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하프 완주기- 꽃부터 피는 나무>
2004년 5월 23일. 오늘은 내 삶에 있어서 참으로 엄청난 변화의 날이다.
운동하고는 담을 쌓고 살던 내가 뛰어본 날 수 총 19일 누적거리 150km 남짓의 경력으로 가슴에 2089라고 큼지막한 배번호가 부착된 마라톤복을 입고 마라톤화를 신고 식구들이 잠을 깰라 조용히 집을 나선다. 대회 후 마실 얼려놓은 꿀물과 잘 익은 바나나와 기념사진을 찍게될지도 몰라 사진기도 나를 따라서 나선다.
아침을 먹을까 말까 약간 망설이다가, 유난히 배고픈 걸 못참는 나는 집 앞의 김밥 집에서 김밥 한줄로 아침 식사를 한다. 배고플까봐 어제도 미리 포식을 하여서 아직까지도 배가 거북하지만 중간에 배고플 것보다는 먹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다.
운동장에 일찍 도착하여 준비운동도 하고, 여유있게 스트레칭을 할 계획이었는데 운동장에 도착하니 집합시간 20분 전인데 갑자기 대변이 보고 싶어진다. 어디가 어딘지 어떻게 출발 전 준비를 해야는지 마음이 바쁜데 화장실에서 시간을 소비하고야 만다. 안내책자의 약도를 따라 가다보니 평화팀 이근형씨가 보인다. 여러 사람이 빙둘러 서 있는데 사이트에서 사진으로 본 클럽 멤버들이다. 이근형씨를 제외하고는 내가 회원인 것을 아는 사람도 없는 그 자리에서 한가하게 인사하고 한담이나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옷을 어디에다 보관하는가가 내 최대의 관심사항이다. 약도를 따라가니 '물품보관소'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목욕탕에 있는 옷장은 아니어도 간이 옷장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에게게! 그곳에는 푸르딩딩한 비닐과 매직이 전부다. 실망스럽다.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한 내가 오히려 당혹스럽다. 아무려나 속에 입은 마라톤복이 나타나게 겉옷을 벗고 보니 내 모습에 내가 참으로 낯설다. 운동을 한 적이 없어 내 사지는 마치 여자 것처럼 뽀오얀 하고 새다리 같이 갸냘픈 생김새가 왠지 남들이 볼까 부끄럽기까지 하다.
모이라는 7시는 다 되었는데 어찌할 바 몰라 혼자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마침 평화팀장님 모습이 보인다.
"안녕하세요.팀장님!" "어? 이 대회에 참가해요?" "예. 말씀드렸었잖아요..... (아니 이럴 수가!)" "건강 코스?" "아니오. 하프요." "하아프? 으음, 잘 해봐요."
대회에 나가는 것에 대해 상의도 했었는데... 평화팀과 딱 세 번 뛰어본 왕초보가 이번 대회에 나올 것이라고는 팀장님은 아마 생각을 못하셨던가보다. 그렇게 몇마디 나눈 후 그냥 어디론가 쓰윽 가 버리신다. '내가 아무리 준회원이어도 그렇지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담?' 그러나 서운함이나 만들며 주물럭대고 있을 한가한 시간이 아니다. 자원봉사자에게서 생수 한 병을 얻어 들고, 두어 모금 마신 후 운동장에 들어서니 사람들 열기가 꽉 차있다. 어쩐지 내가 안 와야할 곳에 와 있는 느낌이다. 몸은 푸는 둥 마는 둥 목마를 것에 대비하고자 생수만 자꾸 마셔댄다. 주최 측에서 진행하는 준비운동을 할 때까지 그 물을 거의 다 마신 상태에서 어느덧 출발시간! 사람들이 출발선 상으로 이동하는데, 어쩌나! 물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소변이 적색 경광등을 깜박인다. 화장실은 어딘지 잘 모르겠고, 또 안다고 해도 갔다오면 뒤쳐진 나 혼자 출발을 해야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르는 혼란스럽고 긴박한 시간이 흐른다. 경광등은 더 빠르게 빠르게 반짝이고... '에라! 모르겠다. 마라톤을 못해도 오줌은 싸야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화장실을 찾는데 다행히도 나처럼 한심한 무리들이 줄지어 뛰어다닌다. 부랴부랴 일을 마치고 운동장에 나와 보니 아직 출발을 안하고 있다. '휴우- 다행이다'
"여어얼, 아호옵, 여더얼, 일고옵, 여서엇" 그건 출발 카운트 다운이 아니라 내 삶의 변화의 카운트 다운이다. 정말로 운동에는 아무런 취미가 없이 살아온 나다.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움직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니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의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결국 돌아올 것을 날도 더운데 뭐하러 나가냐? 내려올 산을 뭐하러 올라가냐?는 식이니 마라톤을 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 특수부대원도 아니면서 어쩌자고 그런 극한 상황으로 소중한 몸을 학대하는가? 라는 것이 내가 해온 생각인데 그런 내가 마라톤 스타트 라인에 서 있으니, 사람들이 놀라서 목소리가 큰 것일까? 마치 내 변화를 성원하듯 사람들이 입을 모아 더욱 큰 소리로 우렁차게 외친다. "다서엇, 네에엣, 세에엣, 두울, 하나아."
