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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를 위한 법화경강의 제13강 2
(無比 큰스님, 문수선원, 2008년 12월 19일)
2. 방편품 90-100
90.彩畫作佛像하야 百福莊嚴相 호대
채화작불상 백복장엄상
自作若使人하면 皆已成佛道니라
자작약사인 개이성불도
채색으로 불상을 그려서
일백 가지 복이 원만하게 장엄한 탱화를 만들 때
제가 스스로 하거나 남을 시켜 하더라도
이러한 이들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彩畫作佛像하야
채화작불상(彩畫作佛像)하여 그림으로 그리는 거죠. 채색을 하고 그림을 그려서 불상을 만든다 이거야. 그림을 그리니까
百福莊嚴相 호대
백복장엄상(百福莊嚴相)이라 32상과 80종호를 아주 근사하게 얼마든지 잘난 모습으로 그릴 수가 있지 않습니까. 백복장엄상으로 그리되
自作若使人하면
자작약사인(自作若使人) 스스로 그리기도 하고, 약사인(若使人) 사람을 시켜서 그리기도 해. 그렇게 해도
皆已成佛道니라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야, 누가 그린다 하는 데 조금만 동참해도 그건 이미 남을 시켜서 그리는 게 되니까 동참만해도 개이성불도야.
그러니까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아라” 하는 것을 자꾸 자꾸 심어주는 거야.
그래도 도대체가 이해가 안가고 납득이 안 가는거죠.
그래도 이근공덕(耳根功德)이라고 해서 귀로 한 번 스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그야말로 콩나물 법문으로 물이 자꾸 스며들기만 해도 콩나물이 자라듯이,
이근공덕도 보통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들은 이근공덕만이야말로, 이근공덕. 귀 이(耳)자 뿌리 근(根)자
귀뿌리로 한 번 지나가는 공덕 이것만으로도 상당하거든요. 개이성불도니라.
그 다음에 또
91.乃至童子戱로 若草木及筆이나
내지동자희 약초목급필
或以指爪甲으로 而畫作佛像하면
혹이지조갑 이화작불상
如是諸人等이 漸漸積功德하야
여시제인등 점점적공덕
具足大悲心일새 皆已成佛道니
구족대비심 개이성불도
但化諸菩薩하야 度脫無量衆이니라
단화제보살 도탈무량중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무 꼬챙이나 붓이나
또는 손가락이나 손톱 따위로 불상을 그린다 해도
이와 같은 이들이 점점 공덕을 쌓으며
큰 자비심을 갖추어서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다만 여러 보살이 되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였느니라.
乃至童子戱로
내지동자희(乃至童子戱)로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若草木及筆이나
약초목급필(若草木及筆)하여 초목이나 풀이나 나무나 붓이나 이런 걸로 그리기도 하고
或以指爪甲으로
혹이지조갑或(以指爪甲)으로 손톱으로 그린다 말야. 손톱으로 땅이나 나뭇잎 같은 데 손톱으로 그리면 그려지거든요. 그런 장난입니다.
而畫作佛像하면
그렇게 해가지고서 화작불상(畫作佛像)이야. 불상을 그린다. 감나무 잎 같은데 아니면 남방의 야자수 나무 같은 것 이런 건 글씨도 쓰니까 그런 데다 손톱으로 하면은 그림이 그려지잖습니까. 그렇게 해서 불상을 지을 것 같으면
如是諸人等이
여시제인등(如是諸人等)이
漸漸積功德하야
점점적공덕(漸漸積功德)하야 점점 공덕을 쌓아서
具足大悲心일새
구족대비심(具足大悲心)일새 대비심을 구족할 새
皆已成佛道니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니라 다 이미 불도를 이뤘다. 그러니까 인불사상(人佛思想) 사람은 그대로 부처고 사람보다 더 존귀한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지극히 고귀함과 무한생명 무한 능력 여기에 우리가 이해를 하고 눈을 뜨고
그것을 존중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그런 가르침이
결국은 불교의 가르침이고 또 내가 늘 인불사상, 인불사상 하는데
이 법화경이야 말로 인불사상의 원전이다 라고
하는 근거가 바로 이런 데 있습니다.
보십시오. 부처, 불도를 이룬다 라고 하는데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이런 조건을 이야기 해놨어요. 이게 무슨 조건입니까? 전혀 조건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고봉독숙 저 외로운 봉우리에서 홀로 자면서 일종식하면서 장좌불와하면서 피나는 정진을 하는 그 삶은 그럼 어떻게 되느냐? 그거 결국은 성불하기 위해서 한다는데 그러면 그런 일은 어떻게 되느냐? 그것으로 인해서 부처되는 거는 아니야 그런 삶이 좋아서 그렇게 살 뿐이야.
저기 서울대학교 나와 가지고 좋은 회사에 간부로 있다가도 저 시골에 가가지고 농사짓고 나무하면서 사는 사람 많잖아요. 그게 좋아서 사는 거야. 딴 사람들은 저 사람 돌았나 어째서 그렇게 사는가 싶지만은 아니야 그 사람에게는 그 삶이 좋아.
외로운 봉우리에서 하루 한 끼 먹고 혼자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 그 삶이 좋아서 그런 것이지 그것이 부처되는 조건은 아니예요.
