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99오뚝이회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 논술, 일생에 가장 쓸모 있는 공부 / 글 잘 쓰면 말도 잘한다
장병호 추천 0 조회 24 07.10.13 1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논술&구술은 하나다]


* 논술, 일생에 가장 쓸모 있는 공부 / 글 잘 쓰면 말도 잘한다


좋은 논술문엔 옳은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가 있다.
나쁜 논술문엔 틀린 논리와 뻔한 논거가 있다.
가장 나쁜 논술문엔 논리 자체가 없다.


10년 넘게 해마다 수학능력평가와 논술·구술 시험을 치러온 남다른 경력 덕분에 대학입시에 대해서는 남보다 할 말이 조금 많다. 물론 구술면접 경력은 10년이 채 안 된다. 내가 처음 구술면접 시험을 치른 것이 1997학년도 입시였다.

그해 입시에서 서울대 법학과에 지원했다. 애초 입학할 생각이 없었으니 단지 ‘응시’해 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면접장에 들어선 순간, 내가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에 출전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미인대회를 보면 출전자 앞에 심사위원이 50여명쯤 쫙 늘어서 있지 않은가! 그처럼 면접장에 들어서자 7~8명의 교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술면접 문제는 실질적인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한 방안을 얘기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현재 남녀 불평등의 원인은 누적된 가부장적 의식과 불합리한 제도에 있다고 보고, 제도 개선을 통해 의식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여자는 결혼하면 남의 집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제도가, 딸은 남의 집 식구가 될 사람이라는 의식을 만들어내고 이 의식은 딸에 대한 투자를 꺼리도록 만들어서, 사회 전체적으로는 여성의 능력이 남성의 그것에 비해 열등해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은 다시 그런 편견과 고정 관념을 공고히 해서 부정적 피드백이 확대 재생산된다….

이런 식으로 문제의 원인 분석에 좀더 치중한 답변을 하고, 해결방안으로 ‘호주제 폐지’를 제시했다. 그러자 교수들이 한결같이 호주제 폐지 반대 입장에서, 호주제 폐지가 가져올 문제점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강도 높은 반박과 추가 질문을 퍼부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라 더듬더듬 적당히 대처했더니 오히려 공격의 강도가 세졌다. 나도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해 이후로는 거의 싸울 듯한 분위기가 됐다. 좋게 말하면 격렬한 토론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혼자 집중포화를 맞은 셈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술면접

법학과 면접을 치르고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면접관의 냉담한 반응에 수험자가 호응해서 똑같이 ‘반응’하면 안 된다는 것과,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 논리는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면접관의 태도에는 어떤 메시지도 담겨 있지 않다. 냉랭하든 친절하든 그건 개인적인 특성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수험생에게 유리하다.

이런 경험과 깨달음으로 중무장을 하고 다시 99학년도 서울대 사범대학 자연과학부 구술면접을 치렀다. 당시 사범대 교직적성 구술 면접문제는 “우리 주위에는 평생을 시장판에서 모은 몇십 억의 거금을 선뜻 사회에 환원하는 ‘김밥 할머니’ 같은 미담의 주인공들이 많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사례처럼 교육을 받지 않고도 선행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대기실에서 이 문제를 받자마자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흘러갔다.


김밥 할머니의 사례를 거론하며 인간은 교육을 받지 않고도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경우, 그 주장을 일반화하면 결국 ‘성선설’이라는 인성론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 또 성선설이란 인간은 이성과 착한 마음을 선험적으로 타고난다는 주장이고, 교육이 인간의 지성과 함께 인성까지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런 주장은 교육의 효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적어도 그 효과를 약화시키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

또 성선설과 같은 맥락의 주장을 할 경우, 어떤 반박이 있을 수 있을까? 혹시 교육받지 않은 전형적인 인간상인 갓난아이를 예로 들어 ‘아기에게서 어떤 도덕성을 찾아볼 수 있는가’라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까? 도덕이란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이고, 그런 배려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와 남, 사회라는 관념이 형성되어야만 하는데 아기에게는 그런 관념조차 없다. 따라서 교육받지 않은 인간의 대표 격인 아기에게서는 어떤 의식적인 선행, 도덕적 행위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교육을 받아야만 선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낫다. 그럼, 김밥 할머니의 사례는 어떻게 설명하지? 그래, 넓게 보면 일종의 사회화 과정도, 윤리 의식을 함양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교육에 포함시킬 수 있고, 그런 할머니들은 정규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장사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화라는 비자발적. 무의식적인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해야겠다.