땅!!
사람들이 출발선을 통과하니 하늘을 날던 새가 내려와 축하하는가? 삑, 삑, 삑 경쾌하게 노래를 한다. 형형색색의 운동복을 입은 건각들 속에 내가 끼어 있는 것이 참으로 낯설다. 군중 속에 병아리 한 마리가 끼어든 느낌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치 축제를 즐기는 것 같다. 내 앞의 어떤 사람은 챙 넓은 목동 모자에다 커다란 비닐 풍선을 길게 끈에 매달고 달린다. 그 풍선이 자꾸 내 머리통에 부딪히며 심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즐기는 거야 좋지만 남에게 이렇게 방해를 끼치다니.. 무식하고 교양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쯪쯧' 나는 그 무식한 풍선의 방해와 6분/km의 속도를 유지해야하는 내 계획을 막는 사람들을 피해서 마라톤에서 금기사항인 걸 알면서도 이리저리 사람들을 사이로 앞지르기를 계속하며 경기장 트랙을 빠져나온다. 출발할 때 지체한 것이 계속 신경쓰여 열심히 달리는데 한결같이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서 뛰어나간다.
나는 1km단위로 페이스를 준비했는데 1km 팻말도 안보이고 2km 팻말도 안보이고 사람들이 어찌나 나를 추월하는지 '이러다가 맨 후미에서 뛸 것 같다' 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롯데백화점 부근을 지나면서 나는 이미 심리적으로 지쳐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2.5km 지점에서 일단 첫 물을 마시며 다시 각오를 다진다. 서곡교를 지나 조금 뛰다보니 내 뒤에서 호르라기 소리가 난다. 나는 뛰기도 벅차기만한데 '맙소사,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저토록 여유를 부리는가?' 그 기죽이는 호르라기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까 그 무식한 풍선이 경쾌하게 나를 앞지르는데 등판에 '페이스 메이커'라는 글씨가 보인다. '아뿔싸 교양 없고 무식한 풍선이 아니라 내가 무식한 왕초보로구나' 안내 책자에서 페이스 메이커를 운영한다는 글은 봤지만 직접 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혼자서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 풍선을 무식하게 따라가 보는데 '어휴- 난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다' 얼마간 따라가다 뒤쳐지며 '역시 나는 초보다'를 되내이며 이미 좀 지친 상태인데, 그때서야 '5km'라는 첫 팻말이 나타난다. 시계를 보니 아뿔싸!!!! 25분을 조금 넘었을 뿐이다. 그동안 마라톤 사이트를 끼웃거리며 여러번 본 문구가 '초반에 오버 페이스가 마라톤의 최대 금기'라는데... '아이고 이를 어쩌나...내 실력으로 여기까지 30분도 빠른 건데 5분 가까이 오버를 하다니...' 이 생각이 나를 본격적으로 지치게 만든다. 마라톤은 평지에서만 달리는 것인줄 알고 있는 나에게 두 번의 언더 패스의 그 짧은 그러나 나에겐 절벽(?) 오르막길을 지나며 나는 더욱 사정 없이 지치기를 계속한다.
우림교를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계속되는 오르막은 뛰어본 사람들이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 나에게는 차라리 공포에 가까웁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나를 앞지르고, 아무래도 내가 꼴찌일 것만 같아 뒤를 보니 그래도 한 무더기의 기다란 알록달록이 저만치 뒤에서 나를 위안해 준다. 오르막에 대한 연습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반환점까지 계속되는 오르막만 내가 뛸 수 있다면 완주할 수 있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힘든다' '지친다' '오버 페이스를 했다'는 생각들을 최대한 안 만들면서 한발 한발 힘을 모은다. 중간 중간에 한 모금의 물들은 나의 최고의 응원자고 활력소가 된다.
