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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明堂)이란 원래 천자가 정치를 행하는 전각(殿閣)을 뜻했다.
풍수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재위 13년(1431) 경기도 내의 크게 유리한 남향지,
즉 명당 수십 곳에 표목(標木)을 세워 개인의 사용을 금지했는데, 이를 봉표지(封標地)라고 한다.
명당을 왕가에서 독점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풍수는 체제 수호적인 학문이었다.
세종이 풍수를 경연(經筵) 과목으로 삼으려 하자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이
“경연은 성현의 학문을 연구해서 정치 실시의 근원을 밝히는 곳인데,
황당·난잡한 잡된 술수인 풍수학을 강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세종실록’ 15년 7월 7일)”고 반대했다.
세종의 장지인 광주(廣州) 서강(西岡)의 영릉(英陵)은 세종이 수장(壽藏·살아 있을 때 만든 무덤)한
당대의 명당이었다.
그러나 세조 때부터 이장론이 대두되었는데, 영릉 주산(主山)의 주맥(主脈)이 무너지고 무덤 위에 덮은 사토(莎土)가 무너진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제는 수양과 안평·금성대군 등 세종의 아들들 사이, 수양과 단종의 숙질(叔姪) 간 골육상쟁의 흉사(凶事)가 잇따른 데 있었다.
세조가 당대 최고의 풍수가였던 안효례(安孝禮)와 최호원(崔灝元)에게 영릉의 길흉을 묻자
모두 우물우물하다가 투옥되었듯이 명당과 길흉화복 사이의 상관관계는 불분명했다.
예종 1년(1469) 2월 영릉을 개장했는데, ‘광중(壙中)에 물기가 전혀 없고 시신과 수의가 새것 같았다’고 ‘예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런 사연 끝에 영릉은 여주 능서면의 현 자리로 이장된다.
명당이 후손들의 발복(發福)과 무관하다고 생각한 풍수가들은 다섯 가지 우환인 오환(五患)이 없는 장지(葬地)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례편람(四禮便覽)’ 상례(喪禮)조는 오환에 대해 앞으로 길, 성곽, 연못, 농토가 되거나 권세가에게
빼앗기지 않을 땅이라고 말하는데,
풍(風), 수(水), 화(火), 충(蟲), 목(木)의 침해를 받지 않는 땅을 뜻하기도 한다.
한 대권후보의 선영 이장을 두고 풍수지리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명당을 찾기보다 오환(五患)을 피하면 된다고 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산송 / 이본영
조선에서는 죽은 자들의 자리다툼이 산 자들에 못지 않았다.
풍수사상이 널리 보급된 결과로 산의 묏자리를 둘러싼 쟁송을 뜻하는 ‘산송’이 사회문제가 되기까지
했다.
일급 명당은 한정돼 있고 이를 차지하려는 사람은 많으니, 불법과 편법이 횡행했다.
남의 산에 슬쩍 묘를 쓰는 투장, 기존 분묘구역에 몰래 묻는 압장, 금지구역을 침범하는 암장, 사기를
쳐서 묘지를 확보하는 유장, 권세를 휘둘러 땅을 빼앗는 늑장이 그것이다.
몰래 주검을 묻고는 들키지 않으려 봉토를 하지 않는 평장이나, 땅 속에 표지를 묻었다가 나중에 이를
근거로 점유권을 주장하는 매표점산이라는 기발한 수법까지 동원됐다.
조상을 어디에 모시느냐에 따라 후손의 운명이 좌우된다 하고, 나라에서 음양과를 치러
왕가의 묏자리를 보는 지관을 뽑을 정도였다.
이런 열기가 산송을 빈발하게 해 임금까지 성가시게 했던 모양이다.
영조는 “근자에 상언(사대부가 임금에게 올리는 탄원)한 것을 보니 산송이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된다”고 개탄했다.