그런데 사회화 과정까지 넓은 의미로 교육에 포함시킬 경우 그 논리를 확장하면 교육의 가치를 너무 약화시키는 주장이 되지 않을까? 굳이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늑대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은 누구나 사회화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니, 그냥 사회화라는 포괄적 교육만 받아도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교육의 가치를 스스로 회의하는 셈이 되는 건 아닐까? 어? 그렇다면 앞서의 성선설에서 우려했던 것과 같은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교가 입실시간이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예상과 달리 여러 명이 아닌 단 한 명의 교수님이 교직적성 면접을 주관했다. 모든 과정이 신기하리만큼 예상대로 맞아떨어졌는데, 다행히도 사회화까지 교육으로 포함시킬 경우의 문제점과 관련한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면접은 그 앞부분에서 종료됐고, 내 마지막 답변에 대한 면접관의 반응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릎을 탁 치며) 오케이~. 이제 밥 먹으러 가야겠다.” 내가 오전 면접 마지막 응시자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논술

가장 기억에 남는 논술 시험은 98년도에 응시한 경희대 논술이었다. 대면 접촉이 아닌 원고지와의 싸움에서 흥미진진한 추억이 있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그해 경희대 논술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시문의 깊이 때문이었다.

제시문으로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나왔고 논제는 (가)의 입장에서 (나)를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즉 논제 자체가 전혀, 간접적으로도 주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수험생이 제시문 분석을 통해 스스로 쟁점을 찾아내고 그 쟁점에 자신의 논거를 첨가해 주장을 펼쳐보라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논술은 독해력이 반이다. 대부분의 대학논술 문제들이 이런 식으로 논제를 직접 주지 않고 제시문 속에 ‘깔아서’ 주기 때문이다. 대신 논제를 잘 찾아내기만 하면, 일단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우선 (나)의 주장은, 개혁과 변법보다는 개량을 강조하고, 형식이 바뀌어도 내용 자체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고 보는 다소 보수적인 견해로 파악했다. 물론 (가)는 그 반대 입장으로 이해했다.

문제는 오직 (가)의 입장에서 (나)를 비판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요구에 충실해야지 공평한 찬반양론이나 어설픈 양비론, 양시론은 금물이다. 상당수 수험생들은 문제지를 받고 20분 정도 경과하자 일사천리로 원고를 써내려가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제시문 독해와 내 생각을 정리하는 데만 40분 정도 투자했고, 10분 동안 개요 작성을 했던 것 같다. 이때 내 의식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나)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작은 부분에서의 변화가 마침내는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를 일반화하면, 양의 변화가 자연스레 질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개량주의와 맞닿게 된다. 둘째, 형식이 변해도 내용 자체는 별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옛 형식을 급격하게 바꾸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이 두 주장을 비판할 참신한 논거가 무엇일까? (제시문이 자연과학적 내용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사회과학적 논거를 생각해내는 것이 좀 차별화되어 보일 것이다.)

우선 개량주의는 부분의 합이 전체와 같기 때문에 부분의 변화(양적 변화)의 총합은 결국 전체의 변화(질적 변화)라는, 반대로 말하면 전체를 나누면 부분과 일치하게 된다는 환원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숨은 전제, 환원주의 자체가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반박하자. 개인이 전부 도덕적이어도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는 부도덕할 수 있다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도덕적 개인, 비도덕적 사회’를 인용해도 좋고, 개인적으로 보면 충분히 양보와 관용의 정신을 실천할 만한 사람이라도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질 때는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는 배타적 성향을 띠게 된다는 집단이기주의를 사례로 들어도 좋겠다.

또 부분의 변화가 자연스러이 전체의 변화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례를 생각해보자. 아하,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있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자는 ‘평천하’의 문제도 개인적인 ‘수신’의 문제로, 사회의 혼란을 그 사회 구성원인 개인의 도덕성 타락으로 환원한,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다. 하지만 춘추전국의 혼란을 실제로 통일한 것은 공자의 ‘유가’사상이 아닌, ‘법가’다. 그리고 법가는 개량보다는 변법을 통한 개혁을 주장한 사상이므로, 진정한 변화는 양의 축적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급격한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논거로 적절하다.

그 다음, 형식이 변해도 내용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는 주장을 반박하려면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음, 아무래도 군대가 좋겠군. 군인의 제복이나 제식은 과연 군기의 상징일 뿐인가? 아니면 그러한 외면적 형식이 내면에도 영향을 끼치는가? 형식이 단지 상징에 그친다면, 왜 모든 나라의 군대가 그토록 엄격한 형식을 강요할까? 군대의 ‘형식’은 전투력과 단결심, 전우애, 용맹성이라는 ‘내용’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나쁜 논술문과 가장 나쁜 논술문

좋은 논술문엔 옳은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가 있다.
나쁜 논술문엔 틀린 논리와 뻔한 논거가 있다.
가장 나쁜 논술문엔 논리 자체가 없다.(그 결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인간인 이상 어떻게 아무런 논리 없이 생각할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면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알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선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학생이 논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대개 위 세 가지 부류 중 마지막 유형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처방은 간단하다. 자신의 소박한 논리를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하기만 하면 적어도 최악의 논술문 범주에서는 벗어나 나쁜 논술문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다.