만약에 부처되는 조건이라면 육조스님 같은 이는 나무 팔러 갔다가 금강경을 한 구절 떡 듣고는 바로 부처가 됐는데, 자기가 부처인 줄 알았는데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설명할 길이 없잖아요 그건.
그 사람이 언제 불교를 알았습니까. 무슨 낫 놓고 기역자를 아는 사람입니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를 압니까. 절이 있는지 압니까. 스님이 있는지 압니까. 전혀 정말 시골에 나무나 해다가 시장에 갖다 팔아서 겨우겨우 연명해 가는 정말 무지막지한 사람이거든요. 언제 참선 참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그건 설명할 길이 없잖아요. 그거는.
그 분이 제대로 깨달은 분이다 라고 해서 우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하는 거예요.
무당 절도 조계종 붙여놓으면 잘 되는 거야. (웃음) 그만치 조계종이 빛나는 종파라. 하하 그게 전부 조계산에서 육조스님께서 머무시면서 경학을 한 그 업적과 그 사상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조계종 이렇게 한다고요.
송광사도 조계산 하는 것도 역시 그 뜻이라.
그 뜻으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죠. 그렇게 돼 있다고요.
그런 사상과 그런 스님을 우리가 조상으로 받들고 그런 사상을 배우고 답습하면서 엉뚱하게 그렇게 생각하면 잘못이야. 그냥 그 삶이 좋아서 산다 하면 그건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을 하든지 열흘에 한 끼를 먹든지 한 번도 안자고 평생 안자고 살든지 간에 그것이 자기가 좋아서 그런 삶을 산다고 하면 그건 괜찮아요.
그러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하면 그건 안 맞는 말이야. 그걸 아셔야 돼요 꼭. 이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만 듣는 게 아니고 이렇게 이야기 해 놓은 것이 염화실에 올려놓으면 스님들이 듣는 이가 많아.
공부하는 스님들이 특히 와서 듣는다고요.
그러니까 소견을 바로 잡아 주는 거라. 소견을 바로잡아 주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내가 무수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맞는지 한 사람도 이의다는 사람도 없고 따지는 사람도 없어. (웃음)
이 보십시오 여기 이 방편품이 이런 말씀이 참 의미심장하고 깊은 뜻이 있는 거거든요. 손톱으로 이렇게 나뭇잎에다 불상을 그려도 그걸로 다 이미 불도를 이루어 마쳤다. 끝냈다 성불해 마쳤다 해버렸는데 뭐 더 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但化諸菩薩하야
단화제보살(但化諸菩薩)하야 다만 여러 보살들을 교화해서
度脫無量衆이니라
도탈무량중(度脫無量衆)이니라 한량없는 대중들을 도탈케 하니라.
92.若人於塔廟와 寶像及畫像에
약인어탑묘 보상급화상
以華香幡蓋로 敬心而供養커나
이화향번개 경심이공양
若使人作樂호대擊鼓吹角貝하며
약사인작악 격고취각패
簫笛琴箜篌와 琵琶鐃銅鈸과
소적금공후 비파요동발
如是衆妙音으로 盡持以供養하며
여시중묘음 진지이공양
或以歡喜心으로 歌唄頌佛德호대
혹이환희심 가패송불덕
乃至一小音이라도皆已成佛道니라
내지일소음 개이성불도
만약에 어떤 사람이 탑이나 등상불(等像佛)이나 탱화에
꽃과 향과 깃발과 일산으로써 공경 공양하였거나,
또는 남을 시켜 풍악 울리고 북 치고 소라 불고 퉁소와
저와 거문고와 공후와 비파와 징과 요령 등
이러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상에 공양하였거나,
또는 환희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거나,
내지 아주 작은 음성으로 공양하더라도
이러한 이들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若人於塔廟와
약인어탑묘(若人於塔廟)와 만약에 어떤 사람이 탑묘, 부처님 탑입니다. 탑과
寶像及畫像에
보상(寶像) 불상과 그리고 화상(畫像)에 탱화나 이런 것 그런 것에
以華香幡蓋로
이화향번개(以華香幡蓋) 꽃이나 향과 번개 번 이렇게 늘어뜨리는 것이 있어요. 그런 것으로서
敬心而供養커나
공경하는 마음으로 공양을 하거나
若使人作樂호대
약사인작약(若使人作樂)호대 사람을 시켜서 노래를 한 번 부르게 한단 말야. 지가 불러도 좋을테지만 더 잘 부르는 연주가를 부르고 가수를 불러서 노래를 부르게 하되
擊鼓吹角貝하며
격고취각패(擊鼓吹角貝)야 북을 치기도 하고 뭘 불기도 하고 범패도 하기도 하면서
簫笛琴箜篌와
소적금공후(簫笛琴箜篌) 퉁소나 젓대나 금소리나 공후나 이거 전부 악기 이름입니다.
