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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렇게나 좋은 봄날에
김인기
시나브로 봄이 왔다. 몸을 움츠리며 지냈던 날들이 엊그제만 같은데, 그새 봄이 내 가까이 온 것이다. 주위를 살피니, 바야흐로 나무마다 가지에는 움이 연두색으로 곱다. 이제 나도 아침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창문을 여는데, 아이들은 학교에 간다고 부산을 떤다. 이럴 때 조금은 경쾌한 음악을 들으면 좋다. 이런 봄날이라면 내 잠깐 흐트러져도 죄가 되지는 않으리.
과연 봄날이로다. 그래서 내가 '생각은 나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다소 긴 글을 썼다. 그러나 이 글을 아내에게 보였다가 내가 곤욕을 치른다. 내가 그만 여한(餘寒)에 덜컥 잡힌 것이다. '백목련을 그렇게 고결하게 받들면 자목련은 아주 피멍이 든다.' 이러면서 아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니, 내 미처 깨닫지 못한 그 마음이 애달프다.
어쩌면 내가 오래오래 후회할 짓을 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으아, 아내의 눈물이 이렇게나 아름답다니. 꽃잎에 담뿍 젖어 아른아른 어리는 아침이슬이다. 사람을 그렇게 울리고는 그 눈물이 아름답다니, 내가 몰매를 맞을 사내로다. 그런데도, 그게 그랬다. 아내 말로는 내가 아직까지도 예전의 여인을 못 잊으니, 자신은 허수아비와 사는 셈이란다.
아내는 내 바람기를 지적한다. 살랑살랑. 마침 어디선가 봄바람이 분다. 그러나, 내 언제 바람을 피운 적은 없다. 그러나 내 이런 반문도 아내의 감각을 따르지는 못한다. 과연 아내의 표현대로 나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친절했구나. 그렇지만, 이런 신랑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에 나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하나하나 헤아리니, 나는 구석구석에 바람이 가득 들어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펑!' 터질 위인이구나.
바람둥이! 나는 바람둥이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천성이 잘못이라 하기 어렵고, 어느 사내가 이와 많이 다르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특히 남녀들이 서로 좋아하는 걸 억지로 아니라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물론 성욕을 사려 깊게 다뤄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게 마치 자기와 무관한 양 허세를 부리면, 그거야말로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런 뜻에서 보자면 건축가 김수근 선생의 글은 의미심장하다. 선생이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 적에 쓴 '내가 느끼는 매력적인 여자'란 짧은 글이 있다. 나는 절로 감탄한다. 이런 정도로 냉철하게 자신을 응시하니 '건축가 김수근 선생'일 수 있었겠구나 싶다. 이래서 나도 배우는 바가 많다. 그러면 선생의 글을 조금 인용해 보자.
이 세상에서 여자가 모두 없어지는 날이 있다면 나는 그 다음날 자살하겠다. 이만하면 여자의 매력 운운 논(論)하지 않아도 족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여자보다 더 매력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짤막하게 말해서 여자 없이 못 살겠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선생이 말한 여자란 바로 자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들이다. 당연히 할머니나 어머니나 누이와 같은 이들은 배제한 부류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아내한테 핀잔을 듣는 바로 그 부류가 아닌가. 내 무슨 속셈으로 누구에게 접근하진 않았으나, 결과를 두고 보니, 나 역시 자연스럽게 관능에 따라 호의를 드러내지 않았던가 싶다. 이러니 내게 바람기가 그득하다는 힐난이 아주 타당하다.
그렇다고 이게 괴짜의 작태냐. 아니지. 이래서 이런 욕망의 처리가 인간들의 오랜 숙제였다. 아주 간단하게 알약 하나 먹고 다 잊을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도 없고…… 여자는 너무 복잡해서 적응하기가 어려워. 이런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고성능 인조인간이라도 빨리 나타났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적어도 당장은 그런 혜택을 누리기도 어렵구나.
하기야, 그래도 걱정이다. 남성용 인조인간이 나타나서 여자들을 대신하는 만큼 여성용 인조인간이 나타나서 남자들을 대신할 테니까. 그래서 여자들이 실지로 나와 같은 남자들을 내친다 해 보라. 아마 여간 큰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다가 남자들이나 여자들이 이성(異性)을 서로 기피하면 어떻게 하나. 내 만약 여자들에게 아주 버림을 받으면, 내 무엇으로 자신을 위로할까? 문득 차후에도 사람들이 술은 많이 마시지 않을까 싶다.
두 사람이 마시나니 산에는 꽃이 피네(兩人對酌山花開)
한 잔 한 잔 또 한 잔(一盃一盃復一盃)
내 취해 자려 하니 그대 그만 돌아가오(我醉欲眠君且去)
내일 아침 내키거든 거문고 안고 오시거나(明朝有意抱琴來)
술을 마시더라도 이렇게 마시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내 술과 정답게 사귀지도 못하였으니, 내 이백(李白)을 따라 '산중대작(山中對酌)'할 수도 없구나! 그러면 내 무엇으로 외로움을 견디려나. 안타깝다! 나는 술과 더불어 즐기지도 못하는 깜냥이구나. 그러니 나 이제 차(茶)라도 가까이 하여 언제 '홀로 차 마시는 즐거움'이나 논하면 되려나. 아무쪼록 이런 욕심이 차(茶)에 누가 되지 않기를!
