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장터
아우내란 ‘2개의 내를 아우른다’는 뜻이다. 경상도와 한양을 이어주는 길목이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청주·진천·조치원·예산 등에서 지역 특산물과 소를 몰고 와 장을 형성하였으며, 인근 장터 가운데 가장 크게 번성하였다. 장은 매월 1일·6일·11일·16일·21일·26일에 열리는데, 돼지 소창에 양배추·파·고추·마늘 등을 선지와 함께 다져 넣은 ‘병천순대’로 유명하여 평상시에도 찾는 사람들이 많다. 1919년 4월 1일 유관순 열사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를 불렀던 곳으로 주변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조병옥 박사 생가가 있다.
아우내 장터에서는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경성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천안 출신의 유관순은 3·1 운동 직후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유중권, 숙부인 유중무 등에게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4월 1일 아우내장의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1919년 4월 1일, 갈전면[지금의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는 약 3,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 3단계로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1단계는 4월 1일 오후 1시 무렵 시작되었다.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에 태극기를 달고 이를 앞장 세워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는 큰 시위를 벌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들은 주재소를 향하여 오는 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헌병과 수비대가 급히 출동하여 총을 쏘고 총검으로 마구 찌르는 만행을 벌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두 번째 단계는 오후 4시 경에 일어났다. 사망자의 시체를 주재소로 옮기면서 항의하는 군중을 향하여 일본 헌병은 총을 쏘는 것으로 응대하였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군중이 부근의 산과 시장에 모였다가 면사무소와 우편소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시위를 벌였던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장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