좋은 논술문을 쓰려면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하는데 한국 교육의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영어, 수학에 투자한 시간의 12분의 1도 논술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좋은 논술문을 쓰겠다는 것인가. 이런저런 이유로 대입 수험생들의 논술문은 평균적으로 ‘나쁜 논술문’의 범주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평균그룹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평균 수준의 나쁜 논술문을 썼다면 그로 인해 떨어질 사람이 대학에 붙는 일은 없어도 그로 인해 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인의 언쟁 승부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1. 목소리 크면 실제로 이기거나 적어도 이긴 것 같은 느낌은 든다.

2. 말을 더 많이 해 버리면 실제로 이기거나 적어도 이긴 것 같은 느낌은 든다.


최악의 논술문에서 종종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곤 한다. 큰 목소리에 대한 선호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주장만 강조하는 악덕으로, 다변에 대한 집착은 같은 내용을 되풀이하여 말하는 악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최악의 논술문에서 탈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이 두 악덕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악덕이란 나쁜 습관과도 같다. 무의식적인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의식적인 노력밖에 없다.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을 세 문장 또는 네 문장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왜 3~4 문장인가? 논증의 원형은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이다.


(대전제)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보다 훨씬 긴 논증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논리전개 과정도 통합하고 환원하면 결국 위와 같은 세 문장 또는 네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만약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이 그 이상의 여러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면, 십중팔구 군더더기가 있거나 중언부언하고 있거나다. 그리고 이런 의식적인 글쓰기 노력을 하다보면 논술에서 ‘중언부언’과 ‘근거 없음’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치유할 수 있다.





논술의 고전적 쟁점을 파악하라

남들 하는 만큼의 ‘나쁜 논술문’에 만족할 수 없다면 ‘좋은 논술문’에 도전해보자. 좋은 논술문의 조건인 바른 논리와 독창적인 논거 중 전자는 그리 벅찬 목표가 아니다. 대입논술에서는 고도의 엄밀성을 요구하는 복잡한 논증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논리적 오류가 보이지 않도록 쓰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풍부한 독서와 깊은 사색의 경험이 부족한 수험생들이 독창적인 논거를 생각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책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라는 뻔한 충고는 도움이 안 된다. 대신 방법을 한 줄로 요약할 수는 있다. “논술의 고전적 쟁점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

대입논술의 논제는 매우 다양해 보이지만 무한대로 다양한 것도 아니고 그 안에서 아무런 경향성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주제들을 일반화하면 인문 과학이나 사회 과학, 또는 자연 과학에서 이슈가 되어 온, 수십 가지의 고전적인 쟁점들과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쟁점에 관한 지식을 획득하는 데 보다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들을 선별적으로 읽는 것이 가장 실전적이며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렇다면 상당수 독자들은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만 모아놓은 책이나 자료가 무엇이냐고 되물을 것이 분명한데 뜻밖에도 대답은 ‘교과서’다. 윤리, 일반 사회, 국사, 세계사, 정치, 경제 교과서. 논술에 필요한 배경지식이 가장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책의 제목들이다.

더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다면 각 시도교육청에서 발간하는 심층면접, 논술대비 자료들을 탐독하라. 그 안에는 배경지식만 따로 모아놓은 읽기 자료도 꽤 많이 있고 웹에서 누구든지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 다이제스트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직접 책을 읽으면 된다. (상자기사 참조)

말하기와 글쓰기가 한몸인 이유

글쓰기(논술)와 말하기(구술)는 당연히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글과 말이란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불과하고, 같은 생각을 표현하는 다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을 잘하는 사람은 글도 잘 쓸까. 그럴 가능성이 높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은 말도 잘할까. 아주 ‘많이’ 그렇다. 그 둘 사이에는 매우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 즉 글을 잘 쓰면 말도 잘할 수 있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어려운 문제 위주로 공부를 해두면 쉬운 문제는 더 쉽게 느껴지지만, 쉬운 문제만 풀어봤다고 해서 저절로 어려운 문제까지 해결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음성언어는, 문자언어에 비해 더 쉬운 표현 수단이라는 얘기다.

또한 시선, 동작, 표정, 억양, 어조 등등의 외적 요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말에 의한 의사 전달은 더 용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글은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반복적·지속적이고, 다른 요소들의 도움을 바랄 수 없어 순수하게 글로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 이러한 부담은 글의 필자로 하여금 자신의 글에 대해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검토하고 반복적으로 퇴고하기를 강요한다.

