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족은 치우천왕의 직계 후예로 동이족이다.
이전의 사가들은 옛날의 삼묘(三苗:서전에 등장)가 곧 지금의 묘(苗)족이라 이르나, 현대학자들 중 이를 부인하는 자가 많다.
묘족은 도깨비의 시조인 귀면(鬼面) 곧, 벽사수면상(壁邪獸面相)의 시조인 무신(武神) 치우(蚩尤:14대 자오지 환웅)의 직계 후예다.
묘족은 동이 제족과 함께 은(殷)나라를 건설한 핵심 세력으로 그 시대에 문물이 상당히 발달하고 예악이 성하였다.
민족원류
; 고대의 “ 구여(九黎), 삼묘(三苗), 남만(南蠻) ”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양자강 中·下流와 황하강 下流 유역에서 오래 전부터 생활해 오다가 점차 부락 연맹체인 “ 구여(九黎) ”를 이루었고 요, 순 시대에 새로운 부락연맹인 “ 삼묘(三苗 또는 有苗또는 苗民) ”를 이루었는데 “ 형초(荊楚)또는 남만(南蠻) ”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많은 역사 자료들은 三苗가 묘인(苗人)의 조상임을 말해 주고 있다. 여러 호칭이 있으나 스스로는 “ mu(木; 黔東방언 지역), mong(蒙) 또는 mao(毛) ”등이라고 한다.
원시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이전 된 후 문자는 없어도 역사가 비로소 이루어지고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하고 귀주지역의 고대국가인 Ye lang국(夜郞國;秦,漢시대)당시에 이미 묘족이 있었다.
삼국시대의 촉국(蜀國) 제갈량(諸葛亮)이 남쪽 지역을 정벌할 때(A. D. 225년)에 남중(南中)의 맹획(孟獲)을 칠종칠금(七縱七擒)한 고사가 유명하다.
전국 시대(B. C. 475 ㅡ 221 년)의 강대국이었던 초국(楚國)의 楚人과 苗族은 여러 방면에서 일치하는 면이 많아 같은 조상으로 간주되는데 지역적으로 호남성 동정호 주변에서 건국하고, 풍습상 모내기할 때 단풍나무를 논에 꽂고 단풍으로 침대받침을 하지 않고 양식 창고의 기둥을 단풍으로 하며 땅을 선택할 때에 단풍을 먼저 심고 단풍나무가 잘 살 것인지를 먼저 판단한 후에 지역을 옮기는 등 단풍나무를 대단히 숭배하는 습속과 초나라 시대의 묘에서 출토되는 동령(銅鈴), 동과(銅戈), 동전족(銅箭簇), 노기(弩機), 회도관(灰陶罐)등이 완전히 일치한다.
묘(苗)
; '묘(苗)'라는 호칭에 대해서 서로 다른 많은 견해가 있는데, 19세기의 Graves는 《묘족》이라는 저서에서 한자의 초(草)와 전(田)이 합성된 자로, ' 한 뙤기 밭에 길게 자라 난 풀 ' , 즉 ' 아직 개화되지 못한 부족 '이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한편 C·E Jamieson은 묘(苗)는 ' 식물의 발아된 싹 '을 뜻해, 즉 ' 한족이 아직 그들의 지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정착해 살고 있지만 아직 개화되지는 안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토착민 '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의 용해청(龍海淸)은 묘족은 분명 조상들이 벼농사를 지은 농경민족일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며, 묘족의 조상을 역사에서는 “ 묘(苗) ”, “ 요우묘(有苗) ”, “ 산묘(三苗) ”, “ 묘민(苗民) ”등으로 기록하고 있고, 고대에는 남부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총괄해 시대를 따라 남만(南蠻), 우링만(武陵蠻)등 만(蠻)자를 붙여 ' 야만인 ' 취급을 했었으나 당·송 이후에는 남부지역에 정착해 번성하는 이들을 중요시해 그동안 만(蠻)자를 붙여 불러왔던 의식에서 탈피해, 묘족이 폭 넓게 분포해 있는 관계로 주위에 함께 거주하는 부이족(布依族)은 중쟈묘(仲家苗), 수이족(水族)은 수이묘(水苗), 동족( 族)은 동묘( 苗), 이족( 族)은 뤄뤄묘( 苗)로 호칭하는 등 다른 민족에게도 모두 묘(苗)자를 붙였다고 주장하나 묘족의 기원과 더불어 아직 정론이 없다.
