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전부를 불태우고 난 뒤에 남는 것
종수(유아인 분)는 문예창작과를 나온 소설가 지망생.
택배 아르바이트 중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난다.
그녀는 내레이터모델이다.
(종수가 해미를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의 성형 사실을 밝힌다)
종수는 마트 행사 경품으로 받은 여성용 시계를 해미에게 준다.
촌스럽다면서도 그녀는 시계를 손목에 찬다.
(싸구려 분홍색 시계는 매우 중요한 메타포이다. 해미로 대표되는 하위 계층 여성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같은 계층 남성인 종수의 유일한 행운을 뜻한다. 그 행운을 해미에게 선물하는 행위는 이후 발전 될 종수의 감정에 대한 복선이다)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해미.
그녀가 첫 만남에서 보여주는 판토마임(귤을 까먹는)은 대단히 흥미롭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후자의 경우는 더욱 절실하고 구체적이며 전자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자기 암시' 이다. 또한 이 영화의 장르가 '미스터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귤→고양이→우물→해미'로도 치환 가능하다)
그녀는 마치 꿈을 꾸듯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에 대해 얘기한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대해, 배를 굶주린 자들과 인생에 굶주린 자들에 대해서.
해미는 자신이 없는 동안 그녀의 고양이를 부탁한다면서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버린다.
종수가 파주로 이사하기 전 들른 해미의 집은 하루에 딱 한 번 빛이 들어오는 해방촌 언덕 꼭대기의 북향 원룸이다.
해미는 고양이 이름이 '보일이'이고 자폐가 있어 낯선 사람을 보면 숨어버린다고 말한다.
(실제로 종수는 끝까지 고양이를 보지 못한다. 보일이가 그녀의 상상 속 존재인지의 여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종수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일화들을 구체적으로 회상한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질 때 아주 잠깐 한 줄기 빛이 어두컴컴한 그녀 방 벽에 머물다 사라진다.
(종수에게 해미는 암담한 현실의 빛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파주 아버지(최승호 분)의 농가는 심하게 어질러져 있다.
(해미의 방도 그렇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비무장지대를 넘어 시도때도 없이 들려오는 대남방송, 말없이 끊어지는 전화, 청년 실업을 다룬 텔레비전 뉴스.
(종수의 현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정들이다. 결핍, 불안, 분노가 잠재된 그의 성격은 잠겨진 아버지의 창고를 열어 보여줌으로써 '유전'으로 확장된다)
다음 날 굳게 잠긴 창고(헛간)에서 종수는 아버지의 비밀스런 수집품인 칼들을 발견한다.
(폭력적인 성향의 아버지는 낡은 트럭과 암송아지 한 마리만을 남긴 채 공무원 폭행 혐의로 체포된다)
해미가 아프리카로 떠난 뒤 종수는 그녀의 집에 가서 고양이 밥을 준다.
그리고 멀리 남산타워가 내다보이는 창문 앞에서 자위를 한다.
(종수에게 '남산타워'는 단순한 물질적 대상이 아니다. 어두운 해미 방안을 비추는 한 줄기 햇빛의 유일한 '반사체'이기 때문이다)
고집 센 아버지는 피해자와의 합의와 반성문 제출을 일체 거부하고, 이를 중재하려는 변호사(문성근 분)는 종수를 불러 아버지를 설득하라고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종수는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일면 닮은 구석이 있다. 종수의 탄원서에도 결국 아버지는 실형을 선고 받는다)
보름 후 한국으로 돌아온 해미 곁에는 낯선 남자가 서있다.
케냐 공항 폭탄 테러를 함께 겪었다는 '나이로비 동지' 벤(스티븐 연 분)은 종수의 트럭을 타고 곱창집까지 따라와 합석한다.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칼라하리 사막 선셋 투어 중 홀로 황혼을 바라보던 해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벤은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눈물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어떤 감정이 슬픔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항에 차가 있음에도 종수의 트럭을 얻어타고 온 벤은 술자리가 파하자 해미를 자신의 '포르쉐'에 태우고 떠나버린다.
'노는 것'이 그의 일이라는 벤에게서 종수는 심한 열패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따라간 벤의 집에서 종수는 그가 요리 도중 해미에게 '메타포'에 관해 말하는 걸 듣는다.
"인간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이…나 자신을 위해서 제물을 만들고 내가 그걸 먹는 거야"
화장실 선반에서 화장품이 든 가방과 여성용 장신구들을 발견한 종수는 벤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아"
해미는 종수의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벤의 모임에서 해미는 예의 '그레이트 헝거'에 관해 얘기하며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춘다.
점점 격정적으로 변해가는 그녀의 춤 동작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런데 벤은 따분한 듯 하품을 하다 종수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미소짓는다.
(벤은 해미가 흥미롭다고 말했었다)
종수의 의심은 더욱 커진다.
얼마 후 지나던 길이라며 느닷없이 종수의 집을 찾아온 해미와 벤.
해미는 어릴 적 종수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우물' 얘기를 꺼낸다.