琵琶鐃銅鈸과
비파(琵琶)나 요(鐃) 꽹과리나 동발(銅鈸) 이런 건 방울 바라춤 출 때 하는 것, 그런 것과
如是衆妙音으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미묘한 소리로써
盡持以供養하며
진지이공양( 盡持以供養) 하며 모두 그것을 가지고 공양을 올려. 불상 앞에 그런다 이말이예요. 부처님 앞에가 아니고, 그림이나 불상 앞에서 그렇게 공양하며
或以歡喜心으로
혹이환희심(或以歡喜心)으로 혹 환희하는 마음으로써
歌唄頌佛德호대
가패송불덕(歌唄頌佛德) 노래나 범패로서 불덕을 찬송을 하되
乃至一小音이라도
내지일소음( 乃至一小音)이라도 한마디만 하더라도
皆已成佛道니라
다 이미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니라
찬불가 삼귀의 사홍서원 안부르는 사람 없죠. 소리 내기가 조금 쑥스러워 가지고 조금만 기어들어가는 모기 소리만치만 하더라도 개이성불도니라 해놨어.
여기 그렇게 해놨잖아요. 모기소리만치만 해놔도 개이성불도니라.
차 이봐요. 법화경은 이래서 경전의 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그냥 그대로 부처니까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어. 그러니까 그냥 살아라 이거야.
만약에 뭐가 어떻게 되고 폼을 갖추고 한다면은 못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장애인은 어떻게 하고, 아픈 사람, 늙은 사람, 무식한 사람 어쩌란 말이요.
안되잖아요. 그렇게 불교가 그래되면은, 불교가 그런 가르침이라면 이거 불교 믿을 게 안되잖아. 그렇게 사람 차별하면.
공덕많이 지어야 부처된다. 참선많이 해야 부처된다. 그러면 딴 사람 못하는 사람 어쩌란 말요. 말도 안되는 거예요.
그런 석가모니는 우리 존경할 필요가 없는 거지. 이렇게 가르치니까 존경할만한 거예요.
이렇게 만인평등, 그것도 절대 평등이라. 하나하나가 절대적으로 누구하고도 비교하면 안돼. 비교해서 낮다 높다 하면 안된다고요.
비교해서 낮다 높다 하는 그런 존귀함이 아니라 절대평등, 똑같이 부처로서의 자격과 인격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런 가르침입니다.
아 삼귀의 노래 한 번 안 해본 사람 어딨어. 속으로라도 다 따라 했게지. 이거봐요 일소음(一小音)했잖아요. 우리 중생들의 심리를 잘 안다고요. 속으로 따라하더라도 개이성불도다. 그게 무슨 조건이 됩니까? 안해도 상관없어요.
불교 비난하는 사람도 똑같애. 상관없이 똑같이 부처님이야. 그래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여기(당신은 부처님 책자) 뒤에 있어요.
성철스님, 부처님 오신날 봉축법어
공장에서 일하는 부처님 교회에서 찬송가 부르는 부처님, 법당에서 목탁 치는 부처님, 사람 차별 하지 아니 하고 어느 누구든지간에 똑같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써 이야기를 했잖습니까. 이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제일 불교 공부 많이 한 이가 성철스님이라 그래서 국민선사 그러잖아요. 국민선사.
바로 법화경 사상 그대로예요, 법화경 사상.
그러니까 요런 거 이런 말 이 뜻을 이제 들었으니까 집에서 하나하나 쓰세요. 그리듯이 세발 네발 개발이 되든지 뭐가 되든지간에 (웃음) 하나하나 그려보는 거야.
“내지일소음(乃至一小音)이라도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니라” 얼마나 기분좋습니까? 이런 말. 다 인정해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 다 인정해주는 거예요.
그 어떤 경우의 삶을 살더라도 다 인정해주는 거라.
똑같애요.
서양에는 이제야 그걸 아는가 흑인이 그렇게 성공한 거예요.이제사 아는지.
그 전만 하더라도 한 100년 전만 하더라도 돈 몇 푼 주고 팔고 사고 노예지. 그래 사상이 이렇게 다르다니까.
진짜 성인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런 데서도 잘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소신을 확고하게 해야죠.
그 다음에 또 봐요.
93.若人散亂心으로 乃至以一華를
약인산란심 내지이일화
供養於畫像하면 漸見無數佛하며
공양어화상 점견무수불
或有人禮拜커나 或復但合掌커나
혹유인예배 혹부단합장
乃至擧一手하며 或復小低頭하야
내지거일수 혹부소저두
以此供養像하면 漸見無量佛하야
이차공양상 점견무량불
自成無上道하고 廣度無數衆하야
자성무상도 광도무수중
入無餘涅槃호대 如薪盡火滅이니라
입무여열반 여신진화멸
만약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꽃 한 송이를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무수한 부처님을 친견하느니라.
혹 어떤 사람이 절을 한 번 하거나, 합장만 한 번 하거나,
손만 한 번 들거나, 머리만 조금 숙이어도,
이러한 일로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스스로 최상의 도를 이루고는
무수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기를
마치 나무가 다 타고 불이 꺼지듯 하느니라.
若人散亂心으로
약인산란심(若人散亂心) 으로
乃至以一華를
내지이일화(乃至以一華)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이런 말은
지금 여기도 우리가 이런 소리를 해도 이렇게 신기한 이야기를 해도 온갖 무슨 친구 만날 생각 집에 뭐 하다 말고 해논 무슨 빨래 생각, 온갖 잡동사니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겠어요. 사람은 그래, 다 그렇다고요. 뭐. 혼자 그러는게 아니라
딴 사람도 다 그래요.