봄날, 봄날이로다. 여기 이렇게 봄날인데, 그렇기로 내 어찌 근심을 앞질러 하랴. 하물며 우울증이라니,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냐. 그런데도 얼마 전에 어느 여배우는 자살했다. 내가 보기에 그가 그런 병에 걸릴 이유가 없다. 젊고 고운 처녀가 그렇게 흩날리다니. 그런데도 그는 구구한 추측을 남기고는 그렇게 속절없이 스러졌다.
형편이 어려워서 우울하다면 그 형편을 개선하면 된다. 그러나 누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도 허망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건 어렵다. 이런 병을 다스릴 약은 없으니까. 하물며 이의 해법이 그 욕망을 더욱 키우는 것이랴. 그런데도 실지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한다. 그래서 급기야 본의는 다 잊고 더 크고 더 높게 가지려다가 인간이 아주 이상해진다.
안빈낙도(安貧樂道)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니 하는 풍토에선 유위법(有爲法)보다 무위법(無爲法)이 우선한다. 그러니까 일 잘 하는 것보다 일 잘 더는 것이 낫다. 끝내는 '아무 것도 꾀하지 않아도 제 본성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無爲自然)' 경지를 지향한다. 오죽하면 '최상의 도는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했을까? 불교의 논리로 보자면 성욕이란 색(色)이지만 본질은 공(空)이다. 그러나 그 공(空) 또한 색(色)과 다르지 않으니(空卽是色), 누가 색(色)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빠질 일은 없다.
꽃잎 하나 날려도 봄빛은 바래는데(一片花飛減却春)
바람에 가득 날리는 꽃잎 정녕 시름겨워라(風飄萬點正愁人)
지는 꽃잎 눈앞에 스침도 잠깐이려니(且看欲盡花經眼)
입술에 많은 술 들임을 꺼리지 말라(莫厭傷多酒入脣)
강가 작은 집에 물총새 둥지를 틀고(江上小堂巢翡翠)
궁원(宮苑) 옆 높은 무덤엔 기린상도 누웠어라(苑邊高塚臥麒麟)
이치를 따지더라도 모름지기 놀며 즐길지니(細推物理須行樂)
어찌 헛된 이름으로 이 몸을 얽어매랴(何用浮名絆此身)
내 바람기를 탓하는 아내여! 좋고 좋은 봄날에 그대는 차라리 나와 더불어 이렇게 가만히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이나 떠올리는 게 어떠할까? 내 비속함을 굳이 변명할 뜻은 없지만, 그렇다고 무익한 실랑이로 세월을 보내기엔 우리 인연이 너무 아깝다. 바람, 바람, 바람이라. 그러나 그 바람도 다 바람 나름이 아니랴.
내 가슴에 바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미풍이거나 훈풍일 것이다. 그나마 내 삶의 일 할을 넘지 않으리. 이런 바람이라면 기꺼이 사랑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바람이 아닌 나머지 구 할은 그대로 있다. 이 가운데 삼 할은 그대에게 드리고, 또 삼 할은 문학에 바치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들일랑 내 그냥 그대로 두려니. 이러다가 나도 그대와 더불어 언젠가 바람 속으로 바람이 되어 흩어지려니.
봄엔 사랑하기에 좋다. 나야 아내에게 크게 미움을 받아 그만 곤경에 처했지만, 그거야 봄날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라 해야겠지. 나는 죄가 없다. 이러니 곧 그대 자목련도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을까. '그게 남이 아닌 내 신랑이어서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나, 이런 자목련의 마음, 바로 이 마음이 아름다운 나날을 위한 내 업이로구나.
사위가 될 청년한테 어느 분이 선물하였다며, 누가 내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11분'을 소개했다. 그렇다면 내 어찌 그냥 지나치랴. 그래서 그 책을 읽었는데,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의심한다. 이게 미친 바람을 일으키는 악서가 아닐까? 여기엔 성욕을 조절하거나 극복하는 방도가 아니라 그걸 발산하고 충족하는 과정이 나온다. 바로 유위법의 전형이기도 하다.
심하다! 아무리 젊은 여자라고 하지만, 매일 낯선 남자와 세 번씩이나 합하다니. 가엽고도 가엽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하지는 않는데, 하물며 아무런 애정도 없는 상대와 그러고도 어떻게 버티나. 더구나 고객들은 돈으로 몸뚱이를 사러 온 터이니, 창녀는 그들에게 제 속살을 팔아야 한다.
