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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족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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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스크랩 역사 보고 강화도
봄내인 추천 0 조회 135 09.01.11 15: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목 차]

 

1. 강화도 개관

2. 탐방코스안내

3. 향토음식 및 별미음식

4. 한민족의 성지

단군유적지 : 영산 마니산, 참성단, 삼랑성,

5. 유적지

1) 강화역사관-[통제영학당지]

2) 강화산성-[연무당옛터]

3) 전등사-[양헌수]

4) 정수사와 보문사-[정수사], [보문사]

5) 고려궁지-[외규장각지]

6) 강화 고인돌

7) 진과 보, 돈대-[갑곶돈대], [초지진], [덕진진], [용진진], [광성보]

8) 병인양요와 신미양요-[프랑스를 격퇴한 병인양요][미국을 격퇴한 신미양요]

9) 성공회 강화성당-[강화도 의병운동과 교회]

10) 고려왕릉-[홍릉], [석릉], [가릉], [곤릉]

11) 조선왕실관련-[철종][용흥궁][철종외가][선원보각지][연산군적거지]

12) 봉수와 요망대-[봉수][요망대]

13) 강화인물-[이규보],[김통정],[김상용],[이건창],[윤집],[홍익한],[황형],

[황사영],[선돌]

6. 강화의 전설

7. 기타

함허동천, 동막해변, 서해낙조, 석모도

 

 

1. 강화도 개관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렀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 때에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렸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강화로 천도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39년간이나 사실상의 왕도가 되었고, 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었다.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1231년 몽고군이 송경, 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고종 19년(1232)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이령군(二領軍)으로 하여금 국도의 방어선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두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을 송악이라고 짓게 했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고, 22년 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년 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고세력에 밀려, 임시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다시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했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항전을 지속하였으나, 끝내 몽고군에게 유린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년 6월에 몽고 내지로 납치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 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했고, 뒤를 이은 24대 원종도 강화를 서울로 이어받을 생각이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이를 실현치 못하였다. 이로써 강화는 천도이후 39년간 고려의 국도가 된 셈이다.

 

강화서울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 25대 충렬왕 10년에는 원나라의 반적, 흡단의 내침으로 충렬왕이 일시 강화로 피했다가, 2년 후 송도로 환도한 일이 있었고, 고려 말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해 강화천도가 논의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정종, 태종의 3대왕이 일시적이나마 강화에 잠행한 일이 있고, 특히 태종은 강화에 도호부사를 두어 방어를 강화했으며, 14대 선조도 강화의 방어에 주력해 왜병을 근접치 못하게 하여, 남북 간 적병의 연락차단에 성공했던 일도 있다.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제 1차의 난에서 40일간을 강화로 몽진, 겨우 난을 피했었고, 제 2차 내침 때에도 강화로의 몽진이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고, 강화로 피난한 왕자들이 잡혀가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한지 45일 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 17대 효종으로 하여금 북벌계획을 추진케 하여 강화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케 하였다. 19대 숙종은 인조시대부터의 유수에 진무사를 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기위한 진, 보를 증설하고, 각 진에 돈을 설치하여 분담 수비하게 하였으며, 문수산성의 축성 등 모든 방비를 강화시켰다.

 

강화도의 수난은 현대까지 이어지는데, 조선 고종 3년의 프랑스 군함사건과 동 8년의 미국 군함사건, 동 12년의 일본 군함사건 등 조선 최후의 비극을 연출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 곧 강화도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별도로서 또는 요새지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지녀온 강화인 만큼, 당시의 왕궁을 중심한 고적과 유적이 전도에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도처에 승경이 있어, 어디를 가나 왕도를 찾는 기분이 충만해 있다. 서울에서 1-2시간 거리에 위치한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5번째로 큰 섬으로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많아서‘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라고도 불린다.

 

※ 우리나라 10대섬

1)제주도 2)거제도 3)진도 4)강화도 5)남해도 6)안면도 7)완도 8)울릉도 9)돌산도

10)거금도

 

1988년 개관한 강화역사관 제1전시실에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생활상이 펼쳐진다. 제2전시실은 문화전시실로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과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3전시실은 북방민족의 침략사, 제4전시실은 근세의 역사를 담고 있다. 갑곶돈대는 역사관과 이어져 있다. 이 돈대는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겨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강화읍내에는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산성, 강화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강화동종, 성공회 강화성당 등의 유적지가 있다.

 

강화도 동부, 강화해협 쪽의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과 각 돈대들은 고려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방어하기 위한 국방유적들이다. 강화역사관과 고려궁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을 모두 보려면 5개소 일괄관람권을 구입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대인 2700원, 청소년 1700원.

 

고려시대에 39년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몽고군과 끈질긴 전장의 승전을 불심으로 다스리기 위한 팔만대장경의 각판과 민족 문화의 황금기에 만들어진 고려청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주조 등 찬란한 역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강화도는 큰 섬이 작은 섬 몇 개를 거느리고 북단으로는 선사시대와 고려시대 유물 및 각종 박물관, 갤러리 등이 산재하며, 동으로는 호국의 국방 전적지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너른 갯벌, 물이 들어오면 훌륭한 해수욕장으로 탈바꿈 되는 바다와 세계적으로 이름난 철새도래지 여차리. 그리고 환상의 서해낙조인 장화리에서 그 남단의 끝을 맺는다.

 

서쪽으로는 보문사와 마애석불. 아직도 천일염을 생산하는 삼량염전, 수 천 년 유구한 역사의 자취가 살아 숨 쉬는 교동도, 철새의 낙원 볼음도. 해당화 피고 지는 주문도 등 수없이 많은 유?무인도가 있으며, 황해에서는 숭어, 꽃게, 새우등 서해 특유의 해산물이 상당량 생산된다.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 강화의 섬과 산

강화도, 교동도, 동검도, 미법도, 볼음도, 석모도, 서검도, 아차도, 주문도, 황산도 등 여러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니산, 고려산, 낙조봉, 혈구산, 진강산, 별립산, 길상산 등의 저산성 산지가 솟아 있고, 산지 사이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 강화의 기후

강화를 이루는 섬들은 지질시대에는 김포반도에 연결된 육지였으나, 오랜 침식작용으로 평탄화 된 뒤 침강운동으로 육지와 나뉘어 섬이 되었다. 암석은 화강암, 화강편마암이 주이며, 염해연안에 약간의 중생대층이 나타난다. 기후는 해양성 기후의 특징을 띠어 같은 위도의 내륙지방보다 따뜻하다.(연평균기온 : 11.2도C, 연강수량 : 1146mm)

온화한 기후로 인해 남서부에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동백나무, 초피나무, 보양목, 탕나무 등의 난대성식물이 자생한다.

 

◈ 강화소재 보물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제10호), 강화동종(제11호), 정수사 법당(제161호), 전등사 대웅전(제178호), 전등사 약사전(제179호), 전등사 범종(제393호), 석조여래입상(제615호), 철아미타불 좌상(제994호)

 

2. 탐방코스

 

(1) 전적지코스

강화역사관(갑곶돈대,갑곶리탱자나무)→광성보→덕진진→초지진→전등사→고려궁지→연무당옛터

(2) 강화산성코스

강화산성남문→남산약수터→석수문→연무당옛터→서문→북문→오읍약수터→고려궁지→김상용선생순절비→용흥궁→토산품판매장→풍물시장

(3) 강화읍코스

강화버스터미널→고려궁지→강화산성북문→오읍약수터→김상용선생순절비→성공회강화성당→용흥궁→연무당옛터→강화산성서문→토산품센터→풍물시장

(4) 선사유적지코스

강화역사관→강화지석묘→점골지석묘→삼거리고인돌군→내가지석묘→고려산등산,고천리고인돌군

(5) 교동도코스

강화역사관→고려궁지→강화지석묘→무태돈대→창후리선착장→월선포선착장→교동향교→화개사→교동읍성→연산군적거지→남선포,사신나루→고읍리→달우물시욕장

(6) 고려시대관련유적지코스

강화역사관→선원사지→이규보묘→가능→홍능→고려궁지→북문→오읍약수터

(7) 일주코스

강화대교->강화역사관->광성보->덕진진->초지진->함허동천->갯벌생태체험관-> 마니산->고인돌->연무당옛터(서문)->고려궁지->용흥궁

 

3. 향토음식 및 별미음식

(1) 향토음식

옛날식 백반, 시래기밥, 왕새우 소금구이, 밴뎅이회, 황복회, 옻닭, 용봉탕, 강화쌀,

화문석, 인삼, 새우젓, 씨없는 감, 강화김, 강화고추

(2) 계절별 별미음식

1 ~ 3월 : 동어구이, 생굴, 4 ~ 6월 : 숭어, 농어회

7 ~ 9월 : 벤뎅이, 병어, 준치회 10 ~12월 : 낚지, 대하구이 등

(3) 강화읍장날 : 매월 2, 7, 12, 17, 22, 27일

 

[강화8경]

①전등사 종소리, ②보문사 석불, ③연미정 달맞이, ④갑곶 대교, ⑤마니산 단풍, ⑥손돌목 물결, ⑦초지진 포대, ⑧적석사 낙조

 

◈ 연미정

이 정자의 초창 년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고종이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학생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勉學)케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후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방어사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중종7년(1512) 순변사가 되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황형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 한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해협(염하강)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하였다 한다. 높은 석주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 20년(1744) 중건, 고종 28년(1891) 중수 등 수차에 걸쳐 보수하였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시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군사시설 보호구역내에 위치함.

 

◈ 적석사

적석사는 고려산 서쪽에 위치. 고구려 장수왕 4년(416)에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오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 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이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다. 동에 청련사, 서에 백련사. 북의 흑련사, 중앙에 황련사가 있다.

 

4. 한민족의 성지=단군유적지

 

◈ 영산 마니산

강화군 화도면에 위치한 산으로 가운데 부분 봉우리에 참성단이 있다. 마니산 정상(469.6m)은 단군성조께서 하늘에 제천의식을 봉행하던 참성단(465m) 동쪽의 헬기장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봉우리이다.

 

한반도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마니산은 한라산의 백록담과 백두산의 천지까지의 거리가 똑 같다고 한다. 마니산은 전국에서 기가 가장 센 곳이라고 한다. 강화도 주민들은 모두 마리산 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머리에 해당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옛날 지도에는 摩利山(마리산) 또는 摩尼山(마니산) 으로 표기된 것도 있다. 현재 한자 표기는 摩尼山(마니산) 이다. 마니산은 88세계 장애자 올림픽 때 성화를 채화 전세계에 불을 밝혔으며, 매년 전국체전 개최 시 성화를 채화 봉송하고 있다. 또한, 등산로를 따라 91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노라면 서해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탁 트인다.

 

마니산은 해발468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 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이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 섬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 참성단의 기록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은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다.

