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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유재란때 직산전투 이야기 임진 정유왜란 중에 육지전투에서 평양, 행주 싸움과 더불어 삼 대첩으로 알려진 직산 전투는 천안지역에서 명나라 군사와 일본 군의 치열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명나라가 승리하여 일본군 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조선을 구한 전쟁 이다. 직산 전투를 소사평 전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 나라 에서 쓰여진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는 그 전투 내용이 아래에 소개 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직산(稷山) 북방 소사평(素沙坪) 홍경원(弘慶院)에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의 군사를 크게 무찌 른 싸움으로 평양, 행주의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중 육전(陸 戰) 삼대첩(三大捷)의 하나이다. 남원을 함락한 일본군은 전주에 서 합류하여 경상, 전라, 충청 3도를 유린하면서 북상하였는데, 그 가운데 모리(毛利秀元), 가토(加藤淸正)의 군사는 공주를 거 쳐 전의 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의 군사는 직산 에 까지 이르렀다. 인심이 흉흉하여 백성들은 벌써 피난길을 떠 나게 되고, 조정의 백관들마저 모두 짐을 다시 싸놓고 공포에 쌓 여 있었으며, 궁전은 이미 서쪽으로 피난할 준비를 하고 있었 다. 이 때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揚鎬)는 평양에 머물고 있었 으며 선조는 수차 그에게 출격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의 접반사 (接伴使) 이덕형(李德馨)도 선조의 뜻을 따라 적의 한강 이북의 침입을 저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양호는 바로 남으로 말머 리를 돌려 9월 3일 서울에 이르러 제독(提督) 마귀(馬貴)를 불 러 놓고 적극적인 싸움을 벌이지 않고 물러나서 방어할 생각만 을 한다고 꾸짓고, 비밀히 날랜 기병을 선발하여 부총병(副摠 兵) 해생(解生)을 비롯하여 참장(參將) 양등산(揚登山), 유격장 (遊擊將) 우백영(牛佰英), 파귀(頗貴) 등으로 남진하게 하였다. 뒤를 이어 유격장 파새(擺賽)는 정병 2000명을 거느리고 증원군 으로 떠났다. 마침내 9월 5일 동틀 무렵 직산 북방 소사평에서 구로다의 일본군과 충돌하여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적은 천안으로 진출하여 계속 서울을 다시 점령할 기세로 북상 중에 있었고, 그 선봉대가 이어 소사평을 향하여 진격 중이었 다. 이때 명나라군의 가장 앞에서 전군을 지휘하던 부총명 해생 은 이것을 바라보고 곧 작전을 지시하여 좌, 우, 중협으로 나누 어 전진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흰옷을 입고 있 었으므로, 해생의 군은 처음에는 이것을 조선의 양민으로 잘못 알고 있다가 그들이 먼저 조총을 쏘는 것을 보고 적인 것을 알 고 군사를 모아 일제히 적중을 향하여 뛰어 들어갔다. 적은 많 은 사상자를 내고 마침내 크게 밀려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명나 라 군사는 많은 일본군을 참수하여 적진을 던지는 등 더욱 사기 를 올렸다. 이때에 용맹높은 유격장 파새가 부총병 해생의 군 을 뒤따라오다가 원병 2000명을 동시에 전선에 뛰어들게 하니, 적은 마침내 대세가 기울어 이미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조총 등 무기를 버리고 목천현과 청주를 향하여 다투어 도망하였다. 