아이 말하는 사람도 그런데 뭐, 듣는 사람이야 더 쉽지. (웃음) 듣는 것은 뭐 누가 모르니까 일방적으로 혼자 딴 생각 실컷 해도 표도 안나고 좋아요. 그게 산란심이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내지이일화(乃至以一華)를 꽃 한송이 일화 꽃한송이를
供養於畫像하면
공양어화상(供養於畫像)이라 불상 앞에다 공양을 척 할 것 같으면, 여기 여러 송이 너무 많이 했구만, 한송이만 하라고 했는데 불상에 공양할 것 같으면
漸見無數佛하며
점견무수불(漸見,無數佛)하고, 점점 무수불을 본다 이건 이제 사실 필요없는 소리라. 무수불하며
或有人禮拜커나
혹유인예배(或有人禮拜)커나 혹 어떤 사람이 예배하거나
或復但合掌커나
혹부단합장(或復但合掌)커나 뭐 절하기 싫으면 합장만 해도 돼, 안 해도 돼, 또 여기는 합장만 하거나.
乃至擧一手하며
내지거일수(乃至擧一手)라 손만 뻐쩍 드는 거야. 뭐 지 친군가? 손한 번 뻐쩍 들고 부처님을 보고 손 한 번 뻐쩍들고, 그렇게 하며
或復小低頭하야
혹부소저두(或復小低頭) 고개 까딱하는 거야. 소저두라는 건 고개 까딱하는 거야.
꼭 한국사람은 고개 까딱해 어디 저 티브이나 이런 데 나오면 일본사람들은 허리까지 팍 이렇게 숙여. 이왕하면 허리까지 숙이면 좀 좋아. 뭐 이렇게 소개할 때 자기 이름 소개할 때 고개만 까딱하고 그것도 안하는 사람들도 있어 마 그렇게 해도 좋다는 거지. 혹부소저두 하며
以此供養像하면
이차공양상(以此供養像)하면 이것으로써 불상에다가 공양할 것 같으면은
漸見無量佛하야
점견무량불(漸見無量佛)해서 점점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해서
自成無上道하고
자성무상도(自成無上道)하고 스스로 무상도를 최상의 도를 이루고
廣度無數衆하야
광도무수중(廣度無數衆) 널리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해서
入無餘涅槃호대
입무여열반(入無餘涅槃)하되 무여열반에 들어가되
如薪盡火滅이니라
여신진화멸(如薪盡火滅) 마치 나무가 다 타고 그리고는 불이 꺼져서 불마저 싸늘하게 식어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열반에 들 것이다.
흔히 하는 말에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이런 말이 있어요.
사실 처처 불상이고 처처 부처님이지. 곳곳이 부처님이고 사람사람이 다 부처님이고 부처님이니까 하는 일마다 다 불공이지. 하는 일마다 다 불사(佛事)야.
뭘 하더라도. 걸어가도 불사요, 앉아도 불사요, 잠을 자도 불사입니다.
부처가 하는 일이니까 부처의 일이지. 부처님이 하는 일은 밥 먹는 일만 부처님이 하는 일이 아니라 똥 누는 일도 부처님 일이야.
그래서 내가 이제
이렇게만 알면은 좀 부족하고 그래서 자기자신을 위시해서 모든 인간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이해하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무궁무진한 능력과 그 어떤 영원한 생명 그래서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요렇게 줄여서 표현해요.
내 생명이 그대로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이다 한 그러한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이해해 주는 것
그러면 뭐 모든 가족들이 서로서로 그렇게 이해해 주고 받들어 섬긴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아무 문제없죠.
그 행복의 지름길이야. 행복의 열쇠가 이것 뿐이라고요.
한 가정이 그렇고 이웃과의 관계가 그렇고
한나라가 그렇고 온 세계 인류가 다 그렇게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면은
그거 뭐 석유 빼앗기 위해서 가서 전쟁 일으키고 구둣발로 얻어터지고 그렇게 안 할 거 아냐. 참 거.
그러니까 끝도 없는 욕심만 부리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고 인간의 이해가 없으니까 존중할 줄 모르는 거지.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거야. 사람 존중하는 이 운동이 가정에서부터 차츰차츰 확산되어 가지고서 온세계에 확산되면 그게 행복의 열쇠입니다. 행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것은 아니예요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이게 참다운 이치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이러한 참다운 이치를 제대로 알아서 우리가 실행에 옮기면은 그대로 행복이 따라와 행복은 절로 따라오게 된다고요. 우리가 참다운 이치를 이해못하고 이치하고 위배되게 역리로 그렇게 행동하니까 문제가 생기고 거기에 고통이 따르게 되는 거지.
그래서 이게 진리라고 하는 것이 첫째 중요하고 또 그 진리는 그대로 이고득락(離苦得樂) 모든 문제와 고통을 떠나서 낙을 얻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94.若人散亂心으로 入於塔廟中하야
약인산란심 입어탑묘중
一稱南無佛하면 皆已成佛道니라
일칭나무불 개이성불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 한 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若人散亂心으로
약인산란심(若人散亂心)으로 산란심 또나오네. 전부가 중생세상이니까 전부 똑같으니까. 누구할 것 없이 다 산란심 가지고 있어요. 저 뭐 선방에 앉아서 화두들고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산란심없는 줄 알죠. 제일 많아요.
제일 많아.