산송은 관아의 주요한 재판거리가 됐고, 이를 둘러싼 뇌물수수와 편파적 재판이 물의를 빚었다.
모함과 폭행, 분묘 훼손 사건도 이어졌다. 산송 때문에 허구한 관·민이 곤장을 맞거나 투옥당하고,
관찰사가 쫓겨났다.
영조는 “늑장·유장·투장 같은 것을 각별히 엄금하고, 법대로 시행하고, 수령 또한 잡아다 죄를 묻고”라며, 비리를 엄단하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린다.
그는 묏자리를 뺏는 것은 다른 이의 집을 찬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도 폈다.
장묘문화는 가장 보수적인 문화로, 다른 분야보다 변화가 더디다는 말도 있다.
가톨릭교도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조상신 덕을 보려고 다시 선조들 묘를 옮겼다 한다.
보수 정객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가 꿈을 이룬다면 다시 산송이 빗발치지 않을까?
이본영 국제뉴스팀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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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07.11.07 03:10
70대 노인이 조상의 묘를 풍수지리 전문가의 충고에 따라 좀 더 나은 곳으로 이장했다.
조부와 증조부를 포함한 직계 조상의 묘 9기를 부모의 유택(幽宅)이 자리 잡고 있는 선산으로 모아 번듯한 모습을 갖추었다.
어느 문중에서나 있음직한 일이다. 세상과의 이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70대 후손은 조상님들을
좋은 곳에 모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
▷70대 노인이 대통령을 목표로 삼은 정치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조상을 잘 모시려는 갸륵한 후손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해 권력을 잡으려는 야심가로 변해 보인다.
이회창(72) 전 한나라당 총재가 그런 모습이 됐다.
그에게 묏자리를 잡아 준 풍수지리 전문가는 “이 전 총재의 새 선산은 후손 중 군왕이 나올 수 있는 군왕지에 속하는 명당”이라는 말까지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조상 묘를 이장한 뒤 4번째 도전에 성공한 선례도 있다.
이 전 총재는 지난날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병(病)’을 비난했지만, 이제 자신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할 차례 같다.
▷역술가와 풍수지리 전문가의 말에 후보들이 울고 웃는 일은 한국 대선의 낯익은 풍경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집을 옮기려다 포기한 이유로 “지금의 한옥 터가 좋다”는 풍수지리 전문가의 말을 꼽은 측근이 있었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의 측근도 일찌감치 그의 경선 승리를 예언한 50대 남성 역술가 얘기를
가끔 하는 모양이다.
각각 독실한 기독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인 두 사람이 그럴 지경이니 종교가 없는 후보들은 오죽할까.
▷요즘 길거리와 지하도에까지 진출해 노점 형태의 영업을 하는 역술가가 크게 늘었다.
외국에서 들어온 타로 카드 점에 심취하는 젊은이도 많다. 하지만 명색이 21세기인데 조상의 음덕이나 점술가의 말에 기대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겠다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오늘 이 전 총재가 출마 선언을 하며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도 많은 국민은
“조상님을 옮겨 모신 명당 덕 좀 보고 싶다”는 소리로 들을 것도 같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설왕설래]명당(明堂)
풍수학에서 회자하는 명당찾기는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멀리는 조선 건국 초기 서울을 수도로 정할 때 하륜의 풍수이론이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또 일제 때 풍수지리에 의거해 한반도 전체를 명당으로 보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지역의
혈(穴)마다 쇠말뚝을 박거나 산허리를 잘라 길을 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풍수학계에 떠도는 충청도 가야산의 명당 자미원(紫微垣)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말 대원군이 자미원에 묘를 쓰면 2명의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말에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묘를 지금의 예산군 가야산 자락으로 이장했고, 곧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라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외 최고권력자의 묏자리를 정해주고 김일성 사망을 예언해 명성을 날렸던 지관 손석우는
생전에 남연군 묏자리는 자미원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1998년 심장마비로 숨졌고, 자신의 묘를 남연군 묘소 400여m 위쪽 도립공원 안에 쓰도록 함으로써 죽어서도 구설에 올랐다.
