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10:00~14:00 사이에 서초동 소재 외교센터 12층 포에버리더스에서 2011년도 저희 연구소 학술대회를 가졌습니다. 동기생 등 약 90여명이 참여하여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여기에 학술대회 발표내용과 당일 촬영한 사진을 몇 장 싣습니다.
학술대회 식순 <Program of the Seminar>
제 1 부 등 록 및 개 회 사 Registration & Opening Address
▶ 09:30-10:00 등록 및 상호 인사 Registration & Greetings ▶ 10:00-10:05 연구소장 인사말 및 개회사 Welcome & Opening Address by Dr. Lee Jae-Hyung (President of the IEAPS)
제 2 부 세 미 나 (Forum) ◉ 사회: 방영준 성신여대 교수 ◎ Panel Coordinator: Professor Bang Young-Joon (Sungshin Women's University) ▶ 10:10-10:40 일본에서의 한류: 현상과 전망 Hallyu in Japan (Present and Future) 발표: 세종대학교 호사카 유지 교수 ◊ Presenter : Professor Hosaka Yuji (Sejong University) ▶ 10:40-11:10 한국에서의 일본문화: 현상과 전망 Japanese Culture in Korea (Present and Future) 발표: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용구 교수 ◊ Presenter : Professor Park Yong-Gu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 11:10-11:30 휴식 및 환담 Tea and Coffee Break ▶ 11:30-11:45 일본에서의 한류에 대한 토론 Discussion on the Issue of Hallyu in Japan 토론: 동아일보 전문기자 이정훈 ◊ Discussant : Mr. Lee Jung-Hoon, Senior Reporter, the Donga Ilbo ▶ 11:45-12:00 한국에서의 일본문화에 대한 토론 Discussion on the Issue of Japanese Culture in Korea 토론: NHK 서울지국장 이토 료지 ◊ Discussant : Mr. Ito Ryoji, CEO, NHK Seoul Bureau ▶ 12:00-12:15 토론자 질의에 대한 발표자 답변 Presenters' comments on Discussants' Remarks ▶ 12:15-12:20 방청자 질의에 대한 발표자 답변 Question & Answer Sessions ▶ 12:25 폐회 (Forum Ends)
제 3 부 오찬 및 환담 : 12:30-13:30 Luncheon & Friendly Talks : 12:30-13:30
연구소 소장 환영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세미나를 주관하는 사단법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이재형입니다.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참석하여 성원을 보내 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저희 연구소는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전보장, 경제협력, 문화교류,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문제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우리나라와 아시아 지역의 사회발전과 번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순수학술연구기관입니다. 그동안 저희 연구소는 정부 부처의 수주를 받아 정책연구를 수행함은 물론 독도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한국-몽골 국가연합에 대한 세미나 등을 실시해 왔습니다. 또한 3년 전부터는 주한 아시아 국가들 대사를 초청하여 조찬강연회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한 필리핀, 인도, 라오스, 방글라데시, 베트남 대사의 초청강연을 들었고, 오는 11월 3일에는 주한 싱가포르 대사의 조찬강연이 이 자리에서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한류-일류 교류를 통한 한일양국의 교류협력발전’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흔히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가깝다고 하는 것은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며, 멀다고 하는 것은 양국이 역사적으로 몇 차례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두 나라는 가깝고도 절친한 이웃관계로 발전해야 할 것입니다.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온 한자문화와 불교가 다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감으로써 한일 두 나라는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긴밀하게 협조할 경우,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안보 측면에서도 상호 협력을 통해 가까운 이웃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유리한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 때문에 서로 소원해하고 경계하기 보다는 두 국민 간에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해서 상생발전을 도모하는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이후 한류가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끌면서 이제 한류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편 한국에서도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즐기는 젊은 층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 자기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현대감각에 맞게 발전시켜 오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한류를 좋아하는 것처럼 한국인들도 일본문화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면 양국 국민들은 상호 불신의 벽을 무너뜨리고, 선린호혜의 장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당 연구소는 한일양국이 문화교류를 통해 협력적 국민감정 순화를 모색하자는 의미로 이번에 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학술대회를 진행할 인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사회는 성신여자대학교 사범대학 윤리학과 방영준 교수가 맡아 주시겠습니다. 오늘의 학술대회 발표는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용구 교수 순으로 할 예정이며, 이어서 동아일보 이정훈 전문기자, 이토 료지 NHK 서울지국장 순으로 토론이 진행 될 것입니다. 