우리는 그래도 책에라도 이래 눈을 팔고 읽고 뜻이라도 좋아서 따라가지. 그래도 가끔 산란심 끼어드는 데 망상이 끼어드는데 앉아서 가만히 있으면 화두에 별로 의심도 없죠. 솔직하게 별로 의심도 없어요.
개가 불성이 있다 없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그건 개의 일이지. (웃음) 의심이 안 가지는 거야 이게. 의심이 안 가져요.
이뭣고, 이뭣고 염불만 이뭣고 이뭣고 하지 정말 마음으로 ‘아 뭘까’ 해가지고 정말 빠져들어 가가지고 그게 정말 궁금해가지고 빠져들어가서 일심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어요. 만약에 있으면은 프로가 이 천 명이 넘고 아마추어는 한 만명이 넘어. 지금 결제중이잖아요. 여기 오늘 선방에만 해도 7-800명이 와가지고 매일 참선하고 있잖아요. 무슨 터지는 소식이 들렸을 거야.
아니잖아요. 그냥 그것이 좋아서 그 단체에서 그렇게 어울려가지고 그렇게 하는 게 좋아서 할 뿐이야. 답이 없어. 본래 답이 없는 일을 하는 거야.
어떤 결과도 없습니다.
아니 아마추어는 그냥 두고 프로들도 수 년을 수 십년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쪼아봤자 다른 답이 없어요. 거기서 만약 무슨 답이 나온다면 답이 벌써 나왔을 거 아니요. 벌써 나와서 무슨 소식이 있었을거 아니요.
아니잖아요, 아니라니까.
그건 그냥 그런 삶이예요. 좋거든 그 삶도. 깨끗하게 탈속하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간결하고 참 좋잖아요. 마치 동양화의 한 폭 같이 참 간결하고 소박하고 깨끗하게 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고 그 생활이 좋은 사람들이 그렇게 어울려서 사는 거야. 그거지 딴 거 아니예요. 이미 부천데 뭐 더 이상 더 답을 찾아. 답 찾을 곳이 아니야.
거기서 해답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알아야 돼.
그래 산란심이라는 이게 그냥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누구없이 산란심 가지고 있는 거야. 산란심으로
入於塔廟中하야
입어탑묘중(入於塔廟中)하야 탑묘 가운데 들어가 가지고
一稱南無佛하면
일칭나무불(一稱南無佛), 한 번 “나무불” 하는 거야. “아미타바” 이렇게 한다든지
皆已成佛道니라
그렇게 한 번 할 것 같으면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 중국사람들은 인사가 아미타바 하더만, 아미타바 그렇게 한 번만 하면 다 이미 불도를 이뤘다 했는데 그게 무슨 성불의 조건이 됩니까? 성불에는 조건이 없다.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다.
이건 억 만 번을 부르짖어도 지나치지 않는 운동입니다.
일칭나무불 하면 개이성불도니라.
산란심으로 망상 부글부글 끓고 온갖 마음속에는 시기 질투 음해 모략이 꽉 차 있는 그런 마음으로라도 나무불 하고 관세음보살 나무불만 좋나 어데 관세음보살도 좋고 상관없어요.
그런 소리인데 그게 무슨 성불의 조건이 되느냐 이 말이예요. 내말은. 성불의 조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래의 부처라는 뜻을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95.於諸過去佛의 在世或滅後에
어제과거불 재세혹멸후
若有聞是法하면 皆已成佛道니라
약유문시법 개이성불도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들이
혹 생존해 계실 때나 열반에 드신 뒤에
이러한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於諸過去佛의
어제과거불(於諸過去佛)의 모든 과거 부처님의
在世或滅後에
재세혹멸후(在世或滅後)에 세상에 계실 때나 아니면은 열반에 든 뒤에 혹멸후에 열반에 든 뒤에
若有聞是法하면
약유문시법(若有聞是法)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이 가르침을 들을 것 같으면은
皆已成佛道니라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니라. 다 이미 불도를 이뤘다. 지금 요거는 우리가 여기에 해당돼요.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이 소리를 누가 나중에라도 듣게 될 것 같으면 그것으로써 개이성불도니라. 못들어도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어.
우리는 다만 이런 말을 듣는 것과 듣지 못하는 그 차이는 그런 줄 아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 차이입니다.
그래도 뭐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도대체가 그야말로 차돌을 물 속에다 아무리 오래 담궈 놔도 겉만 젖지, 들어내면 금방 말라버려. 속에는 일밀리도 스며들지가 않아.
그런데 영혼이 제대로 순화되고 또 우리가 자꾸 이렇게 이런 시간을 갖다보면은 마치 우리 마음은 잘 가꿔진 옥토와 같아서 물을 부으면 쑥쑥 스며들어버려.
그러면 그렇지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계속 무릎치고 계속 고개 끄떡거리고 맞다맞다맞다 하고 계속 그렇게 되는 거지.
그건 마치 우리가 이런 데 인연이 익숙해져 놓으면은 그야말로 흙에다가 물을 붓는 거와 같아가지고 물이 쑥쑥 스며들어 버리죠. 법문이 이러한 이치가 쑥쑥 스며들으면서 끊임없이 고개 끄덕거리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미래불장인데
96.未來諸世尊이 其數無有量이라
미래제세존 기수무유량
是諸如來等이 亦方便說法하리니
시제여래등 역방편설법
오는 세상의 여러 세존들 그 수효 한량이 없어
이 모든 여래들도 또한 방편으로 설법하시고,
未來諸世尊이
미래제세존(未來諸世尊)도
其數無有量이라
기수무유량(其數無有量)이라 앞으로 올 부처님도 그 숫자가 한량이 없어. 똑같죠 뭐. 그야 뭐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그 숫자가 한량이 없는 거죠.
