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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대홍수 후 이건한 현재의 죽유종택(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오른쪽 건물이 사당이고, 왼쪽 건물은 사랑채다. 이건 전의 죽유종택(쌍림면 매촌리)은 죽유 아들이 처음 건립했다. |
죽유(竹) 오운(1540∼1617)은 조선 중기 문신(文臣)이자 학자였다. 그는 다른 선비들과 달리 당대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과 남명(南冥) 조식, 두 선생의 문하에 동시에 출입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취하며 자신의 학문을 형성했던 인물이다. 그는 또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전란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고, 지식인들이 중국만 숭상하던 분위기에서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 오랜 기간 공을 들여 역저 ‘동사찬요(東史纂要)’를 편찬·간행하기도 했다.‘죽유는 평생 아래의 아전들과 귀를 대고 말한 적이 없다. 이 점이 다른 사람들이 미치기 어려운 점이다. 또 자기를 굽혀서 귀한 사람을 받들지 않았다. 아첨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더럽히지도 않았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 죽유를 가까이서 보아왔던 선비의 평이다. |
임금이 죽유에게 하사한 서적 ‘대학’. 가려진 부분에 죽유 이름이 쓰여져 있다. |
◆퇴계와 남명, 양대 석학의 가르침 받아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의령으로 이거해 살았고 만년에는 경북 영주로 옮겨 머물던 죽유는 19세 때 남명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고, 25세 때는 퇴계의 제자가 되었다. 남명의 제자가 먼저 된 것으로 전하나, 죽유에게 퇴계는 처고모부이고 조모의 종제이므로 어릴 적부터 퇴계에 대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죽유가 영향을 받은 것도 퇴계가 먼저일 것으로 보고 있다.죽유는 퇴계와 남명 양문을 출입했지만, 학문적으로는 퇴계의 영향을 더 받았다. 이급(李級)이 ‘죽유집’ 서문에서 죽유에 대해 ‘뇌룡정 앞에서 출발해 암서헌 마당에서 졸업했다’고 표현했듯이, 학문의 입문은 남명에게 해서 최종적으로 퇴계에게서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죽유는 퇴계를 존숭(尊崇)하여 “그 도덕과 문장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아 이 세상의 모범이다. 주자 이후 제일인자”라고 했다. 퇴계와 남명 양문을 출입한 제자들은 대부분 시간적 차이를 두고 양문을 출입했던 데 비해, 죽유는 청년시절부터 두 사람이 별세할 때까지 계속 출입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이 죽유에게 내린 사제문(賜祭文)에서 ‘도학은 퇴계를 존모하고 학문은 남명을 으뜸으로 삼았다(道慕退陶 學宗山海)’고 했다. 죽유의 학문적 성격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죽유의 제자이자 사위인 조형도(趙亨道)는 ‘산해의 마루에 오르고 퇴계의 방에 들어갔다(升山海堂 入退溪室)’고 표현했다. 죽유는 이처럼 두 석학의 학문적 훈도 속에서 남다른 학자로 성장해 큰 성취를 얻었다.죽유가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절조를 지켜 물러나기를 좋아하고 주자학을 중시하며 저술을 많이 한 점은 퇴계의 영향이었고,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벼슬살이를 탐탁잖게 여기며 국난을 당해 창의했다는 점 등은 남명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볼 수 있다.죽유는 양문을 출입하면서 문하의 많은 제자들과 사귀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 한강(寒岡) 정구, 서애(西厓) 류성룡, 소고(嘯皐) 박승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등은 대표적 인물이다.◆새로운 지평의 역사서 ‘동사찬요’ 저술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죽유는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를 절충한 동사찬요를 저술, 생전에 간행했다.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을 참고해 단군부터 고려 공양왕까지 우리나라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죽유는 영주에서 은거생활 중이던 1606년 67세의 나이에 동사찬요를 저술했다. 죽유는 처음에는 7권으로 엮었으며, 서애 류성룡이 이를 보고 크게 찬탄하고는 한 본(本)을 선조에게 봉진했다. 선조는 유림의 표준이 될 만하다는 하교를 내렸다.이 동사찬요의 출현으로 한백겸이 ‘동국지리지’라는 역사지리서를 저술하게 되었던 만큼, 동사찬요의 편찬(編纂)과 개찬(改纂)은 우리나라 학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수정·보완한 개찬본 완성은 75세 때인 1614년의 일이다. 한백겸은 ‘동사찬요’를 정독한 뒤 “죽유의 사서 저작이 사체(史體)를 얻었다”고 칭찬했다. 