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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보라빛
고 최재선 주교 삶과 신앙 | ||||||
한 손에는 묵주, 한 손에는 호미 든 목자 | ||||||
3일 하느님 품에 안긴 최재선 주교는 여러 면에서 첫 번째 기록을 세운 주교다. 한국교회 최고령(96) 사제이자 주교였던 최 주교는 지난해 사제수품이 아닌 주교수품 50주년 금경축을 지냈다. 사제수품 50주년을 맞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주교로만 50년을 지낸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쉽지않을 것이다. 초대 부산교구장을 역임했고,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해외선교사를 파견하는 한국외방선교회를 설립했다. 한 세기 가까운 긴 세월을 살았던 것 만큼이나 많은 발자취를 남기고 떠난 최 주교의 삶과 신앙을 더듬어본다. 동기 중에 주교가 세 명 최 주교는 1912년 경남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산골에서 대대로 열심한 신자 집안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에 사느라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서당을 다닌 최 주교는 1926년 당시 소신학교였던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해 1938년 사제품을 받았다. 한국교회 129번째 사제였다.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와 마산교구 장병화 주교가 최 주교 신학교 동기다. 동기 중에 주교가 세 명씩이나 나온 것도 이례적이다. 최 주교는 해방 이전 대구대교구 영천본당 주임으로 사목할 당시 지역 유지들을 모아 종교에 대해 강의하던 중 천주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는 죄목으로 끌려가 영천경찰서 유치장에서 6개월 동안 감금 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천 황금본당에서 해방을 맞이한 최 주교는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전신인 성의학원을 잘 관리해 성의여자종합고등학교 등 네 개 학교로 키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업적이다. 최 주교는 대구 계산본당 주임과 대건고등학교장을 겸임하다가 1957년 부산교구가 새롭게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았다. 신설된 교구였던 만큼 최 주교는 맨주먹으로 교구를 일궈나가야 했다. 성당도 몇 개 없고, 신자도 별로 없고, 돈도 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최 주교가 가진 것은 대구대교구장이 쥐어준 3000달러가 전부였다. 주교관은커녕 교구청도 따로 없어 중앙성당 사무실을 몇 해 동안 주교관 겸 교구청으로 사용했다. 힘든 고비고비마다 최 주교가 의지한 것은 최 주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묵주기도다. 1961년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하면서 로마에서 묵주 6만 개를 사와 모든 교구민에게 나눠준 일화는 유명하다. 요즘은 일반화된 묵주기도 몇 십만 단, 몇 백만 단 바치기 운동은 최 주교가 교구민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시작된 것이다. 최 주교는 메리놀 수녀회 수녀원 땅(현 대청동 가톨릭센터)을 교구청 부지로 거저 얻은 것 역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쳐 성모님이 기적을 일으켜주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데 각별했다. 한국외방선교회 설립 45살에 주교가 된 최 주교는 1973년 한창 일할 나이인 61살에 교구장에서 물러났다. 교구에서 발생한 문제에 최 주교는 이를 자신의 부덕의 소치로 돌렸다. 최 주교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교구장직에서 물러난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상인 동시에 매"라고 말했다. 교구장에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외방선교회를 설립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국외방선교회는 최 주교가 1975년에 세운 한국교회 첫 선교회다. 한국외방선교회 설립은 한국교회가 받은 교회에서 나누는 교회로 전환하는 것을 상징한다는 뜻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1984년에는 한국외방선교 수녀회를 설립한 최 주교는 선교회 창설을 평생 큰 영광이자 은혜로 여겼다. 성모 신심과 함께 최 주교를 늘 따라다닌 수식어는 절약과 청빈이다. 최 주교는 선종 직전까지 부산 한국외방선교 수녀회 수녀원 정문에 붙어 있는 6.6㎡(2평) 남짓 안내실에서 살았다. 아무리 무더워도 선풍기 한 대면 그만이었다. 강론 원고는 이면지에 쓰고, 난방이 안된 방에서 겨울을 나느라 감기가 걸렸을 때는 휴지 한장으로 십여차례나 콧물을 닦을 정도였다. 교구에서 나오는 생활비는 대부분 복지시설 성금으로 내놨다. 최 주교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볼 때마다 호화롭게 살지 말고, 열심히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부산교구 총대리 이영묵 몬시뇰은 "한손에는 묵주, 한손에는 호미를 들고 포도밭을 일군 목자"라고 고인을 기렸다. 아마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을 것이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고 최재선 주교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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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보기] | ||||||