 

◈ 참성단-사적 제136호

마니산(摩尼山 468m)의 참성단(塹城壇)은 대한민국 내의 유일한 단군 유적이다. 사실의 실재 여부를 떠나 적어도 1,000년 가까이 마니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단으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와 있다.

 

참성단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사에서 고려 원종 5년 (1264년)에 왕이 친히 이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참성단을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단으로 전한다 " 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뤄 원종 이전에 이미 참성단이 설치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단군기원 51년에 " 단군왕검께서 춘추로 제사를 올리기 위해 참성단을 쌓았다" 고 한다. 이는 기원전 2282년에 해당한다. 고려이후 참성단은 인조 17년(1640년) 강화 유수 최석항에 의해 개축됐다.

 

단의 크기는 길이 90자(27m), 폭 60자(18m), 높이 18자(5.4m)로 3층으로 구성하고 계단을 세 곳, 문도 세 곳에 설치하였다. 참성단은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제단과 그 앞에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의 광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참성단은 천. 지. 인 삼재가 한자리에 구현된 조형양식이다. 이는 다른 말로 " 홍익인간 "의 의지가 스며있는 자리라고 하겠다.

 

참성단을 조성한 연대의 기록은 대야발의 단기고사(707년), 최치원의 제왕연대력(890년), 권근의 동국사략(1043년), 이암의 단군세기(1363년), 노사신의 동국여지승람(1486년), 이맥의 태백일사(1520년), 북애자의 규원사화(1675년), 홍봉한의 문헌비고(1770년)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년), 조선 인조 17년(1639년), 숙종 43년(1717년)에 단을 보수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이곳 참성단에서 제천의식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숙종 때의 보수 내용은 참성단 동쪽 등산로에서 5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참성단 중수비>에 강화 유수였던 최석항이 높이 5m에 폭 3m의 자연석에 기록하여 놓았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에 의하면, 단군왕검께서 단기 51년(B.C.2282)에 운사 배달신에게 참성단과 삼랑성을 쌓을 것을 명하시어 참성단은 마니산에 쌓고, 삼랑성은 지금의 정족산에 쌓았는데, 그 때 조역한 사람만 강화의 남쪽 백성 8000명이 들었으며, 3년 후 성이 완성된 신유년에 천왕이신 단군께서 친히 오시어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늘에 천제를 올렸다 한다.

 

*. 암스트롱이 1969년 7월 20일 아폴로우주선 탐사시 지구를 사진찍으니, 지구에 참성단과 만리장

   성이 가장 정확하게 보였다. 특히 참성단은 도장같이 보였다. 빌리그래엄 목사도 여의도광장 대

   전도회에서 증언-지구의 핵이며 뿌리. 유리겔라가 비행기에서 기를 감지.

 

◈ 삼랑성-사적 제130호. 넓이 23만 9027.2㎡, 둘레 약 1km.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다만 단군(檀君)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성 구조를 보면 잡석으로 축조되어 삼국시대 석성구조를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보수, 조선시대에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네 곳에 있으며 문 위에는 누각이 있던 흔적이 있으나, 남문만을 복원 종해루(宗海樓-전등사 정문)라 하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된 마니산의 사고가 옮겨와 보존되었었다. 그리고 성내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으며, 병인양요 당시에 프랑스군에 승리한 기념비로서 양헌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이러한 삼랑성은 특히 마니산 전설과 더불어 단군신화와 관련되는 흥미있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태백일사에 의하면 예전에는 삼신을 수호하고 사람의 목숨을 이치대로 돕는 자를 말하여 삼시랑이라 하였으니, 이들의 본디 이름은 삼신시종지랑(三神侍從之郞)이었다. 그러니 삼랑은 본디 배달이라는 신하였고, 또 세습적으로 삼신을 수호하는 관리를 말한다고 하였다. 또한 환단고기 신시본기에 따르면 삼랑은 배달신이니... 지금의 혈구(강화)에 삼랑성이 있다.

 

성이라는 것은 즉 삼랑신하가 숙위하던 곳이며 랑이라는 것은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대야발의 단기고사나 이암의 단군세기와 그 책들을 인용해 편집한 이맥의 태백일사에서도 삼신수호의 목적으로 삼랑성을 축성하였다고 하였다. 반면에 규원사화나 단군고 등에서는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와 두 아드님이 와서 축성하였다고 하며 방위의 목적도 있다고 하였다.

 

5. 유적지

1) 강화역사관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갑곶돈대 옆에 있는 강화의 역사를 주제로 하는 전시관으로 1988년 개관한 강화역사관은 선사시대로 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역사에 대한 설명과 전시물들이 있다.

 

마당에는 세계금속활자중흥기념비와 예전에는 용정리 비석군이라고 불리던 비석들이 마당을 채우고, 동쪽 편에는 시선 1척이 있다. 역사관에서 동쪽으로 20m 지점에는 천연기념물인 갑곶리탱자나무가 있다. 20m 정도 더 가면 갑곶돈대가 나온다. 입장료(2004.1.1)는 어린이(7-12), 청소년(13-19), 군경(하사이하)은 700원(할인 600원), 어른(20-64)은 1300원(단체할인 900원)이고, 주차는 무료이다.

 

※. 강화군청에서 운영하는 강화역사관, 갑곶돈대, 고려궁지,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의 입장료는 한꺼번에 구

    입하면 30% 정도 할인. 일괄 구입한 입장권은 보통 2일 정도 유효.

 

제1전시실 : 개국시원(開國始原)

강화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국조 단군(檀君)의 개국과 더불어 그 역사를 같이 하고 있는 역사의 고도(古都)이며 개국의 성지(聖地)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塹城壇)과 군내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유적은 강화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제2전시실 : 강화의 문화

강화는 세계에 빛나는 한민족의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로 천도하여 이 시기에 민족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금속활자의 주조, 팔만대장경의 판각, 상감청자의 제작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전국적으로 유명한 화문석(花紋席)반닫이 등의 공예문화도 뛰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제 3전시실 : 강화전쟁사(고려, 조선)

강화는 고려시대 이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대변하듯 수차례 외세의 침입을 받은 곳으로서 외침에 대한 항쟁처이며 국가방어의 주요지역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특히 몽고의 침략 때 38년간 고려의 도읍으로서 끈질긴 대몽 항쟁을 주도한 곳이다. 또한 조선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에는 조정의 피난지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 4 전시실 : 강화 전쟁사(江華 戰爭史-近代)

예로부터 강화는 조선의 수도인 한성으로 통하는 관문이자 수도방위의 전진기지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근대에 이르러 신식무기로 무장한 서구 열강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에 침략하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켰지만, 조선의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물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를 빌미로 강화 갑곶진에 상륙한 일본은 마침내 조선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 강화도조약)를 체결하기에 이르는데, 이로써 조선도 일본과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통제영학당지]

조선말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하자, 고종이 1876년 개항과 더불어 해양강국을 지양하는 군함건조와 구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재부족, 재정궁핍 또한 청나라 및 일본의 조선침략정책에 기인하여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우선적으로 해군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1893년 강화도 갑곶리에 우리나라 최초로 통제영학당(해군사관학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8월 청?일전쟁의 발발로 존폐의 지경에 처했다가, 1896년 5월 Callwell대위 일행이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폐교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건물은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으며, 영국인 교관들이 거주하였던 한옥이 남아있다.

 

2) 강화산성

고려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에 토성으로 축조, 그 규모가 매우 광대하여 강화읍 선원면 일대를 돌려 쌓았으나, 패전 후 몽고군의 강요로 헐리었다. 조선 초에 이르러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시 일부 파손되어, 효종 3년(1652)에 보수 하였다.

 

숙종 3년(1677) 유수 허질이 전면은 돌로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였으며, 그 후 동?서?북쪽의 일부는 숙종 35년 (1709)에 유수 박권. 동?남의 일부는 숙종 37년(1711) 유수 민진원이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성은 치첩 1813개소, 4대문(동.서.남.북), 4소문, 2수문, 4개의 성문장청등을 설치했다. 동문 망한루(望漢樓), 서문 첨화루(瞻華樓), 남문 안파루(晏波樓), 북문 진송루(鎭松樓)라 하였다.

 

[연무당옛터]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 옛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이다.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3) 전등사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72)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 그 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할 전, 등불등자(傳火登)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이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 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 104 매가 보전되고 있으며, 정화궁주의 시주물로 전해 내려오는 청동수조와 옥등이 남아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 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있다. 처음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 이래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 후 전등사는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경내에 있는 보물 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 97-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 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 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 수비대장 양헌수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 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178호)

대웅전은 1916년 수리시 발견된 양간록에 의하면 선조 38년(1605) 일부 불탔으며, 다시 광해군 6년(1614)에 불이나 모두 타버림으로서, 다음해 공사를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완공을 본 것으로 되어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팔작집으로 막돌 허튼 층 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운 다포식 건축이다. 귀공포에는 나무로 깍은 인물상(나녀상)을 얹어 놓은 것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목조로 된 석가ㆍ아미타ㆍ약사여래의 석가삼존불을 목조 닫집(또는 천개)안에 봉안하고 있다.

 

※ 전설에 의하면 대웅보전 나녀상은 힘들게 처마를 받쳐 들고 있다. 도편수가 여인이 미워

서 힘든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도록 했다고 한다.

 

◈ 전등사 약사전(보물 제179호)

대웅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건축양식은 조선 중기의 다포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팔작집이다. 계단식의 기단 위에 배흘림으로 기둥을 세우고, 약간 안쪽으로 휘었는데 지붕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 전등사 범종(보물 제393호)

중국 북송 철종 소성 4년(1097, 고려 숙종2년)에 희주 하남성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된 철제 범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이다. 일제강점 말기 부평 병기창에 놓아두었던 것을 광복 후 독실한 불교신자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옮겨 현재에 이른다.

 

◈ 정족산 사고(장사각)

사고는 고려 고종 때 처음 설치했으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소실된 것이 많다. 조선시대에는 충주, 춘추관, 성주, 전주 4곳에 설치하고 실록을 1부씩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왜란이후 1603년-1606년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실록을 활자로 3부 출판했다. 전주실록 원본과 교정본을 합한 5부의 실록은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교정본),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전주실록)에 분산 보관하였다.

 

춘추관본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소실되었고, 묘향산 실록은 1633년 후금과의 외교악화로 전북 무주 적상산으로 이전했고, 마니산실록은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크게 파괴되어 현종 때에 보수하였고, 1678년(숙종 4)에 정족산에 새로운 사고를 건축하고 이장했다. 실록 원본은 일제시대 때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갔다.

 

※ 실록은 좀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빛을 쪼여주는 포쇄를 실시한다.

 

◈ 정족산 가궐지-(향토유적 11호)

고려시대 연기비보(국운의 연장을 꾀하는 비보책) 방책으로 강화도에 축조한 가궐지이다. 1258년 2개의 가궐(신니동 가궐)과 이궁(흥왕리 이궁)을 조성하였다. 전등사 앞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 터만 남았다. 왕이 직접 머물고 있는 것처럼 밤마다 금침을 깔고 불을 밝혔다 한다.