죽유가 동사찬요를 저술하게 된 동기는 우선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역사는 잘 알면서 우리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잘 모르는 풍조를 바로잡고, 옛 사실을 밝혀 당시의 일을 해석하는데 거울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인물들을 명신과 반흉 등으로 구분해 권선징악을 도모하려했고, 또한 그 당시까지 나와 있던 사서의 문제점을 시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특히 이 책 가운데 ‘지리지(地理志)’는 고대 인문지리서로 가치가 크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중 ‘지리지’는 신라 위주로 된 한계가 있는데, 이를 극복해 삼국의 지리지를 따로 편찬했다. 그리고 당시 지명을 중국식 지명이 아니라 원래 군현의 명칭 그대로 편찬했다. 이는 고구려가 통치했던 요동지방을 우리 영토로 인식한, 새로운 발상이라 할 수 있다.이 책은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여러 번 관련 내용을 수정하고 보충해 나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수정본을 통해 단군이나 기자의 강역을 확대하거나 그 위상을 높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의 ‘동사찬요’ 편찬은 역사를 통해 도학적 삶의 기준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죽유는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그는 왕희지의 글씨를 배웠는데, 특히 초서에 능했다. 최흥벽(崔興璧)은 죽유 글씨에 대해 ‘수경(瘦勁)이 고고(高古)하여 마치 키 큰 소나무나 늙은 회나무가 껍질은 다 벗겨지고 뼈만 남은 것 같다(瘦勁高古 如長松老檜 皮盡而骨露)’고 평했다.◆망우당 곽재우를 도우며 임란 의병활동 임란 발발 이후 최초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망우당 곽재우가 초반에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병사 조대곤에게 토적(討賊)으로 몰리면서 휘하의 장병들이 다 흩어져버렸다. 망우당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한때 모두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지내려고 했다. 이 때 망우당이 의령 가례(嘉禮) 마을을 지나다가 죽유를 만나게 되었다. 죽유는 망우당이 창의한 일을 칭찬하며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의 전투용 말과 노비 8명을 내어 주었다. 죽유는 인근 마을의 선비들에게 권유해 장정들을 내놓게 하고는 망우당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자신은 망우당 밑에서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아 의병활동을 도왔다.그 당시까지만 해도 망우당은 향촌의 선비에 불과했지만, 죽유는 이미 정3품까지 오른 고관이었고 나이도 12세나 더 많았다. 그런데도 그 휘하에서 수병장(收兵將)을 맡아 망우당을 도운 점은 죽유의 인격을 잘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처가의 재산까지 동원해 의병활동을 도왔다.또 학봉 김성일이 의령에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해 왔으나, 안동 출신이라 의령 지역의 사족들과 유대관계도 없고 지리에도 어두웠다. 죽유는 이처럼 지역 사정에 생소하던 학봉을 도와 지역의 사족들과 연계시켜주고 지리적 상황을 안내하며 초유사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죽유는 다시 호남을 공격하던 왜적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을 곳곳에서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고, 도원수 권율이 이런 사실에 대해 포상할 것을 요청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기도 했다.죽유는 1600년 이후에는 영주에 머물면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했다. 영주는 장인의 전장(田莊)이 있던 곳으로, 그는 장인의 재산을 상속받아 별장을 마련해 두었다. 영주에 머물며 ‘퇴계집’을 편찬한 데 이어, 진성이씨 족보인 ‘도산보(陶山譜)’의 편찬을 주도하며 서문을 쓰기도 했다. |
현 종손의 증조모가 아이를 물살에 떠내려 보내며 지킨 죽유 신주 감실. |
■‘죽유 불천위’이야기종부가 목숨 걸고 지킨 감실보물급 문화재로 보존돼 와죽유 불천위 신주에는 가슴 아픈 일화가 서려 있다. 현재 죽유종택은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야산 아래에 있다. 이 죽유종택은 독립만세운동을 모의한 곳이고, 6·25전쟁 때는 북한 인민군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종택은 1920년 대홍수 때 이건한 것으로, 그 전에는 현 종택에서 조금 떨어진 쌍림면 매촌리에 있었다.당시 수해 때 죽유 15세 종손인 오용원씨(1965년생)의 증조모가 아기를 업은 채 불천위 신주 감실을 안고 마을 앞 송림천을 건너게 된다. 하지만 거친 물살을 헤치며 내를 건너다 아기와 신주를 모신 감실을 다 지키지는 못한다. 결국 아기는 물살에 떠내려가버리게 되고 감실만 안고 건너게 되었다. 죽유 불천위 신주와 감실은 이처럼 종부가 목숨 걸고 지킨 덕분에 홍수 후 이건한 지금의 죽유종택 사당에 다시 봉안될 수 있었다. 죽유 신주 감실은 매우 정교하고 훌륭해 보물급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이 감실은 10여년 전에 유물관에 보관하고, 새로 모조품을 만들어 대체했다. 죽유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3월3일)는 기일 초저녁에 지낸다. 3년 전 종손이 종회를 열어 문중 어른을 설득해 변경했다. 종손은 “제사를 마치면 밤 10시경이 되는데, 참석한 제관들이 모두 귀가할 수 있는 시간이라 시간 변경 후 참석하는 제관이 많이 늘어나게 됐다”고 말했다.종손은 불천위 제사를 공개적으로 진행해 일반인들도 체험할 수 있게 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소재지: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 101번지
