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보겠습니다. ^^
벌교는 이번이 세번째 이군요. 대학교 2학년때랑 지난 여름에 갔었죠.
2학년 때는 태백산맥을 읽어 보지 못한 때라 설명을 들어도 잘 몰랐었고 여름에는 그냥 혼자 갔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어림잡을 수가 없었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합니다. 그만큼 벌교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의 기행이 성공적으로 끝났으리라 믿습니다. 거기에다가 이근술님의 친철한 설명까지 보탬이 되어 더욱 빛난 기행이 되었습니다. 마치 십년 묶은 체증이 가신 것 같더군요. 제 자신에게도 가장 완벽한 벌교 기행이 되었습니다.^^
22일날 먼저 우리카페 어느님께 드릴 '좋은생각'과 크리스마스카드를 구입한뒤 서울행 버스에 오릅니다. 10시 다 되어 가는 시간에도 차가 상당히 많군요. 연말이라 그런지...
양재역에 내려 전철을 타고 충무로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탄 뒤 서울역 도착. 사람이 여기도 많군요.
약속시간이 10시 반이건만 서울역 도착시간은 11시 20분 입니다. 역시 용인에서 서울역까진 멀군요.--;
약간은(^^;)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조마조마 하는데 기차 출발 직전까지 나타나신 분이 있어 저의 죄(?)는 무마되는 듯 합니다.
기다랗게 늘어선 줄을 따라 개표를 마친뒤 순천으로 가는 열차에 오릅니다.(서울발 진주행 제489 무궁화호)
마음에 드는 자라를 골라잡은 뒤 이제 "간다"는 기대에 부푼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열차는 천천히 출발합니다.
창밖에는 도시의 가로등이 어둠을 쫓아내어 서울도심의 모습을 훤히 보여줍니다. 잠시후 한강철교를 통과합니다. 소설 '한강'에서는 유일민고 유일표가 기대반 두려움반으로 서울에 첫발을 디디는 장면이 나오죠.
영등포역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탑니다.
서서 가는 사람도 생겨나는 군요. 구로, 가리봉, 독산 평소에 전철탈때는 더디게 지나가던 장면들이 기차에서는 빠르게 지나가는 군요.
하지만 저의 낙도 여기가서 여지없이 깨지고 맙니다. 우리자리의 '침묵'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카페분들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노력'하시었기에 창안으로 눈을 돌립니다.
저도 그렇고 여기 계신 분들은 조용한 분들이라 다른 자리에 비해 분위기가 처진모양입니다. 김호진님, 안가르쳐주지님, 샤오랑님이 계시는 군요. 샤오랑님은 예외군요. 하긴 분위기를 쇄신하다가 더더욱 우리자리를 침묵속으로 빠트렸으니 공범이 됩니다..ㅋㅋ..('뻔데기'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원에서 다시 몇분을 더 태우고 기차는 남쪽으로 갈 길을 재촉합니다. 창밖풍경은 어둠이 삼켜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한글써니님이 자리를 바꾸는 군요.
열차안에서 서로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동안 저와 안가르쳐주지님과는 다시 '침묵을 묵묵히 지키기 위해' 잠을 청해봅니다. 이런걸 '역사의 반동'이라고 하나?//--; 암튼..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눈을 떠보니 대전이로군요. 고가철교아래로 시내의 모습이 내다보입니다. 공사중이라 그런지 상당히 오래걸리는 군요. 이래서 열차가 연착이 부쩍 느는가 싶습니다.
우리열차는 좌측철로를 통해 열심히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앞으로도 '일제의 잔재'라는 말은 지겹게 들으시겠지만 철도도 일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대표적인 시설이죠.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우측통행입니다. 지하철(서울 지하철 1호선 제외)도 그렇고 우리가 지나다닐 때도 보통 오른쪽으로 치우쳐 걷습니다. 그런데 철도는 해방된지 50년이 넘었음에도 좌측통행을 그대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4호선에서는 남태령에서 철도청과 서울지하철공사의 관할지역이 바뀐다고 선로의 위치가 뒤바뀌는 웃지못할 일도 있습니다. 또한 민족적 감정(?)을 떠나서 왜 굳이 불편과 착오를 감내하며 좌측통행을 고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열차는 계속 남으로 남행하며 서대전, 익산, 전주, 오수, 남원을 지나칩니다. 한글써니님은 잠자리가 불편한지 계속 뒤척이시는군요.
5:24분 열차는 정시에 순천역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대기중이던 남도관광버스를 타고 벌교로 향합니다. 겨울이라 6시임에도 껌껌하군요. 지방이라 서울보다는 불빛이 세지는 못합니다.
