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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정신과 초월 의지
- 강영환 시의 의미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한 시인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의 시 세계를 살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가 고뇌하고 신명냈을 감정들과 사유들을 간접 체험하면서 또 하나의 삶을 살아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 세계에 깊이 몰입함에 따른 독서의 자의식이 빚는 고통, 즉 저자의 의식이 주는 빛과 칼날에 독자로서 나의 단조롭고 안이한 의식이 갈리고 연마되는 것은 큰 고통이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서는 나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자아를 구축하는 생성의 장이라고 하는가. 독서 끝에 그 감상을 우려내는 글쓰기 역시 같은 작업의 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강영환의 시는 독자인 나에게 그와 같은 복잡한 울림을 준다. 1977년에 등단하여 2023년 현재 34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열정과 사유는 속물적인 자본주의의 삶에 젖어 사는 나에게 여러 감정의 골과 의식의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집요하게 시를 쓰며 한 생애를 이룰 수 있다니! 시인은 천직인가, 천형(天刑)인가! 강영환 시인에게 다작은 흠이 되지 않는다. 늘 시에 의한, 시를 위한, 더 나아가 시 그 자체이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생 시인이 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시 세계를 시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따라가 본다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닿을 수 없는 경지에 대한 그리움 내지 안타까움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시인의 시를 다 읽고 난 뒤 든 소감은 ‘아득함’이다. 시의 방대한 양에 대한 압도감에 의해서든 시의 깊이가 주는 막연함에 의해서든 모든 시를 읽고 난 뒤의 감정은 ‘먹먹함’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세계를 보고 난 뒤의 감상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한 시인의 생애를 몇 마디 말로 압축할 수는 없다. 이 글은 한 시인이 질러간 미학적 사유와 감정에 대한 내 나름의 단상에 불과하다.
강영환 시인은 산문이나 머리말 등에 자신의 시론에 대한 여러 글을 남기고 있지만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글은 다음과 같다. 즉, “어떻게 하면 침묵에 가까운 언어를 구축할 수 있을까. 나의 언어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의미의 세계이지만 나는 침묵으로 전할 수 있는 의미를 찾아 나선다. 시가 사물이 되기를 희망한다.”(「자서」, 『뒷강물』, 2002)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 내용은 시의 본질을 시인 나름대로 규정하는 말이자 자신의 시작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가 갖는 초월적 신비와 그것을 통한 심미적 자유의 확대! ‘침묵의 언어를 구축하고 싶다’는 말이나 ‘시가 사물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은 창조의 신비와 자유를 획득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자 동시에 세속적 관념과 가치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이러한 말들은 상당한 사유와 실천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말이다. 그 말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강영환 시인이 구축한 한 세계를 살아보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한 생과 시적 세계의 중심부를 음미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그리는 시적 풍경 속으로 질러 들어가 볼 일이다.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과 저항적 현실주의
강영환 시의 출발은 그리 낭만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가 등단한 해(1977)를 비롯해 첫 시집 『칼잠』(1983)이 나오는 시기를 고려하면 모두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와 함께 언론 표현의 자유가 막힌 상태에서 시적 발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의식 있는 지성인으로서 세계에 대한 인식과 발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파악하는 순간 시는 분노와 고통의 형상을 띠기 시작한다. 저항과 부정의 심리적 투사는 당연한 이미지로 제시된다. 다음과 같은 시들이 초기 시의 정조와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것들이지 않을까?
유리창을 가리는 것은 안개만이 아니다
해질 무렵
서편을 향하는 새의 큰 그림자가 무거워지고
닫혀 있는 덧문의
오랜 세월 열리지 않는
유리창을 가리는 것은 그림자만이 아니다
…<중략>…
눈이 부시거든 눈을 감고
창이 빛나거든 창을 닫아
바람이 몰아가는 흔들림을
보아라 바라보아라
-「유리창을 가리는 것은」(『칼잠』, 1983) 부분
마루바닥에 날을 세워
차가움은 뼈속깊이 사무쳐도
이웃과 이웃의 어깨에 부딪혀
끈끈한 체온으로 실어 나른다
호명 당하여 떠나간 이웃
돌아오지 못할 때
오, 옆으로 누워 드는 잠은
자주자주 목이 마른다.
-「칼잠」(『칼잠』, 1983) 부분
첫 시집에서 뽑은 이 두 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정서는 부정과 저항이다. 먼저 「유리창을 가리는 것은」에서 살펴본다면 “유리창을 가리는 것은 안개만이 아니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니다’란 부정사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면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유리창’을 무엇인가가 ‘가리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보기 위해 “바람이 몰아가는 흔들림을/ 보아라 바라보아라”라고 하면서 ‘바로 본다’의 의지적 행위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그의 다른 시에서 “거꾸로 흐르는 피/ 바로 바로 쳐다보기 위해/ 헐렁한 바지 움푹 패인 눈으로/ 늦도록 홀로 연습을 한다”(「바로 바로 쳐다보기」, 『칼잠』, 1983)고 말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불의와 기만에 찬 시대 현실에 대한 직시와 응전의 자세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깨어있고자 하는 정신을 불러내고 있는 표현이다.