그럴 수가 없는데, 어떤 사정으로 그래야 한다면, 그건 고역이다. 더구나 그런 걸 본인조차 으레 그러려니 한다면 상황은 더욱 어둡다. 이른바 '포르노'라고 하는 음란물이 나쁜 게 바로 이런 것이다. 여성을 영혼이 깃들인 존재로 보지 않고 그저 특정한 부분만 부각하여 오로지 교접에만 가치가 있는 '조개'로 여긴다. 이러면 필경 남녀가 다 파멸한다.
인간이 그럴 수 없는데, 그렇게 억지로 길들여지니, 멀쩡하던 사람들도 그만 변한다. 서서히 멍청해지거나 조용히 미치거나. 이러다가 나중에 그만 화병이 생기는 게 아닐까?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라피'란 책을 보면 사태가 아주 심각하다. 더러는 갑자기 자해를 하는가 하면, 칼을 들고 잠자는 남편을 마구 찌른다. 자기가 사는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왜 그런 난동을 부렸느냐?' 누가 그렇게 물어도 그 당사자가 제대로 설명은 해낼지 의문이다. 기실 그는 승인투쟁을 그렇게 벌인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 주위엔 아연한 경우도 있다. 역시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성교육을 어떻게 하나. 더구나 아직은 여린 자녀들에게 앞장서서 겨우 그런 따위라니. 하기야 곳곳에 널린 게 음란물들이다. 그렇기로 '진보'나 '개방'이 몰상식한 노출은 아니지 않느냐. 현실이 그러니까 그대로 따른다는 주장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어떻게 용인하겠느냐.
부부가 서로 아끼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 만큼 이의 육체적인 표현도 소중하다. 그러나 나라마다 그 환경이 제법 다르다. 지극히 사사롭게 보이는 이런 일조차 당연히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내가 통계자료를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는 기억한다. 미국인이 가장 자주 하고 일본인이 가장 드물게 한다. 이건 아주 당연하다.
일본은 대표적인 집단주의 사회이고 미국은 대표적인 개인주의 사회이다. 그러니 미국인들이야 마르고 닳도록 상대에게 애정을 표현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지만, 일본인들은 그게 그렇지 않다. 우리들도 그렇지만 일본인들도 아마 상대에게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오직 그런 이유만으로 부부가 파경에 이르지도 않을 터이다.
이렇게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신뢰는 필요하다. 특히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겠다 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나는 아내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아내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노라 한다. 이건 이상하다. 나란 인간의 됨됨이를 환히 알게 되어 도리어 신뢰감이 더 들 법도 하건만, 여자들은 그게 그렇지도 않는 모양이다. 이러면 나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내 착오일까? 아내가 '생각은 나는 사람'이란 내 글을 본 뒤로 사태를 해석하는 능력이 갑자기 늘었다. 무심코 하는 내 언행에도 체계적인 분석이 따른다. 이를테면 내가 '그 여자는 머리가 큰 편이었다.' 하면 즉각 반응한다. 그러니까 내가 머리가 작은 열등감으로 머리가 큰 사람을 좋아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과연 내 머리가 작긴 하다.
여자한테 머리가 크다고 하면 그게 칭찬이 아니다. 나야 여자의 머리가 크거나 작거나 그게 무슨 대수냐 하지만, 여자들이 듣기에는 그게 그렇지도 않는가 보다. 그러면 나도 아무개 머리가 크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래서 아내는 '큰머리여인'을 '큰바위얼굴'이라 칭하고, 나는 그보다는 '대두보살(大頭菩薩)'이라 하는 게 더 좋겠다 제안한다.
파울로 코엘료는 남녀가 합궁하는 시간이 평균 11분이라 했다. 겨우 11분이라니, 이 짧은 11분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소란스럽다니, 정말 인조인간이라도 빨리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나와 아내는 근래 '큰머리여인'을 말하느라 하루 평균 한 시간은 족히 허비한다. 그리고 이 논란의 매듭은 항상 동일하다. 내가 전혀 실속이 없는 바보 노릇만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두보살을 친견하는 일은 없지만, 그 보살이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이 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두(大頭)? 아하, 대두(大豆)!" 엊그제는 아내가 그러더니, 이제 내게 두유(豆乳)를 만들어 주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아내가 한동안 두유제조기에 대두(大豆)를 넣어 두유를 만들곤 했다. 그러니까 대두(大豆)가 대두(大頭)에 밀린 셈이다.
과연 봄이 왔다.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해지면 아이들은 마치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인 양 무리를 지어 다니리라. "참새!" "짹짹!" "돼지!" "꿀꿀!" 선생을 열심히 따르며 짹짹거리고 꿀꿀거리는 아이들로 거리엔 온통 봄의 기운이 가득할 것이다. 늘 봄은 이렇게 온다. 그러면 자동차의 소음이나 우울한 생활고로 주름진 어른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환하게 번지리라. 그러나 나는 언제쯤 아내가 만들어주는 두유에 소금을 조금 뿌려 맛나게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