 

◈ 선원보각-(향토유적 12호)

조선 왕실의 계보와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었다. 1910년 국가의 명으로 철폐되고 서적들은 한양으로 옮겨졌고 건물은 퇴락한 것을 1999년 복원하였다.

 

◈ 양헌수 장군비-(인천시 기념물 36호)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 정족산성에서 싸워 승리하여 프랑스가 퇴각하도록 하였다. 승전비는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양헌수 비는 국가에서 세운비가 아니라 주민이 세운 비이다.

 

[양헌수]

본관 남원(南原). 자 경보(敬甫). 시호 충장(忠莊). 이항로(李恒老)의 문인.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철종 때 참상(參上)에 승진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천총(千摠)으로 좌선봉장이 되어, 강화도 정족산(鼎足山)에 침입한 제독 로즈가 지휘한 프랑스 함대를 대파, 다량의 신무기를 노획한 공으로 한성부좌윤(左尹)에 특진하였다. 그 뒤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신임을 얻어 어영?금위?포도의 각 대장을 거쳐, 1875년 형조판서, 1884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4) 정수사와 보문사, 선원사지

[정수사]-(보물 제161호)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懷正禪師)가 창건하여 정수사(精修寺)라고 했는데, 조선 세종 8년(1426) 함허대사가 수축할 때 법당 서쪽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수사(淨水寺)로 고쳤다고 한다.

 

이 법당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현재의 정면 툇마루 부분은 후대에 가설된 것으로 보인다. 문은 통 싸리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연꽃무늬 조각의 특수 문양으로 유명하다.

 

[보문사]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의 글씨로 '낙가산 보문사'라 새겨진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오르면,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를 갖춘 대웅전이 보문사를 찾는 사람을 반기고 있다.

 

대웅전의 내부 넓이는 약 60평, 이곳에 관음보살상을 포함해 3,000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바로 아래에는 요사채가 있다. 보문사 석실은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만들고 동굴 내에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제화갈라보살과 나한상을 안치하였고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선덕왕 때 어부들이 고기잡이 나가다 그물에 걸려, 올려진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하며, 이때부터 석실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뒤의 역사는 알 수 없고, 조선 시대 후기에 들어서 1812년(순조 12년)에 한차례. 그리고 1867년 (고종 4년)에 다시 경산(京山)화상이 석굴을 보수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8년 춘성(春城)선사가 석굴 내부를 좀 더 확장, 개수하였고, 최근에는 1980년 정수(靜守)스님이 내부를 다시 확장하는 한편, 지금의 불단 뒤와 옆에 있는 석탱화를 조성하였다. 보문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 및 안에 봉안된 나한상이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높으며, 우리나라에 흔치않은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석실의 구조를 보면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고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을 달았다. 석굴 안은 면적이 30평으로 꽤 널찍한 편이다. 석실에 들어서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2불의 성상을 모셔놓은 불단이다. 석실이니 만큼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단 및 닫집이 전부 돌로 커다랗게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연꽃이 조각된 불단 위에 닫집이 달린 전각 형태의 불전이 있고, 그 안에 아래 위 두 줄에 걸쳐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여기에 22불의 석상이 봉안되었다. 석상의 크기는 전부 30cm 안팎으로 근래 이 석상들의 재질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강암이 아닌 인도에서 나오는 석재임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있는 계단을 따라 한 10분가량 올라가면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유형문화재 제29호'인 마애석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의 이화응 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좌상의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 관음 좌상은 약간 비스듬히 나 있는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데, 위의 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다. 관음 좌상의 양식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 든 채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간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고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졌으며, 안에는 높이 215cm, 밑지름 140cm, 무게 5t이나 되는 범종이 봉안되어 있다. 범종은 1975년 당시 주지인 정수스님의 발원으로 조성 되었으며, 기본 형태는 국보 제36호인 '오대산 상원사 동종'과 국보 제29호 '성덕대왕 신종'을 조화시켜 도안한 것으로, 1975년에 모셔진 것이라고 한다.

 

석실과 범종각 사이에 있는 큰 바위틈에는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향나무의 밑둥 직경은 2.1m이며, 땅위 1.2m 부위의 둘레가 3.2m 정도로 크게 용트림을 하고 있다. 이 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이나 된 노목으로 6?25 당시 죽은 것 같이 보였다가 3년 뒤 다시 소생하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천인대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나란히 자라고 있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령은 약 290년이고, 크기도 비슷해서 높이 16m, 둘레 4.8m 정도이고, 절 경내 주차장에도 수령 약 600년 된 높이 31m, 둘레 4.8m 의 은행나무가 있어 현재 군 지정 보호수로 관리한다. 보문사가 승려들의 수도처로 번성하던 때에는 300여 명의 승려들을 수용하기도 했으며, 그때 취사용으로 사용하던 지름 69cm, 두께 20cm의 일반용보다 두 배 정도 큰 화강암 맷돌이 보존되고 있다. 석모도는 아직도 자연의 고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산과 바다와 갯마을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곳곳에서 자연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다.

 

석포리항에서 보문사 방향으로 5km 가면 왼편으로 어류정항 표지판이 보인다. 염전, 해수욕장 갯벌, 포구 등이 차례로 나타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특히 민모루 해수욕장은 썰물 때면 모래사장이 아닌 드넓은 갯벌이 드러나 아이들과 함께 갯벌 탐사를 하기에 좋다. 어류정항은 장구너머보다 훨씬 큰 포구로 이곳에는 어선 이름을 딴 포장마차형 횟집 들이 늘어서 있고, 직접 잡은 횟감을 팔기 때문에 값이 싸다. 출어기에만 개방하여 금어기(7월 15일-8월 15일)가 되면 철시한다. 삼량염전에선 지금은 예전처럼 발로 밟는 풍차를 돌리는 풍경은 없지만, 오후 4시쯤 되면 수북이 쌓인 소금탑을 볼 수 있다. 염전 바로 건너편에는 15만평의 저수지와 수로를 갖춘 어류정 낚시터가 있다.

 

[선원사지]-(사적 259호)

선원사는 고려 고종32년(1245) 최이(최우)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불력을 통해 구국하고자 창건한 사찰이다. 순천 송광사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혔다.

 

특히 이곳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팔만대장경 목판을 조각 봉안하여 147년간 보관하여 오다, 조선 태조 7년(1398) 서울 지천사로 옮겼다가, 세조 2년(1456)경 합천 해인사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5) 고려궁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최우를 비롯한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몽고의 강요에 의해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 등 궁전건물(장령전,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이 있었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되면서 소실되었다. 그 후 고려 궁터에는 강화유수부와, 외규장각 등의 건물들이 설치되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 시 프랑스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특히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이다.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고, 그 밖에 외규장각, 강화동종이 있으며,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고,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이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강화유수부 동헌-(지방유형 문화재 25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고, 현재는 명위헌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 윤순(1680-1741)의 필적이다. 건물구조는 정면8칸, 측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1977년 복원하였다.

 

◈ 강화부종각

강화동종이 있던 곳으로 2000년 역사관으로 옮기고, 지금은 모조품이 자리하고 있다. 강화동종은 조선시대 강화성문의 개폐시간을 알리던 종으로 숙종 37년(1711)에 만들어졌다. 1995년까지 경축행사 때 타종하였으나 종신에 금이 가서 중지하고 있었다.

 

◈ 강화 유수부 이방청-(지방유형 문화재 26호)

조선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괘홀당(柱忽堂)이라 하였다.

 

※ 인정(人定)과 파루(罷漏)

시간은 일출?일몰의 시차(時差) 관계로 계절에 따라 달랐으나 대개 밤 10시가 되면, 지금의 종로 네거리에 있는 종루에서 28번의 종을 울려, 4대문의 문을 닫고 외부와의 통행을 막는 한편, 성내에서는 고관대작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통행이 금지되었다. 이를 인정이라 하고, 새벽 4시경이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금을 해제하고 4대문을 열었다.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이 제도가 언제부터 실시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고 도성(都城) 구축이 완료된 후부터로 추정된다. 한편 인정에 28번의 종을 울리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日月星辰) 28수(宿)에 고하여 밤사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파루에 33번의 종을 울리는 것은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오늘 하루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외규장각지]

1781년(정조 5) 3월에는 이곳 궁전 자리에 외규장각이 설립되었다. 강화유수 서호수(徐浩修)가 왕명을 받아 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연초헌(燕超軒)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강화부 내책고(內冊庫)의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고, 또 서울 궁성으로부터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왔다.

 

내책고는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들의 보관을 위해 1753년 유수 신은(申思)이 객사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1778년(정조 2)에 반고어사(反庫御史) 심염조(沈念祖)는 이곳의 군기별저치사(軍器別貯置事)를 감사하면서,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 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선적(璿籍), 어필, 어제, 금보(金寶), 옥인(玉印), 죽책(竹冊), 교명(敎命), 전장(典章)의 문자(文字), 문부(文簿)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칠" 정도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왕은 이 보고를 받고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사각(史閣)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는 찬사 속에 외규장각 설립의 뜻을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외규장각은 이런 경위를 배경으로 1781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어, 1782년 2월에 건물 준공을 본 뒤 4월 2일을 길일로 잡아 직제학 심염조, 검교 직각 서정수가 배진관으로 봉안사와 찰리사의 직함을 받아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과 대비전과 혜경궁과 정조의 책보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어제?어필로 사고에 흩어져 있는 것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여, 어제?어필은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에만 봉안하도록 하였다.

 

6) 강화도 고인돌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 혹은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支石墓(지석묘)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石棚(석붕)이라하며,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으로 부른다. 고인돌은 인류가 농경문화를 시작한 이래 남긴 거석문화 유산으로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세계에서 확인된 고인돌 수는 약 55,000여기에 이르며 그 중 26,000여기가 우리나라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전세계 지석묘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우리나라가 지석묘의 중심국가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하점면 부근리, 삼거리, 신삼리, 내가면 오상리, 고려산 능선, 송해면 양오리, 양사면, 강화읍 등지에 북방식고인돌과 남방식고인돌이 있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가 1999년에 조사한 고인돌의 수는 127기(북방식:72, 개석식:49, 형식불명:6) 이며, 고려산을 중심으로 반경 4km내(강화읍:1, 송해면:13, 하점면:55, 내가면:33, 양사면:25)에 위치한다. 북방식고인돌의 남방 한계선은 강화도가 아니다. 전라북도 고창읍 도산리에도 북방식고인돌이 있다.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언즈에서 열린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유적을 세계유산(문화)으로 지정하였다.

