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1)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이제 우리는 어느 덧 반야심경의 마지막 경문에 도달했습니다. 우선 마지막 경문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고설(故說)은 '그러므로 설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설할까요? 바로 뒤따르는 구절인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설 반야바라밀다주'는 반야바라밀다주를 이제 설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설하실까요? 바로 관자재보살님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관자재보살님이 설하신 말씀을 공부해 왔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삿된 소견을 하나하나 부수고 우리가 이것은 진리라고 붙들고 있던 개념마저도 삿된 집착이라고 여지없이 낱낱이 부수워 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토대 위에 반야바라밀다의 공능을 설하셨습니다. 또한 반야바라밀다는 곧 주(呪)라면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다고 하시면서 반야바라밀다주를 높이 찬탄하셨습니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바로 대신주(大神呪)이고 대명주(大明呪)이며, 무상주(無上呪)이고 무등등주(無等等呪)라고 최상 최대의 찬탄어를 쓰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 위대한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를 설하려 하십니다.
즉설주왈(卽說呪曰)은 '즉 주문을 설하여 말하되'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문을 말하면'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관자재보살님은 반야바라밀다의 심오한 뜻은 언설로 표현할 길이 없는 언어의 길이 끊어진 자리이기에 반야바라밀을 하나의 주문인 진언(眞言)으로 나타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참다운 뜻이 언어의 한계에 갇혀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주문은 중국에서 한역할 때에 범어 원음을 그대로 음역하여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2)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주문 원문을 보겠습니다.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우리는 이 글을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라고 읽습니다. 이 진언을 범어로는 '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 Bodhi svāhā' 라고 합니다. 발음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혹은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라고 합니다.
① 진언은 번역하지 않는다
반야심경 강의 초기에도 말씀드렸 듯이 진언은 번역하지 않습니다. 이는 삼장법사 현장(玄奘) 스님이 경전을 번역할 때 원칙으로 삼았던 오종불번(五種不飜)의 하나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도 있지만 다시 정리하는 차원에서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언(眞言)은 거룩한 부처님의 언어이자 깨달음의 언어이어서 광대무변한 뜻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므로 그 깊이가 한량이 없어서 우리 범부들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칫 번역하여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킬 우려가 많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진언은 그 자체가 가지는 신묘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언에서 나오는 음파의 진동은 신묘한 힘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언을 염송함으로써 삼매(三昧)에 들고 가피(加被)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야바라밀다주 외에도 많은 진언(眞言)과 다라니(陀羅尼)를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독송하는 천수경에는 많은 진언과 다라니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명진언(光明眞言)이다 능엄주(楞嚴呪)다 해서 수많은 진언과 다라니를 염송하면서 수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나 능엄경의 능엄주를 일구월심(日久月深) 염송하여 득력(得力)하여 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밀교(密敎)에서는 주력(呪力)에 힘써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표로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담입니다만 여름이 되니까 창문을 열어 놓으니 나나니벌이 집안에 들어와 집을 짓고 있습니다. 왜 나나니벌인가 하면 그 벌이 '날 닮으라 날 닮으라' 하며 주문 외우듯 하며 새끼를 만든다고 하여 나나니벌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독경 제일은 귀뚜라미고, 주력 제일은 나나니벌이 아닌가 합니다. ^^
나나니벌은 날 닮으라 날 닮으라 계속 염송하며 집을 짓고 새끼를 만들어 냅니다. 무엇이든 일념(一念)으로 하면 번뇌망상은 스러지고 삼매(三昧)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삼매를 얻으면 진리와 계합(契合)할 수 있는 것이니 진언은 이와 같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진언을 번역하지 않고 그 소리만 외워도 되는 이유 중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우리는 강아지를 부를 때 워리 워리하거나 아랫입술 안에 혀를 대고 붙였다 뗐다하며 소리를 내면 분명 강아지는 듣고 감응해 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ㅎㅎㅎ 또한 고양이를 부를 때는 나비야 나비야 하거나 야웅야웅하면 고양이 또한 감응해 옵니다. '워리워리' '나비야 나비야'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다면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효과는 만점입니다.