10km 지점에서 물을 마시며 사전 답사에 의하면, '여기서부터 반환점까지가 나에게는 최대의 승부처'임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며 각오를 가다듬는다. 그러나 그 곳의 오르막에 나는 끝내 굴복하고 걷기로 한다. '완전 탈진보다는 차라리 이 비굴이 낫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다가, 다시 사력을 다해 뛰는데 내 앞에 나보다는 20kg 쯤은 더 나갈 듯 싶은 50 중반 쯤 될 듯 싶은 분이 힘겹게 뛰고 있다. '나보다 저 분은 더 힘들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접근해보니 좀 낯익은 얼굴이다. 클럽 사이트에서 보았던 정주천부회장님 같다.(아닐지도 모르지만 난 그렇다고 단정을 한다) '저도 전주마라톤클럽 멤버입니다. 정주천 부회장님 맞죠? 사이트에서 사진을 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용우라고 합니다.' 머리 속에서는 이런 인사를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할 힘이 없다. 나는 정부회장님이 나를 알아보고 '몸이 참 경쾌하게 잘 뛰시네요'라는 선배로서의 격려의 인사라도 받고 싶었지만 나를 모르시니 어림도 없는 내 생각일 뿐. 그래서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내가 먼저 해 주기로 결정한다. 힘들 때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방법이다. 힘들지만 이를 악 물고 나는 여유를 피우기 시작한다. " (사이트에 이번 대회 2시간 30분에 달리신다고 써놓으시더니) 몸이 참 (헥헥) 가벼우시네요.( 헥헥)" 그 분은 뭐라고 나에게 답례를 하지만 나는 힘들어서 그 말을 기억에 저장할 여력이 없다. 다만 내 격려에 그 분이 약간의 힘을 얻은 건 분명하고 그 모습을 보며 나도 힘을 충전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내가 사전에 답사한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반환점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오, 만세! '계속되는 공포의 오르막길, 반환점까지만 갈 수 있다면 나는 완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으로 만세를 부르는 거다.
"힘 내세요!! 완주하세요!!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입니다!!"
자원봉사자인 듯 싶은 젊은 친구들이, 나누어주는 리본색보다 더 진한 핑크빛 비행기를 연신 태운다. 시계를 보니 56분이다. 뜻밖이다. '이 정도면 내심 목표로 세웠던 2시간내 완주도 도전할만 하다'
'남들도 힘든다. 그들을 고무하여 내 힘을 만들자'는 내 작전을 계속하기로 계획을 세우며 반환점을 돌아 내리막길을 뛰는데 평화팀 한맹렬 선배님이 달려오신다.
"히-임!"
고참 선배에게 '힘!'을 외치고 보니 아쭈리, 지가 무슨 왕고참이나 된 듯한 기분이 들며 우쭐한 힘이 생긴다. 그렇게 달려오다가 다시 급수대에서 이온음료 두컵을 마시며 완주의 각오를 다진다.
11km 지점 쯤에서 50대 중반의 지친 싸나이에게 말을 건다. "몸이 가벼우시네요!" 내 몸이 무거워서 누군가로부터 이 말을 들으면 힘이 날 것 같아, 내가 남들에게 그 말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여요? 나이는 못 속이네요. 이이고 힘들어 죽겠네요. 댁은 몇 살이슈?" 뛰면서 말하기가 쉽지 않아 헥헥거리는데 그 분이 내 옆 모습을 쓰윽 훑어보시더니 "30대이신 모양입니다. 좋은 때입니다." 말 대꾸하면 말이 길어 질 것 같아 그냥 뛰며 힘을 모아 또 말을 건넨다. "많이 뛰신 분 같아요." "한 3년 전부터인데 체중이 더는 줄지 않네요. 뛰신지 얼마나 됩니까?" 그 분이 나에게 되물어왔다. "이 유니폼은 며칠 전에 처음 샀고, 이 마라톤화는 한 달 전에 처음 산 왕초보입니다" "이-익? 정말요? 그런데 참 잘 뛰십니다, 그려!" 이것이 바로 내가 듣고 싶은 충전 에너지가 실린 말이다. 그 고참 분과 나란히 뛴다는 것이 이미 나는 자랑스럽고 그 분과의 대화를 통해 나는 힘을 만들고 있다. 계속 그 분과 동반주를 하노라니 그 분이 달리면서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준다. "숨이 가쁘다는 건 오버 페이스 표시입니다. 그 땐 속도를 늦추어야 합니다." "목마르지 않아도 급수대의 물은 꼭 마시세요."