발표자와 토론자의 소개는 차후 사회자가 해 줄 것입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참신한 시각과 논의로 이 학술대회에 동참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참고로 오늘의 학술대회를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들께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드리고 아울러 모든 분들께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일본에서의 한류 고찰 호사카유지(세종대 교수, 일본학) 일본에서의 한류(韓流, Korean wave)는 특히 2000년경부터 2005년경에 걸쳐 일본에서 일어난 한국 드라마 등의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2010년경부터 K-POP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한류 붐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류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의 제1기 유행기를 거쳐 이후 5년 정도의 정착기를 지나 현제 제2의 유행기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1997년의 아시아 통화 위기로 저가가 된 대한민국 원을 배경으로 2000년 전후부터 한국 드라마 등 대중문화 콘텐츠가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의 배우, 가수 등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져 제1기 붐이 형성되었다. 이 현상이 대만에서 ‘한류열풍’으로 불렸고 그 후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한류’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말이 한국으로 역수입되었다. 그러나 제1기의 한류 붐이 주로 중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현상이었다고 하면 제2기의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 붐은 10대에서 30대정도의 남녀들을 팬으로 만들어 확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고에서는 제1기와 제2기(특히 K-POP)의 한류의 차이에 주목하면서 일본의 한류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제1기 한류 붐 분석 (1) 제1기 한류 붐의 형성 일본에서는 1970년대 후반의 한국 트롯 붐이나, 1988년의 서울 올림픽 개최, 2002년의 FIFA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 등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한류’라는 말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서 ‘민방 TV 전국 4파화 방침’에 의해 1990년대에 지방에서 방송국이 증가했기 때문에 콘텐츠 부족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저가이지만 양질의 아시아 콘텐츠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본 방송계를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일본에 있어서의 한류는 2003년 4월 NHK BS2의 해외 드라마로 ‘겨울 연가’가 방송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흔히 말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연 배용준의 애칭으로 제1기 한류 붐은 ‘욘사마 붐’으로도 환언할 수 있다. 초기에는 순애 드라마가 많았으므로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 자신들의 젊은 시대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면서 붐의 견인역할을 했다. 그 이전의 한국 붐과의 차이는 한국에서 방송된 드라마가 일본에서도 그대로 방송되어 한국인 배우에 많은 주목이 모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미 대만이나 홍콩에서 퍼지고 있던 ‘한류’라는 말이 일본에서도 그대로 정착되었다. 2004년에 접어들어 텔레비전·라디오·영화·음악·신문·잡지·출판 등 각 미디어가 겨루듯이 한국 문화 예능 정보를 방송, 보도하기 시작해 ‘한류’라는 말의 일본 내 보급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총리였던 고이즈미 쥰이치로(小泉純一郎)는 ‘겨울 연가’의 주연 여배우 최지우를 총리관저에서 만나거나 노무현 (盧武絃)대통령(당시)과의 정상회담 시에 ‘겨울 연가’를 언급하는 등 한류가 일본 정치권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4년 민간 조사기관이 발표한 각종 히트 상품 순위에 ‘겨울 연가’의 DVD 등 각종 ‘한류’ 상품들이 상위에 랭크되었다. 2004년부터의 일본에서 일어난 한류 붐은 각종 미디어가 적극적으로 보도해 붐을 가열시켰다. 광고나 CF에도 한국인 배우가 기용되었고 미디어가 한류를 탔고 동시에 미디어가 국민을 한류에 태우는 현상을 보였다. 한류라는 말이나 현상이 인지되기 시작했을 무렵, 한편에서는 한국인 배우에 반발하는 현상, ‘혐한류(嫌韓流)’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런 한류 비즈니스에 참가한 일본의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욘사마’, ‘사천왕’ 등의 말을 만들어 인위적으로 한국의 남성 배우 붐을 만들어내려 했다고 한국 측에서 해석하는 경향도 있었다. 사실 공동통신출판사 편집장인 마루야마 사치코가 이 두 가지 유행어를 만들었고 그 회사가 낸 『더 알고 싶다! 한국TV드라마(もっと知りたい!韓国TVドラマ』는 일본의 제1기 한류 붐을 이끌게 되었다.(小野田, 2011 : 53)
(2) 제1기 한류 붐의 하강 현상과 ‘대장금’ 그런데 2005년 후반기가 되자 엔저원고 현상으로 인해 민방 지상파에서 전용방송으로 방송도어 온 이른바 <한류아워>, <드라마틱 한류>가 종연되어 한국드라마 방송시간이 심야대로 이행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으로 수출된 한국영화가 적자로 전환해 2008년 붐으로서의 한류는 끝났다고 일본에서 보도되기 시작했다. 2007년에 일본리서치센터가 실시한 2006년도의 ‘한국영화, 드라마 등을 볼 기회’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5년보다 ‘볼 기회가 증가했다’가 20%였으며 이 숫치는 이전 조사보다 12% 감소한 숫치다. ‘볼 기회가 줄었다’는 답이 9%(6% 증가), ‘거의 보지 않았다’가 61%였다. 이런 숫치는 그 동안의 한류 붐이 주로 매스컴에 의해 주도된 붐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한류 붐의 하강 현상에도 사극 ‘대장금’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먼저 NHK BS2가 2004년 10월 7일부터 2005년 10월 27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10시대에 방송해 온 한국 드라마 시리즈 제4탄으로 ‘대장금’을 방송했다. 첫 번째 방송에 대한 반향이 커서 2005년 7월에 제1화~제27화까지를 재방송했고 2005년 12월에 제28화~제54화가 NHK BS2로 집중 재방송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2005년 10월 8일부터 NHK 종합에서도 매주 토요일 오후 11시 10분부터 재방송이 방송되었다. 