이 점은 「칼잠」 역시 마찬가지다. 시 제목인 ‘칼잠’이란 단어에서 암시되고 있듯 “마루바닥에 날을 세워” “끈끈한 체온으로 실어 나른다”는 표현은 억압받는 민중들의 저항과 부정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 “호명 당하여 떠나간 이웃/ 돌아오지 못할 때” “자주자주 목이 마른다”의 표현에서 무도한 세력에 끌려간 민중에 대한 유대와 연민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과 함께 저항과 전복의 행위를 암시하는 ‘목마름’의 이미지가 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그럴 때 ‘칼잠’은 불의한 현실에 잠들지 못하는 민중의 형상을 상징하면서 언제든 ‘칼날’의 기세로 민중의 힘이 분출될 수 있음을 권력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출발은 강영환 시인의 일생을 지배하는 중심적 심상이 되고, 현실 속에서의 삶도 저항적 민중의 대변자가 되게 한다. 진보단체인 부산 민예총 회장직을 역임한 것이 하나의 대표적 사례다. 그의 시는 민중의 등불이고자 하고, 민중의 분노를 드러내는 칼날이고자 한 것이다. 시대의 부조리를 꿰뚫어 보고 무엇이 해결책이고 대안이 되는지를 ‘바로보기’를 통해 늘 고심한 지식인이자 양심있는 선각자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에는 분노와 저항의 심상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군부독재가 사라진 시대 현실에서도 그 정신과 태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다음 시편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가로막힌 세종로에 서서
재채기를 한다
허황된 빌딩과 간판이 흔들리고
학생과 경찰이 함께 흔들리고
결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와
한꺼번에 재채기를 한다
북악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한강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재채기를 하며 –1987. 6월을 위해」(『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1988) 부분
내 가슴을 열어 들여다보지 말라
남몰래 피운 동백꽃이
서릿발 돋은 신새벽을 불사르고 피었다가
툭, 뚝, 모가지 째
눈길 홀로 걸어간 발자국을 남겼다
무슨 상처를 밟고 지나갔는지
발자국마다 고여 있는 피는
퍼내어도 마르지 않는다
하늘이 내린 눈밭에다
낮은 어느 누가 남긴 흔적일까
나는 꽃을 가르고 들어간다
꽃 안에 다시 붉은 꽃
가슴 깊이 떨어져 피어 있다
눈물로도 지워지지 않는 꽃은
떨어져도 그 가슴이 시리다
-「붉은 동백꽃」(『집을 버리다』, 2005) 전문
위 두 편의 시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음을 직접적이고도 간접적 형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먼저 「재채기를 하며 –1987. 6월을 위해」는 87년 직접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6월 항쟁’을 다룬 시다. 항쟁의 과정이 1년쯤 지난 시간에 “결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돌아 와/ 한꺼번에 재채기를 하”는 투쟁과 저항의 행위를 통해 “북악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한강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는 전망의 획득을 피력한다. 민중적 관점에 입각한 역사의 미래를 확보하고 이를 참다운 삶의 자세로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때 ‘재채기’는 깨어있는 의식이자 역사적 사명의 실천으로서 혁명적 행위다. 이 시는 그런 점에서 역사적 실체인 ‘6월 항쟁’을 통해 민중의 소망과 저항적 혁명의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에 비해 「붉은 동백꽃」은 군부독재가 사라진 시대에 올바른 삶의 자세와 그 지향점을 상징적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이 시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이미지는 ‘동백꽃’이다. 동백꽃은 지사의 표상일까? 동백꽃은 서릿발같은 의기(義氣)로 자신의 몸을 던지고 있다. 모가지 째 툭, 뚝, 자신의 몸을 불사르고 가는 이러한 존재는 함부로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전 존재를 불사르기까지 그가 먹었을 마음의 고뇌와 삶의 무게는 보통 사람이 추측할 수 있거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그러한 무게를 지닌 대상, 동백꽃에 대해 “나는 꽃을 가르고 들어간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것은 동백꽃이 갖는 붉은 산화(散華)의 무게 못지않게 자신의 삶에 대한 산화가 준비되었음을 밝히는 태도다. 세계에 대해 도전적 인식을 거쳐 세계 수용과 전복의 심리가 저 안에는 들어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강영환 시인에게 동백꽃은 바로 세계에 대한 자신의 실존적 참여와 그 참여를 통한 정의로움의 달성을 추구하는 상징적 실체다. 그 실체에 투사된 시인의 마음은 저항적 민중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삶에 대한 관심과 저항 의지는 그의 시에 유독 ‘칼’의 심상을 많이 쓰게 한다. 