명 나라 군은 1일 육합(六合-천지와 사방)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 고 뒤이어 곧 추격을 단행하였으나, 제독 마귀가 너무 깊이 따 라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병력을 돌리게 하였다가 길 을 나누어 남하하기로 하였다. 한편 적장 구로다는 직산에서 며 칠동안 주둔하면서 발악적으로 분탕하며 분을 풀다가 결국 더 이 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여 모리군과 합세한 다음, 공주를 거쳐 서 상주에 이르러 가토와 합쳤다가 모리와 구로다 등은 성주로 후퇴하고 10월 중순에 양상으로 철퇴하였다. 소사의 패전으로 일 본군은 감히 다시 서울의 침략을 꾀하지 못하였다. 이 소사 싸움 은 다른 싸움이 공성(攻城)과 수비였음에 비하여 일대 회전(會 戰)이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위의 내용을 살펴보면 직산 북방 소사평의 전투에서 큰 승리하 였다는 것이다. 소사평의 지명은 세종 실록 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직산현을 소개할 때에 소사평은 없었다. 조선 왕조 실록의 태조 실록부터 선조 실록까지 에서도 소사평의 지명은 나오지 않았으 며, 다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홍경원이 표시된 위에 소사평 이 나올 뿐이다. 소사평의 지명은 선조 수정실록에서 처음으로 직산 전투에서 소개되었고, 그 뒤에 임금이 온양에 휴향차 갈때 에 소사평을 지나면서 임진왜란을 회고하는 곳으로 소개가 될 뿐 이다. 이는 명나라 군사들이 홍경원 일대 성환과 평택의 평야지 역의 모래사장이 중국의 소사지역과 비슷하여 소사평으로 부르 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홍경원의 지명이 또 하나의 지명으 로 탄생한 것으로 사료된다. 천안지역의 지명 중에 승첩골이 여러 군데가 있다. 일반적으로 는 승적골이라 하는데 이길 승자(勝)와 도독 적자(賊)을 합하여 승적골(勝賊谷)로 적고 있다. 이는 한자로 해석하면 도독을 잡 아 이긴 골짜기라는 설명이지만, 이곳들은 임진 정유 왜란시 왜 군을 쳐부순 곳과 관군이 산적을 쳐 부순 곳이라 한다. 이는 산 적을 쳐부순 곳이면 승적골이 맞지만, 왜군을 쳐 부순 곳이라 면 승적골보다는 이길 첩자(捷)를 합하여 승첩골(勝捷谷)이라 고 할 것이다. 이들 지역은 천안시 백석동, 부대동, 안서동에 있 으며 목천면 지산리, 서흥리에 있으며, 북면 오곡리, 동면 장송 리에 있다. 천안 지역의 정유재란 시 왜군을 쳐부순 곳으로 기록이 된 소사 평과 기록이 되지 않고 구전으로 전해 온 승첩골을 비교하면서, 조선 왕조 실록의 선조 실록과 선조 수정 실록을 살펴 보자.
선조 수정 실록 31권(선조 30년 1597년 9월 1일 기축일) 경리 양호(楊鎬)가 부총병 해생(解生) 등을 시켜 직산에서 적군 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보다 먼저 왜적이 남원을 함락시킨 때 부터 이긴 기세를 타서 계속 올려 밀어 경기부근에까지 다가들었다. 경리 양호가 평양 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서을로 들어와서 제독을 불러놓 고 싸우지 않은 죄상을 따진 다음 제독과 함께 방책을 세웠다. 정예롭고 용맹한 기병들을 몰래 선발하여 해생, 우백영(牛伯 英), 양등산(楊登山), 파귀(頗貴)를 시켜 직산에서 맞아 받아치 게 하였는데 여러 부대들과 우리사람들을 모두 알지 못하였다. 해생 등이 직산의 소사평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적이 대열을 짓 지 못한 틈을 타서 냅다 무찌르는 날샌 기병들을 풀어 치자 적들 은 흩어져 달아났는데 죽은자가 많았다. 또 유격 파새(擺賽)를 시켜 2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따라가서 네 장수들과 합세하여 쫓아가 치게 하였는데 또 격파하였다. 이날 경리와 제독이 임금에게 강변에 나가보자고 청하니 임금 은 마지못해 나갔다. 인심이 뒤숭숭해져 선비와 일반사람들은 모 두 짐을 지고 늘어섰으며 왕비는 난리를 피하여 서쪽으로 갔다. 이겼다는 보고가 이르러서야 서울 안이 조금 안정되었다.