묘족의 풍속
매년 입추전후, 호남성 서부에서 생활하는 묘족(苗族) 군중들은 모두 기도와 풍년수확을 경축하는 행사를 찾아 나서 전통적 "간추(走+干 秋:뒤쫒을 간 追逐)"행사를 거행한다.
(동이족의 10월상달 소도의식과 밀접한 관련있는듯) 이 행사는 화원현(花垣縣) 정부가 1993년부터 "간추절(走+干 秋節)" 행사로 개시한 이래 묘족의 독특한 문화 전통을 보여줌과 동시에 , 경제발전의 중요한 창구가 되고, 상서(湘西) 묘족(苗族)지구의 경제·문화 발전의 좋은 수단이 되었다.
사진은 화원현 신낙(新落))이 조성한 묘족시조 치우상 개막식 사진이다.
전설에 의하면 치우는 아주 오래 전에 일찍이 현재의 상귀변계 (湘貴邊界) 일대의 삼묘 지구 일대에서 활동했는데 그 이후 이 일대 지구의 경제와 문화가 창조, 발전되는 조건이 되었다. 상서(湘西)의 묘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당연히 조상 제사풍습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
결론은 묘족만이 아니라 신농씨 묘(다릉)가 있는 호남성도 동이족의 근거지란 얘기 ----- *百里苗鄕의 화원현(花垣縣) 묘족(苗族) 인구 최다, 밀도 최다의 동이 묘족 자치지구
신모구부(神母狗父) [묘족(苗族)]
우리 묘가(苗家)가 소를 죽여 조상에 제사 지내는 원인에 대해 얘기하자면 매우 길다.
전설에, 신농(神農) 시대에 서방의 은(恩)나라에 볍씨가 있었는데 신농이 공고를 내 천하에 포고했다. “은나라에 가서 볍씨를 얻어 올 수 있는 사람에게는 내 친딸인 가가(伽價)공주를 그에게 주겠다.”
가가공주는 신농의 일곱 딸 중 가장 아름다워 새가 보면 날개 짓이 부드러워지고 짐승이 보면 다리에 힘을 못쓰고, 꽃과 비교하면 꽃이 퇴색하고 달과 시합을 하면 달이 빛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 누가 그녀와 부부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누가 그녀와 결혼하길 원치 않는단 말인가?
단지 서방의 은나라가 너무 멀어서 갔다가는 되돌아오지 못하게 되고, 돌아온다 해도 7,80세의 노인이 될텐데 어떻게 가가공주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아무도 황제의 공고를 떼어 오는 사람이 없어 신농은 매우 실망했다.
마침 이때 누런 개 한 마리가 공고문을 가지고 궁으로 들어왔다. 신농이 보니 바로 궁중의 어구(御狗)인 익락(翼洛)이었다. 신농이 물었다. “네가 은나라로 가서 볍씨를 가져올 수 있겠니?” 익락은 고개를 끄덕이며 꼬리를 흔들어 갈 수 있다는 표시를 했다. 신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 아주 잘됐군. 그럼 내일 떠나거라.”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익락은 출발했다. 그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결국 은나라에 도착했다. 그때는 추수가 이미 끝나 은나라 황실의 곡간에는 황금색의 벼가 쌓여있었다. 익락은 곡간으로 기어 들어가 구르고 또 굴러 벼를 온몸에 묻혀 기어 나와 돌아오는 방향으로 뛰었다.
