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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업원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정신적 안정이 필요할 때 인간들은 절대자의 권위에 의존하여 마음의 위안을 찾는다.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나약한 심성을 지녔기 때문에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기 마련이다. 아직도 무허가 철학원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난세일수록 종교의 위상이 높아지는 현상은 나약한 인간의 심리를 반증한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많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세력은 고려 멸망의 원인을 불교가 타락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간주하고 배불숭유 정책으로 민심을 이끌었다. 사찰에 머무는 승려의 숫자도 절의 규모에 따라 제한하고 토지도 몰수하여 국가 재산으로 돌리는 바람에 폐사지가 늘어났다.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영주의 소수서원도 원래는 ‘숙수사’라는 절이었다. 서원의 건축물 대신 웅장한 대웅전과 부속 전각들이 서있을 당시를 회상하면 주변 풍광과 어울리는 절의 규모나 위의가 대단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의 불자들은 규모있는 절들이 문을 닫거나 서원 등으로 바뀌는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삼국시대부터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권 수호에 결정적 역할을 하며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그것이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의 도입으로 정치제도에 유학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지만 정치와 내세의 문제는 별개였다. 아무리 유학이 관학(官學)으로서 국가의 이념을 대신한다 해도 민중에 깔린 신앙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종교는 더 큰 힘을 발휘하고 민초들은 절을 찾아 정신적 위안을 받았다. 결국 종교는 권력자들에게는 수탈과 압제의 수단으로, 피지배자들에게는 현실의 아픔을 달래는 위안의 수단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필요했다.
민초들이 불교에 의존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내세의 소망을 유지하는 사이 집권층인 사대부와 왕실은 그 정도를 더했다. 왕실에서는 왕권을 유지하는 데 종교의 교리를 적용하며 궁 안에 내불당을 지어 신봉했다. 즉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주입하여 임금과 부처를 같은 위상에 올려놓고 신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듯이 백성들도 임금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적용한 것이다. 유럽의 가톨릭이 정치제도를 교황권 확대에 이용했다면, 동양에서는 정치가 불교의 교리를 적용하여 왕권을 확대하는 데 이용했다.
그런가하면 사대부는 사대부대로 가문의 원찰(願刹)을 세워 집안의 복을 빌었다. 불교 없이는 개인적으로 위안을 받을 곳이 없음은 물론 가문과 국가를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왕실과 결탁한 종교지도자들이 새로운 권력층을 형성하여 민초들을 수탈하며 심한 타락상을 보이는 어간에 왕씨의 고려는 말망하고 말았다. 불교 이념의 쇠락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세력은 역성혁명의 많은 명분 중에서 불교의 타락을 꼽은 것이다.
그렇게 열린 조선,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부처님을 ‘불씨(佛氏)’라고 일반인처럼 하대하며 불교를 비판했다. 즉 불교는 보편적 자비를 주장 하면서도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은 물론 부자관계나 군신관계 등 사회의 기본 축을 저버리고 출가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부모, 형제는 물론 이웃과 만물에게까지 인(仁)의 정신을 확대해 나가는 유교의 친친(親親)원리에도 배치된다며 불교가 내세우는 교리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히 무시당하면서도 불교는 왕실과 사대부층에 의해 내세의 소망을 담은 생활종교로 굳어졌다.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왕실의 내불당(內佛堂)과 사대부가의 원찰(願刹)이 조선 왕조에서도 그대로 존속된 것이다. 성군 세종대왕도 왕실의 내불당으로 인하여 신하들과 의견대립을 보인 것을 보면 유교이념을 신봉하는 정치인들에게 불교는 큰 걸림돌이었다. 그런 중에도 불교가 생활인의 밑바탕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세에 대한 소망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실례로는 정업원(淨業院)원이 있다. 정업은 청정하고 깨끗한 행위로서 선업(善業)을 뜻하며, 정토왕생을 위해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행위의 불교용어다. 그 뜻을 살린 정업원은 고려 왕실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유생들이 혁파의 대상으로 여겨 논란을 거듭하다가 1505년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 후 중종이 다시 설치하려 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1550년(명종 5년)에 다시 설치했으나 1612년(선조 40년)에 비구니들을 내쫓으며 혁파한 후 영원히 복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771년 (영조 47년)에 영조가 청용사를 들러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물어 확인한 후 청용사를 정업원으로 개칭하며 정업원 구기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의 후궁들은 임금이 죽으면 궁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의 일부는 불교에 귀의하여 임금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내기도 하고 일부는 정업원에서 보냈다. 초기에는 당당한 실세들의 궁내 종교행위였는데 후기에는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한물간 여인들의 한풀이 장소쯤으로 여기던 정업원은 조선 여인의 심금을 울린 단종비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 더 애절하다. 지금도 가슴 찡하게 전해오는 정순왕후의 이야기는 권좌에서 밀린 현대판 정치인들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더 실감있는 이야기로 살아난다.