 

강화도에는 이 고인돌 외에도 송해면과 하점면에 걸쳐 고인돌군이 있는데, 고려산 북쪽 경사면의 높은 능선 위에서 그 기슭의 평탄한 대지에 이르는 지점에 약 20∼30기(基)의 북방식 고인돌들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강화고인돌은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북방식고인돌은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밭 가운데에 1기가 독립해 있는 것으로, 경기지방을 비롯하여 중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탁자식(卓子式)으로서, 뚜껑돌[蓋石]은 길이 710cm, 너비 550cm나 되는 거석이고, 그 밑에 2매의 굄돌이 받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방식 고인돌의 구조는 4매의 굄돌로 직사각형 돌방[石室]을 구축하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어 놓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 고인돌은 돌방의 짧은 변을 이루는 2매의 굄돌이 없다. 이것은 과거에 파괴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체의 지상 높이는 260cm이며, 긴축은 남북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7) 진과 보, 돈대

진과 보는 신라말,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는 둔전병(평시에는 토지 경작과 군량을 공급하고, 전시에는 전투원으로 동원되는 병사)이 주둔하던 무장 성곽 겸 군사적 지방행정구역이다.

 

1개진에는 3-6개의 돈대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12진, 보에 소속시켜 대부분 관할했고, 영장(돈장)을 두어 운영했으며, 본부(營門)에서 직접 별장을 파견하여 관리한 돈대(분오리, 송곶, 굴암, 송강, 계룡, 망월)도 있으며, 영문소관 돈대는 별정직 돈장을 두어 운영하였다.

 

돈대에는 포대(대포를 설치한 곳)를 소속으로 하는 돈대도 있다. 강화도에는 9개 포대 72문을 고종8년 (1871)에 설치하였다. 진과 보는 비슷하나 엄밀하게 보면, 진’은 현대적인 의미로 대대 병력이,‘보’는 중대 병력이 주둔하던 기지이고,‘돈’이나‘돈대’는 초소에 해당한다. 그러나 특별히 구분을 하지 않고 12진보 53돈대라고도 한다. 돈대는 외침의 방비를 위하여 강화도 섬 전체에 마치 톱니바퀴처럼 둘러쌓은 진지이다.

 

축성연대는 53개 돈대 중 49개 돈대는 조선숙종 5년(1679년)에 유수 윤이제 재임시 어명에 따라 병조판서 김석주의 지휘를 받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삼도의 승군(僧軍) 8,9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축하였다.

 

빙현돈은 숙종44년 (1718년)에 유수 권성이 축조 하였으며, 철북돈은 다음해인 숙종 45년 (1719)에 유수 심현택이 축조하였고, 초루돈은 그 다음해 숙종 46년(1720)에 유수 어유구가 축조하였으며, 작성돈은 영조시대(1725)에 유수 박사익이 축조하였다. 그 후 양암돈과 갈곶돈 두 돈대는 너무 오래되어 폐쇄하였고, 51개 돈대만 수호 관리하였다.

 

※ 조선 후기 5진, 7보 소속 54돈대 (강화해협 북에서 남으로)

[5진]

1. 월곶진 : 옥창돈, 월곶돈, 휴암돈, 적북돈

2. 제물진 : 갑곶돈, 염주돈, 제승돈, 망해돈

3. 용진진 : 용당돈, 좌강돈, 가리산돈

4. 덕진진 : 덕진돈, 손석항돈(또는 손돌목돈), 용두돈(때로 포함 안함)

5. 초지진 : 섬암돈, 장자평돈, 초지돈

 

[7보] (시계바늘 방향으로 한바퀴)

1. 철곶보 : 천진돈, 철북돈, 의두돈, 불장돈, 초루돈

2. 승천보 : 낙성돈, 숙룡돈, 소우돈, 빙현돈, 석우돈

3. 광성보 : 광성돈, 오두돈, 화도돈

4. 선두보 : 후애돈, 동검북돈, 택지돈

5. 장곶보 : 석각돈, 장곶돈, 북일곶돈, 미곶돈

6. 정포보 : 석각돈, 삼암돈, 망양돈, 건평돈

7. 인화보 : 작성돈, 구등곶돈, 광암돈, 인화돈, 무태돈

 

◇ 영문 소속 돈대 : 망월돈, 계룡돈, 굴암돈, 송강돈, 송곶돈, 분오리돈

                             폐지 : 갈곶돈, 양암돈

 

 

[갑곶돈대]-사적 제306호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요새로 강화53돈대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 강화에 천도했던 시절 몽고와 싸울 때 염하를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조선 인조 22년(1644년)에 강화에 여러 진이 설치 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년)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년) 9월 7일 병인양요 때 프랑스극동함대 600여명의 병력이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 문수산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동년 10월 13일 프랑스군을 정족산성전투에서 양헌수장군에 의해 패주하였다.

 

갑곶돈대 안에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두 곳에 전시되어 있다. 갑곶돈대 안에 있는 이섭정에 오르면 염하가 한 눈에 보인다. 갑곶돈대는 강화역사관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용진진]

강화군 선원면 연리 435-1번지에 있는 강화해협(염하)을 지키는 조선시대의 요새로 강화5진7보의 하나. 향토유적 제8호.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강화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의 일부분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만들었는데, 선원면 용진지역에 위치한다. 용진진은 본래 병마만호의 관리 하에 있었고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도합 101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포좌 4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고 한다.

 

용진진은 북쪽의 가리산돈대, 바로 옆의 좌강돈대, 남쪽의 용당돈대를 관리하였는데, 세 돈대 모두 배가 닿는 곳이다. 석축은 모두 파괴되고 석문 가운데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에 문루를 복원하였다. 남쪽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61cm 이고, 북쪽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 의 규모이며, 석재는 화강석이다.

 

[광성보]-(사적 227호)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자연지형이 험한 요새로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다.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 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이곳에 조선 효종 9년(1658) 광성보를 설치하였고, 숙종 5년(1679)에 용두, 오두, 화도, 광성 등 소속 돈대가 축조되었다. 영조 21년(1745) 개축하고 성문을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1866년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때도 격전지였고, 특히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극동함대를 맞아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다.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 왔다. 이곳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 휘하 전 수비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광성보의 경내에는 용두돈대와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외 3인의 쌍충비, 신미 순의총, 무명용사비, 강화전적지 보수정화비 등이 건립되어 있다.

 

◈ 광성돈대

이곳은 전형적 돈대의 하나로 대포 3문이 전시되어 있고, 돈대 주위는 치첩으로 여장을 둘러, 외적의 침략을 근접 거리에서 싸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돈대 입구에는 문을 달아 출입을 통제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원형으로 4개의 포좌를 갖고 있으며, 중앙에 홍이포 외 2개의 포가 있다.

 

※ 홍이포 : 포구로 화약을 넣고, 다시 포탄을 넣은 후 뒤쪽 심지 구멍에 불을 붙여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라 가지만 포탄자

              체는 폭발하지 못한다.

 

◈ 무명용사비

신미양요로 인해 전사한 군인들을 위한 비이며, 매년 강화군에서는 어씨문중과 함께 음력 4월24일에 광성제를 이곳 무명용사비(1975년제작) 앞에서 지내고 있다.

 

◈ 용두돈대

용두돈대는 숙종5년(1679)에 축조되어 덕진진에 소속되었던 것을 1975년 복원하면서 관광차원으로 광성보에 연결시켰다.

 

용두돈대는 바닷가로 돌출한 지형이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지로 절경을 자랑한다. 2004년 새로 복원한 광성포대가 잘 보인다.

 

[덕진진]-사적 제226호

덕진진은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초지진과 광성보의 중간에 위치해 군 작전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덕진진에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용두돈대, 덕진돈대와 남장포대, 덕진포대가 소속되어 있었으며, 숙종 3년(1677)에는 만호를 두고 군관 26명, 병 100명, 돈군 12명, 군선 2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 부대가 야음을 틈타 이 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로저스가 이끄는 미 극동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이때 성첩과 건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지금의 성곽과 문루는 1976년 복원해 놓은 것으로 1971년 12월 28일, 사적 제226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성문인 공조루(控潮樓)를 지나면, 강화 최대의 포대인 남장포대가 왼쪽에 강화해협을 두고 그림같이 도열해 있다. 포좌는 15문으로 현재 조선시대 대포 7문과 덕진포대 내에도 소포와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남장포대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탁 트인 덕진돈대가 보인다. 북쪽에는 광성보, 남쪽으로는 초지진의 사이에서 바라보는 강화해협은 그림 같다.

 

그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다를 향해 경고비가 세워져 있다. 1867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는 이 비석에는 '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는 내용의 비문이 적혀있다.

 

[초지진]-사적 제225호

강화해협의 초입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조선 효종 7년(1656)에 진(鎭)부대를 창설하였고, 숙종 5년 (1679)에는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를 축조하여 이진에 소속시켰다. 진(鎭)은 규모가 가장 큰 군사시설이며, 강화해협을 따라 중요한 위치 5곳에 배치하였다.

 

병인, 신미양요를 치르고 난 후 고종 11년(1874) 6문의 포가 설치된 황산포대와 12문의 포가 설치된 진남포대를 축조하여 초지진에 소속시켰다. 이 방위 시설들은 병인, 신미, 운요호사건 등 수난 과정에서 허물어졌다.

 

초지진은 고종 3년(1866)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침입하였고(병인양요), 고종 8년(1871)에 통상을 강요하여 내침한 미국 아시아함대와 싸웠으며(신미양요), 고종 12년(1875) 일본군함 운요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운요호 사건)를 벌인 격전지이다.

 

1973년 강화전적지 복원사업 1호로 파괴된 초지돈을 복원하고 대포 1문을 포각 속에 전시했다. 전쟁의 흔적으로 석축 한편의 포탄구멍과 2그루 노송 중간에 포탄에 맞은 자리가 남아 있다.

 

8)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프랑스를 격퇴한 병인양요]

고종 3년(1866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사건인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침입한 사건. 1866년 초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이라 한다.

 

프랑스 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은 화를 면하였는데, 그 중 리델(Ridel)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Roze, P.G. 로세(魯勢)]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백락내(伯洛內)]는 "조선은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청국은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정부를 규탄하면서,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제독에게 조선에 응징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조선은 중국의 조공국(朝貢國)이지만 정치적으로 독립국가이며, 공범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면서 거병(擧兵)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사령관인 로즈의 주재 하에 군사적 응징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차 원정>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1일까지 한양의 양화진(楊花津), 서강(西江)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정찰과 수로탐사를 한 끝에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2차 원정>

로즈는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崔善一), 최인서(崔仁瑞), 심순여(沈順汝) 등 3명을 대동하고 강화도로 내침하였다.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 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또,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보복을 밝혔다.

 

정부는 강화도 수비에 실패하여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를 임명하고, 출정하였다. 양헌수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다가 천총(千總)에 임명되어, 대군을 이끌고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계획을 구상하였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군이 가진 총포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 군인, 백성이 모두 피난,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정족산성 전투>

이 때, 양헌수는 화력 면에서 절대열세인 조선군이 프랑스군을 제압하는 데는 기병작전(奇兵作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써 강화도를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양헌수의 군대 549명이 덕포에서 프랑스군에 들키지 않고 한밤중에 잠도작전(潛渡作戰)으로 강화해협을 건너 11월 7일 정족산성을 점거하고 주둔하였다.