이 방송은 2006년 11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총집편이 2006년말에 방송되었고 2008년 3월말에 재방송되었다. NHK는 일본에서의 방송범위에 맞추기 위해 매회 몇 장면이 컷 되어 시청자로부터 “노컷으로 보고 싶다”는 요망이 쇄도했다고 해서 2007년 1월 12일부터 2008년 2월 15일까지 컷 씬을 모두 포함시킨 노컷 자막 버전을 NHK BS2로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45분부터 방송했다. ‘대장금’은 NHK가 방송한 첫 한국 사극이었고, NHK가 방송한 한국 드라마 중 재방송을 포함해 가장 오랫동안 방송된 드라마이기도 하다. 연애 드라마가 아니라 사극이고 일본에서는 한국의 대하드라마로도 불렸기 때문인지 남성 팬들도 많았다. 실제 NHK로 들어온 대장금 팬들의 메일 중 35%가 30~50대 남성 팬들부터의 메일이었다. 이어서 배용준 주연의 환타지 사극 ‘태왕사진기’가 방송되었고 밤 11시 대에 방송되었는데도 평균 시청률이 6.6%로 선전했다. 한편 2005년경부터 동방신기(東方神起) 등의 K-POP 아이돌 그룹이 일본에서의 활동을 일본 방문을 시작했다. (3) 한국정부의 한류진흥을 위한 활동 일본에서는 한류를 한국정부가 지원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최근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의 ‘대한민국 국가 브랜드 위원회’의 지도 하에 한국 관민에서 많은 조직이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대외 문화 홍보를 실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활동은 주로 한국 전통문화 홍보를 한국문화원이 담당하고 대중문화는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이 민간기업의 콘텐츠 제작과 수출에 대해 고액의 국비를 투입해 강력하게 후원한다고 일본에서 알려져 있다. 한국의 2008년도 문화진흥예산은 1,169억엔이며 이 액수는 일본의 1,018억엔보다 많으며 국가예산비율로는 일본의 7배에 달한다. 이처럼 한국정부는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을 설립하고 국가 전략으로서 영화·방송영상(한류 TV드라마 등)·K-POP·게임·애니메이션·만화·캐릭터 등의 한류콘텐츠산업 진흥을 목표로 삼아 민간기업의 콘텐츠 제작과 수출 등을 후원한다는 것이 일본에서 주장하는 한류의 힘의 원천인 것이다. 이런 국책 덕분에 영화, TV 드라마의 제작, K-POP 가수들의 육성, 콘서트 개최 등에도 국비가 투입되어, 콘텐츠 제작 기업에 제작비의 10%에 해당되는 수출 실적이 있으면 한국정부의 금융기관이 적극적으로 융자 하고 있어 한국콘텐츠 제작 기업이 수출 상대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불하는 바람에 수출지 기업들은 적극적으로 한국 노래・드라마·영화 등을 방송하여 그 결과 동북아, 동남아에서 한류콘텐츠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런 일본 측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드라마의 방영권을 구입한 어느 대만기업이 구매액수보다 많은 보조금을 한국 측으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최근 폭발적인 K-POP인기로 알려진 프랑스에서 매년 개최되는 Japan Expo나 Korean Connection등의 국제 이벤트 대회장에 한국정부의 각 기관이 한류콘텐츠 홍보를 계속해 오고 있다. 이것이 프랑스에서의 한국콘텐츠 수입에 큰 힘이 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한국 측 전략이 존재한다고 해도 제1기의 한류 붐은 초기에 한국정부가 개입한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동북아, 동남아, 일본 등지에서 콘텐츠의 우수성이 인정되어 확산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브랜드위원회는 2009년 1월에 설립된 국가기관이므로 그 전의 한류의 폭발적 확산과는 무관이다.
2. 제2기 붐 형성 - K-POP을 중심으로 (1) 세계화 현상을 보여주는 K-POP 제1기의 한류 붐의 중심에 선 콘텐츠는 TV드라마였다. 그리고 제1기 붐은 자연발생적인 측면이 컸다. 그런데 K-POP을 중심으로 한 제2기 붐은 제1기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연령층이 크게 달라졌다. 제1기 붐은 주로 중년 이상의 여성 팬들을 중심으로 한 붐이기 때문에 일본의 10~30대에는 먹히지 않는 면이 컸다. 이에 비해 제2기 붐은 팬들의 연령층을 1세대정도 낮추어 버렸고 한류의 한계로 여겨졌던 10~30대의 팬들의 마음을 잡았다. 제2기의 중심인 K-POP이 10~30대의 열렬 팬들을 일본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유럽(프랑스)에서도 만들어내고 있다. 소위 한류의 세계화를 엿볼 수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제1기와는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2) K-POP 이전의 일본에서의 한국음악 붐 한류라는 말이 태어나기 이전에 일본에서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의 한국 노래가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국 가요의 유행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그것은 개개의 작품의 히트이지 한국 문화의 유행이 아니었다. 1998년 S.E.S가 일본에 진출했고 인기를 끌었으나 큰 성공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2001년에는 BoA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 성공하기 시작했다. BoA는 철저하게 일본화 되어서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그러므로 K-POP의 성공이라 하기는 어려운 면이 지적되어 왔다. 한국노래라기보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노래를 부르고 일본가요로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 BoA와 비슷한 성공 사례로서 동방신기, BIG BANG 등을 들을 수 있다. 2004년경부터 ‘겨울연가’의 붐을 이어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인 가수가 증가했다. S.E.S, BoA, 동방신기 등의 경우는 일본에서 한국 노래의 일본어버전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주로 일본인의 작사·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부르고 어디까지나 J-POP 가수들의 범주 안에서 활동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한국 가수들의 노래의 한국어버전이 점점 일본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BoA의 한국어버전 선집인 ‘K-POP 셀렉션’이 전곡 한국어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데도 첫 등장 주에 일본 오리콘 위클리 차트 13위로 3만4,537매를 팔았다. 비의 앨범 ‘IT'S RAINING’이 오리콘 위클리 15위를 기록했고, 싱글에서는 Ryu의 ‘겨울연가’ 테마 송이 위클리의 23위로 랭크되기도 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한국의 가수가 일본에서 내는 CD 속에는 일본어 노래뿐만이 아니라 한국어 노래가 몇 곡 들어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움직임이 2010년의 K-POP의 선풍의 배경이 되었다.