따라서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의 글쓰기 연습을 하다보면 그보다 헐거운 기준의 말하기는 큰 노력 없이도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구술면접을 준비하는 학생이라도 우선 말하는 연습보다는 글쓰는 연습을 하는 편이 낫다. 만약 구술면접만, 또는 논술만 치르겠다고 작정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대학의 폭은 엄청 좁아질 것이다.

수험생들은 왜 이런 시험(논술, 구술)이 생겨서 우리를 괴롭히나 하겠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 후에도 필요한 능력이 논술과 구술이다. 다시 말해 논술과 구술은 평생 도움이 된다.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글쓰기와 말하기를 통해서만 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남의 머리를 거쳐 정제된 말만 받아들여 그들의 사고를 빌려서만 보는 세상은 하나의 상일 뿐, 실체는 아니다. 그래서 별로 재미도 없고 생생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세상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저차원적인 재미에 만족하며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은 ‘더하기 빼기만 알면 됐지…’ 식의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다. 반대로 러셀이 말했던 ‘무용한 지식이 주는’ 즐거움을 맛보는 쾌락주의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 심지어 구술과 논술을 잘하면 언론사 독자투고에서 소정의 고료를 받아볼 수도 있고, 오프라인이나 온라인에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것은 실제 대입면접 기출문제였다. ‘채팅에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 어떻게 하겠는가?’






계열별 논술 필독서
인문계열 역사란 무엇인가(E.H 카), 그리스-로마신화, 소피의 세계(요슈타인 가이더), 도덕경(노자),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수상록(몽테뉴), 팡세(파스칼), 정의론(롤스), 국가(플라톤), 페스트(카뮈), 게으름에 대한 찬양(러셀),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 맹자(맹자), 삼국유사(일연)

사회과학계열 예종에의 길(하이에크),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슘페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브로델), 제3의 길(앤터니 기든스), 사회계약론(루소), 자유론(밀), 유토피아(토머스 모어),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성의 역사(미셸 푸코), 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 택리지(이중환)

경상계열 국부론(애덤 스미스), 인구론(맬서스), 21세기의 지식 경영(피터 드러커), 신문기사는 지식이다(한국경제신문사), 맨큐의 경제학(맨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베버).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은 수험생들에겐 너무 어렵다.

법정계열 정부론(로크), 순수법학(켈젠), 목민심서(정약용), 성과 속(엘리아데), 법의 정신(몽테스키외), 범죄와 형(베카리아), 권리를 위한 투쟁(예링), 군주론(마키아벨리), 한비자(한비자), 실천론(모택동), 역사의 종말(프란시스 후쿠야마), 솔로몬의 선택(sbs TV 프로그램)

사범계열 에밀(루소), 아동지능의 근원(피아제), 격몽요결(이이), 신학문의 원리(비코), 일반언어학 강의(소쉬르), 신논리학(베이컨), 학교와 사회(듀이)

자연과학계열 과학혁명의 구조(쿤), 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 두 우주 구조에 대한 대화(갈릴레오), 생명이란 무엇인가(슈뢰딩거), 인간현상(샤르뎅), 파브르곤충기(파브르), 종의 기원(다윈), 프린키피아(뉴턴)

의예계열 이기적 유전자(도킨스), 의약분업 시대 환자 권리장전(공저), 의학철학(울프), 생각하는 생물(헤프너), 의료윤리의 새로운 문제들(제이 홀맨), 생명윤리의 철학(구인회)

공학계열 자연과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분야가 공학이므로 현재 수험생 신분의 예비공학도가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은 자연과학 계열의 권장 도서와 중첩될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공학에만 관련되는 도서는 너무 전문적이라 수험생이 읽기엔 무리가 있고 또 아직 읽을 필요도 없다.



* 글: 박원우 웹사이트 ‘우만구만’ 운영자 sogolitna@hanmail.net
1970년 출생한 이래 유소년기 7년, 군복무 3년을 제외한 22년 동안 자기공부를 하거나 남이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며 살았다. 자기 공부로는 수학, 철학 등을 했고 남의 공부를 도와주기로는 논술·구술, 수학 등을 했다. 01학번으로 다시 대학에 입학, 현재 서울대 수의예과에 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직업은 학생이자 학원 강사이고, 취미는 대학 수학능력 시험과 논술, 면접 응시하기다. 10년쯤 후에는 병들고 불쌍한 동물들을 도와주며 살 계획. ‘다음’ 카페 안에서 구술면접 분야 최고 회원수를 자랑하는 우만구만(http://cafe.daum.net/urigusul)과 웹사이트 우만구만(www.igusul.net)의 운영자이며 인천에서 구술면접과 논술전문학원도 운영 중이다.


* 신동아 (통권 530 호) 발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