우리 사회 지도층의 자미원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용상’을 꿈꿀수록 더욱 절실한 모양이다.
대권 3수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을 2년 앞둔 1995년 부모의 묘를 전남 신안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고, 명당의 발복을 받아서인지 꿈을 이뤘다.
그러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2001년 대선을 1년여 앞둔 시점에 ‘왕의 기(氣)가 서렸다’는
충남 예산군 신양면 하천리에 부친 묘소를 옮겼으나 대권 획득에 실패했다.
당시 한화갑 민주당 대표도 목포에 있던 선영 묘를 이 부근으로 이장해 당시 이곳이 자미원 명당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대권 도전 3수에 나설 것이라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역시 조상 묘 9기를 지난 6∼7월 자미원 설이 있는 충남 예산군 신양면 선영으로 옮겨 ‘대권용’ 이장이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이 전 총재 측은 묘소 이전은 도로가 나면서 이뤄진 것으로 대선 출마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대선철만 되면 풍수 얘기가 나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대권은 명당이 아니라 민심에 의해 결정되는 것 아닌가.
이돈성 논설위원
2007.11.05 (월) 19:22 |
풍수지리가 대권 낳는다? |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군왕지지(君王之地)’란 말에 솔깃하는 것 같다.
특히 ‘대권’을 꿈꾸는 이들은 명당 자리를 염두에 두고 묏자리, 집터, 사무실터 하나하나를 고르는 일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풍수지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군왕지지’를 는 뒷얘기는 무성하다.
올여름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조부모를 비롯한 직계 조상들의 묘 9기를 이장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 선언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라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 전 총재측은 “충남 예산군 산성리에 있던 선대묘 앞에 아파트를 짓는다고 예산군에서 옮겨 달라고 공문을 보내 옮긴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15대 대선을 2년 앞둔 95년 11월 부친 등의 묘 3기를 이장했다. 전남 신안군과 경기도 포천군 공원묘지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이 전 총재의 조상 묘 이장을 이와 같은 차원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DJ는 당시 대선을 앞두고 서울 동교동 자택을 비우고 경기도 일산의 주택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조용한 자택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일산 집터가 명당이라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DJ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김영삼(YS) 전 대통령도 빼놓을 수 없다. YS는 1991년 민자당 시절 서울 종로 관훈동에서 여의도로 당사를 옮겼다. 관훈동 당사는 민정당 시절부터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는 자리였다.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풍수지리가들을 대거 동원해 지목한 곳이었다. 관운이 따른다는 이른바 ‘닭벼슬터’라고 불리웠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다. 명당을 떠나면 안 된다는 조언에 따라 1992년 대선 때까지 YS의 사진을 관훈동 당사에 걸어 놓았다. 그렇게 해야만 명당의 기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조언이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는 안국동 사무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여의도와 거리 문제도 있어 참모진들이 사무실 이전을 건의했지만 이 후보는 안국동에 애착을 보였다. 이곳이 보기 드문 명당이라는 ‘진단’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7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는 풍수지리 문제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표측 곽성문 의원이 풍수지리 전문가들을 초청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것이다.
곽 의원은 이 자리에서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이 풍수지리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는 얘기를 끌어냈다. 하지만 그의 ‘오버’로 당을 ‘푼수지리당’으로 만들었다는 비아냥만 들어야 했다. 한상우기자 cacao@seoul.co.kr 기사일자 : 2007-11-07 |
<볼록거울> 대통령과 풍수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정치인들의 풍수에 대한 집착은 유별나다.
역대 대통령 중 일부는 야망 성취 목적으로 풍수에 기댄 흔적이 있다.
특히 묫자리를 잡을 때 풍수에 거는 기대는 은근히 큰 것 같다.