(3) 한국 가수들이 일본으로 진출하려는 이유 한국 가수들이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진출하려는 배경에는 한국의 음악 시장규모가 축소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정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인터넷을 통한 음악 콘텐츠 사업이 계속 확대하고 있지만 음악CD의 시장규모는 이와 반대로 계속 축소되고 있다. 한국의 음반 시장은 2005년에는 1000억원 정도로 최성기(2000년)의 1/4 이하가 되었고 최근에 들어 급격히 침체현상을 보이고 있다.(小野田, 2011, 61) 음반을 구입하겠다는 생각이 한국인의 머리에서 사라진 현상이, 그렇지 않아도 규모가 작은 한국의 음반 시장을 더욱 축소하게 만든 것이다. P2P 등을 사용하는 불법 음악 교환, 인터넷과 MP3로 노래를 다운로드하는 것이 유행되어 그 영향으로 앨범 단위가 아니라 한 곡 단위로 음악을 듣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실상이다. 단가가 비싼 CD로부터 단가가 싼 인터넷 전달용 악곡으로 시장의 요구가 크게 바뀐 것이 한국 음악 시장 전체의 침체로 연결된 것이다. 이런 요인 때문에 한국의 음악 관계자들은 국내에서 인기가 있는 가수들을 일본, 대만, 그 외의 아시아 각국에서 활동시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이런 한국 내 배경이 K-POP의 적극적 해외 진출로 이어졌고 해외애서도 팔리는 아이돌 만들기에 한국음악관계자들을 몰아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고품 브랜드품과 같은 K-POP 그룹들이 엄격한 훈련 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4)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K-POP 붐 2010년 8월 25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有明) 칼러시엄에서 실시된 ‘소녀시대’의 쇼 케이스 라이브는 3회 공연으로 약 2만2,000명에 달하는 일본팬이 모여 열광 속에서 대성공으로 끝났다.(西森, 2011 : 2) 후일 TV를 통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돌 그룹으로 보도된 한국 소녀그룹의 선풍적 인기에 일본인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西森, 2011 : 2) 이렇게 현재의 일본에서의 K-POP 붐이 시작되었다. 이 붐이 제1기 한류 붐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팬들의 연령층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리아케 칼러시엄에는 소녀시대와 같은 세대의 소녀팬들이 서로 같은 핫팬츠를 입고 같은 모자를 쓰고 보도진들에게도 어필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한국아이돌 팬들의 이미지를 초월한 화려한 분위기 그대로였다.(西森, 2011 : 2) 이렇게 2010년 중반에 갑자기 선풍적 인기를 끈 K-POP 그룹은 KARA와 소녀시대였다. 그들이 일본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2010년 8월은 일본에서의 K-POP 붐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일본 평론가들도 지적한다.(小野田, 2011 : 16) KARA와 소녀시대의 2010년 8월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8월 11일 KARA, 일본 데뷔곡 ‘미스터’를 판매개시. 8월 11일 소녀시대, DVD ‘소녀시대 도래(到來)~방일기념반’ 판매개시. 8월 13일 KARA, 일본 도쿄 시부야 109 앞에서 게릴라 라이브 개최, 3,000명이 쇄도한 바람에 30분을 예정한 라이브는 3분으로 중단. 8월 25일 소녀시대, 아리아케 칼러시엄에서 쇼 케이스 라이브 공연으로 2만2,000명을 결집.
KARA는 힙댄스(엉덩이 춤)로 인기를 끌었고 소녀시대는 미각(美脚 : 아름다운 다리)이 인기의 비결 중 하나였다.(小野田, 2011 : 16) 이렇게 제2기 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제2기 붐은 한류이면서 한류가 아닌 글로벌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제작진도 그 부분을 많이 의식한 흔적이 있다. 예를 들어 소녀시대 멤버 중에는 제시카 등 서양 이름을 갖는 이도 있어 한국적 이미지 탈피를 돕고 있다. 그러니 일본팬들은 ‘K-POP을 한류라고 부르지 마세요’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小野田, 2011 : 26) (5) K-POP 확산의 메커니즘 그 동안의 제1기 한류 붐은 주로 TV, 특히 대부분 지상파 프로그램이 발신 원이었다. 즉 지상파 TV 프로에 어느 정도 출연했는가가 결국 인기로 연결되었다. 그것은 한류 붐 외의 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녀시대에 대표되는 K-POP 붐은 그런 종래의 공식을 밟기 전에 미리 인기가 형성되어 있었다는데 큰 특징이 있다. 말하자면 입에서 입으로 붐이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팬들이 정보를 교환할 때 사용한 매체가 You Tube 등의 동화 사이트, 트위터, Face book, Gree 등의 SNS였다.(小野田, 2011 : 21) 팬들은 이런 IT 매체를 통해 한국내의 예능 정보를 교환하여 K-POP 팬층을 확산시킨 것이다. 이집트, 리비아 등 아프리카에서의 반정부 혁명을 주도한 것이 SNS였다는 것이 유명하지만 일본에서 SNS는 K-POP의 확산을 크게 도운 도구가 된 셈이다. (6) 한류, K-POP을 비판하는 반 한류 운동 한류 붐이 확산될 기미를 보이면 반드시 이에 반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에는 2011년 8월에 반 한류시위가 도쿄 오바이바에서 있었다. 