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가 만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꼭 30년. 애수에 젖은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과 진한 호소력을 담은 그의 노래는 여성팬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그의 노래들은 많은 남자들의 애창곡으로 지금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김대중 대통령도 그를 최고의 애창가수로 꼽는다. 잊혀진 많은 가수와는 달리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피땀어린 애정으로 꾸며진 인터넷 사이버세상(www.baeho.com/pe.kr등 4개)에서 생전보다 더욱 힘차게 숨쉬고 노래하는 배호를 만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독립투사 배국민씨의 아들이었던 그의 본명은 배신웅, 호적엔 배만금으로 기록돼 있다. <배호스테레오히트앨범 1집,아시아,1969년> 자켓과 음반사의 상업적 홍보로 알려졌던 '서라벌예대 졸업'.
그러나 부산 삼성중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라면? 악보조차 읽지 못했던 그가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허기진 배를 움켜지며 뼈를 깎는 인고의 노력을 음악 공부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른 최고의 인기가수라는 보상은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도 불러야 했던 노래는 처절한 절규이자 몸부림이었다. 천재가수 배호의 탄생과 죽음은 눈물겨운 휴먼드라마다.
1963년 작은 삼촌인 김광빈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21세의 나이로 12인조 배호 악단을 결성, 국내 최초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진풍경을 연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이 64년.
그해 영화주제가 등 3곡을 담은 데뷔음반 <황금의 눈,지구,LM120132>을 발표한다. 배호의 드럼연주 장면을 담은 자켓 사진은 이제 아주 귀한 볼거리가 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그의 음반은 독집 20여장을 포함해 대략 70여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