눈에 띄는 대로 여러 시집에서 찾아본다면, “숲속에서 칼을 간다 숲을 향하여 굳어 버린 나의 심장을 향하여 무디어진 날을 세운다”(「숲을 위하여」, 『칼잠』, 1983), “그대는 칼이다/ 새파랗게 날을 세워/ 일어서는 칼이다/ 나를 부르는 그대 목소리는 칼이다/ 나를 보고 있는 그대 눈은 칼이다”(「일어서는 봄」, 『이웃 속으로』, 1989), “풀이 칼자루를 쥐었다 누구도 예측 못했다 칼끝이 던져준 밥을 새겨 먹을 일이지만 망가지는 강산을 보면 당장은 아니다 기다려야 될 일과 기다리지 말아야 할 일쯤 풀은 이미 알고 있다”(「칼」, 『물금나루』, 2013), “풀아, 칼이 되라/ 앞을 세워 서슬을 갈고/ 물 오른 종아리 베어 피맛을 보는/ 햇살 건너가는 날이 선 풀아”(「풀아, 칼이 되라」, 『쑥대밭머리』, 2019)처럼 꾸준히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도 ‘칼/칼날’의 이미지는 굳어버리거나 무디어진 대상을 가르고 깨우기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고, 무엇보다 민초로 상징되는 ‘풀’을 칼에 비유하여 등가적 의미를 부여함을 두고 볼 때, 강영환 시인은 생애 내내 민중적 전망에 입각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 시는 분노다. 분노로부터 솟구쳤다. 분노는 일상이고 내 시는 현실이다. 끝나지 않는 생이 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나는 분노를 사랑한다.”(「내가 사랑하는 일」, 『물금나루』, 2013)고 자신의 시적 경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못해 자연스럽다. 부조리한 현실에 정당하게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는 의인(義人)이다. 시인 강영환은 세속의 물질에 타락하지 않으면서 불의한 세력에 겁먹지 않고 “고독한 돌벼랑 끝에서/ 발톱을 다듬고 부리를 갈고/ 견고한 고리 눈을 부릅 뜬 채 너는/ 내려다 본다 날개죽지 밑의 지상을”(「독수리를 잡으러 아이들이」,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1988)에서 보는 것처럼 자유롭고 당당한 ‘독수리’로 하늘을 난다. 자주와 연대로 참된 민주적 삶을 갈망하는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문학과 삶이 일치하는 시인으로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
정치적 차원의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갈망이 완화되어도 강영환 시인에게 민중적 삶에 대한 관심은 꺼지지 않는다. 이것은 초기 시부터 내재해왔지만 이후 시집들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산복도로’ 시편에서 연작시로 제시되고 있다. 저항적 민중주의는 연대적 민중주의로 발전해가면서 민중의 삶에 대한 그의 뜨거운 애정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는 특히 그가 살았던 부산 수정동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실존적 장소성이 가지는 의미와 그 안에 거주해 살고 있는 이웃의 의미를 천착해 들어간다. 이는 민중적 삶의 구체화에 해당한다.
산복도로, 이웃의 발견과 연대적 민중주의
‘산복도로’를 소재로 한 시편은 강영환 시인의 삶을 지배하는 하나의 장소성을 질서화한다. 『장소와 장소상실』의 저자 에드워드 렐프는 실존적 장소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렐프의 말처럼 산복도로는 시인 강영환의 존재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를 시집의 내용으로 보면 알 수 있다. 1980년 『열린시』 창간호부터 최근 시까지 꾸준히 써오고 있는데, 특히 산복도로 자체를 연작시로 다룬 시집은 『칼잠』(1983),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1988), 『이웃 속으로』(1989), 『황인종의 시내버스』(1994), 『산복도로』(2009), 『울밖 낮은 기침소리』(2010), 『집산 푸른 잿빛』(2014), 『출렁이는 상처』(2016), 『달 가는 길』(2021) 등 그의 시집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하나의 소재와 주제를 이렇게 긴 연작시로 여러 시집에 배치하는 것은 특이하다 못해 집요해 보인다. 그만큼 산복도로에 자신의 영혼과 정수가 배어 있음을 시집 분량으로 먼저 말하고 있는 셈이다.
강영환 시인은 산문에서 이 산복도로의 삶을 “부산의 출발점, 부산의 정체성, 주변인의 삶, 부산의 미래”(「산복도로」, 『달 가는 길』, 2021)로 그 의미를 말한 바 있다. 자신의 경우를 넘어 부산의 역사와 부산 시민의 정체성으로 산복도로를 언급하고 있는 셈인데, 그만큼 피난 수도 부산의 형성과 이후 부산의 역사적 발전에서 민중적 삶의 전형성이 여기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산복도로와 그곳에 살고 있는 이웃의 발견은 인도적 차원의 연민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진정한 민중적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찾아 나서는 연대적 민중주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초기 시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것들이 다음 작품들일 것이다.