선조 실록 91권(선조 30년 1597년 8월 27일 을유일) 마도독(麻都督)이 말하기를 적이 지금 여산(礪山)에 와 있는데, 우리 군사가 천안에 주둔하고 있으나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적을 당해내기가 어려운데다가 왕래하느라 피곤하여 용기를 낼 수 없다고 합니다. 명일에 해 부총(解副摠)과 양 참상(楊參將) 을 보내어 교체하려 합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 라가 믿고 안심할 수 있는 대상은 천병뿐인데 한 번 퇴진하였다 는 소문을 듣고 모두 흩어져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 금 두 대인이 내려 간다는 말을 들으니 감격스러운 마음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 실록 92권(선조 30년 1597년 9월 8일 을미일) 접대도감에서 보고하였다. <방금 경리아문에 정찰보고가 들어왔는데 먼저 떠나간 명나라군 사가 직산 남쪽 10리 지점의 지세가 험한곳에 매복하고 있었습니 다. 왜적의 선봉부대를 발견하고 어느 장수의 부하인지 모르겠으 나 말에서 내려 서로 죽일 내기로 싸움하다가 잠시 서로 물러났 습니다. 명나라 군사들은 죽이는 데만 급급하여 미처 머리를 베 지 못하였는데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어 제 떠나보낸 3000명의 군사가 이미 도착하여 한창 추격 중에 있 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오후의 보고인데 또 명나라군사가 부대로부 터 달려와서 구두로 보고하기를 머리를 베인 것은 30개이고 총 과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은 그 수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오후에 각각 수습하여 진을 쳤습니다. 목을 베인 것 가운데는 금 투구 와 금 갑옷 차림을 한자가 몇 명 있었는데 틀림없이 적의 우두머 리일 것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조 실록 92권(선조 30년 1597년 9월 9일 병신일) 제독의 접반사 장운익(張雲翼)이 보고하였다. <방금 직산 싸움터에서 돌아온 명나라군사의 말에 의하면 천안 과 직산 사이에 갑자기 왜적의 선봉부대가 나타났는데 모두 흰 옷을 입고 들판에 널려서 오기에 중국군사들은 처음에 조선사람 이라고 하면서 대들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왜적들 이 먼저 총을 쏘았습니다. 중국군사들은 일시에 말을 달려 서로 죽을내기로 오래동안 접전 하였는데 화살에 맞고 몽둥이로 맞아 죽은 왜적들은 거의 500- 600명이나 되었고 적의 머리를 30개나 베었습니다. 해부총병과 양참장은 각각 자기 손으로 적의 머리 2개씩 베었습니다. 그런데 왜적들이 산에 올라가 흰 깃발을 들자 천안에 있던 적 의 대군이 즉시 구름 떼처럼 모여 왔으므로 수적차이로 대적하 지 못하고 각기 물러나 지켰습니다. 해총병 등 4명의 장수는 지 난밤에 직산으로 떠나갔는데 중국 사람들 중에도 죽은 사람이 많 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독은 즉시 각 군영을 출발시켜 모두 강변에 나가 진 을 치게 하고 그대로 야영을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명령 깃발을 보내어 파유격으로 하여금 정예한 군사 2500명을 뽑아 거 느리고 수원방면에서 맞받아 공격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보고합니다.> 지시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접반관 신충일(申忠一)이 서면으로 보고하였다. <이달 초이레날 흉악한 적의 선봉이 천안으로부터 올라왔습니 다. 해부총병, 양참장, 파유격, 우유격 4명의 장수가 정예한 군 사 2000명과 장관 15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직산에서 15리쯤 되 는 곳에서 적을 맞받아 싸웠는데 적의 머리를 베인 것을 보면 해 부총병은 2개, 양참장은 1개, 파유격은 3개였으며 말과 무기를 노획한 것은 미쳐 그 수효를 계산하지 못하고 왔다고 합니다. 이날 군사를 돌려 세워 진위를 지나서 초저녁에 수원에 도착하였 고 밥을 먹은 뒤에 바로 말을 타고 떠났는데 그 때가 겨우 밤 2 경이였습니다.> 지시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선조 실록 93권(선조 30년 1597년 10월 2일 기미일) 접반사 장운익(張雲翼)이 아뢰기를, 왜적 한 사람을 사로 잡아 사람을 차출하여 압송해 왔으므로 제독이 통사 박대근(朴大根) 을 시켜 물어보니 왜적이 대답하기를, 본디 왜장 모리(毛利)에 게 소속된 노정이었는데 청주에 이르러 병을 얻어 뒤떨어졌다가 9월 24일에 사로 잡혔다. 당초에 관백(關伯)은 어려 장수들에게 분부하기를 조선의 남여를 모두 죽이고 닭과 개도 남기지 않도 록 하라. 그러한 뒤에 다음 분부를 듣도록 하라 고 하였고 그러 므로 남원을 함락시켰을 때 왜적의 전사한 자가 백여 명이나 되 었고, 서울을 진격하고자 직산에 이르렀으나 중국군에게 저지당 해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으며, 천 파총(千把摠)도 20여 명이 나 죽었다.이 때문에 가등청정이 붉은 깃발을 가진 사람을 시켜 전령하여 철수해 돌아가게 하였다고 하였다. 