■ 오운 약력
△1540년 함안 출생 △1566년 문과 급제 △1580년 성균관 전적, 정선군수 △1588년 성균관 사성 △1593년 상주목사 △1595년 합천군수 △1611년 주자문록(朱子文錄) 완성 △1614년 동사찬요 개찬 △1617년 영주에서 별세
죽유 오운묘소-영주 조암동 소재
함안(咸安)에 자리 잡은 고창 오씨(高敞吳氏).
고창(高敞) 오씨가 이곳 영주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것은 선조때 진사(進士), 문과(文科)로 임진왜란에 공헌하고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낸 죽유(竹牖) 오운(吳澐, 1540 ~1617)에서 비롯된다.
고려 문종(文宗)때 한림태학사(翰林太學士) 오학린(吳學麟: 최충의 문인)을 시조로 하는 고창 오씨는 고려이래로 벼슬을 이어왔으니, 거세(巨世)가 민부상서(民部尙書), 그 아들 계유(季儒)가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지고, 손자 육화(六和)가 조선 초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육화의 아들 엄(淹)이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 오엄의 아들 오영(吳榮)은 나주 판관(羅州判官)을 지냈으니 그가 바로 오운의 고조이다.
오운의 증조 오석복(吳碩福)은 중종 대의 원종공신으로 직산 전의(稷山全義)와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역임하였는데, 말년에는 함안 모곡리에 퇴거하여 이황·주세붕 등과 더불어 종유(從遊)하였으며 당대에 시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사후에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오운의 조부 오언의(吳彦毅)는 이황의 숙부였던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사위이면서 그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전의 현감(全義縣監)을 지냈으며, 사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兼 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이로 볼 때 중종·명종 대에 이르러 오운의 선대는 이미 영남사림파에 속했던 것 같다.
오운의 아버지 오수정은 벼슬을 지내지 않았으나 사후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 吏曹參判兼 同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오운의 어머니는 순흥안씨 부호군(副護軍) 안관의 딸로 고려시대 말 유명한 성리학자였던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후손이기도 하다.
죽유가 영주에 입향하게 된것은 영천(榮川) 허사렴(許士廉, 퇴계의 처남)의 사위로,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만나 그 가족이 처가 고장인 영천(榮川, 영주)에 피란해 있다가 그대로 눌러 살게 된 것이다.
오육화-예의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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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엄-숙천도호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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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나주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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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복-의령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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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의-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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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정-숙릉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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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경주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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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여은(홍문관응교) 오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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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