거울 속에는
왼쪽으로 돌아 누운 집이 있다
물속이 아니래도
아니래도 거꾸로 보이는 산과 들
…<중략>…
바람이 닿지 않는 마을
사람들은
왼쪽으로만 돌아 보는 사람들과 만나
왼말을 나눈다
외로만 돋보이는 마을
거울 속에는
떠나지 못하는 마을이 또
하나 더 있다.
-「산복도로 · 9 –산 5번지」(『칼잠』, 1983) 부분
대청동 길을 돌아 산복도로로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흔들리며 간다
흔들리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라
밖은 눈발 성성히 내리고
이 겨울에 더 많이 내리고
강물은 흐름을 멈추고 얼어 붙었다
-「흔들리는 버스 –열린 도시 · 4」(『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1988) 부분
이 두 편의 시는 산복도로가 갖는 지형적 심상지리를 말하는 동시에 정신적 지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고난에 처한 민중적 삶의 위치를 형상화하는 것에 해당한다. 먼저 「산복도로 · 9 –산 5번지」는 산복도로가 “외로만 돋보이는 마을”로 마치 “거울속에(서)/ 떠나지 못하는 마을”처럼 존재하는, 즉 “바람(도) 닿지 않는 마을”로 자리하는 공간이자 장소임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오른쪽’을 정상이나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매우 기이한 형상의 마을이 된다는 전언이다. 고립되고 단절된 공간에 이상한 사람들만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의 핵심은 그러한 단절과 고립이 소외의 현실이자 차별의 공간이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곧 차별받는 민중의 삶을 ‘외로된 마을’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흔들리는 버스 –열린 도시 · 4」를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산복도로의 공간은 “흔들리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라”로 존재한다. 실제 산 중턱에 다닥다닥 집들이 들어섬으로 인해 길들은 산길처럼 좁은 상태에서 미로처럼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휘돌아 감겨져 있는 이 마을 길은 ‘흔들리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곳이 된다. 도상적 위치로 볼 때 산복도로의 삶은 격리와 배제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시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이곳은 “강물은 흐름을 멈추고 얼어 붙어” 차단과 정지의 땅, 폐쇄와 유배의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당연히 곤궁과 결핍의 장소가 된다.
산복도로의 연작시를 진행할수록 시인은 모순된 이곳의 공간을 인식하면서 점차 고립된 민중의 삶의 결을 느끼게 된다. 제도적 차원의 개선에 대한 욕망을 피력하면서도 이 장소가 주는 의미에 대해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산복도로의 주민과 산복도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실존을 깨닫게 하는 대상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시,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내 이웃의 따뜻한 손길을 그리워 한다”(「이웃사랑」, 『이웃 속으로』, 1989)에서 보듯 인간적인 ‘이웃의 따뜻한 손길’로 구현되거나, “불 켜도 보이지 않던 그대가/ 불 끄면 더 잘 보이는 것은/ 그대가 내게 와/ 내 마음에 불을 켜기 때문일까요// …<중략>… //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는 것/ 불빛이 가닿지 못하는 그곳에/ 그대는 있습니까/ 내가 그대와 함께 있습니까”(「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는 것」, 『길 안의 사랑』, 1993)에서 보듯 ‘그대가 내게 와/ 내 마음에 불을 켜’게 됨으로써 ‘내가 그대와 함께 있’게 되는 교감과 우호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에 나타난다.