선조 실록 176권(선조 37년 1604년 7월 19일 무진일) 비망기를 내렸다. 지난 정유년에 남원이 함락되고 나자 적병이 승승장구 북상하 여 이미 기전(畿甸)에 도달하였으므로 곳곳의 백성이 달아나 숨 고 도성이 놀라 무너지게 되었었다. 이때에 양 경리(楊經理)가 구원하기 위해 평양으로부터 갑옷을 벗고 길을 곱잡아 달려와 곧 바로 경성에 들어와서 웅거하여 지휘하였고 제장들을 천안. 직 산 사이에 매복시켜 놓고서 길을 나누어 적을 쳐서 적이 패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리하여 경성이 보존될 수 있었으니,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던 기틀이 된 것이다. 그때 양 경리가 없었다면 마 제독도 물러가 보존하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니, 그가 우리 나라에 공이 있는 것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우리 나라의 편비. 장사(將士)들도 오히려 공로에 보답하여 책훈(策勳)하였는데 양 경리를 위하여는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어 나는 서운하게 생각 하였다. 그는 청백한 지조을 지녀 탐심이 없어서 무엇 하나 취하 지 않았고, 호령이 엄명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그 러나 불행히도 뜻을 성취하지 못하고 공도 이루지 못한 체 간사 한 사람에게 모함당하여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천년 뒤에도 여 한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사당을 세우면 반드시 배향이 있었 는데 선무사(宣武祠)에는 배향이 없으므로 내가 양 경리를 배향 하려고 하니, 널리 공론을 채택하여 아뢰라. 혹 불가하지 않으 면 동지사(冬至使)의 행차 때 화상(畵像)을 구득하여 오도록 의 논하여 조처하라고 비변사에 이르라
현종 실록 14권, 현종 개수 실록 17권(현종 8년 1673 년 6월 8일 신사일) 천안에 사는 진사 이중명(李重明)이 상소하여, 명나라 신종 황제 의 사당을 세우고 인하여 명신인 양호(楊鎬)와 장신인 이여송(李 如松)을 배향하여 우리 나라를 다시 세워준 고마움에 보답하기 를 청하였는데 오랫동안 회보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상소에 대하여 물으니, 우의정 정치화가 아뢰기를, 황제의 사당을 외국 에서 창건하는 것은 전고에 없던 일이며, 지금은 시기가 적당치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정유재란 시의 직산 전투에 관한 기록은 조선 왕조 실록의 선 조 실록과 선조 수정 실록에 위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소사평의 기록은 오직 선조 수정 실록에서만 나와 있으며, 선조 실록에서 는 직산 남쪽 10리에 매복하여 전투를 하였다는 기록과 천안과 직산 사이에서 전투하였다는 기록과 직산에서 15리쯤 되는 곳의 전투하였다는 기록뿐이다. 최근에 소개되는 역사책은 대부분 선조 수정 실록의 내용을 토 대로 하여 소사평 전투로 알려 주었으나, 선조 실록에서는 천안 의 승첩골에서 전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천안의 승첩골은 그 위치가 직산과 천안의 경계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서울로 올라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매복할 수 있는 산들이 있으 며, 매복 후에 적과 교전 할 시에도 유리한 장소로 생각된다. 두 실록의 내용를 합해 보면, 직산 전투는 천안의 승첩골에서 대 승한 곳이며 소사평은 그 후에 왜적의 추격을 막기 위한 야영장 소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6. 25전쟁시에 외국군대가 우리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전투하였 다. 그 외국군의 전적지에 전적비를 세워 그 고마움을 표시하였 고 매년 기념식을 거행한다. 또한 임진왜란 시에 전투한 곳과 우 리민족의 장군과 의병들의 전적비는 모두 잘 보존하고 있으며 매 년 성대히 기념식을 올린다. 그렇지만, 육지전투의 3대첩중의 한 장소인 직산전투의 전적비 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점점 적어질 것 으로 생각되어 더욱 마음이 찹찹하다. 임진 정유왜란 시에 중국 이 우리 나라를 도와 줘 일본에게 유린당하지 않고 우리 나라를 지금까지 지켜 온 사실도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과 다시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므로, 임진 정유 왜란 시에 도 움을 받아 큰 승리를 한곳에 (소사평 들판인지, 승첩골 인지를 가려) 승첩비를 세워 중국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우리 후손에게 도 국토방위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장소를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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