[평화신문 2008.06.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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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재선 주교의 삶과 신앙 | ||
교구 위해 바친 일생, 영원히 빛나리 | ||
선종 하루 전날(6월 2일) 병문안 온 교구장 황철수 주교와 함께 묵주기도를 봉헌한 최주교는 병실을 떠나는 황주교에게 "황주교님, 강복 좀 주시게"라며 생(生)의 마지막 강복을 받았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부산교구와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할 최재선 주교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 부산교구 초대교구장 "부산교구장으로 임명받고 왔는데, 교구청은 제 건물도 없어 더부살이를 하고 있고, 가진 돈도 없었어. 어째. 성모님께 열심히 기도드렸지.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어." 2007년 주교서품 50주년을 맞은 고 최재선 주교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초대 부산교구장으로 부임했을 당시를 이처럼 회고했다. 고인의 말처럼 1962년 3월 부산교구장 부임 당시 부산교구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최주교는 모든 것을 '처음'으로 개척해나갔다. 최주교의 초대교구장 재임 당시 모든 교구청 일을 담당했던 이영식 신부(은퇴)는 "최주교님은 한 군(郡)에 성당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부산 경남 전 지역을 다니며 성당을 짓는데 열성적이었다"고 전했다. 1962~1973년 교구장 재임동안 36개 성당을 신축하며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최주교는 미래를 내다보는 경제 감각도 뛰어났다. 최주교는 재임 당시 부산가톨릭대학교, 한국외방선교수녀회가 자리한 부곡동 땅 17만평을 매입해 부산교구 성장의 초석을 다지는 데도 기여했다. -한국외방선교회 창설 "외국에서 도움 많이 받았어. 이제 우리도 돌려줘야지." 최주교는 한국교회가 이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희생을 무릅쓰고 도와준 해외교회 선교사들 덕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때문에 한국교회가 안정되고 풍요로워지면서 '이제 우리도 나눠야 할 때'라고 다짐했다. 이런 결심은 1974년 한국외방선교회의 창설로 실현됐으며, 이후 한국외방선교수녀회도 창설해 파푸아뉴기니, 대만, 중국 캄보디아, 러시아 등 선교지역에 사제와 수녀를 파견하며 '나누는 교회'로의 변화를 주도했다. -청빈 몸소 실천, 엄격하지만 온정 넘쳐 교구장 은퇴 후 한국외방선교수녀회에서 생활했던 최주교는 주교관을 마다하고 2평 남짓한 경비실에서 지냈다. 한 번 쓴 휴지도 접어뒀다 재활용하고, 선풍기 한 대 없이 여름을 났다. 받은 선물은 사용하지 않고 다시 다른 이들에게 선물했고, 반드시 노인우대 할인을 받아 무궁화호 열차만 탔으며, 명절에 종증손녀가 세배를 가면 주님의 기도를 외워야만 세뱃돈 1000원을 주는 지독한(?)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때로는 80 노인에게 "어린 애가 몸 관리를 못한다"며 야단치면서도 고기 사먹으라며 따로 용돈을 쥐어준 정 있는 분이었으며, 동냥 온 거지를 불러 앉히고는 "거지야, 나는 아흔이 넘어도 경비하면서 산다. 너는 젊은데 왜 일하지 않고 동냥하며 사노.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라"라며 애정 어린 조언을 해주는 마음 따뜻한 분이었다. -지극한 성모신심 "혼자 열심히 기도해도 만 꿰미(1꿰미 5단)를 하려니 10년이 걸렸어. 그래서 꾀를 냈지. 교구민을 총동원하자!" 늘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바친 최재선 주교. 교회 발전을 위해 묵주기도를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한 최주교는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묵주기도'를 권했다. 이것이 한국교회 '묵주기도 바치기 운동'의 효시가 됐다. 은퇴 후 한국외방선교수녀원에 머물렀던 최주교는 한겨울 추위에도 수녀원 앞 성모당에서 장괘를 한 채 몇 시간씩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새신부들이 인사차 찾아가면 즉석에서 같이 묵주기도를 하며 '앞으로 기도 많이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추모사 "저희들도 가난하게 살겠습니다" ◎부산교구 왕영수 신부(은퇴) "울면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란 성서말씀대로 그 숱한 갈등과 한을 뒤로 하시고, 한국순교성인과 천사들의 환호 속에 환히 웃으시며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초대 우리 교구장님은 승리하셨고, 그 마지막이 영광의 길임을 확신합니다. 