강영환 시인의 이러한 산복도로 삶의 인식에 대해 시인 최영철은 시집 발문에서 “산동네는 떠밀려온 자들의 삶이 모여있는 곳이다. …<중략>… 이런 산동네와 현란한 평지의 중간 지점에 시인은 서 있다. 어느 때 발은 산동네에 가슴은 평지에 놓여 있을 것이며 또 어느 때 발은 평지에 가슴은 산동네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중간에 서 있는 시인은 고통스럽다. 평지에서 단지 산동네의 삶을 업신여기거나 산동네에서 단지 평지를 동경하는 식의 단선적 사고가 아닌 그 양자의 의식을 껴안거나 그 양자의 의식을 물리쳐야 할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이웃 속의 시인」, 『황인종의 시내버스』, 1994)라고 말한다. 이는 산동네 주민으로서 살고 있는 강영환 시인의 원심적이면서도 구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중적 심리를 일리 있게 해석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의식은 산복도로의 삶이 진전될수록 연민의 차원을 넘어 현실적 연대의 길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거나, 이곳을 하나의 성스러운 장소로 인식하는 데로 나아간다. 다음 시편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목 말라 빈손으로 떠도는 이웃들
눈꺼풀 위에서 햇살이 꺼졌다
바닥도 없이 진 그늘이 눌러 붙었다
비를 누가 불러 줄 것인가
더 갈 곳 없는 막바지 언덕 위까지
끝도 없이 긴 물동이 행렬은
흐린 등 뒤 마른하늘에 터벅터벅
낙타처럼 걸어 사막에 이를 것인가
-「급수차를 기다리며 –산복도로 · 32」(『산복도로』, 2009) 부분
나무 대신 집이 서있는 산이다
날카로운 모서리는 서로의 가슴을 피해
티끌 없는 하늘가에 닿아 있다
집들로 겹겹이 쌓아 올린 산은
큰 집과 작은 집이 어울려 골목을 만들고
골목은 공 벌레처럼 둥글게
지붕과 지붕 사이를 굴러 다닌다
느리게 가다 혹은 구불거리며 멋대로
가고 싶은 곳 없이도 이웃을 지었다
<중략>
집산 푸른 잿빛이 하늘 가운데 우뚝
닿을 수 없는 높은 불을 켠 밤
이웃들은 낮은 지붕을 걸어서
끝나지 않은 별자리로 갔다
-「집산」(『집산 푸른 잿빛』, 2014) 부분
이 두 편의 시는 산복도로의 삶이 갖는 현실적 고통의 실상과 동시에 그곳에 대한 장소애적(場所愛的) 의미에 대해 밝히고 있다. 먼저 「급수차를 기다리며 –산복도로 · 32」는 산복도로 주민들의 가뭄으로 인한 실제적 고통을 생생히 그려내면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 즉 “비를 누가 불러 줄 것인가”하는 고뇌에 찬 발언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비를 부르고 있는 것이 단순히 기우의 심정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가뭄이 생길 때마다 급수차를 기다려야 하는 소외된 민중의 삶에 대한 연민과 함께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차별받는 민중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연대적 민중주의의 참여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시에서 “끝도 없이 긴 물동이 행렬은/ 흐린 등 뒤 마른하늘에 터벅터벅/ 낙타처럼 걸어 사막에 이를 것인가”로 민중의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것 자체가 구조적 모순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해결 의식의 발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산복도로에 대한 이러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시인은 이 장소가 갖는 신비로운 가치를 발견한다. 그것은 가난한 민중적 삶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정의로운 삶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유래한다. 「집산」은 후기 산복도로 시편에 해당하는데, 오래 산복도로 연작시를 쓰는 가운데 그 의식의 성숙에 따른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를 보여준다. 즉, 산복도로의 공간은 “나무 대신 집이 서있는 산”, “집들로 겹겹이 쌓아 올린 산”으로 “티끌 없는 하늘가에 닿아 있다”. 이 ‘집산’은 “푸른 잿빛”으로 “하늘 가운데 우뚝” 서 있어 영험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곳 사람들의 마음은 순박하여 “이웃들은 낮은 지붕을 걸어서/ 끝나지 않은 별자리”로 서 있을 수 있어, 참으로 순정하고 아름다운 장소가 된다. 이때 산복도로의 장소와 그곳의 주민들은 성소와 성소에 깃든 천상의 주민들을 상징한다.
이것은 낭만적 관념으로 대상을 후퇴시키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은 산복도로의 장소에 대한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발생한 열렬한 찬미, 시인이자 인간의 차원에서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의미 부여인 것이다. 그래서 강영환 시인은 “산복도로는 라싸로 가는 순례길이다”(「라싸로 가는 길 –산복도로 176」, 『달 가는 길』, 2021)로 말할 수 있어, 시인의 영혼 속에 산복도로의 장소성과 그곳의 주민들이 얼마나 깊이 배어들어 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시인에게 산복도로는 영혼의 심층에 각인되어 있는 절대적 정체성이다.