어느 우익단체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 반 한류 시위에는 1500명 정도가 참가한 것으로 보도 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후지TV가 하루 3시간 이상 한류 드라마를 방송하는데 대한 반대 시위로서 실시되었다. 말하자면 제1기 한류 붐에 대한 반대였다. 그러나 2008년 라이브 콘서트 연습 중, 소녀시대가 ‘독도는 우리땅’을 부른 동영상이 일본에서 공개되어 우익진용의 K-POP때리기에 최근 이용되기 시작했다.(‘SAPIO’ 2011.10.5 호 p.16-17, 소학관) 이런 식으로 일본 우익진용의 혐한류는 현재 괴(壞)한류로 그 운동의 목표수위를 한 단계 높은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K-POP도 정치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제1기 붐처럼 좁은 범위 내의 정착화가 진행되지 않을지 우려된다. 일본에서의 한류가 완전히 대중화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쿨‧재팬의 현황과 전망 : 대중문화 개방 이후를 중심으로 韓国におけるクール․ジャパンの現況と展望:大衆文化開放以降を中心に
박용구(한국외국어대학교)
1. 서론
중국에서 작명된���한류열풍은 대만, 홍콩을 포함한 중화권으로, 베트남,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로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급기야 2003년 ‘겨울연가’를 통해 일본에서도 쓰나미를 불러일으켰는데, 일본 한류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중남미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류 글로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류의 장르도 드라마, 음악, 영화 등 미디어콘텐츠의 틀을 넘어 음식, 패션, 한글을 포괄하는 한국문화 전반으로 외연을 확대해가고 있다. 한류가 아시아에서 세계로���뻗어나가는 가교역할을 담당한 일본의 한류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전에는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도 보이지 않던, 심지어 멸시 내지 혐오감마저 내보이던 평범한 일본인에게 한국어 공부를 하게 만들고, 한류 체험을 위해 본고장 한국을 몸소 방문하게끔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한류콘텐츠에 대비하여 범정부 차원에서 일본이 문화산업정책을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유명세에 힘입어 한류를 패러디한���일류(日流)란 말도 등장하였지만, 정작 일류의 본고장 일본에서는 일류란 말 대신 쿨·재팬(cool Japan)이란 말이 알려져 있다. 쿨·재팬이 일본에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맥그레이(Douglas McGray)가 ‘일본의 그로스 내셔널 쿨(Japan's Gross National Cool)’이라는 소논문을 게재한 후였다. 맥그레이는 버블 붕괴 후 일본경제는 위기에 처했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게임을 비롯한 일본의 대중문화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소프트파워를 발판으로 한 세계의 질적 변화는 국민총생산(GNP)이 아닌 ‘국민총쿨(GNC)’과 같은 지수로 생각해야만 하며, 일본은 그 점에서 미국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쿨·재팬이란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의 일본대중문화가 국제적으로 평가받는 현상 또는 그들 콘텐츠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해외로부터 평가받고 있는 패션, 요리, 건축, 전자제품, 전통문화까지 포괄하는 일본문화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즉, 쿨·재팬이란 용어는 해외로부터 역수입되어 국내에서 주목받게 된 점, 대중문화에서 시작하여 문화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외연이 확대된 점, 문화산업의 발전뿐만 아니라 국가브랜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소프트파워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한류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내각부와 경제산업성이 중심이 되어 쿨·재팬의 수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제산업성에서는 2004년 5월 이미 콘텐츠산업을 7대 신산업분야의 하나로 육성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11월 내각부 지적재산전략본부에서는 대표적인 쿨․재팬의 콘텐츠로서 영화·음악·애니메이션·만화·게임이란 미디어콘텐츠와 패션, 음식을 꼽았다. 2010년 경제산업성에서 발간한 문화산업 입국 보고서에서는 여기에 출판과 방송을 더하고 있다. 본고의 목적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한국에서의 쿨․재팬의 현황과 전망을 살피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쿨․재팬 즉, 일본문화 전반을 다루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도 방대하여, 우리 정부의 개방대상이 된 쿨․재팬 즉, 영화, 출판(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게임, 방송에 그 범위를 한정시키고자 한다. 먼저,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살펴본다. 이어서 쿨․재팬의 국내 유입현황을 문화산업적 측면, 쿨․재팬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인식을 사회문화적 측면, 얽히고 섥혀 있는 한일 양국의 현안 속에서 쿨재팬이 점하고 있는 위치를 한일관계의 측면에서 접근함으로써, 그 현황과 전망에 접근할 것이다.