돌아오는 길에는 여러 사람을 추월하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추월하며 그 사람들에게 사실 여부와 상관 없이 말 선물을 계속한다. "몸이 가벼우시네요!. 힘 냅시다. 으샤 으샤" 마치 페이스 메이커라도 되는 양 어느덧 구령까지 붙이는 여유를 즐기고 있지만, 사실 몸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다.
16km 지점에서 또 하나의 페이스 메이커가 내 등 뒤에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붙이며 내 앞에 뛴다. '아중리를 사랑한다'는 글을 등에 달고 남녀 두사람이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들린다. "발을 뒤로 드는 것보다 차라리 그 힘으로 앞으로 내미는 게 좋다." "하나, 두울, 하나, 두울" "이 속도로 가면 2시간보다 2~3분 빠르게 도착할 것 같으니 이대로 가다가 나중에 속도를 좀 줄입시다." 그 말에 내심 크게 안도하며 그들과 어깨를 맞추지만 19km지점 직전에서 그만 '아중리를 사랑한다'는 글씨를 저 앞으로 보낸다. '많은 도움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아중리를 사랑할께요...' 2시간짜리 페이스 메이커를 앞세우니 여러 단어들이 머리를 스친다. 좌절, 포기, 절망, 한계. 과욕. 왕초보. . '2시간 내는 무리인가? 그냥 완주에 만족해야 하는가?'
출발할 때부터 오늘 하루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완주'다. "대회장이신 김'완주' 전주시장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넘기자, 대회장님이신 김'완주' 전주시장님이 말씀하신다. "여러분들! 부디 건강하게 '완주' 하십시오" 길가의 어린 자원 봉사자와 진행 요원들이 연신 외친다. "완주하세요! 완주요!" '머르장머리 없는 친구들! 완주가 지 친군가? 대회장님이신 시장님 함자를 마구 입에 담다니...' 하도 많이 들으니 '완주는 힘들어요!'라는 암시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서곡교를 지나자 내 앞 뒤로 주자가 뜸하여 그 넓은 8차선 도로를 나 홀로 뛰어간다. 차들을 다 세워놓고 넓은 길을 혼자 뛰노라니 미안함도 있지만 짜릿한 쾌감과 우쭐대는 마음까지도 생긴다. 경찰관을 향해 손도 흔들고, 운전석의 짜증스런 표정에게도 손을 드는 여유를 통해 마지막 힘을 모은다. 저 앞에 거의 탈진 수준인 또 다른 50 중반의 싸나이를 내 마지막 활력 대상으로 정한다. 여러번 써온 말을 또 선물한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진심을 담아 말을 건넨다. "몸이 가벼우시네요. (헥헥) 힘 냅시다! (헥헥) 으샤! 으샤! (헥헥)" 내 구령을 듣더니 옆에서 걸어가던 젊은 친구가 다시 뛰기 시작한다. 내가 빨간 옷을 입었더라면 그는 아마 나를 페이스 메이커로 알았을 것이다. 나는 너무 지쳐서 더 지칠 공간이 없다. 나의 빈 공간은 여유 뿐이다.
"여러번 하프를 뛰었는데 2시간 내는 한번도 못 뛰네요." 자조 섞인 목소리에 내가 빠져들기 십상인 분위기다. "아닙니다. (헥헥) 지금 시간을 보면 충분합니다. (헥헥) 저는 처녀 출전입니다. (헥헥) 선배님 저랑 한번 해 봅시다. (헥헥) 선배님이 후배에게 희망을 보여주십시오. (헥헥)" "아니오. 이미 늦었어요. 두시간짜리 페이스 메이커가 아까 앞에 갔습니다" 그에게 동조하는 건 나 자신이 좌절하는 것과 같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절규한다. "아닙니다. 저 앞에 간 건 2~3분 빠르다고 했습니다. 저 뒤를 보세요! 두시간 짜리 페이스 메이커는 저 뒤에 오고 있습니다." 뒤에 오는 게 두 시간 짜리인지 앞에 간 것이 두 시간 짜리인지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분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열심히 뒤에 오는 게 2시간 짜리라고 절규를 뿌린다. "나랑 동반하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나는 내 페이스로 갈랍니다" '힘 내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할 수 있어요! 충분해요!' 그 분에게 머릿 속에서 외치지만 실은 그 말은 내가 나에게 하는 외침의 말이다. '이 상태만 유지하면 2시간내가 가능하다. 가능해! 가능해!'