是諸如來等이
시제여래등(是諸如來等)이 모든 여래들이
亦方便說法하리니
역방편설법(亦方便說法)하리니 또한 방편으로 설을 하리니
97. 一切諸如來- 以無量方便으로
일체제여래 이무량방편
度脫諸衆生하야 入佛無漏智케하나니
도탈제중생 입불무루지
若有聞法者는 無一不成佛하리라
약유문법자 무일불성불
일체 모든 여래께서도 한량없는 방편으로 설법하여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무루(無漏) 지혜에 들어가게 하느니라.
만약 이러한 법을 들은 이들은
누구도 성불하지 못할 이가 없느니라.
一切諸如來-
일체제여래( 一切諸如來)가
以無量方便으로
이무량방편(以無量方便)으로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度脫諸衆生하야
도탈제중생(度脫諸衆生)하야 여러 중생들을 제도해서 도탈해서
入佛無漏智케하나니
입불무루지(入佛無漏智)케 하나니 부처님의 무루지, 부처의 샘이 없는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 하나니
若有聞法者는
약유문법자(若有聞法者)가 만일 어떤 이가 법을 듣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無一不成佛하리라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하리라 한사람도 성불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 법문 들을 것 같으면 누구도 성불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랬어요.
그럼 요 경전이 성립될 때를 기준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지금이 우리가 미래의 사람들이예요. 미래에 해당되는 거라. 그러면은 이게 또 이 법문을 들을 것 같으면은 무일불성불 한사람도 성불하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으니까 다 우리도 성불했다 이 말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우리가 빠져 나갈라고 발버둥 쳐봐야 빠져나갈 수가 없어. 저 앞에 과거 부처님에서 이야기나 미래부처님 뜻에서이야기나 똑같아요.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개 절래절래 흔들고 나는 부처님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렇게 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는 그런 입장이 하나의 제법실상이고 진리인 것이고 또 사실인 것입니다.
98.諸佛本誓願은 我所行佛道를
제불본서원 아소행불도
普欲令衆生으로 亦同得此道니라
보욕령중생 역동득차도
모든 부처님들의 근본 서원은
내가 행하는 부처님의 도(道)를
똑같이 여러 중생들에게
이 도를 얻게 하는 것이니라.
諸佛本誓願은
제불본서원 (諸佛本誓願)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의 서원은
我所行佛道를
아소행불도 (我所行佛道)를 내가 행한 바 불도를
普欲令衆生으로
보욕용중생(普欲令衆生)으로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亦同得此道니라
역동득차도(亦同得此道) 또한 이 도리를 다 같이 얻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의 서원이다 그랬어요.
세상에서도 사업을 잘 해 갖고 성가를 한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어떻게 하더라도 이 성공을 잘 수성(守成) 잘 지켜 나가도록 바라는 마음이 있듯이 부처님도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나서, 사람들이 다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모든 중생들에게 결국은 이 이치를 다 얻도록 알도록 하는 것 이게 부처님의 본래의 소원이다. 서원이다 그랬어요. 본서원(本誓願)이게 부처님 원력이예요.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99.未來世諸佛이 雖說百千億
미래세제불 수설백천억
無數諸法門이나 其實爲一乘이니라.
무수제법문 기실위일승
오는 세상의 모든 부처님들이
비록 백 천 억의 무수한 법문을 설하더라도
그 진실은 오직 일불승(一佛乘)을 위한 것뿐이니라.
未來世諸佛이
미래세제불(未來世諸佛)이 미래세 모든 부처님이
雖說百千億
수설백천억(雖說百千億) 비록 백 가지나 되고 천 가지나 되고 억 가지나 되는
無數諸法門이나
무수제법문(無數諸法門) 무수한 여러 가지 법문들을 비록 설하기는 하지만은
其實爲一乘이니라.
기실위일승(其實爲一乘)이다, 실은 일승(一乘)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뭐 ‘등 달면 좋다’ ‘뭐 하면 좋다.’ ‘동지 뭐하면 좋다’ ‘천도 하면 좋다’ 별별 방편을 다 늘어놨지만은 궁극에 가서는 “부처라고 하는 이 사실” “일승, 일불승” 이것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방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어떤 방편의 이야기도 팔만 사천 방편문 그랬잖아요.
그리고 온갖 그런 법문도 결국은 기실위일승(其實爲一乘) 그랬잖아요. 기실은 우리도 잘 쓰는 소리지. 기실은 일승을 위한 것이다.
일승은 뭐예요? 당신은 부처님,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다. 이말입니다.
100. 諸佛兩足尊이 知法常無性이언만은
제불양족존 지법상무성
佛種從緣起일새 是故說一乘하시나니
불종종연기 시고설일승
是法住法位하며 世間相常住하니
시법주법위 세간상상주
於道場知已하고 導師方便說이니라
어도량지이 도사방편설
부처님 양족존(兩足尊)께서
법은 항상 일정한 성품이 없음을 알지만
부처님의 종자는 인연으로부터 생기므로
일불승을 설하느니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양이 항상 있음을 보리도량에서 이미 알았지마는
도사께서 방편으로 설할 뿐이니라.