2.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현주소
1998년 4월 정부 당국은 그 동안 문을 걸어 잠구었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즉시 개방부문과 즉시 개방 이후 부문으로 나눠 단계적으로 개방하겠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동년 10월, 1999년 9월, 2000년 6월 등 세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방이 진행되었다. 그 뒤 2001년 7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시정 거부에 대한 대응조치로 개방일정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2004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제4차 일본대중문화개방이 이루어졌다. 1차 개방 방침은 영화 및 비디오와 출판(만화)에 한정된 것이었다. 영화는 한일공동제작 작품(20% 이상 출자 등 영화진흥법상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와 한국 영화인이 감독이나 주연으로 참여한 경우), 일본 배우의 한국영화 출연, 3대 국제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와 아카데미 영화제 수상작, 그리고 비디오는 극장에서 공개된 작품에 한해 개방했다. 이에 따라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가 처음으로 상영되었고, 이어서 칸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가게무샤’가 개봉되었다. 이어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 한․일 공동으로 제작된 박철수 감독의 ‘가족시네마’���등이 개방되었다. 출판에서는 일본어판 만화책 및 만화잡지를 개방했다. 2차 개방에서는 영화 및 비디오의 개방범위 확대, 공연에 대한 부분개방이 이루어졌다. 영화는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외)과 연령제한이 없는 ‘전체 관람가’로 확대되었다. 공인 국제영화제는 영화진흥위원회의 포상금 지급대상인 13개 영화제와 국제영화제작자연맹(FIAPF)이 인정하는 70여개 영화제이다. 이에 따라���‘나라야마 부시코’,���‘러브레터’, ‘링’, ‘소나티네’,���‘철도원’,���‘그림 속 나의 마을’,���‘사무라이 픽션’,���‘감각의 제국’,���‘엑기’,���‘4월 이야기’,���‘쌍생아’,���‘쉘 위 댄스’,���그리고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건드레스’ 등이 개봉되었다. 비디오는 극장에서 공개된 영화, 가요공연은 2000석 이하의 실내공연장에서의 공연(단, 공연의 실황방송, 레코드나 비디오 판매는 금지)이 개방되었다. 3차 개방안은 영화를 비롯해서 비디오, 가요공연, 게임, 방송 등 1, 2차에 비해 개방정도가 대폭 확대되었는데,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는 18세 이상 관람가를 제외한 모든 영화, 애니메이션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극장용 애니메이션, 비디오는 개방대상 일본영화와 애니메이션 중 국내 상영 분, 비디오는 극장에서 공개된 것, 가요공연은 실내외 구분 없이 전면, 음반은 일본어 가창음반만 제외(연주만, 제 3국어 및 한국어 번역)한 음반, 게임은 게임기용 비디오와 게임물을 제외한 나머지 게임물(PC게임, 온라인 게임, 업소용 게임 등), 방송은 매체 구분 없이 스포츠, 다큐멘터리, 보도 프로그램, 그리고 영화의 TV방영에 대해서는 케이블TV, 위성방송에서 제2차 개방의 기준을 충족시킨 극장 공개된 작품에 대해 개방되었다. 3차 개방 이후 2001년 7월에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수정 거부에 대한 대응조치로서 추가로 개방하기로 한 일본어 가창음반, 오락TV방송(쇼․드라마), 18세 이상 성인용 비디오 영화, 가정용 게임기, 애니메이션, 공중파 방송, 영화 방영 등의 개방 일정이 중단되었다. 이후 일본 소니사의 인기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PS2)이 일정 조건 하에 2002년 2월 국내 판매가 허용되었으며, 또한 2002년 2월 한일 합작드라마라 '프렌즈'가 방영되어 일본 대중문화 방송 기준 등에 대한 새로운 논란이 일기도 했으며,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당시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월드컵 공식음반 2종의 제작 및 발매를 승인하고, 수록곡 3곡의 일본어 가창을 국내 방송에서 7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하는 4차 개방안은 2003년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되었다. 9월에는 영화는 전면 개방되고, 비디오는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2006년부터, 레코드(CD, 테입 등) 판매는 일본어 가창 음반 포함, 게임은 게임기용 비디오게임물을 포함해 전면 개방안이 발표되었다. 12월 개방안은 방송 분야가 핵심이었다. 케이블과 위성방송에서는 생활정보‧교양프로, 영화‧극장용 애니메이션(국내에서 공개된 것만)에 대해, 일본어 가요에 대해서는 전면 개방이 이루어지고, 드라마는 12세 관람가 프로 및 한일합작드라마가 개방되고, 그 외의 오락프로(버라이어티쇼, 토크쇼, 코미디 등)는 개방되지 않았다. 지상파 방송에서는 생활정보‧교양프로, 영화(국내에서 공연된 것만)의 전면 개방이 이루어지고, 일본어 가요방송은 국내에서 공연된 것과 한국 프로에 출연하는 경우, 드라마는 공동제작 드라마에 대해 개방이 천명되고, 오락프로(버라이어티, 토크쇼, 코미디)는 개방되지 않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2년 유예한 뒤인 2006년 전면 개방하기로 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마지막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방송분야의 개방이다. 방송은 3차 개방에 이르러 비로소 포함되었고, 그 폭도 보도, 스포츠, 다큐멘터리에 한했고, 드라마, 버라이어티, 음악 등 오락프로그램은 제외되었다. 이는 방송은 시청 및 소비가 일상적이어서 사회에 미칠 잠재적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송은 사전통제가 가능한 영화와 달리 사후심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민거리는 드라마와 오락프로그램이었는데, 드라마란 스포츠나 보도, 다큐멘터리와 달리 정규편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시청자의 시간을 구속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스토리 내에서 지속적인 시청을 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 국민은 다른 프로그램보다 드라마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고, 개방대상이 선진 일본의 수준 높은 드라마라는 점에서 상당한 사회문화적 파급력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금년 2월 23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제 일본 드라마를 받아드릴 때가 됐다고 말해 추가개방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는데, 5차 개방으로 완전개방이 이루어질지, 아니면 6, 7차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되는 때이다. 3. 쿨․재팬의 현황 및 전망 우리나라에서 쿨․재팬의 현황 및 전망을 문화산업적 측면, 사회문화적 측면, 한일관계의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3-1. 