바다의 수평적 해방과 산의 수직적 초월
강영환에게 바다는 하나의 정신적 방향타로 다가온다. 그가 이전까지 추구했던 민중의 저항적 이데올로기와 산복도로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얻게 되는 해방감이 ‘바다’라는 소재와 사상의 전개로 나아가게 한다. 원형적 심상 차원에서 바다는 유동과 범람, 즉 금기에 대한 위반의 전복적 상상력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이러한 진전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의 혁명적 사상과 행동은 바다의 심원함과 파동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바다나 파도 이미지에서 강영환이 “날빛 푸른 칼을 차고/ 수심깊이 잠겨든다”(「다도해 12」, 『북창을 열고』, 1987)고 민중적 저항성의 상징인 ‘칼’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상상력의 전개 차원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이런 바다를 소재로 온전히 한 권의 시집을 묶은 것은 『남해』(2001), 『푸른 짝사랑에 들다』(2003), 『내 안에 파도, 내 밖의 파도』(2023) 등이 있다. 이러한 바다 이미지가 시인의 세계관과 접맥되어 잘 표현된 작품을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섬에 들면 뭍이 그립고
뭍에 오르면 섬이 그리운 것은
내 피가 짜기 때문이다
타는 목에 갈증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지나온 길의 수심이 너무 깊어
발끝은 닿지 않고
끝없이 던져넣는 내 심장의
흔들림 없는 거대한 침묵 앞에
집어등을 밝히고 섰다
물결 흔들림이 섬을 만들 때
또 한 번 솟구쳐 보는 거다
피를 던져 소금을 느껴 보는 거다
미명을 향하여 발정하는 바다
내 안의 섬들이 뜨거워진다
-「내 안의 섬들」(『푸른 짝사랑에 들다』, 2003) 전문
그대 사는 마을은 낮은 땅에 있다
몰려가서 출렁이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가슴을 일으켜 세우던 얼굴은 목마른 길로 돌아온다
거울 속에서 표정을 바꾸며 그네 타는 푸른 요정들
햇살 내리는 날에 하늘에게 한 번 웃어주는 아가다
…<중략>…
꼬리등 밝히고 몰려다니며 물고기 집을 흔들어 깨우고 잠든 풀잎이다
종내에는 수천의 얼굴로 모여 낮은 눈빛을 주고 받으며
빛으로 모여 사는 그대 영토다
-「낮은 바다」(『내 안에 파도, 내 밖의 파도』, 2023) 부분
이 두 편의 바다 시는 바다에 대한 그의 인식과 바다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다가 어떻게 민중적 삶의 관점과 어울려 가는지, 그리고 산복도로에서 보여주던 장소 사랑에 기반한 성현(聖顯)의 가치가 어떻게 접맥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내 안의 섬들」에서 보자면, “섬이 그리운 것은/ 내 피가 짜기 때문이다”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는 내 피의 짬, 다시 말해 내 피의 뜨거움(‘타는 갈증’과도 연관돼 해석된다)과 잇닿아 있다. 여기서 내 피의 짬이 환기하는 내 피의 뜨거움은 내 피가 갖는 도전과 반란의 정신, 곧 민중의 저항성과 관련된 의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에서 바다의 속성으로 “물결 흔들림이 섬을 만들 때/ 또 한 번 솟구쳐 보는 거다”로 언급되는 표현은 행동으로 분출하는 자아, 다시 말해 억압적 세계와 교조적 관념을 부서뜨리는 혁명적 자아를 표상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바다는 성난 민중의 힘줄이자 숨결이다. 따라서 바다는 민중의 저항성을 내면화한 상징이자 그 확대다.
이에 비해 「낮은 바다」는 민중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바다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적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의 정신적, 미학적 가치의 핵심은 “그대 사는 마을은 낮은 땅에 있다”는 표현에 들어 있다. ‘낮은 땅’이 뜻하는 것이야말로 민중적 삶의 상징일 것이다. 뭍에서 이런 낮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 ‘풀’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산복도로에서 바라다본 바다가 바로 이런 심상을 시인에게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런 시적 이미지 아래엔 민중적 삶이 추구하는 ‘해방’의 의미망이 깃들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산복도로의 삶들이 “이웃들은 낮은 지붕을 걸어서/ 끝나지 않은 별자리로 가”(「집산」)서 성스러운 하늘의 마을이 되듯이, 바다의 삶도 “종내에는 수천의 얼굴로 모여 낮은 눈빛을 주고 받으며/ 빛으로 모여 사는 그대 영토”가 되는 성스러운 현상이 발생한다. 시인은 낮은 삶과 낮은 공간이 더 신성하고 아름답다는 역설을 그의 시적 생애로 발견하고 완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처음 바다를 만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산골 산청에서 태어나 전남 함평에서 여수로 전학 가서 넓고 물 많은 종포 바다와 거대한 쇠배를 처음 만났다. 경이로운 바다에 여름이면 파도에 몸을 던져 온몸으로 바다를 느꼈다. 그 이후 바다는 내 몸에 들어 살기 시작했고 부산에 와서도 바다는 눈을 떠나지 않았다.”(「후기」, 『내 안에 파도, 내 밖의 파도』, 2023)는 자전적 고백은 시인이 따뜻하고 순정한 삶을 살려고 함을 알려주는 지표로 보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바다는 어린 그에게 ‘경이’로 다가왔고, ‘몸에 들어’ 하나의 정신이 되고 하나의 지향점이 된 것이다.