중국에 기원을 둔 풍수가 한반도로 건너와 굳건히 자리잡은 것은 조선시대였다.
말 그대로 바람(風)과 물(水)이 우주와 생명에 중요한 변수라고 보고 지형지세의 힘을 빌려 발복을
꾀했던 것이다.
풍수는 집을 짓거나 묫자리를 잡는 등에 다양하게 적용됐는데, 특히 묘지 조성 때 큰 역할을 했다.
국교가 불교인 고려시대만 해도 화장(火葬)이 일반적이어서 묘지 풍수가 성하지 않았으나
유교의식이 강한 조선조 들어서는 매장이 중시됐다.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에도 풍수 과목이 있었다. 잡학과의 경우 지리, 의학, 명리, 역관과 함께 풍수는
정식 과목의 하나였고, 합격자가 지관이 되면 궁궐에서 묘지에 이르기까지 터를 잡는 일을 했다.
풍수사상은 일제 때 다소 시들해졌다. 허무맹랑한 미신으로 치부된 것이다.
하지만 그 뿌리는 무척 강해 해방이 되고 서구문화가 밀려드는 가운데도 암암리에 생활 깊숙이
뻗어나갔다. 특히 사회 상층 인사일수록 이를 믿는 경향이 강했으니 묘한 역설이라고 할까.
풍수 덕분에 대망을 이룬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 인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대선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그는 고향인 전남 신안의 선친 묘소 등을 1995년에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다. 그 덕분인지 모르나 그는 2년 뒤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다.
이장을 권유한 이는 당대 최고의 지관인 육관 손석우 씨.
손씨는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도 조상 묘소를 이장케 했다고 한다.
그는 1993년 저서 '터'에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예언하기도 해 화제가 됐다.
이번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지난 7월 조부, 증조, 고조 등 조상의 묘소 9기를 한꺼번에 이장했다는 보도다. 2004년에 선친의 묘를 옮긴 지 3년 만이다.
풍수 연구가 박민찬 씨는 이곳이 '선인독서형(선비가 책 읽는 지형)'의 명당이라며 이장을 권했다고
한다.
'대권 3수'의 이 전 총재가 '군왕지'의 덕을 볼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전 대통령들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흥밋거리가 되는 건 사실이다.
풍수는 믿을 만한 걸까? 풍수 신봉자들은 과학성과 합리성이 있다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다분히 심리적 기대효과 아니겠느냐며 회의적 시각이다.
예컨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같은 이는 부친 묘소를 '왕기(王氣)' 서린 '명당'으로 이전했으나
별 효험을 보진 못했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유명인일수록 매장제를 택한다는 것이다. 풍수설 때문인가?
이는 사회적으로 일반화한 화장 추세에 역행한다.
정치인뿐 아니라 경제인들도 대부분 매장방식을 선호한다.
묘소 역시 널찍하게 터잡기 마련이어서 보통사람들을 찜찜하게 한다.
ido@yna.co.kr
[한마당―정철훈] 이회창과 서빙고동
서울 옥수동 8번지는 조선시대에 빙고동(氷庫洞)으로 불렸다.
겨울에 보관한 얼음을 여름에 궁중으로 진상을 하던 얼음창고가 있던 곳이다.
얼음은 청계천 상류의 맑은 물을 결빙시켰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최대 치적으로 청계천 복원 이 꼽히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의
명경지수가 청계천이었다 하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얼음창고가 서울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으로 옮겨진 것은 연산군 때다.
요즘 대선 출마설이 나도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청계천 복원 공사가 한창이던 2005년 4월 말,
서울 인왕산 자락 옥인동에서 서빙고동으로 집을 옮겼다.
서빙고동 일대는 원래 광활한 모래벌판이었다.
1956년 5월 자유당 정권 시절 정·부통령선거 때 30만명의 청중이 운집한 백사장이 근처에 있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 해공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은 재집권에 성공했다.
