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관의 월급은 2800원이었고 인턴 월급은 500원(환율로 $1.00) 보다 훨씬 많았고 군대에 가면 우선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였다. 졸업식을 앞두고 대학에서 가르치시던 교수님들을 모시고 소위 사은회라는 회식이 있었다.
당시에는 호화롭게 호텔식당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불고기 집에서 소주 잔 돌리며 교수님들과 졸업생들이 겨우 한 끼 저녁 먹는 자리였다.
명동의 어느 음식점이었는데 미생물학의 이종훈 전임 강사가 회식 도중에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미생물학의 장익진 교수가 나를 보잖다고 하셨다. 한쪽 구석에 장익진 교수님과 이종훈교수님 그리 내가 셋이서 따로 앉게 되었다. 장익진 교수님이 나더러 말을 시작 하였다.
“그동안 자네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네,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인가?”
“그냥 군인 갈 생각입니다.”
“혹시 병원 미생물로 기초 의학을 해볼 생각 없는가?”
“전연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내 연구실에 자네 같은 후배가 필요해서 제안하는 거네.”
전연 생각지도 못 한 뜻밖의 질문이라 어리둥절하고 뭐라고 대답할지 생각도 못하였다.
“내일 교수실로 좀 오게”
고민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내 주위에는 대한민국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누구에게 의논할 데도 없고 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필요로 해주고 스카우트를 해 준다니 고맙고 기쁘기도 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나는 시간과 돈에 쫓기느라고 대학 6년간 제대로 내 욕심껏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지도 못하였다. 이제 군의관으로 가면 빽도 없으니 전방 의무대에 배치될 것이고 3-4년간 복무하게 될 것이다.
제대하게 되면 전문의 교육도 못 받을 것이고 어디 시골 보건소에 취직 되거나 돌팔이 의사 개업이나 하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돼지 먹이는 것 밖에 없으니 시골 보건소장이나 되면 이 권한으로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나 얻어다 돼지라도 편히 길러 보고 싶었던 것이 고작 나의 소망이었다.
학교에 남아서 기초의학을 공부 한다면 병원 미생물학자가 되고 교수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감히 생각하기조차도 버거운 사치스러운 생각과 미래였다. 그러나 실컷 공부할 수 있고 마음대로 연구하고 가난하지만 훌륭한 학자가 되는 것은 더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도무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고작 시골 보건소장이나 되기 위하여 여지까지 이 험난하고 고된 공부를 하였던가?
이런 기로에서 나의 고민은 며칠 밤을 새우며 밤중에 남산에 올라가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을 했지만 도무지 현실과 미래를 연결시킬 수 없는 미궁과 혼란의 늪이었다.
누구하나 의논할 수도 없고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선배도 없으니 혼자서만 애를 쓰고 있었다.
며칠 후 결론도 못 내린 채 이종훈선생과 장익진 교수님 방에 갔다.
“잘 생각해 봤나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미생물학 연구실에 들어와 대학원 과정을 하면 장래 교수도 될 수 있고 Kin’s Plan에 들어가면 군에 가는 것도 연기되고 교실에서는 가능하면 장학금도 받아 대학원 석사 2년을 마치면 또 박사과정 4년 모두 6년 과정을 마칠 수도 있네.”
내가 본과 2학년 미생물학을 공부할 때는 기용숙 교수님과 이종훈 교수님이 계셨고 장익진 교수는 그 다음 해부터 미생물을 가르치기 시작 하였다.
특히 본과 2학년 에 배우는 미생물은 내가 휴학했을 때 많은 입학 동급생들이 미생물에서 학점이 안 나와서 낙제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돈도 없는 내가 여기서 낙제를 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큰 걱정거리 가 아닐 수 없었다.
낙제를 안 하기 위해서 이 미생물학과를 더 열심히 중점적으로 공부 하였다. 그러니 나의 미생물학 점수는 일 년 내내 항상 상위권 톱이었다.
그 후에 이 학교로 전임하신 장익진 교수님은 내가 3, 4학년 학생 생활 을 할 때 나를 오랫동안 관심 있게 관찰하시고 계셨다고 하였다.
“자네는 열심이고 또 본교 졸업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교실에 들어오는 사람이기 때문에 앞으로 장래에 이 교실을 맡아 운영할 사람으로서 적임자라고 생각하네.
이 연구실에 들어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앞으로 이 연구실을 잘 맡아 키워 보게”
가난한 학자가 되느냐 시골 돌팔이 의사가 되느냐의 갈림길에서 몇 일간 고민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나를 알아주는 분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장익진 교수님은 엄격라면서도 자상한분이셨다. 교실 연구실에 들어온 첫날 나를 교수실에 불러 놓으셨다.