諸佛兩足尊이
제불양족존(諸佛兩足尊)은 모든 부처님 두 가지가 만족한 세존 양족존은
知法常無性이언만은
지법상무성(知法常無性)이건만은 법이 언제나 성품이 없다. 공성(空性)이다, 공이다 이말이야. 어떤 독특한 자성이 없는 줄을 알건만은
佛種從緣起일새
불종종연기(佛種從緣起) 불종(佛種) 부처님의 종자는 연기(緣起)로 쫓아 일어난다. 불종은 연기로 쫓아 일어난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공(空)이야, 무성(無性)이야.
모든 법은 다 무성이고 무성이라는 것은 어떤 실다운 개체로서의 어떤 성품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라는 뜻이죠.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있느냐? 우리가 부처라 하더라도. 전부 연기로 쫓아 일어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석가모니를 부처라 하더라도 아니면 지금까지 법화경에서 설해 온 모든 사람이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실도 결국은 뭐예요? 이러한 인연을 통해서 인식되어지고, 그래서 당당하게 자신감있게 마음 탁 놓고 성질 부리게 되면 좀 부리고 그렇게 사는 거야.그거 크게 죄책감 갖지 않고 마음 탁 놓고
그건 뭐 옛날 도인들은 보면요 자기 타고난 성질을 하나도 못버려요. 도인들은 그러면 그런 개인 타고난 성질이 없을 것 같으면 전부 두루뭉실이고 똑같을 줄 알죠? 천만에 그 색깔과 그 개성이 너무너무 뚜렷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그냥 이렇게 적당히 지낼 때는 다 좋죠. 다 용납하고 그렇지만은 어떤 상황이 되면 자기 개성, 자기 독특한 고집이라든지 성격이 탁 나타나잖아요. 살다보면 나타나거든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도인들도 똑같애요. 도인들도 법문하는 거라든지 생활하는 거는 너무 개성이 뚜렷해요. 그 고집이 다 있다고요. 그 성질, 그 고집이 다 있는 거야. 두루뭉실이 아니라고요.두루뭉실이 되나요? 생각해 보면 그게 안 맞는 거지.
그런데 그것은 다 각자의 자기 인연에 의해서 종연기 연기로 쫓아서 연으로 쫓아서 일어난 것이다. 현상은 전부 본래 본체는 공한데 현상은 전부 인연에 의해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거야. 도인들이 각자 성격이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르고 생활이 다른 것도 전부 각자 자기 인연이 달라.
그 인연으로 부터서 그런 생활을 보여주는 것이죠.
석가모니는 석가모니대로 그 인연따라 그렇게 살았고, 육조스님은 육조스님대로 달마스님은 달마스님대로 임제스님은 임제스님대로 전부 각자 자기 인연에 맞춰서 인연을 따라가면서 그렇게 그 삶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불종종연기(佛種從緣起) 인연으로 부터서 일어났다. 이걸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 “마음의 원리”도 첫 손가락 꼽아야 할 중요한 것이고 “연기의 원리”를 깨달은 것도 이것도 정말 참으로 값진 가르침입니다. 어떤 다른 종교, 다른 철학에서는 이런 연기의 도리를 이야기 하지 않거든요. 불교만이 이야기 하는 거야.
그래 모든 것은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이 인연에 의해서 연기에 의해서 이렇게 존재한다 라고 하는 그런 깨달음과 거기에 대한 가르침인데 이 꽃은 왜 이렇게 어떤 것은 붉고 어떤 것은 희냐? 이것도 전부 우리가 세세하게 몰라서 그렇지 자기들 나름대로 전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럴만한 조건이 거기 개재돼서 이 붉은 것은 붉은 거야.
그래 붉다가 왜 나중에는 희어지냐? 그것도 세월이 가면서, 세월이라고 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인연이 거기에 개재되기 때문에 그래서 변색이 또 되는 거죠.
전부 그런 인연이 있고, 조건에 의해서 그렇게 현상이 차별하게 벌어진다 라고 보는 것 이것도 대단한 발견입니다. 불교에 있어서의 아주 큰 발견이예요.
마음의 위대함을 발견한 것 하고 이 현상이 연기로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것하고 이것이 아주 불교에서 양대 산맥이라고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법화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간혹 나옵니다.
是故說一乘하시나니
시고설일승(是故說一乘)하시니 그런 까닭에 일승을 설하시니라. 그러니까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본래 부처이지만은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비로소 부처인줄을 알고 훨씬 더 마음 편하게 당당하게 또 자기 발전을 한껏 누리면서 그렇게 사는 길이 열리는 거죠.
이런 인연을 우리가 만나지 못하면은 그저 못난 중생 아주 뭐 업이 많고 죄업이 많고 업장이 많은 그런 중생으로만 자꾸 생각을 하면 그런 인간이 돼 버려요.
그런데 법화경이 좋은 점은 본래 부처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가르침으로 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동안 불교를 모를 때 내가 생각했던 거라든지 살았던 것은 그만 무시해 버리고 지금부터라도 정말 희망과 원력을 가지고 당당하게 힘차게 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거예요. 그게 좋은 겁니다. 그게 좋은 거예요.