② 왜 아제 아제인가
진언은 번역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21세기 사람들은 그래도 궁금해 합니다. 저는 범어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번역된 책들에서 발췌하여 그 뜻을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에 앞서 먼저 살피고 넘어 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언 원문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거론이 거의 없는 문제입니다. 진언 한역 원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이 글을 원음으로 읽으면 '갈체 갈체 파라갈체 파라승갈체 보제 사파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글을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라고 읽습니다. 그러면 범어 원음은 어떻습니까?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비슷합니까? 전혀 다릅니까? 웬지 모두 다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진언 원음인데...
揭諦에서 揭은 '갈' 또는 '게'로 발음합니다. 諦는 '체'이지만 불교에서는 '제'로 읽습니다. 그러면 揭諦는 '갈제'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ㅈ을 ㄷ으로 발음했습니다. 그래서 '제'를 '데'로 읽었습니다. '갈제'는 '갈데'가 됩니다. 그런데 국어 음운학적으로 ㄷ앞에 ㄹ은 탈락되어 묵음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갈데'는 '가데'가 됩니다. 揭諦가 결국에는 '가데'가 됩니다. 菩提의 '제'도 '데'로 읽으니 '보데'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리'로 읽습니다. 婆는 '바'로 읽습니다. 訶는 '하'로 읽습니다.
이를 종합하여 정리해 보면 이러합니다.
'가데 가데 파라가데 파라승가데 보데 사바하.' 그런데 범어 원음을 표기하면,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로 표기합니다. 혹은 범어 원문을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말과 범어의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로 변형되어 있으니... ㅠㅠ 아마도 불자들이 범어 발음이 익숙치 않아 발음하기 좋으라고 '가'를 '아'로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제 아제.... 저는 진언은 범어 원음대로 읽혀져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한 세대가 결심하면 되려만 그러나 한 번 굳어진 전통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범어를 음사한 한역어(漢譯語) 발음은 우리말과 거의 비슷합니다. 한역된 한자라고 해서 중국 발음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저는 중국어를 모릅니다만 중국발음으로 저 진언을 읽으면 다음과 같답니다. "지에디 지에디 보루오지에디 보루오생지에디 푸티 스포헤" 어떻습니까? 또 하나 예를 들면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범어로는 '샤캬무니'라 발음하는데 중국인들은 '시쟈모우니' 라고 한다니 범어의 한역은 우리말과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알기 쉽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梵語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혹은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古語 가데 가데 파라가데 파라승가데 보데 사바하 現在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中國 지에디 지에디 보루오지에디 보루오생지에디 푸티 스포헤
참고적으로 써 보았습니다. 이제 진언 원문에 대한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③ 진언의 뜻
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 Bodhi svāhā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떼(gate 揭諦 아제)는 gam(가다)이라는 산스크리트어 어원에서 파생된 말로 '간 이여, 가자, 건넌다, 깨친다, 도달하신 분이여!' 등으로 해석합니다.
빠라가떼(pāragate 波羅揭諦 바라아제)는 pāra + gate로 pāra는 prajñāpāramitā(般若波羅蜜多)의 pāram으로 저 언덕(彼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호격(呼格)일 때는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처소격(處所格)일 때는 '저 언덕에 갔을 때', 현재 완료형일 때는 '저 언덕에 건너 갔네' 등으로 해석합니다.
빠라상가떼(pārasamgate 波羅僧揭諦 바라승아제)는 pāra + sam + gate로 sam은 '완전히, 모두'라는 뜻으로 '저 언덕으로 완전히 가는 이여, 피안에 완전히 감이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하신 분이여' 등으로 번역합니다.
보디( Bodhi 菩提 모지)는 깨달음(覺)의 뜻으로 '깨달음이여!' 라고 번역합니다.
쓰와하(svāhā 娑婆訶 사바하)는 '스바하'라고도 하는데 '성취한다, 완성한다, 혹은 영원하라, 행복하라' 하는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비밀어라 하겠습니다. 인도에서는 만트라를 반복하여 외우다가 마지막에 쓰와하 하는 소리와 함께 향을 불속으로 던진다고 합니다. 이는 그들이 믿는 신에게 제물을 올리니 소원 성취해 달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반야심경의 진언도 불보살님께 이루어 달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혹은 능동적으로 그렇게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제 이를 좋합적으로 서술해 보겠습니다. 이 진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여러 책에서 수집된 해석을 모아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범부(凡夫)가 발심(發心)하여 깨달음에 나아가고자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입장이라면,
"가는 이여,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완전히 가는 이여! 진리여, 영원하소서!"