단종은 12세에 왕위에 올라 13세에 한 살 연상의 송씨와 결혼했다. 임금은 대부분이 세자나 세손일 때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예사지만 단종은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임금이 된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계유정난으로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단종과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상왕과 대비가 되어 창경궁에서 뒷방 늙은이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에 일단의 충신들에 의한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땅으로 귀양살이를 떠났다. 그 때 어린 부부는 청계천의 영도교에서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다리, 원래는 영미교라는 이름의 나무다리였으나 성종이 살곶이다리와 함께 돌로 가설하면서 영원히 건너버린 다리,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는 다리라는 의미로 영도교(永渡橋)라 이름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살곶이다리와 영도교의 석재를 뜯어 사용하여 영도교는 다시 나무다리가 되었다가 시멘트를 바른 다리로 고쳐졌으나 청계천을 복원하는 바람에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름만으로도 단종과 정순왕후의 아픈 사연을 증언하는 역사물로 살아 있다.
그렇게 생이별을 한 후 정순왕후는 청룡사에서 세 명의 여종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세조는 정선왕후를 위해 영빈정(英嬪亭)을 지어주고 식량과 생필품을 보냈으나 왕궁에서 보내온 모든 물품을 거절하고 정업원에서 살았다. 화가 난 세조는 그들에게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불합리하게 쫓겨난 왕비의 딱한 사정을 들은 인근의 여인들은 주변에 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돕기 시작했다. 요즈음의 벼룩시장과 같은 성격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여인들이 가꾼 채소를 팔면서 몰래 도운 것이다. 조선 말기의 『한경지략(漢京識略)』 궁실조에는 동관왕묘 앞 싸전굴(米廛洞) 장거리(場巨里)의 채소시장을 소개한 글이 있다. 정순왕후와 시녀들이 초근목피로 어렵게 생활한다는 것을 안 여인들이 조정의 감시를 피해 정업원에서 가까운 곳에 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도우려 했다는 것이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생이별의 아픔을 안았지만 의연함을 잃지 않고 정순왕후는 동쪽 맞은편 산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안녕을 기원했다. 82세에 한 많은 삶을 다할 때까지 이 산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으니 무려 64년의 세월이다. 그 많은 한을 삭이며 그리움을 달랜 이 산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峯)이라 하지만 실상은 절망으로 통곡했던 슬픔의 봉우리다. 그 당시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정순왕후의 꿈을 실어 그렇게 명명했겠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절망과 슬픔으로 점철된 여인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 슬픔은 1771년(영조 47년)에 영조의 행적에서도 확인된다. 영조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미 250여년이나 지난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성공한 쿠데타였다. 그런데 그 사건에 연루된 정순왕후의 사연을 들고 영조는 이를 위로하듯 눈물을 삼키며 친필 휘호를 남겼다. 이 장면은 조선왕조실록 영조 47년(1771년) 8월 28일 조와 정업원 구기비의 현판에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
○上 命建閣于淨業舊基立碑, 御書淨業院舊基五字以下。院在興仁門外山谷中, 南距東關王廟不遠, 卽燕尾汀洞, 而端宗大王王后宋氏遜位後所住舊基也。
(임금이 정업원의 옛터에 누각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고,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다섯 자를 써서 내렸다. 정업원은 흥인문 밖 산골짜기 가운데에 있는데, 남쪽으로 동관왕묘와 멀지 않았으며, 곧 연미정동(燕尾汀洞)으로, 단종 대왕의 왕후 송씨가 손위(遜位)한 후 거주하던 옛터다.) -영조47년 8월 28일
○前峯後巖於千萬年 淨業院舊基歲辛卯 九月六日 飮涕書 -비각의 영조친필 현판
실록에 보이는 손위(遜位)는 임금의 자리를 내어놓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와 관련된 현판의 문구를 보면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정순왕후가 겪은 고난이 영조에게는 남의 일같이 않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무술이 소생으로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위태로운 고난을 겪은 영조는 자신의 아픔이 정순왕후의 아픔에 오버랩되어 북바쳐오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왕의 체통도 잊고 눈물을 삼키며 썼다는 음체서(飮涕書)의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는 영조의 올바른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객관적 사실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기록하는 것은 사관(史官)들이 하는 일인데 임금이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공개적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더구나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부끄러운 역사도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제왕으로서의 역사인식을 피력했다. 