 

양헌수는 정족진을 결성한 뒤, 남문에는 초관(哨官) 김기명(金沂明) 지휘하에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哨官) 이렴(李濂) 지휘하에 포수 150명, 서문과 북문에는 초관(哨官) 이대흥(李大興) 지휘 하에 경군 및 향군 157명을 배치, 매복하게 하고 프랑스 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이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로즈는 올리비에(Ollivier)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야포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군이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포격을 가함으로써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정족산성에서의 접전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하여 6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 승리의 의미>

첫째, 화력 면에서 열세인 조선군이 연전연패를 하다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에 의하여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둘째, 정족산성의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거하였으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하여, 야포를 동원하여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이 싸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철수할 때,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프랑스는 이때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대여 형식으로 돌려주기로 약속하였으나, 현재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개항을 위해 입약협상(立約協商) 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원정을 성공이라고 간주하였다. 그 근거로는 1867년 3월에 미국정부가, 미국은 제너럴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사옥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으니 대조선미불 공동원정을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 정부는 이미 조선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하였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하였던 것이다.

 

[미국을 격퇴시킨 신미양요]

고종 8년(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가 1866년 8월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 있었던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제너럴셔먼호사건이 발생한 뒤에, 두 차례의 탐문항행을 실시하였는데, 이 사건의 응징, 손해배상청구, 조선과의 통상관계 수립을 위하여 조선원정 계획을 두 차례 세웠으나 계획으로 그쳤다.

 

1871년 미국은 조선을 개항하기 위하여 조선원정을 결행하였다. 미국은 주청미국공사 로우(Law, F.F.)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원정에 나섰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를 비롯하여 군함 5청,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고, 1871년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에 함대를 집결하여 약 보름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한 뒤, 5월 16일 조선원정길을 떠났다. 로저스는 조선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 무력시위와 함께 군사작전에 의해 강제로 협상을 진행시키겠다는 포함책략을 수립한 뒤 인천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려고 조선대표에게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의 남장포대와 김포의 덕포포대로 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선과 미국은 최초로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를 손돌목포격사건이라 한다.

 

손돌목포격사건 직후 미국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조선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과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을 요구하고, 만일 이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가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하는 것은 주권침해이며,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을 거부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10개 중대로 상륙군을 편성하고, 포병대, 공병대, 의무대, 사진촬영반 등을 동원하였다. 미국은 해상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초토화시킨 뒤 수륙양면공격으로 초지진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6월 11일에는 덕진진을 무혈 점거하였고, 이어서 광성보 전투가 이어졌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수비병 600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이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포격을 한 시간 동안이나 벌인 끝에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조선군은 수자기를 빼앗겼으며, 미군은 광성보에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사 350명, 부상 20명이었고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0명이었다.

 

미국의 강화도 침략은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다만,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 다른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미국은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개항을 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침략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이양정책을 이기지 못하여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한다. 조선은 미국함대의 철수가 미국이 패하여 돌아간 것으로 간주하였고, 더욱 문을 굳게 닫게 된다.

 

미국의 실패요인은 첫째, 미국은 처음부터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된 강화해협을 허가없이 미군함대가 들어온 것은 주권침해이며 영토 침략행위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이해가 부족하였다. 조선은 미국을 오랑캐로 간주하였고, 미국은 백인우월감으로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셋째, 조선은 아직 개항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조선은 교역항구가 없었다. 양반 지도층은 개항이 곧 망국이라고 생각하여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넷째, 청은 조선이 개항하면 종주권을 잃을까 우려했다. 청은 조선이 쇄국정책을 지켜서 청나라의 조공국으로 남길 바랐다. 그 결과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신미양요이후 전국의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여도 싸우지 않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9) 성공회 강화성당

인천광역시 강화읍 관청리. 차 한대가 가까스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을 들어가다 보면 언덕 위에 축대를 쌓고 돌담을 얹은 사적 제424호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 나온다.

 

태극무늬가 선명한 솟을대문에 '聖公會江華聖堂'라는 간판을 건 대한성공회 건물은 익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성당의 모습과 확연한 차이점을 보인다. 성공회강화성당은 외관을 들여다보면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한국전통사찰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십자가를 보지 않는 이상 성당이라고 쉽게 생각되어 지지 않는다.

 

성공회강화성당은 영국에서 한국 초대 성공회 주교로 서품 받은 존 코프페(C. John Corfe:한국명 고요한)가 1900년 11월 15일 세운 건물이다. 대한성공회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이며, 1898년에 세워진 천주교의 명동성당보다는 2년 늦게 세워졌다. 서쪽에 위치한 출입문은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이 걸린 종각을 맨 앞으로 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고 있다. 성공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희준을 배출한 성당이고 서울대교구장을 지낸 정철범 주교도 이 성당 출신.

 

남산을 향해 외삼문, 내삼문, 성당, 사제관이 늘어서 마치 배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선교사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가 되자.”는 뜻을 세워 배의 모양으로 지었다고 한다. 우선 성당의 바깥 출입문인 외삼문은 뱃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강화읍 내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외삼문에서 3계단을 더 올라 내삼문을 지나도록 돼 있는데 여기에는 종각이 들어서 있다. 원래 이 종각에는 1914년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매달려 있었는데, 서울대성당의 것보다 조금 작지만, 음색이 아름답고, 소리가 4방 30리까지 울려 퍼졌다고 한다. 1945년 일제에 의해 징발되었으며, 지금의 종은 1989년 신자들이 모금해 다시 매단 것이다.

 

종각 중간에 서서 배의 선복에 해당하는 성당의 팔작지붕을 올려다보면 가장 먼저 천주성전(天主聖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성당이나 예배당에서 일반적인 당(堂)대신 성전으로 쓴 것이 독특하다. 천주성전 현판 밑 4칸 벽면에 주련이 걸렸는데, 이 주련위에 연꽃무늬를 장식한 것도 인상적이다.

 

출입구인 전실과 회중석, 통로, 지성소(대제대), 감실(소제대), 예복실로 구성된 성당의 내부는 바깥에서 보기와는 영 딴판. 모두 20개의 큰 나무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는데, 전실에서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3번째 기둥 중간에 세례할 때 쓰이는 화강암 성천대가 있다. 6번째 기둥부터 북쪽으로 지성소와 제대가 들어서 전체적으로 이곳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꾸몄다. 지성소 안에는 회중석 마루보다 높은 계단 위에 돌판을 깔고 그 위에 화강암 제대를 고정했다.

 

제대 뒤 가운데 기둥에 하느님 야훼를 뜻하는 만유진원(萬有眞原)이라 쓴 현판은 당시 선교사들이 선교의 근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지성소 북쪽 1칸을 2계단으로 높이고 제대를 놓은 후 정면에 성체를 봉안하는 성막을 안치했는데, 이곳이 작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집회공간. 성당의 구조상 미사 때 사제가 신자들에게 등을 보인 채 집전하는 형식이 살아 있는 유일한 성당이다. 나름대로 초기 교회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1890년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파된 후 1893년 영국인 왕란도 신부가 강화 갑곶나루를 통해 들어왔다. 처음에는 갑곶진(갑곶나루) 근처 초가집을 구입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정부가 해군을 육성하기 위한 해연총제아문을 설치해, 그 직속으로 조선수사해방학당을 1893년 이곳에 설립했으며, 교관으로 온 영국인 장교와 포병교관의 집이 강화읍에 있었는데, 학교가 폐쇄되면서 교관은 영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 집을 성공회에서 사게 되어 교회가 강화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후 집 근처 지금의 땅을 구입하여 1900년 현재의 성공회 강화성당을 짓게 되었다.

 

성공회 강화 성당은 한국성공회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건물로 정면에 서서 교회를 바라보면 104년의 세월을 지켜내고 있는 건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잘 보존되어 있다. 교회 내부를 유리창을 통해서 들여다보면 서양식 제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도 매주 예배가 진행된다.

 

바시리카 양식의 제단은 경건해 보이며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건물의 겉모습은 전통한옥을 본떠 지어졌는데, 정면 5개의 주련은 불교 사찰의 것과 흡사하게 보인다. 한자로 쓰여 있지만 내용은 성경문구를 따온 것이다. 지붕 용마루 끝에 치마기와 대신 십자가를 올려놓은 것이 기독교 건물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표시이다. 경복궁을 중건한 대목수가 책임자였고 목재는 백두산에서 옮겨왔다고 하며 건축기술자 들은 중국에서 왔다고 전한다.

 

현재 강화성당이 있는 자리는 두번째 강화산성 남문에서 북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이다. 두번째 강화산성은 병자호란 때 무너졌던 것이다. 지금도 강화성당 대문을 보면 산성 축대를 확인할 수 있다. 측면과 후면의 출입문은 영국식 도어로 되어있어 혹시 외국건물이 아닌가 착각하게 한다.

 

[강화도 의병운동과 교회]

1907년 강화도에서 기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번졌던 정미 의병운동은 지금까지 큰 아픔으로 남아있다. 정미 의병운동이란 정미조약 직후 강제해산 당한 군대 출신들이 의병을 조직해 무력투정을 전개한 사건. 이동휘, 연기우, 지흥윤, 유명규 등이 주도한 의병들이 일본인 순사와 일진회 강화지부 총무였던 강화군수 정경수를 살해했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인과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강화 의병운동의 핵심인 이동휘는 강화 진위대장 출신으로 1905년 강화읍에서 감리교로 개종한 인물. 강화읍교회의 권사로서 강화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사들로부터 강화의 바울이란 별명을 얻었다. 이동휘가 감리교 권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감리교회는 민족주의 단체로 인식됐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에 비해 성공회는 직접적인 무력투쟁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중도적인 입장을 택해 많은 주민들을 구한 공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강화성공회 성당이나 수녀원에 모여들었는데, 성공회 단 아덕(터너) 주교가 일본군 대장과 두 차례 담판하여 일군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화를 면했던 것.

 

성공회는 “일군의 공격을 사전에 막아 주민들의 희생을 줄였지만 일본군의 무력행동에 대한 비판 없이 사태수습에 나선 것은 아쉬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0) 고려릉

[홍릉]

이곳은 고려 제23대 고종의 릉이다. 고종은 강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이고 비는 제21대 희종의 딸인 안혜태후이다. 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헌이 세력을 잡고 있었으나, 고종 6년(1219)에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아 왕은 제 구실을 못하였다.

 

고종 45년(1258) 유경, 김준 등이 우의 손자를 죽이자, 비로소 왕에게 대권이 돌아갔다. 고종 3년(1216)에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으나, 고종 18년(1231) 몽고군이 쳐들어와 다음해 강화도로 천도하여 몽고군과 대항하였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 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까지 16년간에 걸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였다. 고종은 몽고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 내면서, 고종 46년(1259) 태자 전을 몽고에 보낸 후 그해에 승하하여 개경으로 옮기지 못하고 이곳에 안장하게 되었다.