갑자기 여기서 돌발사태 발생!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드셨는지 버스에서 갑자기 내리셔서 볼일을 보시는듯... (왜 술 너무많이 마시면 하는 일이 있죠? ^^;;)
여기서 아직도 어둠이 걷히지 않은 들판사이를 달린뒤 고개를 넘자 드디어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에 도착합니다.
여기서 일단은 식당에 들릅니다. 여기서 좀 쉬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부산에서 오신 님들과 만난 뒤 조별로 모여 자기 소개를 합니다.
여기서 모모님의 저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난 그저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제 정모후기의 '살벌한' 리플을 보고 쫄았씁다. --;;
그래도 모모님도 모자를 벗으시니 꽤나 미인이시군요.(설마 믿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모모님도 자세히 뜯어보면 미인이시랍니다.^^;;;
그리고 다시 벌교향토문화회관으로 이동. 여기서 선물도 주고받고 인사도 하고 벌교에 대한 소개를 대충 듣습니다. 한글써니님 좋은생각많이 하시고 성민정님 지금도 선물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
벌교역 앞을 지나다가 따무르자님이 염상구가 국회의원 최익승 앞에서 '백골난망 분골쇄신'을 기억하지 못하여 쩔쩔매던 모습을 재현해 보십니다.
그리고 다시 관광버스로 진트재로 이동합니다. 여기는 벌교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데 심재모가 구룡에서 계엄군을 이끌고 고개를 넘어 오면서 벌교에 대한 첫인상을 느끼는 곳이죠. 한낯 촌동네인줄 알았더니 예사 동네가 아니라는... 그리고 여기는 철도 터널이 있는 곳이죠 . 하대치와 안창민이 열차를 습격하여 경찰의 무기를 접수하는 장면이 여기서 나오죠. 또한 강동기가 초소를 습격하다가 전사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개는 벌교 북초등학교 단상에 올라 '충견만세'라는
상당히 엽기적인(?) 장면이 나오죠. 경전선은 전남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건설한 철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한마디로 수탈과 착취로 얼룩져있다고 할 수 있죠. 철도가 난다고 거기 있는 민중을 거리로 내모는 행위는 더더욱 이를 실감나게 말해주죠.
저 위에는 뎻날에 진트재터가 있습니다. 현재는 진트재 높이가 해발 50M인데 전에는 더 높았었군요. 그리고 몇해전까지만해도 진트재로 쓰였던 2차선 도로의 흔적도 남아있구요.
우리버스는 다시 회정리 삼구로 이동합니다. 옛날엔 고사리라고 했는데 옛날에 절이 있었던 자리라고 하더군요. 상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운정스님이 잠시 벌교에 있는 선암사의 말사에 머무는 장면이 나오죠.
회정리 삼구에는 염상구의 애를 밴 외서댁이 호수에 투신했다가 왕주댁에게 기적적으로 구출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염상구는 실존인물이라고 하는군요. 실제로 쌍칼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우리는 중도방죽으로 이동합니다. 여기서는 농민들이 힘들여 힘들여 중도방죽을 쌓아완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로 여기서는 당시 농민과 노동자들의 고초를 느끼게 됩니다. "웨메! 말도 마시오. 그게 사람할일 인디라"결국 농민은 이 방죽을 보며 넉넉함과 성취감을 느끼지만 결국은 일본인 지주 엔도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초래하죠.
선수머리의 뻘은 그야말로 질깁니다. 여기는 여자만이라고 하는군요. 여기바다는 동해바다랑은 너무나도 틀립니다.
또 여기서는 정현동이 논을 염전으로 만들기 위해 짠물을 들이자 참다 못한 농민이 정현동을 낫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이 나오죠. 대학교 2학년때 이말을 듣고 어떤 영감을 받았던 곳이랍니다.. 그래서 결국은 태백산맥도 읽고 말이죠.