"가는 이여,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가는 이여!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는 이여! 깨달음이여, 영원하여라."
또한 수행자로서 깨달음의 세계로 가신 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가신 이여! 가신 이여! 피안으로 가신 이여! 피안으로 완전히 가신 이여! 깨달음을 이루신 이여! 영원하소서!"
"갔을 때, 갔을 때, 피안으로 갔을 때, 피안으로 완전히 갔을 때, 깨달음이로다. 스바하."
반야바라밀다를 증득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신 불보살님의 입장이라면,
"건너갔네, 건너갔네. 저 언덕에 건너갔네. 저 언덕에 모두 다 건너 갔네. 깨달음을 성취했네."
"건너갔네, 건너갔네. 저 언덕에 건너갔네. 저 언덕에 완전히 건너갔네. 오! 이 놀라운 깨달음이여, 만세!"
"감이여, 감이여, 피안에 감이여, 피안에 완전히 감이여. 깨달음이어라. 스바하."
밀교 수행자 입장이라면,
"도달하신 분이여! 도달하신 분이여! 피안에 도달하신 분이여! 피안에 완전히 도달하신 분으로 계신 보리보살님이여! 저희 헌신을 흔쾌히 받아주십시요."
우리 향불교 법우님들과 같이 불법을 배우고자 서원을 세운 불자라면,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우리 함께 저 언덕으로 가세. 깨달음이여! 행복이 있어지이다!"
"가세, 가세,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가세. 우리 다함께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가세. 깨달음 이뤄지이다."
마지막 진언은 제가 해석을 붙여 보았니다만 보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진언의 의미와 공덕을 다 헤아리기는 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다양한 해석이 자칫 본의를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진언은 해석하지 않고 염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불자의 길
이 반야바라밀주는 반야심경의 총체적 결론입니다. 관자재보살님께서 법을 설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에는 부처님께서 삼매속에 계신 가운데 많은 비구들과 보살님들, 옹호성중들이 청중으로 계셨는데 아마도 이 진언을 설하실 때 환희의 도가니가 아니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관자재보살님이 설법(說法)을 마쳤을 때 부처님께서 삼매경에서 일어나 관자재보살의 설법이 사실임을 증명(證明)하시고 대중은 환희하면서 이 경을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 주문은 불자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불자가 가야 할 길은 어디입니까? 관자재보살이 중생들의 어리석은 소견을 낱낱이 부수고 소위 법을 이루었다고 할 만한 이들의 조그마한 집착마저도 여지없이 부수며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내 건 것은 모두 저 광대무변한 청정한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지혜의 완성에 있다 할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세계야말로 불자가 가야 할 대광명(大光明)의 세계인 것입니다. 관자재보살님은 모든 불자로 하여금 이 길을 가도록 환하게 길을 밝히신 것이며 축복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는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늘 진리에 합당한 것인지 아니한 것인지 마음의 성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라밀의 세계는 한 점의 미혹이 없어야 하듯이 불자의 길은 비리(非理)와는 길이 떠나야 하고, 삼독(三毒)의 마음을 여의고 늘 광명정대함 속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가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반야심경을 모두 마치며 소리 높여 염송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그 동안 애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
첫댓글 오래전부터 아제아제로 염송해서 익숙하긴 합니다만 가떼로 읽혀지는 것이 바르면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_()_음이여 행복이 있어지이다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합니다만 불자들은 잘 받아들일 것 같은데요.
백우님, 그동안 반야심경 공들여 써 주신 덕분에 값진 공부를 공짜로 한 것 같네요.