주교님께서는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지워지지 않고 선명히 제 가슴에 자리한 기억이 한 가지 있습니다. 1973년 여름 독일 「엣쎈」의 기차역에서 주교님을 만났고, 독일 은인 「타케」 집에 기거하며, 당신이 갈 곳도, 해야 할 일도 없이 그저 묵주만 잡고 우시면서 성모님께 기도하시던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없는 이의 가난한 소청'을 들어 주시어 귀국토록 하시었고, '그의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한국외방선교수도, 수녀회라 믿습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의 전환점을 이룩하시며, 한국교회의 선구자적인 구원의 횃불을 비추시고, 몸소 앞장 서 가시었습니다. 모진 시련을 통하여 가난과 순명, 겸손을 배우시고 주님은총의 도구로 끝까지 살아오신 것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교님이 가심으로 우리 교구는 새로운 역사의 마당을 열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던 이갑수, 정명조 주교님을 보내시고 당신마저 떠나 주님과 성모님께로 가셨으니 지상에 있는 저희들을 위하여 세 분이 일치하여 기도하여 주시옵기를 소망합니다. 20여 년을 화려하고 안락한 주교관을 외면하고, 수위실의 열악한 공간에서 기쁘게, 감사하게 생활하시던 모습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저희들도 가난하게 살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열정을 다하신 외방선교 수녀회를 힘껏 돕겠습니다. 가시는 길 주교님의 마지막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가난하게 살아야지요. 대궐같고 사장실 같은 주교관 사제관, 좀 생각해 보세요. 기도해야 합니다. 정결하게 살아야 하겠지요. 순명하면 복을 받습니다." 주교님, 안심하시고 평안히 가시고, 다시 만날 때까지 본 고향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교님 기대와 사랑, 감사했습니다"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총원장 박미애 아모스 수녀 주교님, 사랑합니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만 같으셨던 주교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몇 번의 병원생활도 이겨내고 일어나셨던 주교님이신지라, 119구급차로 병원으로 모셔 가면서도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오시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지, 남천성당 소성전에서의 연도 중에도 유리관 속에 누워 계시는 주교님께서 벌떡 일어나시며, "집에 가자" 하고 말씀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교님을 어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신 주교님은 결코 무섭지만은 않으셨습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시고, 적절한 유머와 재치 있는 말솜씨로 우리를 곧잘 웃게 하셨으며, 화를 내신 후 미안한 표현도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안내실 소임을 하는 수녀에게 화를 내시곤 미안한 마음이 드셨는지, 주교님께선 점심식사 후 4층 성당에서 기도하시고 내려 가시면서, 안내실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시고는 계단 화분에서 딴 꽃잎을 유리창 앞에 가만히 내려놓고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토라진 수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 수녀는 수녀가 아니라고 하시는 말씀이 때로는 잔소리처럼 들려 십대 아이들처럼 반항도 해 보았지만, 우리는 우리에 대한 주교님의 사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품으로 가시기 얼마 전 병실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다 용서 해라." "내가 너거(너희가) 미워서 야단치는 게 아니다. 알제?(알겠지?)" 우리는 압니다. 주교님의 그 깊은 마음 속에는 우리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가득했었다는 것을. "주교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주교님께서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성모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평소 늘 하시던 말씀처럼 저희들 열심히 기도하고, 착한 수녀 되겠습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딸들인 저희들을 위해 전구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주교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박기옥 tina@catholictimes.or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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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8.06.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