이것을 국왕인 동이대야(同二大爺)가 발견하고는 바로 말을 타고 쫓아갔다. 국왕의 말은 매우 빨리 달려 익락이 보기에 곧 잡힐 것 같아 그는 맹렬히 머리를 돌려 말에게 뛰어 올라 국왕을 한 입에 물어 죽였고, 그러자 아무도 감히 다시 쫓아오려 하지 않아 익락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신농은 볍씨를 얻은 후 익락의 고생을 한차례 위로했을 뿐 가가공주와 혼인하는 일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는 익락의 기분이 안 좋게 보이자 물었다. “너는 볍씨를 얻어 돌아와 큰 공을 세웠으니 영원히 궁궐 안에서 키우게 하마. 그럼 됐지?” 익락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꼬리도 흔들지 않았다.
섬서성 바오지(보계) 시내 중앙통에 자리잡은 신농씨 사당과 그 안에 안치된 신농 소상의 위용
신농이 또 물었다. “내가 너를 소공(少公)에 봉하면 되겠니?” 익락은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꼬리도 흔들지 않았다. 신농은 다시 물었다. “내가 궁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아가씨를 골라 너와 혼인시켜 주면 되겠지?” 익락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꼬리도 흔들지 않았다. 신농은 크게 노하여 익락을 죽이려 했다.
환관이 옆에서 아뢰었다. “태공(太公)께서는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익락을 죽여서는 안됩니다. 공께서는 황제의 공고를 내어 천하에 포고하시어 이미 약속해두신 말이 있습니다. 익락의 믿음을 잃으시면 천하의 믿음을 잃게 될 것인데 어찌 백성들이 복종하겠습니까!”
신농은 듣고 나서야 문득 크게 깨달아 익락에게 말했다. “공주에게 물어보고 나서 만일 공주가 원한다면 너의 아내로 주겠다.” 익락은 듣고 나서 앞다리를 꿇고 머리를 끄덕이고 꼬리를 흔들며 은혜에 감사하는 표시를 했다.
신농이 공주에게 가서 물어보니 뜻밖에도 공주가 쾌히 승낙하며 말했다. “익락은 부왕의 명을 받들어 볍씨를 얻어 만세의 공을 세웠으니 소녀도 그와 혼인하길 원합니다.” 이렇게 해서 신농은 공주를 익락에게 시집보냈다.
결혼하고 2년 뒤에 공주는 커다란 핏덩어리를 낳았는데, 신농은 이 말을 듣고 노기충천하여 뛰어와 검으로 쪼갰다. 그 속에서 일곱 명의 남자 대형대옥(代兄代玉: 묘어(苗語)로, 번역하면 묘족(苗族)을 의미한다. ‘兄’은 ‘苗’이고 ‘代’는 접두사다.)과 일곱 명의 여자 대차대래(代茶代來: 묘어로, 번역하면 한족(漢族)을 의미한다. ‘茶’는 ‘漢’이고 ‘代’는 접두사다.)가 튀어 나왔다.
세월이 흐르고 꽃은 피고 지어 눈 깜짝할 새에 10년이 지났다. 대형대옥은 커서 성인이 되었고, 7형제가 근면하고 용감하며 무예가 출중하여 구름을 쏘면서 동시에 기러기를 쏘고, 달려가 맹호(猛虎) 등에 타기도 했다. 대형대옥은 소공(少公)으로 추대되었고 위풍이 당당했다. 그들은 날마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의 아버지는 누구세요?” 가가공주는 계속 말해주지 않았다.
대형대옥은 자주 산에 올라 사냥을 했고 익락은 항상 따라 다녔는데 나갈 때는 앞에 서고 돌아올 때는 뒤에 섰다. 그들의 사냥 수확이 아주 많아 고기는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고 입을 가죽옷도 끝이 없었다. 대형대옥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 오래지 않아 대공(大公)으로 추대되었다.
하루는 대형대옥이 익락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물소 한 마리가 ‘하하’하고 윗니가 다 빠지도록 웃었다. 대형대옥은 매우 이상히 여겨 물소에게 누굴 보고 웃느냐고 물었다. 물소가 말했다. “너희들 때문에 웃지.”
“우리를 보고 웃는다고?” “너희가 자신의 아버지를 모르니 웃지.”