문화산업적 측면 쿨․재팬의 콘텐츠를 영화, 출판(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게임, 방송으로 나누어 각각의 콘텐츠가 우리나라의 문화산업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통해서 현황 및 전망을 살펴보고자 한다. 1차 개방이 이루어진 1998년부터 1년 단위로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집계가 되어 있지 않은 항목이 많아, 통일된 기준하에 일관적으로 자료정리가 되기 시작한 2005년 이후를 중심으로 다루고, 그 이전 자료는 수집 가능한 범위 내에서 첨가하고자 한다.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발간한『2010 콘텐츠산업통계』를 기본자료로 삼고, 여타의 자료를 참고하기로 한다. 3-1-1. 영화 영화는 문학, 미술, 음악, 컴퓨터그래픽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결집된 종합예술로서 한 나라의 총체적 문화역량을 나타내는 핵심 콘텐츠산업이며, OSMU에 의한 고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산업이다. 3-1-5.게임 4차 개방을 통해 전면개방이 이루어진 게임분야에 대해서는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 상당한 고전이 예상되었지만, 한일 게임 이용자 사이에 교차선호 현상이 나타나 우려했던 문제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수입되는 게임 수입액에 대한 공식집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일본 게임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파악할 수 없지만, 2002년 현재 약 30%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양국 게임시장의 특징을 중심으로 현황과 전망을 해보기로 한다. 게임분야는 4차 개방을 통하여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게임시장은 크게 비디오게임, 아케이드게임, 온라인게임, 모바일게임, PC게임으로 나뉜다. 한국과 일본은 주로 이용하는 게임분야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즉, 한국은 전체 응답자의 67.1%가 선택한 온라인게임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가운데, 모바일게임(15.3%)과 PC게임(8.6%) 순으로 나타난 반면, 일본은 아케이드 게임이 35.1%로 1위를 기록했고, 비디오게임(18.4%)과 모바일게임(16.5%)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한국에서 1위를 차지한 온라인게임은 일본에서 4.6%로 최하위에 머무르고, 일본에서 1위에 오른 아케이드 게임은 한국에서 4.4%로 4위에 그쳐, 한일 양국의 게임이용자들이 선호하는 게임 장르가 판이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009년 현재 세계 게임시장에서 한국 게임산업의 매출액 비중은 3.1%인 반면, 일본 게임산업의 매출액 비중은 13.4%를 기록하여, 일본이 한국보다 시장규모가 4배 정도 크지만 양국의 게임시장의 특징은 교차선호 양상을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일본 게임물의 국내 유입은 이미 공식적인 허용 이전에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어 개방 효과는 그다지 높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3-1-6.방송 3차 개방에 의해 방송 부문에서는 매체의 구분 없이 다큐멘터리, 보도 프로그램, 스포츠 방송이 허용되고, 4차 개방을 통해서 오락 프로그램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역이 개방되었다. <표11>에 의하면 전세계로부터 수입액의 5%에도 못 미치지만, 우리의 방송시장을 잠식할 것으로 우려되는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이 전면 개방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 영향력을 평가하기엔 시기상조라 할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직후 우리나라의 관련업계에서는 전체적으로 흥행 가능성에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지만, 완전개방시 일본 대중문화산업의 한국시장 점유율은 7-10% 전후로 전망하는 의견이 많았다. 일본영화에 관해서는 초창기에는 호기심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시장 점유율(15% 내외)을 차지할 것이지만 점차 감소하여 종국에는 홍콩영화 정도의 점유율(7%)로 감소할 것(이홍재, 김휴종 외, 52쪽), 음반분야에서는 7-10%로 조사되었다(이홍재, 김휴종 외, 54쪽). 일본업계에서도 영화는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증가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홍콩영화의 시장점유율 정도인 7-10%를 전망하고, 음반은 10-15%로 전망했다(이홍재, 김휴종 외. 63쪽). 2008년(2조8900억원)과 2009년도(3조 3100억원)의 국내 영화산업 총매출액 6조 2000억원에서 2008년과 2009년도 일본 영화 매출액 추정치 396억1146만원의 비율을 구하면 0.64%에 불과하여 예상 시장 점유율 7-10%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서울 관객수를 기준으로 보면 <표4>에 나타나 있듯이 2000년 7.4%로 정점에 달했지만, 나머지 연도는 대체로 2-3%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는데 그치고 있다. 일본 음반시장의 국내 총매출액을 알 수 없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이 역시 예상치를 훨씬 밑돌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래 그림에 나타나 있듯이 일본 정부는 미디어콘텐츠(영화‧출판(만화)‧애니메이션‧음악‧게임‧방송) 분야에서 우리나라와의 경쟁에서 우위성을 자신하고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자랑하는 쿨․재팬의 경쟁력을 평가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개방된 쿨․재팬 콘텐츠를 분야별로 나누어 현황과 전망을 살펴본 결과 최소한 우리나라 문화산업에 대한 우려할 만한 경제적 파급력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고, 온라인게임을 위시해 쿨․재팬의 경쟁력을 뛰어넘을 한류콘텐츠의 등장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결론 일본 대중문화 개방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사방에서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기억이 새롭다. 쿨․재팬이 국내에 유입되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문화적 측면과 우리 문화상품이 고사할 것이라는 문화산업적 측면의 피해를 우려한 목소리가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대중문화 개방으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지금 당초의 우려는 기우로 끝나가는 듯하다. 오히려 개방정책은 일본 대중문화의 음성적이고 불법적인 유입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한류의 대외경쟁력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일본의 경쟁력이 월등한 애니메이션과 게임 분야의 개방도 시장잠식 효과보다 시장확대를 통한 우리 문화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높일 것이라는 분석도 나와 있다. 그 배경에는 급성장한 우리나라 문화산업 경쟁력, 개별화 한 쿨․재팬에 대한 비호감, 영토와 역사를 둘러싼 한일간의 갈등이 놓여 있다. 