면 돌다리는 본래 널따란 장판교(넓적한 바위로 놓은 다리)였는데 경지정리하면서 지금과 같은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다고 했다.
3.장수리~평택항 마린센터 구간(7.5km)
장수리에 당도하여 마을 입구에서부터 걸어 올라갔다. 조선시대 직산현에 속했던 장수리는 본래 ‘두매리’였다. 그러던 것을 1970년 경 ‘두메산골’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해서 ‘장수리’로 바꾸었다. 그래서인가 장수리에는 장수(長壽)하는 노인들이 많다. 80세 노인은 보통이고 90대 노인들도 수두룩하다. 마을 노인들은 장수(長壽) 비결을 넉넉한 경제력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어염(魚鹽)이 풍부했고, 간척된 뒤로는 들판이 기름져서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는 것이 이유란다.
장수리 노인정 정자나무 아래에는 여자 노인들 몇 명이 아이크림을 나눠 먹으며 이상권선생, 조정묵 대표, 장국장과 함께 수다를 떨고 있었다. 노인들은 오늘이 현덕면체육대회라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곳에 가 있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들은 왜 가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오전에 예선탈락해서 화풀이 겸 마을회관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도 곁에 앉아 마른 오징어에 맥주 한 캔씩 나눠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숨 막힐 뜻한 더위를 한풀 꺾어준다.
장수리에서 희곡리 건너가는 길은 마을회관 근처의 김정한 효자각과 해주 오씨 사당을 거쳐가는 코스와, 마을 서북쪽 집너머와 군량마을을 지나 들판을 건너가는 코스로 나눠진다.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더니 제법 넓은 들판이 나온다. 건너편 외딴 집을 끼고 뒤편으로 돌아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길을 따라 직진하였다. 장수리 건너편은 신영리 서두매, 매상동, 가장골이다. 길은 매상동 정미소에서 38번 국도와 매상동을 연결하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와 만났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북쪽으로 직진하였더니 신영삼거리(실제로는 사거리)가 나왔다. 우리는 신영 삼거리에서 신영초등학교 방향(신영새싹길)으로 접어들었다. 현재 신영초등학교의 공식 교명은 내기초등학교 신영분교다. 1980년대만 해도 학생 수 300여 명의 학교였다는데 농촌의 급격한 인구감소로 재적학생 2명의 미니학교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없는 토요일 오후의 교정은 고요하다. 1960, 70년대 냉전체제의 유물인 이승복어린이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신영초등학교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동네 할머니의 조언을 받아 학교 담장을 끼고 내려가는 비포장도로로 방향을 잡았다. 내리막길을 1백 미터쯤 내려갔더니 마을 쪽에서 내려오는 시멘트 포장길과 만난다. 시멘트도로는 한 달 전 우리가 답사했던 길이다. 낮익은 길을 따라 1km남짓 달려더니 희곡리 입구 돌장승이 나타났다. 장승은 본래 마을의 수호신이며 이정표였다. 돌장승에게 감사하며 좌회전하여 달렸더니 희곡리 원희곡을 지나 일자촌이 나온다.
희곡리 전체는 함평 이씨의 동족마을이다. 함평 이씨는 조선 초 이중길이 내기리로 입향한 뒤 아들 대에서 대교공파와 진사공파로 갈라졌다. 가문은 진사공파에서 이대원 장군이 배출되기는 했지만 진사공파 보다는 대교공파가 크게 성장하였다. 근대 이후 크게 활약한 이민도, 이병헌, 이자헌, 이계철, 이계안, 이계경 등도 대교공파의 후손이다. 우리는 일자촌 입구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해안도로를 따라 1백 미터쯤 걷다가 옛 신전포 앞에서 도로를 건넜다. 아산만 어업과 해로교통의 전진기지였던 신전포는 갯벌 매립으로 약간의 수로만 남았을 뿐 화려했던 옛 자취를 찾을 수 없다. 2차선 제방길을 따라 5백 미터쯤 달렸더니 마린센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원효길의 종착지 수도사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다. 총 연장 13km.
■원효길 평택호예술관에서 마린센터까지 구간
평택호예술관→권관3리 황소울→문곡→고잔→통로암거→문곡1리 상하동→금댕이→은석골→돌다리→장수리 마을회관→장수리 군량마을→신영리 서두매→신영리 매상동 정미소→신영삼거리→내기초등학교 신영분교→신영분교 동쪽 담장길(비포장)→희곡리(원희곡)→희곡리 일자촌→해안도로→옛 신전포→마린센터 (총 1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