한참을 걷다가 다리밑에서 쉬어갔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 자리가 남아 있더군요. 여기서 나중에 살아남은 농민들이 다시 빨치산으로 들어가게 되죠. 여시선 왼쪽에 진광산, 오른쪽에 제석산 진광산 밑에 부용산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읍내를 에워산 불길에서 어느날 저녁 이 산들로 횟불이 오르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하대치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마지막 투쟁을 결의 하는 장면이 나오죠.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헛것을 듣고 있는것이 아니었다.-
다시 회정리로 이동하여 외서댁을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우리네 여인들의 애환을 생각해 봅니다. 남편이 죽고 외간남자에게 겁탈당한뒤 죽음 을 뿌리치고 다시 남편의 뜻을 이어 빨치산 투쟁을 하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버스는 다시 도래등을 지납니다. 원래 중도방죽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바로 여기서 물이 돌아 바다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길가에 버스를 세우고 우리는 현부자 집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간판하나! 주유소이름이 '농민 주유소'라고 하는군요. 태백산맥에서는 농민의 애환을 리얼하게 그려내더니 여기서는 '농민주유소'라는 상호가 나타내 주는군요. 부디 농민을 위하는 주유소가 되시길...
얼마안가 우리는 현부자네로 도착합니다. 여기엔 의외로 버스가 두대는 들어감직한 주차시설이 있군요. 다시 위 절에는 꽤 넓은 주차공간이 나오고 말이죠. 현부자네는 첩을 위해 지은 별장이라고 하죠. 그리고 대문엔 2층에 누가 있는데 원래 우리나라에는 이런 집이 없다고 합니다. 일제에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던 지주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집앞의 벗나무와 서까래에 그려져 있던 벗꽃무늬하며... 목욕탕 시설까지..
그리고 저 아래로는 농민들의 작업을 세세히 볼 수 있어 한가하게 주색을 탐하면서도 농민을 항상 번뜩이던 눈으로 감시하던 지주들의 징그러운 작태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소화가 정하섭을 숨겨주던 곳이기도 하죠.
그리고 약간 위로 가서는 현부자네가 지어준 무당의 집터가 있는데 감나무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집은 3칸이었는데 한칸은 정하섭에게 마땅한 반찬거리를 짓느라 고심하던 소화의 모습을 그린 부엌이랑, 소화의 어머니 월녀를 모시던 안방, 그리고 정하섭과 소화의 뜨거운 사랑(^^*)을 그린 사당이로 이루어졌었져.
절에 있는 화장실을 들리다가 첨산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첨산이 잘보이기로는 여기를 따라올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김범우가 처남 신석주일 때문에 순천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첨산을 바라보며 신성하여 함부로 오르지 않는 산이라고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그리고 탱자나무 전설과 전라도 지주중 비행기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심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다시 도로로 나오다가 우측에 벌교 터미널에서 나오는 시내버스가 보이는군요. 서울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BF101형이... 그러니까 옛날버스있죠.. 엔진소리가 유난히 큰... 버스에는 보성의 차밭을 상징하는지 차잎모양이 그려져 있군요,.
그리고 일본인 선원을 죽이고 해방후에 당당히(?) 벌교로 컴백한 염상구가 땅벌과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벌교 철교를 가봅니다. 갑자기 '왕초'에서 김춘삼(차인표)가 발가락(허준호)와 깡대결을 벌이던 장면이..
"깡으로 할까, 주먹으로 할까" ㅋㅋㅋ...
밀물이 찼을때를 이용하여 대결을 했고 여기서 땅벌은 영원히 벌교바닥을 떠나게 되죠.
갯벌 방향으로는 똘똘뭉쳐 하얀 솜을 이루는 갈대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억새풀이 누가 더 이뻐요?라는 듯이 끼리끼리 모여 있습니다. 건너편에는 창고로 쓰였다는 터가 있는데 이근술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상당한 규모로더군요. 여기선 남도여관에 머물고 있던 임만수와 토벌대가 심재모의 '불호령'에 단숨에 여기로 쫓겨나던 장면이 나오죠. 계엄군과 토벌대의 임시막사가 되었죠.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옛날 중도의 집이었다는 붉은 색 지붕의 슬레이트집이 지금도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그래도 주인님을 좋으신 분이라 믿으며...^^
여기 철교는 벌교 사람들에게는 지름길이라고 하죠. 옛날엔 소화다리와 홍교만 있었으니까 돌아가려면 상당히 먼 거리였죠. 하지만 철다리 옆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하도 많이 사람이 지나가니까 읍에서 두발 두손 다들고 난간을 설치해 주었다고 합니다. 2대국회의원 선거 다음의 '민중의 승리'라고나 해야할까요?
여기서 기차에 대한 로맨스가 있는데 마침 벌교에서 출발한 기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봅니다. 사진엔 기관차 부분이 나올듯...
광주발 순천행 통일호 열차로군요. 확인하느라 사진에선 제가 한눈파는 장면이 나올수도...
안가르쳐주지님은 '나 돌아갈래'를 흉내내며 포즈를 잡아 보시는 군요.
잠시의 로맨스를 끝내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로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