신익희 후보의 급서는 테러는 아니라고 결론났지만 음모설은 지금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점점 짙어가는 이회창 출마설의 배경에는 이명박 후보의 유고(有故)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
대선 후보가 후보자 등록마감(올해는 11월 26일) 이후 사망한 경우 해당 정당은 마감 후 5일(12월1일)
까지만 다른 후보자를 등록할 수 있다는 공직선거법의 규정에 따라 스페어 후보를 한 사람 더 내자는 것이다. 이 전 총재를 대선 후보로 옹립하려는 서상목 전 의원의 주장이다.
이명박 후보측은 이를 두고 '습격사건'이라며 발끈하고 있는 형국이다.
서빙고동은 인근 동부이촌동과 함께 풍수지리학에서 기러기가 날개를 펼쳐 모래톱으로 내려 앉는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 명당으로 꼽히긴 한다.
쇠락한 인왕산 지기(地氣)를 떠나 군중을 떠안는 평사낙안형 지세에 몸을 의탁한 지 2년 반.
하지만 풍수는 풍수로 망한다는 속설이 있듯 혹시 이 전 총재를 옹립하려는 인사들은 평사낙안형을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은 이 전 총재 자신이 권력이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서빙고동 칩거에서 배운 철학이자 진리라며 옹립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모습을 기대하기엔
아직 그릇이 작은 것일까.
정철훈 논설위원 hrefmailtochjung@kmib.co.kr
[송상일의 세상읽기]풍수 이야기
입력날짜 : 2007. 11.09.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봄 선대의 묘를 옮겨 모셨다.
이 전 총재 측은 "선영이 앞뒤로 사방 도로가 나 이장이 불가피했다"고 했다.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사람들은 이 사실을 흥미로워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대선을 앞둬 조상 묘를 옮겨 모셔 화제가 됐었다.
그 때 묏자리를 봐 준 이는 '육관도사'로 소문 났던 손석우 옹이었다.
그런데 생전에 손 옹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덕을 쌓으면 죽어서 구렁텅이에 들어도 명당(明堂)이 된다."
곽박(郭璞)이 쓴 '장서(葬書)'는 중국 풍수의 고전이다.
당 황제 현종(玄宗)이 비단 주머니로 감싸 간수했다고 전해지는 책이다.
그래서 '금낭경(錦囊經)'으로도 불린다. '장서'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음양의 기(氣)가 숨을 내쉬어 바람이 되고, 올라가 구름이 되며, 내려와 비가 되고, 땅속에서 돌면
곧 생기가 된다."
하늘의 정기를 땅이 받아서 만물을 생육한다.
이것이 풍수 곧 '바람과 물의 과학'이 지닌 기본적인 생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운우지정(雲雨之情)인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초나라 양왕(襄王)의 부친 회왕(懷王)이 꿈속에서 미녀를 만나 구름과 비의 정(情)을 나눴다.
양왕의 글벗이던 송옥(宋玉)이 지은 시에 나오는 이야기다.
구름과 비가 '장서'에는 풍수의 설명으로, 송옥의 시에는 남녀상열(男女相悅)의 은유로 등장하고 있다.
풍수와 성(性)의 친족성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과연, 풍수 지도(地圖)를 보면 묏자리가 여성의 생산성을 상징한다는 것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다.
풍수란 하늘과 땅, 음과 양, 남과 여의 하모니, 자연과 사람이 하나의 생명체를 이뤄 사는 삶을 꿈 꾸는 유기체 이론인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 사는 삶을 유가는 '벼리를 따름(順理)'라고 하고,
도가는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고 한다.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그 뜻은 하나로 통한다. 그것은 '무리하지 않음'이다.
묏자리를 옮기고 결의한 이 전 총재의 출마가 역사의 벼리에 순(順)하는 것인지 역(逆)하는 것인지는
육관도사가 와도 모른다. 그것은 오직 국민이 알아서 정할 일이다.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