또한 본문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한류 열풍에서 기인하는 문화적 자신감, 비약적 압축성장을 달성한 경제발전,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낸 민주화를 바탕으로 우리사회가 전반적으로 모일模日에서 탈일脫日로 나아가고 있는 시대적 조류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물론 쿨․재팬의 능력을 예단하기엔 이르다. 어느 날 분출한 한류와 달리 쿨․재팬은 개방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또한 각 장르에서 해적판이 만연해 있어 쿨․재팬의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고, 이와 같은 상황을 직시한 일본은 범정부 차원에서 저작권 보호를 위한 대책 수립에 골몰하고 있다. 그리고 초미의 관심사인 방송 분야의 개방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쿨․재팬의 파급력은 예상보다 크지 않았지만, 우리사회에 쿨․재팬 마니아층을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사회의 저변에 널리 자리잡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에서의 한류 고찰에 대한 토론문
李政勳 동아일보 기자
호사카유지 교수님의 글은 ‘어떻게 韓流가, 특히 K-POP을 중심으로 한 2기 한류가 일본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저처럼 젊은이들이 누리는 대중문화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이 발표문을 보면서 토론자는 일본에서 한류가 일어나게 된 과정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한류란 말이 대만에서 만들어져 일본과 중국으로 확산돼 갔다는 것도 이 글을 보고 처음 알았다. 1997년 말 한국의 외환위기로 한국 원貨가 저평가된 데다, 일본은 ‘民放TV 전국 4파화’의 실시로 콘텐츠 부족을 느끼면서 일본이 대만 등에서 유행하고 있는 한국 드라마를 수입하면서 한류가 시작됐다는 역사적인 분석엔 상당한 공감이 간다. 경제적 이유로 시작된 한류는 ‘원高엔低’ 현상이 일어나면서 종료되는 듯 했다. 그런데 대장금이 히트를 치면서 K-POP 시대를 여는 2기 한류시대가 열렸다는 분석도 상당히 명쾌하다. 2기 한류에 대한 호사카유지 교수님의 분석은 쿨(cool) 하다. 교수님은 2008년도 한국의 문화진흥 예산은 1169억 엔으로 1018억 엔인 일본보다 많다. 국가예산에서 차지하는 문화진흥예산 비율을 비교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7배 높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국이 國策(국가정책)으로 한류를 진흥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교수님은, 일본의 분석을 원용해 지적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다. ‘한류 진작을 위해 한국 정부가 펼치는 지원이 WTO가 규정한 금지보조금에 해당하는가?’란 질문이다. 만약 위반이 아니라면 한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이 중단되면 한류는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측을 해주셨으면 한다. 과거 일본은 東京올림픽 이후 스시(壽司)를 대표로 한 일본 음식 세계화와 일본 정원을 세계에 전파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안다. 이러한 일본의 노력과 한류 수출을 위한 한국 정부의 지원을 비교해 달라. 2기 한류를 이끄는 K-POP은 BoA나 일본어화 한 한국 트롯과 달리 한국어로 불리고 있다. 물론 K-POP을 부르는 가수 중에는 영어 이름을 가진 이가 있고, 가사에도 영어가 많이 들어가 있지만 주류는 한국어다. 한국의 아이들(Idol) 가수들은 한복이나 國樂 같은 한국적 요소가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통할 수 있는 섹시한 미모와 춤 그리고 가락으로 무장했다. 한국은 한국적 색체가 적은 한류를 수출하고 있는데, 이를 일본적인 것의 수출에 주력했던 일본의 문화 수출과 비교해줬으면 좋겠다. 사실 한국의 대중문화계는 노래와 드라마 등을 만들 때 한국에서의 인기만큼이나 세계 시장에서의 人氣를 의식해 만들고 있다. 수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을 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수출을 위주로 한 무역으로 경제를 성장시켜온 것과 비슷하다. 한국은 수출을 위해 原資材를 수입했다. 수입한 원자재를 가공해 수출하는 가공무역으로 무역규모를 키워 경제를 일으켰다. 축소되는 한국 시장에 맞추기보다는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사카유지 교수님의 평가는 어떠한지 궁금하다. 한국어 사용권이 좁은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교수님의 의견은 어떠한지 듣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류가 嫌韓流를 넘어 할리우드 영화나 미국-POP처럼 일본 시장에 자연스럽게 정착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도 물어보고 싶다. 이토료지 지국장 토론문 요약
▼한국에서는 90년대 후반부터 일본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 방침에 따라 대부분의 분야가 전면 개방되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야는 방송분야로 지상파방송에서의 일본 드라마와 버라이어티 방영은 아직도 금지되어 있음. ▼일본대중문화가 한국의문화산업에 미친영향은애니메이션, 만화는 어느정도 있어도 전체적으로 보면 (시장점유율은 7%에서 10%) 결론적으로 우려할 정도의 경제적인 파급력은 없다고 판단. →그렇다면 왜 일본 드라마를 지상파에 개방하지 않는 것인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경우 획일화 →영역의 미분화 →협동화 일본 드라마의 경우 다양화 →영역의 세분화 →개별화 →한국은 「과도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한국에는 「일식」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이자카야」가 유행하고 있다. 경제적 발전에 따라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환경이 갖추어지고 있다고 생각.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대중문화는, 개방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도라에몽, 소년 아톰, SMAP). 오히려 대중문화의 개방은, 일본이 한류를 받아들이는 기회를 만들었다 (드라마 「겨울연가」에 대표되는 1차 한류). ▼일본에서의 한류 현상 1차 한류붐과 2차 한류붐은 차이를 보이고 있음. * 1차 →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 * 2차 → IMF 이후의 전략, 대외시장 개척에 적극적 ▼ 한류 열풍의 파급효과 * 경제 산업적 이익 * 자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한국은 역사문제를 둘러싼 일본에 대한 반발과 동시에, 먼저 선진국에 들어간 일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 타국 문화를 바라보는 여유 ▼ 결론 →일본 드라마를 개방하면, 한국 내에서 쿨 재팬이 활성화될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의 한류도 더욱 활성화되는 상승 효과가 있다. 이와 함께, 아시아와 세계 시장에서 한류와 쿨 재팬이 인정 받는 환경이 갖추어진다. 쿨 재팬과 한류는 win-win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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