 

[석릉]

고려 희종(1169~1237)의 능이다. 희종은 신종(神宗)의 장남으로 이름은 영 자는 불피(不陂) 시호(諡號)는 성효(誠孝)이다.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비(妃)는 성평황후 왕씨다.

 

1204년에 즉위하였고, 즉위하는데 공을 세운 최충헌을 문하시중 진강군 개국후에 봉했으나 횡포가 심해지자, 왕은 내시 왕준명 등과 함께 이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이 실패하여 희종7년(1211) 폐위되어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고종24년(1237) 8월에 승하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남한에서 최초로 고려 왕릉인 석릉을 2001년 10월 26일부터 전면 조사하여 출토유물 20점과 다량의 관정(棺釘·관못)과 목관에 부착된 금박편, 그리고 장신구로 사용된 구슬류 등을 수습해 2001년 10월 22일 일반에 발표했다. 묘역 전체는 시신을 묻은 매장 주체부를 포함해 총 5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봉분 주위로는 '∩' 자 모양 담장(曲墻)이 두르고 있음이 드러났다.

 

발굴단은 무덤방 천장을 길이 300㎝, 너비 120㎝ 안팎되는 대형 판석 3장을 놓고 그 위에 다시 평면 8각형 호석(護石. 바깥 지름 240㎝ 가량으로 판단되는 구조물을 설치한 대목이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지적했다. 돌로 만든 무덤방은 길이 310㎝, 너비 210㎝, 높이 220㎝ 규모이며 양측 벽과 뒷벽에는 깬돌을 이용해 7단으로 쌓았다. 출토 유물은 이미 여러 차례 도굴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많지는 않은 가운데 온전한 모양의 청자 탁잔(靑磁托盞) 3점을 비롯해 꽤 많은 청자 조각이 수습됐다.

 

[가릉]

고려 24대 원종(元宗, 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順敬太后)의 능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로 본관은 경주이다. 1235년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에 책봉되어 경목현비(敬穆賢妃)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죽었다. 1244년에 정순왕후(靜順王后)에 추봉되고,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1305년 태후의 고향인 황려현(黃驪縣)을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310년(충선왕 2) 원나라 무종(武宗)이 제서(制書)를 내려 고려왕비로 추존되었다.

 

능은 능내리 마을을 지나 약 500m 정도 산길로 가면 있다. 능은 전체 3단으로 되어 있다. 1974년 보수, 정비공사 당시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강화군에서 보수·정화하였다고 한다. 상계부분의 봉분은 활개없이 원형봉분만 있는 상태이며, 곡장 대신에 봉분 주위에 계체석으로 능역을 표시만 해 놓았다. 원래 봉분에 복토 작업을 한 관계로 석수가 봉분 뒷편에 머리모양만 보인다.

 

중계에는 묘표와 좌우에 각각 문인석이 있다. 묘표는 중앙에 있으며 원두형이다. 묘표에는 ‘고려왕가릉(高麗王嘉陵)’이라 새겨져 있다. 기존 조사에서 문인석은 좌우에 각각 2쌍씩 있다고 하였데 지금은 1쌍씩만이 있다. 문인석은 홀대를 약간 좌측으로 비켜 잡고 있으며, 고려후기 조선전기 양식이다. 하계에는 자연석으로 신도(神道) 형태만을 만들어 놓았다.

 

[곤릉]

고려 22대 강종의비 원덕태후의 릉으로 길정리 산75번지에 있다. (고려사)원88에 보면 고종의 생모인 강종비 원덕태후는 고종 26년(1239)에 돌아가시어 곤릉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에 고종비의 릉 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고려후기 왕실 묘제를 따라 문인석과 무인석의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직경 5m의 원형 봉분 주위에 ㄷ 자형 곡담이 둘러져 있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묘비 1기와 표석 1기가 있다. 1992년에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1) 조선왕실관련

◈ 강화도령 철종-1831(순조31)∼1863(철종14)

조선 제25대왕. 재위 1849∼1863.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김조순의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10) 회평군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음으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 (철종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 삼포세 6만 냥을 진대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욕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에 달하는 여주의 민가에 은자와 단목을 내려주어 구휼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조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토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일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을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천한전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가 있어, 금릉위 박영호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1864년(고종1)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이다.

 

[용흥궁]-유형문화재 제 20호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 원범(1849~1863)이 조선 제25대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潛邸)이다. 철종 4년(1853)에 초가집이던 것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명명하였다.

 

용흥궁의 배치는 서울에 있는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으로 지어 질박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철종조 잠저구기”비(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광무 7년(1903)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였고, 강화군에서 1974년 보수를 시작으로 수차에 걸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철종외가]

철종외가는 선원면 냉정리 264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후 철종의 외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으며, 후원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자형 목조건물로 45칸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ㄷ자 모양의 몸체만 남아 있다.

 

건축양식은 전체적으로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일자로 곧장 연결시켜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구획하였다. 당시 일반 사대부의 웅장한 집의 규모와는 달리 법도에 맞도록 고졸하게 지은 집이다.

 

[철종외가묘]

조선 철종 10년(1859) 강화유수 조충식이 철종의 외숙부 3인의 묘를 정화하고 비석을 세워 왕족의 위신을 세웠다 한다. 철종은 왕위에 오른 뒤 외가 5대에게 벼슬을 추증케 하고 선원면 냉정리에 전답 10여 정보를 하사하는 등 특전을 베풀었다.

 

3기의 묘소 중 우측의 묘비에는 「조선증대방보국승록대부의정부영의정용담염공휘성화지묘」라 새겨져 있고 장명등과 좌우에 망부석 양석등의 석물을 갖추었다. 좌측 중앙의 묘비에는 「조선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용담염공휘덕석지묘」라 새겨져 있고 상석과 향로석이 놓여있다. 좌측의 묘비에는 「조선증자헌대부이조판서용담염공휘상임지묘」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숭정기원후기미팔월일일이란 글씨로 보아 철종 10년(1859)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파평염씨가 묘비의 비문을 고쳐, 철종의 외숙 행세를 하며 궁궐을 출입하다, 가짜임이 밝혀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선원보각지]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 등을 봉안해 오던 곳으로 조선 현종 1년(1660년) 정족산성 내 장사각 북편에 강화유수 유념이 건립하였다. 선원보각은 숙종 5년(1679) 낭원군 이품이 "선원보략"을 올려 처음 간행한 이래, 역대에 걸쳐 새로이 왕이 즉위할 때마다 중교(重交), 보간(報刊) 해 오던 것을 고종 34년(1897)에 합간한 바 있다. 이 건물은 1900년대초 일인들에 의해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산군 적거지]

연산군 (재위 : 1494 - 1506)은 조선 제 10대 왕으로 이름은 륭, 성종의 맏아들이다.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 독서의 부활 "여지 승람"의 간행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마침내 종종반정으로 폐위, 군으로 강등되어 교동의 초옥으로 유배되었다가 병사했다.

 

연산군이 귀향살이를 보낸 옛 집터에는 우물이 남아 있어 지난날 폭군의 자취를 회상케 한다. 현재 밭으로 변해 버린 집터에는 "연산군 잠저지"라고 새긴 자그마한 화강암 비가 세워져 있다.

 

12) 봉수와 요망대

[봉수]

강화도의 봉수대는 조선시대 봉화로 중에서 제 5거에 해당된다. 제 5거는 순천으로부터 받은 봉수망은 전라도 해안지역을 거쳐 충청도 내륙지역을 거친다. 충청도 해안 지역은 간종으로 연결된다 봉수로는 경기도 지역에서는 다시 해안을 거치면서 북상 김포군 통진에서 강화도로 넘어와 대모산-진강산(간봉으로는 강화의 장봉도 포함)-망산(덕산)-화개산-하음산 (조선 전기에는 별립산)-남산-(조선전기에는 고려산)을 거쳐 통진의 남산(조선 전기에는 통진 주산)을 비롯한 기타 봉수를 거쳐 한성 목관산 제 5봉에 이른다.

 

강화도 지역 봉수 각 거리는 (김포 수안산)-7.2Km-대모산봉수-6.8Km-진강산 봉수-7.2Km-덕산 봉수-10.5 Km-교동 화개산 봉수-11.1 Km-하음산 봉수-7.2Km-남산봉수-7.8 Km-김포 남산으로 봉수되는 거리는 평균 9Km 로서 전국적인 8Km 보다는 약간 길다. 각 봉수 별로 봉수군이 16 - 20인이 상주하고 있었다.

 

대모산봉수(大母山 烽燧-불온면), 진강산 봉수(鎭江山 烽燧-양도면), 덕산 봉수( 德山 烽燧-내가면), 남산 봉수(南山 烽燧-강화읍), 하음산 봉수(河陰山 烽燧-하점면), 교동화개산 봉수(喬桐華蓋山 烽燧-교동면), 교동남산 봉수(喬桐南山 烽燧-교덩면), 교동 수정산봉수(喬桐修井山 烽燧-교동면), 주문도 봉구산봉수(注文島鳳丘山烽燧-서도면)

 

 

[강화도의 요망대]

말도에서 볼음도 까지 5리, 볼음도에서 서검도 까지 10리, 서검도에서 미법도까지 10리, 미법도에서 석모도까지 10리, 석모도에서 삼암돈까지 3리였다. 바다를 통하여 외적이 침범하면 말도 등 제도에서 보고를 하고, 본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대응하였다.

 

각 섬 간의 거리가 가까워서 포성이 서로 들리므로, 각 섬에 요망장 1인과 대포 2병을 지급하였다가, 외적의 침입이 있게 되면, 말도에서부터 포를 쏴서 각 섬에서 차례로 응하여 삼암돈대 까지 이르며 순식간에 그 포성이 영문에 이른다. 적이 40리 밖에 있더라도 영문에서 미리 알고 조치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요망대를 활용하면, 서해의 외적 침입을 손쉽게 파악하여 경보 체계를 유지할 수 있고, 또 본부에서 항상 각 돈대의 포를 응할 때에는 여러 섬에서 서로 호응하여 말도에까지 미칠 수가 있기 때문에, 유사시에 크게 활용할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말도 요망대(서도면), 볼음도 요망대(서도면), 어류정 요망대(삼산면), 주문진 요망대(서도면)

 

13) 강화도 관련인물

[이규보]

고려시대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이규보(1168∼1241)는 본관이 황려(黃驪), 초명(初名)은 인저(仁?),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이다. 호부시랑(戶部侍郞)을 지낸 윤수(允綏)의 아들이다. 만년에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고려 1191년(명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당시 최고 집권자인 최충헌에게 기용된 문인의 한 사람으로 뒤에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이규보는 시문에 능하였으며, 특히 민족의 영웅시인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인의 큰 포부와 활동을 읊어 민족의식을 선양하였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인한 국난극복의 일환으로 ≪팔만대장경≫ 조판의 국가적 사업이 시작될 때에 불교 호국의 신앙과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문집으로는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이 묘역은 1967년 국가의 지원을 받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재실을 복원하였다.