현판의 ‘前峰後巖 於千萬年’이 그것이다. 이를 왕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라.’는 명령형 해석이 가능하고, 문학적으로 보면 뒷부분을 ‘영원하리라’는 영탄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 작은 현판과 비문 앞에서 한 임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왕권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여인의 한을 읽을 수 있으니 역사의 현장은 세월이 갈수록 더 찬란한 빛으로 후세를 교훈한다. 역사는 그렇게 옳게 산 사람과 그르게 산 사람을 심판하는 공정한 거울과 같은 것이니 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울시에서는 정업원구기비를 1972년에 이르러서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비신의 비양(비의 전면)에는 淨業院舊基의 영조 친필이 새겨져 있고, 비음(비의 후면)에는 단종비 송씨가 세상을 떠난 이후 251년이 지난 1771년에 왕이 친히 글씨를 썼다는 내용의 33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각은 청룡사의 우화루(雨花樓) 서쪽 끝에서 화장실로 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우측의 작은 문을 열고 나가야 볼 수 있다. 정순왕후의 영혼을 만나는 데 겸손한 자세를 취하라는 듯 겨우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이다. 하얀 스텐으로 제작된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오랜 세월을 이겨낸 반룡송(盤龍松)이 활짝 편 우산처럼 답사객을 맞는다. 반룡(盤龍)은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을 일컫는 말이므로 반룡송은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처럼 위로 4m정도만 자라다가 몸을 비틀어 옆으로 가지를 뻗는 소나무를 말한다. 반송(盤松)이 밑둥지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 버섯 모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면 반룡송(盤龍松)은 밑둥지에서 한 줄기로 솟아오르다가 옆으로 뻗는 것이 반송과 다르다. 예천의 석송령(천연기념물 제294호)과 이천 백사면의 반룡송(천연기념물 381호)이 대표적인 나무인데 석송령은 곁으로 뻗은 가지들이 1069평방미터(324평)의 그늘면적을 이룰 만큼 곁으로 가지를 뻗는다. 정업윈터의 반룡송은 그 규모가 석송령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중전에 오른 정순왕후가 대비에 머문 후 폐서인이 되어 어렵게 살던 인생여정을 나타낸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 안쓰럽다. 곁으로 뻗은 가지들을 받치고 있는 철봉 지지대는 마치 정순왕후를 봉양하던 세 하녀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순왕후에게 종교는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고뇌를 짊어지고 신음하는 왕후에게 불교가 없었다면 그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종교는 일상이 편안하고 부요한 사람들보다는 억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절실히 필요하다. 현실이 힘든 자들은 신앙하는 신이 있기에 그 신을 꼬집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하며 답답한 심정을 풀어낸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억울한 사연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하는 절대자는 그 심정의 고백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역할을 다 한 것이다. 그런 중에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정순왕후는 왕권에 밀린 패자로서의 가슴에 많은 한을 안고 살았는데도 82세의 천수를 다했다. 동망봉에 올라 임의 명복을 비는 행위가 절대자를 만나는 신앙이었고 그 행위는 곧 내면의 아픔을 씻어내는 구도의 자세였기 때문이리라.
청룡사는 비구니들의 수행처로 항상 정숙하고 청결하다. 그곳에 주석하는 혜초 스님은 대웅전과 우화루 사이에 열린 마당을 자주 쓴다. 시멘트로 포장한 곳은 쓸어도 흔적이 없지만 흙마당은 빗자루의 흔적이 정결하게 남아 있어 보는 재미가 있어서란다. 필자가 찾았을 때는 솔잎이 섞인 나뭇잎을 태우고 있었는데 모처럼 도심에서 낙엽 타는 향기에 취할 수 있어 좋았다. 아무리 진한 연기도 매캐하지 않고 나무마다 지니는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 낙엽들은 소멸하는 순간에도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청룡사의 정업원터는 혜화역에서 출발하여 일석 이희승 선생 기념관, 이화장을 경유하여 세종조의 청백리 유관에 얽힌 이야기와 그의 외증손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 살았던 비우당, 그리고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옷감에 물들였다는 자주동샘[紫芝洞泉]을 찾은 후 청룡사, 동망봉, 보문사, 미타사를 답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모두 낙산공원 경내에 있어 길도 편하다.
강기옥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글럽한국본부회원.
서울역사문화포럼이사. 내외일보논설위원.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서초문인협회부회장.
월간 아트앤씨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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