어디서 이런 공부를 하겠습니까
부처님의 말씀은 진리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갖게 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세, 가세, 저 언덕으로 가세. 우리 함께 저 언덕으로 가세. 깨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
예전에 제가 법사로서 활동할 때는 천수경 진언과 반야심경 진언을 모두 범어 원음으로 했더니 처음에는 어색해 했는데 자꾸 반복하여 하니까 정착되어 갔는데 제가 그만 두는 바람에 아마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이 반야심경을 해설하면서 동원된 책은 무수합니다. 참고적으로 여러 책을 보고 취사(取捨)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 용어 하나하나가 진리를 나타내기에 한 글자라도 잘못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마음을 정갈히 하고 일지향을 사릅니다. 작년 7월에 시작한 반야심경을 1년만에 오늘 회향합니다. 반야심경을 함께 공부하고 싶어서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가볍게 들어가다가 한 발 한 발 들어감에 반야심경의 깊은 심연에 빠져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희열과 놀라움에 반하면서 반야심경의 광대무변한 세계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습니다. 이 반야심경 해설은 그 광대무변한 뜻이 태양이라면 반딧불에도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반야심경의 심오한 뜻을 공부하시고 피안의 세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회향을 축하 합니다...나무묘법연화경()()()
_()()()_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감사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백우님 수고하셨습니다. 꼭 1년이 걸렸군요. _()_ 저가 반야심경을 인터넷으로 공부하기 위하여 여러 카페를 기웃거렸지만 백우님의 해설이 가장 편하고 읽기 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향불교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고요. 반야심경의 광대무변한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도록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 해 주신 백우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반야심경 공부방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
반야심경을 통하여 법공님을 만나서 정말로겁고 감사했습니다. 낱낱이 읽어 주시고 댓글을 남겨 주시어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인연이 지속되기를 합장해 봅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수고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람해 보세요.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반야심경의 마지막, 진언을 톻해 처음의 반야바라밀다의 내용을 다시 천명하고 간절한 발원(피안의 저 언덕)이 담겨 있지요. 글자수는 전부 합해 270자 밖에 안되는 짤막한 경이지만 참 마음 내어 공부(만남) 하기에는 어려운 법보(法寶) 이지요. 백우님 1년 동안 고생 하시어 우리가 아주 쉽게 접할수 있어 넘 좋았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그동안 좋은 말씀과 더불어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야심경의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노름을 그만하고 피안의 언덕으로 어서 가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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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님 반갑습니다. 틈틈이 오셔서 반야심경 전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거듭거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수고 많이 하셨어요.ㅡㅡㅡ 제가 명동에서 반야심경을 쓰고 있는데 스님이 탁발나오셨더라구요.
반야심경 내용을 아느냐 물으시기에 저는 내용은 모르고 내 마음을 다스리려고 문자를 써 나가고 있습니다
내용을 어느정도 알면 말을 해 주겠는데.. 전혀 모른다니까 그냥 가시더라구요.
그리고 공부하는 스님들도 어떻게 공부했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하시면서 입가에 미소로 성불 하십시요 .
저는 가시는 스님 뒷모습만 바라 보았지요.
어렵지만 그래도 반야심경을 맛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반야심경 사경을 많이 하셨으니 그 뜻이 잘 이해가 되셨을 줄 압니다. 무궁무진한 뜻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뜻을 헤아리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정진있으시기 바랍니다. 가떼 가떼 바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
잘 보았습니다. 저도 요즘 반야심경을 사경하면서 새롭게 발심을 하게되었습니다. 심오한 말씀에 스스로 감격해 하고 있답니다. 백우님의 정진력에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널리 회향하시기 바랍니다. 나무 반야바라밀...().
아, 이런 이제야...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쓰와하.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
궁금한 것이 있어 꼬리글았다가 바로 전화해서 시원한 대답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_()_ _(())_
잘읽고 갑니다,,,마치 불어를 보는듯해서 ㅎ
감사합니다. _()_ _(())_
백우님~
제가 다른 부분은 않읽었고 여기서만 읽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고 제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을 올려 보곘습니다.
보시고 말씀 부탁드립니다...^^
불자의 기본이 되는 반야심경은 불교의 진수를 담은 경전으로 감히 제가 강의를 했습니다만 _()_ _(())_
다만 함께 공부해 보자는 의미로 강설을 했습니다만 시간이 나시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현님의 반야심경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