때문에 그가 바다 시를 쓰는 중간중간 격언처럼 “긴 항해 끝에 닿은 유토피아/ 오래된 뼈를 묻는 어디에도/ 바다보다 더 깊은 집은 없다”(「집」, 『푸른 짝사랑에 들다』, 2003)로 말하거나, “물결을 탄 생은/ 묻어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다”(「나울 너머」, 『푸른 짝사랑에 들다』, 2003), “낯선 내 앞에 파도소리 질펀하다/ 다음 생은 바다다”(「산정 파도」, 『내 안에 파도, 내 밖의 파도』, 2023) 등의 표현을 통해 바다를 통한 집념과 생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바다는 순진한 소년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고, 시인이 된 그에게 무엇이 이 지상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인지를 몸과 마음속에 물질적 감각으로 되새기게 했던 것이다. 강영환 시인의 영혼은 평생 바다와 한 몸이 되어 일렁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바다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시적 도정에서 어느 시기에 ‘산’으로 옮아간다. 바다가 갖는 개방성과 반란성은 생세계가 어느 정도 민중적 삶에 대한 억압이 완화되는 시점(생각건대 2002년 이후가 아닐까)에 질적 전환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유동적인 것보다 확고하면서도 초월적인 표상이 되는 대상에 대한 감수성의 확대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럴 때 산이 상상력의 지평에 포착된다. 그에게 산은 장년의 삶의 체계를 상징하는 새로운 좌표로 떠오른 셈이다.
강영환 시인에게 산은 무엇인가? 시집을 읽어가면 갈수록 본능에 이끌려 찾아갈 수밖에 없는 곳으로 그려진다. 특히 지리산을 중심으로 쓰여진 연작시는 산에 대한 애정과 산을 통한 깨달음이 주옥처럼 엮어져 하나의 ‘산경(山經)’으로 펼쳐져 있다. 그에게 있어 산시는 마음의 지향과 수행을 닦는 법문이다. 이러한 산을 소재로 쓴 시집만도 『불무장등』(2005), 『벽소령』(2007), 『그리운 치밭목』(2008), 『불일폭포 가는 길』(2012), 『다시 지리산을 간다』(2018) 등이 있다. 이 시집들은 지리산 등반기를 바탕으로 지리산의 역사와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한 긴 연작시로 하나의 시리즈 시집이다. 긴 시간 지리산 산행을 하며 느낀 체험을 여러 시집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편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물구나무서고 돌아눕고 속을 뒤집어 봐도
몸을 떠나지 않는 산, 그 산에 가고 싶다
땀에 젖은 내 발자국이 있어서가 아니라
애인 같은 몸 능선에 누워서
서늘한 교태로 불러서가 아니라
그늘의 차가움이 뼈에 사무치는
깊고 깊은 계곡 그 깊이에 젖고
높고 높은 주능 말없이 흘러가는 그
마루금에 빠진 몸이 안달이 나 간다
앉아 있을 수도 누워있을 수도 없어
목을 죄는 넥타이 벗어 던지고
훌훌 빈손으로 가는 산은
문신으로 새겨진 태초의 그리움 아니면
피에 새긴 오늘의 굶주림이어서
지리산을 안고 지리산을 간다
-「나는 지리산을 간다 –서시」(『불무장등』, 2005) 전문
그대 흥미 없는 생에 무너지고 싶다면
흔적도 없이 무너져 훨훨 날아가고 싶다면
남도 지리산 동녘 써레봉으로 가서
세상을 가르는 칼등을 걸어 보라
눈이 상봉을 향하여 갈증을 풀 때 산등은
눈부신 쪽으로 몸을 끌어가려 하느니
왼쪽은 가물가물 햇살 벼랑이고
오른쪽은 푸르고 깊은 수해 빛이다
그곳에는 영원에 쉽게 닿는 길이 숨어 있다
한 번 무너지면 돌아올 수 없는 길 위에서
몸은 스스로 균형을 잡고 가지만
눈에 넣고 가는 상봉이 앞서서
지친 영혼을 손잡고 길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몸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그때 써레봉 가듯 이승을 걸어라
-「써레봉을 넘어서」(『불일폭포 가는 길』, 2012) 전문
이 시들은 산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운명과 필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들에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이번 생애의 의미와 실존에서 비롯된 제 존재성의 감각을 사색한다. 산은 시인에게 자신의 존재성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끔 하는 장이다. 이를 「나는 지리산을 간다 –서시」에서 살펴보자면, 시적 화자는 지리산에 가는 이유를 “문신으로 새겨진 태초의 그리움 아니면/ 피에 새긴 오늘의 굶주림이어서/ 지리산을 안고 지리산을 간다”고 발언하고 있다. 이 내용은 앞의 시 구절들이 보여주는 전제들의 대비에 의해 그 의미가 구성되는데, 즉 “땀에 젖은 내 발자국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늘한 교태로 불러서가 아니라” “깊고 깊은 계곡 그 깊이에 젖고/ 높고 높은 주능 말없이 흘러가는 그/ 마루금에 빠진 몸이 안달이 나 간다”에서 보이는 것처럼 ‘피상과 미혹’이 아니라 ‘심원과 장대’ 때문에 간다는 것을 가리킨다. 곧, ‘문신으로 새겨진 태초의 그리움’과 ‘피에 새긴 오늘의 굶주림’은 지리산을 가게 하는 이유로서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만 하는 내 존재성의 특이성을 성찰해야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나를 비롯한 이 세계의 본질에 대한 궁극적 관심을 채우기 위해 산을 발견하게 되었고, 산행을 통해 이를 수행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길은 산으로 통한다”(「산 가운데에서 –중산리」, 『불무장등』, 2005)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깨달음의 발언이다. 