(후에 종수는 이 우물의 존재 여부로 인해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게 된다)
"좋다, 오늘이 제일 좋은 날 같애"
해가 지기 시작하고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벤이 가져온 대마초를 나눠 피운다.
갑자기 상의를 벗어 던지고 춤을 추기 시작하는 해미.
그레이트 헝거의 춤.
(카메라는 새의 날개를 닮은 그녀의 손끝을 지나 바람에 흔들리는 키 큰 나무 우듬지에서 한참을 머문다. 무너진 해미의 집터 뒤로 펼쳐진 검푸른 노을은 그녀가 보았다던 칼라하리 사막을 연상시킨다)
흐느끼다 쓰러져 잠든 해미를 소파에 눕히고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눈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해요"
아버지의 폭력에 엄마가 가출하자 아버지는 종수에게 엄마의 옷을 태우라고 명령한다.
"나는 지금도 그 때 꿈을 꿔요"
"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들판에 버려진 낡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라는 벤.
'한국에는 쓸모없고 지저분한 비닐하우스가 진짜 많다'는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벤이 느끼는 희열은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이며 옳고 그름이 아닌 자연의 도덕처럼 '동시존재'하는 '밸런스'라는 것이다.
방화 주기는 두 달에 한 번, 이번에 태울 대상이 '아주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그는 귀띔한다.
"나는 해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미소짓는 벤.
그 날 새벽, 잠에서 깨어난 해미에게 종수는 창녀나 옷을 그렇게 벗는 거라며 화를 내고 해미는 대꾸도 없이 벤과 함께 떠나버린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해미의 전화가 알 수 없는 소음과 발자국 소리만을 남긴 채 끊어져 버리자 종수는 다급하게 해미의 집을 찾아가지만 현관 비밀번호는 바뀌어 있고 그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종수는 집 주변의 낡고 더러운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을 일일이 감시하기 시작한다.
얼마 후 다시 찾아온 그녀의 집은 깨끗히 치워져 있다.
여행 가방도 그대로고 고양이의 흔적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종수는 그녀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음을 직감하고 미친듯이 해미를 찾아헤매기 시작한다.
"너무 가까워서 놓쳤을 거예요.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어요"
비닐하우스를 이미 태웠다며 벤은 태연하게 말한다.
그의 곁에는 해미를 닮은(연상시키는) 낯선 여자가 서있다.
"해미는 그냥 연기처럼 사라졌어요"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친구도 없는 해미가 유일하게 특별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종수였다고, 난생처음 종수에게 질투를 느꼈노라고 그는 말한다.
종수의 감시하에 드러나는 벤의 일상은 의외로 평범하고 건실하다.
집, 스포츠 센터, 성당, 화목한 가족, 친구들.
(이어지는 우물에 관한 일화는 '외로운 여자' 해미의 극단적인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해미의 가족과 마을 이장은 그녀의 집에 우물이 없었다고 말한다. 16년 만에 나타난 엄마만이 우물이 실재했음을 단언하고 종수는 엄마의 말을 통해 비로소 해미를 믿게 된다)
벤의 집 앞에서 그를 감시하던 종수는 그의 미행을 눈치챈 벤에 이끌려 모임에 초대되고 화장실 서랍 속 장신구들 틈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발견한다.
그리고 벤이 데려왔다는 주인 없는(이름 없는) 고양이로 인해 종수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면세점 판매원이라는 벤의 새로운 여자는 중국 관광객들에 대한 얘기로 들떠있고 벤은 또 지루한 듯 하품을 한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징역 1년 6개월로 유죄가 확정되자 종수는 송아지를 팔아 엄마에게 주고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여자에게 화장을 해주고 있는 벤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자연스레 그가 말한 '메타포'를 떠올리게 된다. '화장'이라는 단어에는 의외로 여러가지의 뜻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 역시 중의적 표현이다)
눈 내리는 들판.
종수를 기다리고 있는 벤.
트럭에서 내린 종수는 칼로(어쩌면 아버지의 것일) 벤을 찌르고 시체를 포르쉐 운전석에 앉힌다.
자신의 피 묻은 옷을 모두 벗어 던져 넣은 종수는 차에 석유를 뿌리고 그의 집에 두고 갔던 벤의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벤의 차를 뒤로 하고 종수는 알몸으로 트럭을 타고 떠난다.
오프닝에 명시했다시피 이 영화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이다.
큰 줄기를 중심으로 여러 부분이 각색되었지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하루키의 관조적이고 소극적인 성향이 이창동 감독의 손에서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헛간을 태우다'의 화자인 '나'는 '관찰자'로 끝나지만 '버닝'의 종수는 사이코패스인 벤을 감시하고 단죄한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이 아닌 현 사회의 계층적 괴리감을 입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버닝>은 이창동 감독 영화의 주요 특색인 리얼리즘에 문학적 은유가 가미된 독특한 작품이다.
제 71회 칸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과 벌칸상, 제 55회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글/배성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