생기넘치게 꿈과 희망을 잔뜩 가지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거예요. “아이 나도 부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무얼 못하겠는가?”
그동안 뭐, 집에서 이웃에서 누가 나를 인정 안해주더라도 아 부처님은 나를 인정해 줬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또 내용이 알고 보면 맞는 거고.
부처님이 인정한 게 뭐 무슨 격려 차원에서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만인에게 절대적으로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거죠. 절대 꿇릴 거 없고, 주저주저 할 게 없고, 정말 당당하게 무량공덕 생명을 가졌다 이렇게 확신을 해야 됩니다.
확신하면 그걸로 끝이예요. 사실은.
그래서 열반경에도 보면 광액도아라고 하는 소 잡던 백정이 어느 순간 맨날 소만 잡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한생각 탁 돌이켰어. 한생각 돌이키고는 칼을 탁 도마에 꼽으면서 나도 천불(千佛)의 일수(一數)다. 나도 부처다 말이야.
이런 이야기가 열반경에도 나와있어요.
그래서 선사스님들이 그 법문을 많이 인용합니다.
아주 많이 인용해요.
열반회상(涅槃會上)에 광액도아(廣額屠兒)가 방하도도(放下屠刀)하고 소잡던 칼을 집어 던지면셔 창언아시천불일수(唱言我是千佛一數)다 크게 부르짖기를 나도 천 부처님의 한 사람이다. 라고 이렇게 큰 소리를 당당하게 친 것은 바로 믿어 들어갔기 때문에 "사람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바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용을 해요.
보십시오. 경전의 그런 이야기라든지 그 다음에 육조스님 사례라든지 이런 것을, 무엇을 보더라도 우리 인간은 정말 위대한 존재예요. 달리 다른 것 없다니까.
뭘 닦아야 되고 무슨 공덕을 지어야 되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다음에 유명한 말인데
是法住法位하며 世間相常住하니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
이 법이 법의 위치에 머물러서 세간 상에 상주한다.
모든 것이 불생불멸이다 라고 하는 그런 이치도 이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於道場知已하고
어도량지이(於道場知已)하나 도량에서 이건 보리수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도량하면 언제든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곳”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이런 법당도 도량이 되는 거야. 우리가 이렇게 공부함으로 해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되니까 그런말입니다.
도량에서 지이(知已) 알자마자. 알고나선, 깨닫자 바로 안 일이지만 그런 말이예요.
導師方便說이니라
도사방편설(導師方便說)이니라 도사께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본래 안 일이지만, 본래 그러한 사실이지만은 도사가 방편으로 이런 저런 허망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무상하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고 별별 이야기를 설하게 된 거죠. 사실은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이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변함이 없는 것이고 불생불멸의 이치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걸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내 인격이 되고 이것이 내 살림살이가 되고 이러한 위대한 가르침이 내 것화 되고 정말 내 마음에 가슴에 무르녹게 할려면은 좀 공을 들여야 돼요.
읽어야 되고 써야 돼요. 쓰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읽는 것 보다. 한 자 한 자 아무리 쓰기 어렵더라도 한 자 한 자 이렇게 쓰고. 번역한 거 다 나눠드렸잖아요.
번역한 거 보고 대조해가면서도 쓰고 아니면 번역한 걸 쓰기도 하고, 어떤 보살님들은 또 영문으로 써온 분도 있대? 영문으로도 한 번 쓸 수 있는 분들은 또 쓰고.
뭘 써도 상관없어요. 번역도 좋고 한문으로 좋고 영문으로 좋고 뭘 써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이 뜻이 우리 마음에 무르녹게 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그런 어떤 공을 들임으로 해서 정말 차돌같이 굳어있던 내 영혼이 차츰차츰 부들부들하게 녹아서 이런 말들이 쑥쑥 몸에 배어들어가고 결국은 내 인격이 되고 나의 생활화가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오늘 법화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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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乃至一小音(내지일소음)이라도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니라.ㅡ 한마디만 하더라도 다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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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에는 조건이 없다.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다. ... _()_
諸佛本誓願은 我所行佛道를 普欲令衆生으로 亦同得此道니라..내가 행하는 부처님의 도(道)를 똑같이 여러 중생들에게 이 도를 얻게 하는 것이니라. .고맙습니다._()()()_
.............皆已成佛道...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_()()()_
皆已成佛道...........고맙습니다.. 慧明華 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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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處佛像/ 事事佛供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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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나무묘법연화경-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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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實爲一乘.........
ㅎㅎㅎ (오늘 공부가 즐거워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
皆已成佛道
;불상을 그리는 사람
;불상을 그리도록 시키는 사람
;장난으로 불상을 그린 아이
;불상 탱화에 공양올린 사람
;음악,음성으로 공양한 사람
;산란한 마음으로 꽃 한송이 올린 사람
;절 한 번 한 사람
;합장 한 번 한 사람
;손 한 번 든 사람
;머리 약간 숙인 사람
;산란한 마음으로 탑묘에 들어가서 나무불 한 번 한 사람
;법화경 법문을 들은 사람
諸佛本誓願 我所行佛道 普欲令衆生 亦同得此道 ...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2번째 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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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묘법연화경 _()_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