“교실에 들어 온 것을 환영하네. 연구실 생활이라는 것은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네, 적어도 자네가 근무하는 첫 5년간은 친구들 결혼이다, 생일이다, 친구 아버지 환갑이다, 초상집이다 하는 일체의 사사로운 행사에 찾아다니는 것은 자네의 이 귀중한 시간의 낭비이니 이런 것들은 절제해야 하네. 그런데 찾아다닌다는 생각은 않는 것이 좋겠네.”
“이것저것 다 찾아다니면서 언제 공부 하겠나”
하시는 지엄한 분부를 하셨다.
이때부터 교실 한구석에 군용 목침대를 놓고 잠은 구석에서 자며 밤낮 없이 연구실의 잡일부터 배웠다.
연구생들의 박사학위논문 준비와 강의준비, 학생실습지도 등 모든 일을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연구실의 하루는 쥐똥, 토끼똥 치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연구실에서는 동물사가 있어 연구용 모르모트(guinea pig)와 햄스터(hamster)를 사육하고 있었다. 실험동물을 사육하는 것은 초보 연구원의 기본 주어진 의무였다. 사료를 주고 물병에 물을 갈아주고 실험동물 실의 청소와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유리 대롱(pipette파이펫)을 닦고, 세균 배양 배지 만들고 학생들 미생물 실습 준비를 하였다.
“이제부터 자네는 어느 교수 밑에서 훈련을 받고 공부했다는 것이 일생을 따라 다니게 되어 있네. 내 명예를 걸고 지도하겠으니 그리 알게”
“알겠습니다.
일장 훈시와 연구실 생활에 대한 태도와 각오에 대하여 지침을 지시 받으니 등골에서 식은땀이 다 배어났다.
아침 조회는 새로 나온 의학 잠지를 읽고 발표하는 Journal reading에서 시작 되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독보회”였다.
북한에서는 직장마다 학교마다 아침 시간에 독보회라는 아침 조회 모임이 있어 상부의 지시사항과 사상교육, 노동신문의 사설 읽기 등을 하며 소련공산당사(“베까뻬베”)를 암기하는 시간이 있다. 성경공부 같은 시간이 있다. 누구나 참석해야 되고 여기에 성실하지 못하면 “자아비판”을 해야 한다.
대중 앞에 나가서 내가 이런 이런 잘못을 하였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이 열심히 하겠다는 맹서를 하는 것이다.
연구실에서는 자아비판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Journal reading은 영어로된 외국 논문을 번역해서 요약해서 발표해야 하니 나의 서툰 영어 실력으로는 몇 시간씩 준비해야하는 큰 부담이었다.
이렇게 시작 한 기초과학의 미생물학 공부는 날이 갈수록 차차 영어해독 능력이 늘어서 다음 임상에 나가서도 오랫동안 잘 써 먹을 수 있었다.
우리 세대의 기초 과학 육성의 중요성을 실제로 몸으로 체험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기초 과학과 실험실에서 사용하던 기구들과 그 원리는 몇 년 후에 보면 우리가 실제 일상생활에 쓰이는 실용 도구로서 부엌살림에도 이용 하게 되었다.
예로서 미생물 연구소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던 고압 멸균기(autoclave)는 지금 어느 집에서나 사용하는 압력전기밥솥이 되었다.
냉동된 생선이라도 몇 달이 지나면 담백질의 변성이 일어나 맛이 달라진다.
그래서 냉동식품과 신선한 식품의 맛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바이러스 연구실레서 사용하는 초고속 초저온냉동기는 영하 70도 로 바이러스를 보관하는 기구인데 음식물은 영하 70도로 냉동되면 단백질의 변성이 일어나지 않아 아무리 오래 놓아 두어도 맛이 변하지 않는 요새부자 주부들이 선호 하는 소위 2천만 원짜리 냉동기가 바로 이것이다.
각종 음식물을 특히 채소를 건조시켜 마른 음식으로 실온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진공 냉동 건조(lyophilization)방식으로 김치니 음식물을 오래 냄새 없이 보관하는 방식들도 모두 기초 미생물 과학에서 나온 것들 이다.
이 기초 과학 연구실에서의 훈련은 그 후 일생을 살아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원리를 알면서 생활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의과 대학 학생시절 비싼 의학 원서 교과서 한권 살수 없이 공부 한 나에게는 형편없었던 원서 해독 능력을 이 2년간의 대학원 석사 학위 과정에서의 실험을 겸비한 교육은 나의 실력에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이 기초 의학 공부에서 배운 지식은 그 후 임상 의학으로 전과해서도 환자를 진단 치료하고 또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절대적인 보고 (寶庫)였음을 감사 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