그 분을 뒤로 하고 롯데 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오호 횡재라! 평화 팀장님이 바로 앞에서 뛰고 있다. 오, 하느님 성모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천군만마를 만난 기분이다. 있는 힘을 다해 부른다. "티 임 자 앙 니 임 ! (같이 가요! 나 힘들어요)" 팀장님은 무표정하게 나를 한번 휙 돌아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앞으로 주욱 달려나가신다. '아니 이럴 수가!' 야속한 심정, '기록을 의식하는가 보다'고 다스리지만 결정적으로 힘이 빠진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힘을 빼면서 남 타령하는 건 지금 무의미하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이란 어차피 혼자 사는 거다. 실은 아무도 나를 도울 수가 없다. 나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나 뿐이다.지금 여기에서 나는 이것을 처절하게 경험적으로 배우고 있다. '서운함은 그만 만들자!'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 사실, 계속 서운함을 만들어 낼 힘도 나에게는 없다.
경기장을 왼쪽에 끼고 달리는 건 더욱 힘이 부친다. 배고플 때 못 먹을 떡이 있는 것과 같은 셈이다.걷고 싶은 마음이... 마음이... 마음이... '아니야. 다 왔어. 힘내! 이대로 가면 목표인 2시간 내도 가능해 뛰어!!!'
이윽고, 저만치 커다란 노란 아치가 내 작은 눈 속에 쏘옥 들어온다. 주홍빛 트랙이 마지막 격려를 하듯 내 발바닥을 토닥거린다. 누군가 멀리서 사진을 찍고 있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대회를 마친 후에야 Photoro.com에서 찍는 사진인 것을 앎. 미리 알았으면 폼 좀 잡는 건데...)
"삐-위-익" 이 세상에 와서 들은 가장 아름답고 멋지고 신나는 소리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내 돈 세는 소리'로 알고 있는 내 머릿속 메모리를 정정한다.
그런데, 피니쉬 라인은 의외로 나에게 무심하다. 삐이익, 그 전자음 말고는 아무도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도 없고 '수고했다' '축하한다'는 격려의 말도 없다.
사람 많은 경기장, 그 결승선에서 나는 환희가 아닌 잔잔한 허무와 고요를 만난다. 내 삶을 다 살고 난 어느 날, 내가 숨을 멈추면 아무도 '수고했다'고 '축하한다'고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시끄럽게 울기나 안하면 다행일 것이다. 아무도 내 마라톤 처녀출전 완주에 관심이 없다. 내 삶도 그러하리라. 아마...
누군가 나를 칭찬하고 고무해 준들 삶은 삶.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서운함도 원망도 후회도 심지어 피곤함 그저 관념일 뿐이다. 희열도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없다. 지금 여기에는 오직 '나'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진한 격려로 나 자신을 스스로 위안한다.
'그래, 해냈어! 나는 나인 것이 좋다 !!'
나는 이상하리만치 고요와 평온을 느낀다. 그 왁자지껄한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피니쉬 라인.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출발점이다. 우리들 인생도 그러하리라. 아마.... 아들아, 언젠가 내가 숨을 쉬(止)거든 내가 쓰던 몸을 두고 울지마라. 구태어 나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라. "완주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가능하다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나를 조용히, 그냥 조용히 지켜봐 주라. 준비한 꿀물을 내 몸에게 먹이며 나는 아직도 피니쉬 라인을 향해 들어오고 있는 이들을 조용히 지켜본다.
"두시간 완주를 목표로 기를 썼는데, 뛰어보니 성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군요." 목표를 달성한 승리자여, 만세! 좌절을 맛본 승리자여, 만세! 절망을 맛본 승리자여, 만세! 과욕을 맛본 승리자여, 만세! 오, 저기 저, 포기를 맛본 승리자여, 만세! 이 놀이에 참가한 우리는 결과와 상관 없이 이미 모두가 다 승리자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당신인 것을 좋아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2004.05.25 수야(水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