 

묘역은 사당인 백운정사 바로 좌측에 정비되어 있는데, 이중 활개에 용미를 길게 갖고 있는 원형 봉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은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계체석을 놓았다. 계체석을 받침대로 앞에는 고석을 받쳐 놓은 상석이 있다. 상석 앞에는 새로 만든 향로석이 2개 있다. 향로석 좌우에는 형태만 남아 있는 문인석이 있고, 약간 앞 좌우에는 양석이 있다. 향로석 정면에는 장명등이, 장명등 좌우에는 민무늬의 8각 기둥형태의 망주석이 있다. 봉분 좌우와 중계 좌우에는 동자주가 각각 1개씩 있다. 상계 봉분 좌측에는 조선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갈이 있다. 민무늬 대석에 월두형 비신의 형태로 비에는 ‘고려이상국하음백문순공휘규보지묘배정경부인진양진씨부(高麗李相國河陰伯文順公諱奎報之墓配貞敬夫人晉壤晋氏?)’라 새겨져 있다. 이 뒷면에는 ‘○○○계축 9월(癸丑 9月)’이라 적혀 있다. 중계 상석 좌측에 옛날 것으로 보이는 묘표가 있는데 민무늬 대석에 월두형 비신으로 되어 있다. 비의 전면에는 “고려이상국문순공하음백규보지묘(高麗李相國文順公河陰伯奎報之墓)”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개국 527년 무오 4월에 세워진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1983년 1월 15일에 세운 “백운이규보선생문학비(白雲李奎報先生文學碑)”가 있다. 이 비는 김동욱(金東旭)이 찬하고, 이필용(李弼龍)이 썼다.

 

문학비 좌측에는 여주이씨대종회에서 1991년 5월에 세운 묘역정비기념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역정비기념비 왼쪽에 있는데, 이규보가 죽은 지 699년 후인 1939년 기묘년 3월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이범세(李範世)가 찬하고 김교덕(金敎悳)이 서하고, 후손 이병하(李秉夏)가 전서한 것이다. 전후면에 전서로 “고려이평장사백운이선생시문순공신도비명(高麗李平章事白雲李先生諡文順公神道碑銘)”이라 하였다. 비제는 “고려금자광록대부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하음백이공신도비명병서(高麗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河陰伯李公神道碑銘幷序)”라 하였다.

 

[김통정]-(? ∼1273(원종14))

강화 교동 태생으로 삼별초의 장수로 장군 배중손과 함께 강도(강화)에서 개경(개성)으로의 환도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여러 가지 여건상 강화에서의 항몽 항전은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원종의 6촌 되는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녀들로부터 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에 싣고 남쪽으로 떠났는데, 배가 무려 천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지포를 막기 전이라 장지포 해안선 일대와 내가면 해안선 일대의 포구가 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강화를 떠난 삼별초의 선단은 악천후와 기근을 참아가며 전남 진도에 상륙하여, 군영을 설치하고 영토를 전라도 일원과 경상도 일부에까지 확장하여 항몽전을 펼치었다. 고려 조정에는 관군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어 몽고군과 려몽연합군을 편성하였는데, 고려 장수에는 대장군 김방경이었으며, 원나라 장수에는 흔도, 홍다구 등이었다.

 

삼별초군은 처음에는 10배가 넘는 적군을 맞아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중과부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271년 설상가상 삼별초의 총대장 김통정이 전사하자, 급격히 삼별초군의 사기가 떨어졌다. 배중손이 총대장이 되어, 잔여 군졸을 이끌고 제주도로 들어가 군비를 정돈하고 성을 수축하여 재기를 꾀하였다.

 

그 후 남해안의 여몽 연합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얻기도 하였으나, 1273년 김방경, 흔도, 홍다구 등이 전함 160여척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상륙하여 토벌전이 벌어졌다. 30배가 넘는 나몽연합군을 맞이한 삼별초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점차 쇠약해져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배중손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70여명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 목매어 죽었으며, 그를 따르던 장수 김혁정, 이기 등 70여 명도 모두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김상용]

명종16년(1561)에 출생한 선생은 장렬 김번의 증손이며 병자호란시 청국과의 화의를 극력 반대한 척화파 김상헌의 형으로 자는 경택, 호는 선원, 시호는 문충,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23년(1590)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인조 10년(1632)에 우의정이 되고 인조 15년(1637)에 순국하였으며 그 위패는 선원면에 위치한 충렬사에 봉안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宗廟)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루 위에서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하였다. 충의의 귀감인 선원 김상용 선생의 위국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순조 때 유수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이 순절비를 건립하였다.

 

당초 순절비는 구 남문지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 위치로 옮겨 세우던 중, 숙종 26년(1700)증손인 김창집이 세운 구비가 발견되어 현재 신.구비를 나란히 세웠다.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 별시문과에서 6명 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 화도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 일찍 급제하였다하여 4년 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1874년(고종1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문장가 서보 황각등과 교유하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 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 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 벽동군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880년 풀려나와 경기도 암행어사를 지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여 당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생가는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00여 년이 지난 것으로 보이며, 안채는 9칸 규모의‘ㄱ’자 형태로,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3량 가구로 몸체를 짰다. 구조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배치하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지방의 전형적인 한옥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 강화군에서 복원, 정비한 것이다. 천하 문장가이며, 정치가이며, 사상가이며, 강화학의 일인자인 그가 서거하자 양도면 건평리에 장사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묘지는 초라하고 돌보는 이가 없다.

 

[윤집]

윤집 선생(1606-1637)은 조선 중기의 충신으로 자는 성백, 호는 임계·고산, 본관은 남원, 형갑의 아들이다. 인조 9년(1631)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과의 화의를 반대하여 중국 심양으로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척화의 소신을 주장하다 피살되었다.

 

세상에서는 오달재,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라 불리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선생이 살던 집의 건물은 없어지고 밭으로 변하였으며, 대리석으로 된 비석만 전하고 있다. 비석 전면에는 충신 고학사 윤집택지라 새겨져 있다.

 

[홍익한]

인조 때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崔鳴吉)이 주장한 화의론(和議論)에 극구 반대하다,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당한 삼학사의 한 사람인 화포 홍익한(花浦 洪翼漢)선생의 택지이다. 홍익한은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시 청나라 사신이 치욕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동년 12월 강화도를 침입할 때 평양 서윤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공은 어머니를 흥왕리 촌가 화포산장에 피난하게 한 후 교동을 경유해 임지로 부임하여, 성을 수호 하던 중 이듬해 척화파로서 청나라에 잡혀가서 윤집, 오달재와 함께 심양에서 피살되었다.

 

[황형]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1459 - 1520)의 옛집터가 있다. 선생의 자는 언평, 본관은 창원으로 성종 11년 (1480)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 후 혜산진 첨절 제사, 훈련도정, 의주 목사, 회령 부사, 함경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 5년(1510) 삼포왜란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중종 7년(1512)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이며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여 이곳 월곶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다. 택지는 월곶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논밭으로 변하였으며 후손들이 파손된 비석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황사영]

1801년 신유박해의 상황을 적은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산데르의 생가 터는 갑곶돈대, 관청리 형방과 함께 강화를 방문한 순례자들이 꼭 한번 들러야 하는 곳이다. 강화읍 월곶리 대금동에 위치한 생가 터는 강화 터미널 뒤편 강화 경찰서를 지나 걸어서 3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황사영(1775(영조51)∼1801(순조1))은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산데르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측근인물로 활동했으며 1798년 고양에서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하여 서울지역의 지도적인 활동가로 활약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북경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백서"이다.

 

한 집안의 멸문지화를 불러온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이 1801년(순조1)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흰 비단에 적어 중국 북경의 (구베아)주교에게 보내고자한 밀서로서,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체포되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지자 황사영은 충정도 제천의 배론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피신하여 토굴에 숨어서 자기가 겪은 박해상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 박해를 피하여 배론까지 찾아온 황심을 만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도를 상의한 끝에 박해의 경과와 재건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길이 62cm 넓이 38cm의 흰 비단에다 한 줄에 95∼17자씩 121행, 도합 1만 3311자를 먹글씨로 깨알같이 써서, 옥천희로 하여금 10월에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북경주교에게 전달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9월 20일(양력 10월 27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이 9월 26일에 체포됨으로써 백서는 사전에 압수되고, 황사영 자신도 9월 29일 잡히는 몸이 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1785년 (정조9) 이후의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의 상세한 전개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력을 적었고, 주문모신부의 활동과 사주, 기록 그의 죽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 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는 한편,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어 주문모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그해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진주사를 겸하게 하여 신유사옥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토사주문과 함께 황사영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대폭 축소하여 청나라 예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이 축소된 백서를 이른바 "가백서"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감호책이나 종주권 행사 등에 관한 내용을 빼고, 서양선박과 군대파견을 요청한 사실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황사영백서의 원본은 1801년에 압수된 이후 줄곧 의금부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후 옛문서를 파기할 때 우연히 당시의 교구장이던 뮈텔주교가 입수하게 되어 1925년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때 로마교회에 전달되어 현재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은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 내는 처참한 육사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 배기 아들 황경헌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탄생지이자 소년 시절을 보낸 대금동 마을은 대대로 창원 황씨의 세도가 크게 떨치던 곳으로 말끔하게 단장돼 서있는 황씨 문중 사당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바로 그 문중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 터가 남아 있다. 하지만 사당 옆에 황사영의 생가는 흔적도 없고, 다만 길게 자란 잡초와 갈대 사이로 약간의 공터만이 그 자취를 짐작케 해준다.

 

[손돌]

1231년 몽고(원나라)가 침입하매, 고종은 화친을 내세워 일단 회군시켰으나, 그들이 계속 부당한 조공(朝貢)을 요구하므로 결사 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 몽고의 2차 침략 때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는 바, 고종은 조정을 이끌고 개경을 떠나, 사공 손돌이의 배를 타고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현재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인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지라, 천도하는 고종도 심기가 불편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노를 젓는 사공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 뱃길을 바로잡도록 하명하였으나, 손돌이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 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괘념치 마옵소서"라고 아뢰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을 죽이라고 명하였다.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 항해를 바라는 충성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뢴 후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천도 항해는 손돌이의 바가지 안내대로 험한 협류를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당도하였다. 왕은 뒤늦게 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을 후히 장사지내주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도 세워주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 뱃길목을 지금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르며, 공(公)의 기일인 음력 10월 20일 쯤이면 손돌의 원혼이 바람을 일으킨다 하였다. 이때에 부는 거센 바람을 '손들이바람', 이 무렵의 추위를 '손들이추위'라 전해온다.