이런 깨달음의 확대가 「써레봉을 넘어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눈에 넣고 가는 상봉이 앞서서/ 지친 영혼을 손잡고 길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몸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의 표현에 있다. 산을 통한 자아의 수양과 수행이 있지 않고서는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각성의 표현이다. 이때 산은 “영원에 쉽게 닿(게 하)는 길”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수행을 비추고 닦게 하는 경전이다. 이러한 인식은 상당한 삶의 연륜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자, 보다 지고한 가치와 세계에 대한 갈망이 없고서는 내지를 수 없는 말이다. 즉 존재의 영적 초월에 대한 서원이 깃들여 있지 않고서는 그러한 대상과 생각에 이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산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정리이자 새로운 삶에 대한 구도의 표현이다. 바다 시처럼 산시도 자연스럽게 격언이나 잠언의 형태가 솟구친다. 가령, “힘 들여 오르는 산길에/ 앞선 발자국을 밟아 걷지 말라/ 비틀거린 흔적에 네가 빠지리라/ 내게는 나의 길이 있고/ 네게는 너의 길이 따로 있으니/ 무심히 따르면서/ 내 발자국을 깊이 밟지 말라”(「발자국 하나 –왕등재」(『벽소령』, 2007)에서 보듯 삶의 주관을 강조하거나, “어쩌랴 일곱 신선을 높이는 운해에 들어/ 한신골 넘쳐나는 해방을 삼키고 말았으니”(「내 마음의 산 –지리산」, 『그리운 치밭목』, 2008), “하늘과 산이 나눠 가진 조망이/ 길을 이끌어 속세를 떠나게 한다/ 지친 나를 무너뜨려/ 하늘에 걸어 놓은 길이다”(「하늘에 걸어 놓은 길 –벽소령」, 『다시 지리산을 간다』, 2018)에서 보듯 산이 우리에게 주는 미적 덕목이 ‘해방’과 ‘하늘에 걸어놓은 길’, 즉 ‘초월’임을 조곤조곤 일러준다. 세속적 삶의 허망과 피상적 현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무의미한지를 산시들은 존재의 본질적 차원에서 말해준다. 그래서 시인은 “써레봉 가듯 이승을 걸어라”라고 단언할 수 있고, 이를 게송 읊듯이 노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현상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는 막연하게 적용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직관의 영역에서 어떤 말들은 아무런 설명을 달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감득되기도 한다. 강영환 시인의 최근 시에서 보이는 다음 구절이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서두르지 않는 수녀는/ 젖은 길에 남겨둘 발자국이 없어도/ 등 뒤에 마른 길을 불러다 놓고/ 그림자 없이도 강을 건넌다”(「길 건너는 수녀」, 『누구나 길을 잃는다』, 2021)의 시 내용이 그렇다. 장마 중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수녀의 모습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언제나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노수녀가 건너는 횡단보도의 현장에서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등 뒤에 마른 길을 불러다 놓고/ 그림자 없이도 강을 건너’는 모습을 발견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의 주제는 삶의 여러 무게를 다 내려놓고 초연히 자신의 존재성을 거두어들이는 수녀님의 정신적 경지, 그것을 꿰뚫어 보는 시적 화자의 공감 능력에 있다. 이것은 가히 자신의 삶과 존재성을 완전하게 이루어내는 ‘초월적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 시인의 생애를 따라오다 보면 인식의 깊이와 넓이가 조금씩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이 어떤 관점과 물질에 반응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전개해 갔는지가 그 시인의 특이성을 언급할 사항일 것이다. 강영환 시인은 자신의 존재성이 민중에 있다고 생각하여 저항적 관점에 기반한 세계인식을 처음부터 선보였고, 이를 자신의 실존적 장소가 되는 ‘산보도로’의 장소성과 주민을 통해 심화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원형적 차원에서나 물질적 차원에서 같은 상상적 의미를 가진 ‘바다’ 이미지를 통해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바다라는 물질성을 통해 ‘해방’의 의미를 더욱 궁리해 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다 확고하고 초월적 대상인 ‘산’의 심상에 상상력의 질적 전화를 꾀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함께 초월적 삶의 지평에 대한 구도적 자세를 추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강영환의 시적 세계를 정리하자면 ‘칼의 정신과 초월 의지’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영환의 시는 현실적 존재의 파동과 울림을 여실히 드러내는 감광지이면서, 보다 나은 삶과 존재에 대한 끝없는 탐색을 추구하는 상상화인 셈이다. 강영환 시인의 생애와 그의 시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꿈과 고뇌를 대변하는 장대한 파노라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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