 

손돌공의 묘는 물 건너로 광성진을 보이는 덕포진 북쪽 해안 언덕 위에 있다. 김포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화의 진에 예속되어 있던 진이다. 공의 제사는 조선조말까지 계속되어오다가 일제 강점후 중단되었었으나 1970년 이후 계속 지내오고 있으며, 묘는 1977년 박일양(朴一陽)씨 등과 면민들이 묘비를 세우고 치산(治山)하여 크게 단장하였다.  

 

6. 강화의 전설

 

고려산오련지전설 : 백련사, 적석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의 창건 전설.

손돌풍 : 뱃사공 손돌의 억울한 죽음과 손돌목에 대한 이야기.

마니산신선놀음 :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이야기.

마니산전설 : 마니산, 혈구산, 진강산, 고려산, 능주산의 다섯 형제가 중국에서 떠내려 왔는데, 마니산이 맏이이므로 가장 높고, 지금도 정상에는 그 때 쌓은 성이 남아있다.

 

충렬사유래담 :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역부족으로 패하여 강화성이 함락되자, 원임대신으로서 왕족을 모시고 강화로 왔던 김상용이 화약고에서 자폭하였는데, 그 때 신발 한 짝이 날아 떨어진 곳이 지금의 충렬사가 위치한 곳이라는 이야기.

 

선두포둑이야기 : 선두포 둑을 쌓는 공사가 몇 년이 걸려도 완공되지 않을 때, 어떤 중이 나타나서, "사람을 하나 바다에 집어넣으면 쉽게 완성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인부가 그 중을 떠밀어 넣어서 둑을 완성시켰다는 이야기.

 

벌대총이야기 : 조선시대 효종이 사랑하는 명마 벌대총이 죽자, 그 말이 죽었다는 보고를 할 수 없었던 양천의 사또가 "벌대총이 누운 지가 사흘이요, 눈감은 지가 사흘이요, 먹지 않은 지가 사흘입니다." 라고 보고를 하여 위기를 벗어났다는 이야기로, " 양천원 죽은 말 지키듯 한다." 라는 말이 전한다.

 

부근리 지명의 유래 : 병자호란 때, 왕자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잡힌 곳.

모로도 전설 : 귀양을 가면 머리가 희도록 못돌아 간다는 이야기.

문무정 전설 : 동네 부녀자들의 풍기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야기.

 

전등사 나녀상 전설 : 길상면 온수리 전등사의 대웅전 처마에 있는 옷 벗은 여자 형상에 대한 전설. 전등사를 만든 목수를 속인 주모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처마를 받치는 벌을 받고 있는 모습을 전등사 대웅전 처마 밑에 만들었다는 이야기.

살창리이야기 : 광해군의 동생인 영창대군이 살해당한 곳에 대한 이야기

 

강화에는 살창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영창대군은 겨우 일곱 살에 형인 광해군에게 살해당한 곳이다. 즉 영창이라는 창과 살인이라는 살자를 가지고 부르게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에게는 참말로 영창대군을 죽여야만 했는지 그것은 아직도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친가 삼족을 학살하고 대비를 유폐시켰다. 최후에 남은 것은 이복동생 영창대군이었다. 광해군은 곧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필시 세상 체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선조임금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는 국민은 광해군을 살인왕이라고 부를 것으로 생각하였는지, 덕수궁에 유폐한 인목대비로부터 영창대군을 떨어뜨려 강화섬으로 옮겨서 당분간 시일의 여유를 가지게 했다. 이때에 강화부사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세력을 가진 이이첨의 심복이었다. 앞장선 사나이로서 영창대군을 맞이하여 2년이 되던 해 이미 죽이려 하는 심산을 갖추고 있었다. 단 임금이나 이이첨도 죽이라는 명령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부하로 하여금 영창대군의 방문을 굳게 닫아걸고 방돌에 불을 지피라고 명령했다. 이때 영창대군은 나이는 일곱 살 그날도 다름없이 방한구석에 주저 않아 멀리 서울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에 그려보고 있었다.

 

얼핏 생각이 나는 것은 방이 따뜻해지는 것이 예전과는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머리가 몽롱해지니 따뜻한 것보다 뜨거워진다. 참기가 어려워 문을 열려고 애써 보았으나 굳게 닫혀 있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을힘을 다하여 보았으나 이제는 몸에 열이 치밀어 온다. 이마에서부터 가슴등줄기까지 땀이 줄줄이 흘러내린다. 대단히 숨가쁜 상태에서 발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니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방 가운데를 헤매이며 돌면서 달려보기도 하였다. 일곱 살의 어린 몸 발이 타는 듯 조각이 나면서 붉어지고 만다. 손이나 얼굴이며 방바닥까지 붉어지고 만다. 잠깐 있는 동안 영창대군은 방가운데 쓰러지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움직이지 못하였다. 영창대군은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이고 다섯 살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여 일곱 살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7. 기타

[함허동천]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華道面) 마니산에 있는 계곡이다. 마니산 국민관광지의 일원으로 마니산 남단의 함허동천 계곡에 설치한 시범 야영장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활용하여 야영장, 취사장, 놀이시설, 다목적 관광 및 넓은 주차장 등을 설치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애용하는 곳으로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摩尼山:469.4m) 정수사(精修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기화가 썼다는 '涵虛洞天' 네 글자가 남아 있는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마니산 줄기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는 쏟아 부운 듯한 바위가 형성되어 조물주의 예술품인양 매끄럽게 반들거리고, 줄기 남쪽은 세계 5대 갯벌중 하나인 강화 남단 갯벌이 펼쳐져 있으며, 수려한 산세와 어울려진 계곡 속 너럭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줄기속에 세상사 시름을 잊게 한다. 이곳에는 중원에서 건너온 함허대사의 부인이 애틋한 인연을 끊고 이승의 육신을 바다에 묻어 버려 그 영원이 바위로 솟아났다는 '각시의 서' 라는 바위가 있어 유명하다. 폭10m, 길이 200m의 넓은 백사장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밀물시에는 해수욕을 썰물시에는 조개, 게잡이 등을 할 수 있다. 가족단위의 여름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막해변(동막해수욕장)]

화도면의 동막해변은 마니산 줄기가 남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여름철 밀물 때는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특히 썰물 때에는 넓이 1천 8백만 평, 해안으로부터의 직선거리가 4km에 이르는 광활한 개펄이 모습을 드러난다.

 

이곳은 세계 5대 개펄의 하나이기도 하며, 밀물 때에는 잔잔한 바다가, 썰물 때에는 드넓은 개펄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시야가 탁트이며, 솔숲에 감겨있는 백사장 주변. 이른 오전과 늦은 오후에는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한낮에는 갯벌에서 작은 갯것들을 잡는 재미도 쏠쏠하다. 갯벌 속에서 뛰어 노는 일도 색다른 경험이 되며. 해수욕장 주위에는 아주 잘 가꾸어진 소나무 숲이 갖추어져 있다. 때때로 삼겹살에 찌개를 끓이는 가족들이 눈에 띄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 시원함만큼은 최고다. 해수욕장 앞에는 분위기 있는 전원카페도 있어 젊은이들의 데이트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해수욕장 왼쪽 언덕에는 분오리 돈대와 분오리 저수지가 있다. 1866년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 문수산성을 점령한바 있으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공격으로 패주하였다.

 

[서해낙조]

강화도는 서해의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5군데 있다. 그 첫째가 적석사 낙조봉 이다. 이 낙조봉은 서울 경복궁을 기준으로 직선을 그어 정 동쪽이 강원도에 위치한 모래시계의 주인공 정동진이며, 정 서쪽이 적석사 낙조봉으로 정서진이라고도 불리며 우리나라 3대 낙조 조망지로 유명하다.

 

다음이 석모도에 위치한 보문사 마애석불에서 내려다보는 낙조는 감히 상상을 초월하는 서해의 낙조라 할 수 있으며, 다음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을 불 게 물들이는 장화리 조단의 낙조를 꼽을 수 있다. 또한 요즘 새롭게 낙조 조망지로 부각되는 양도면 해운정 대하 양식장이나 민머루 해수욕장 근처에서도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이른 봄(3월 1일경) 해지는 시각은 대체로 6시 15분경(하루에 약 1분 정도씩 늦어짐), 따라서, 5시 45분 정도에는 도착하는 것이 좋다.

 

[석모도]

강화도 외포항에서 서쪽으로 1.5㎞ 해상에 위치한 석모도는 작고 아름다운 섬으로 일몰이 아름답고 산과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경치가 좋은 곳으로 영화 시월애(時越愛)와 취화선(醉畵仙)을 촬영한 곳으로 유명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차로 1시간 반에서 2시간이면 강화 본섬의 서쪽 끝 외포리 포구에 닿는다. 여기서 맞은편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까지 1.5km 바닷길을 카페리선을 타고 건너가야 한다.

 

강화와 석모도를 잇는 약 1.5km의 바닷길은 수많은 기러기 떼가 동행한다. 여행객들이 던져주는 과자 맛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이다. 석모도의 석양은 너무 아름다워 서럽다. 사람들은 코끝 시린 그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 뱃길에 오른다. 안면도, 변산의 채석강과 함께 '서해안의 3대 낙조'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석양을 자랑하는 석모도는 강화도의 서쪽에 자리한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배가 닿는 곳은 석모도 석포리 선착장. 석모도는 본래 세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것을 70년대 간척사업을 통해 하나의 섬으로 묶었고, 행정명칭도 삼산면(三山面)으로 하였다. 토끼(석모도의 모양)의 머리 부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해발 264m의 상주산이 솟아 있고, 목 부위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간척농지, 몸통부위에는 해발 300m를 넘는 상봉산과 해명산이 솟아 있다. 일주도로는 바로 이 섬의 약 3분의 2정도 면적을 돌아 나오게 돼 있는데 차로는 40여 분, 자전거로는 2시간 30여 분이 걸린다.

 

<참고자료>

일출명소 : 고성화진포, 강릉경포해수욕장, 정동진, 동해추암해변, 포항해맞이광장,

                산울기공원, 울산간절곶과 명선도, 여수향일암, 해남땅끝마을, 서산왜목마

                을

일몰명소 : 강화장화리, 시흥오이도, 태안안면도, 부안솔섬, 순천순천만, 통영달아공원,

                변산의 채석강

억새명소 : 정선민둥산, 포천명성산, 창녕 화왕산, 서천신성리갈대밭,

은행나무 : 영주부석사, 영동영국사, 양평용문사, 금산보석사,

단풍명소 : 양양점봉산주전골, 평창오대산상원사, 강릉청학산소금강, 동해두타산무

                계곡, 원주치악산구룡사, 양평용문산용문사, 봉화청량산청량사, 공주계룡산

                갑사, 고창도솔산선운사, 장성백암산백양사, 정읍내장산내장사, 청송주왕산

                과 주산지, 구례지리산피아골, 해남두륜산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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