대형대옥은 놀라고 기뻐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어디 있지?” 물소는 익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바로 너희의 아버지야!” 익락은 고개를 끄덕이고 꼬리를 흔들어 ‘맞다’는 표시를 했다.
대형대옥은 매우 화가 났다. 왜냐하면 하찮은 개 따위가 그들의 아버지 노릇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일곱 명은 동(銅)칼과 동검을 꺼내 익락을 죽였다.
이 날 대형대옥은 사냥감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가가공주는 익락이 돌아오는 것이 보이지 않자 물었다. “익락은? 그는 왜 돌아오지 않지?” 대형대옥이 말했다. “물소가 말하길 그가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는 표시를 했어요. 개 따위가 우리의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화가 나서 죽여버렸어요.” 가가공주는 듣고 화가나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일곱 명의 여동생들도 한바탕 울었다.
조금 지나 가가공주가 정신이 들어 대형대옥에게 욕을 하며 말했다. “익락이 바로 너희의 아버지다. 너희가 아버지마저 죽였으니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니!”
가가공주가 대형대옥을 죽이려 하자 7형제는 간절히 애원하며 말했다. “어머니, 우리는 정말 몰랐어요. 실수로 아버지를 죽였지만,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요. 우리를 용서해주세요. 어머니!” 일곱 명의 대차대래도 오빠들을 대신해서 사정했지만 가가공주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와서 대형대옥을 위해 사정했으나 가가공주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반드시 그들의 머리를 가져오려 했다. 나중에는 신농도 와서 친히 황제의 명령을 전했다. “대형대옥은 모르고 실수로 죽였으니 죽을죄를 면한다. 물소는 혀를 함부로 놀렸으니 그 벌로 사람을 위해 밭 갈고 땅을 경작하고, 또한 오늘 이후로 그것을 죽여 조상에 제사지낼 것이다.”
후에 가가공주도 죽자 대형대옥과 대차대래 남매들은 상의하여 어머니 가가를 ‘내규(奶嬀)’에 봉하고 아버지 익락을 “마구(馬勾)”에 봉했으며 물소를 죽여 제사지내 추모했다.
묘족 언어로 “내규마구(奶嬀馬勾)”란 바로 “신모구부(神母狗父: 신 어머니, 개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후로 매년 가을이면 대형대옥은 물소를 죽여 내규마구에게 제사를 지내 추모했다. 이때부터 이 제사활동은 대대로 전해 내려와 풍속이 되었다.
용병문(龍炳文) 수집, 연보(燕寶) 정리. 귀주(貴州) 송도(松桃)와 호남(湖南) 상서(湘西)에 전래됨. 연보(燕寶)가 엮은 <묘족민간고사선(苗族民間故事選)>에서 뽑음.<안원전>
치우천왕
치우천왕은 하북성 대릉하(강수)에 사는 모든 자식들을 강 씨 성으로 만들고 하북성, 산동성, 산서성 일대에 용산문화 및 대문구 문화를 일궈낸 것으로 보인다.
능히 안개를 부리고, 칼, 창, 활, 도끼, 장창을 처음 만든 동두철액의 갑옷 천왕 치우의 위력이 중원을 뒤덮었으므로 황제는 치우상을 그려 벽사신상(도깨비 도등신상)으로 삼아 천하를 위협하고자 했다.
이러한 치우 신상은 후일 건축양식의 어처구니와 민화의 장수도깨비나 신선과 같이 그려지는 해치(해태)로 반영된다. 치우 가면극인 치우희(蚩尤戱)는 기주(冀州)에서 유명했다. 치우희(蚩尤戱)로 유명한 기주(冀州)는 어디인가. 뻬이징이 있는 하북성을 말함이니 가히 중원의 중심부로 땅이 꽤 넓다.
원소와 조조는 이 지방을 두고 둘의 생사를 건 전투를 벌여, 결국 관도대전에서 조조의 어렸을 적의 친구인 허유가 조조에게 오고, 원소군의 장수 순우경이 군량 관리에 실패하는 등의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기주는 조조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서경(書經)》의 <우공편(禹貢篇)>에 기주(冀州)라 하여 기성[冀省]이라 하는 하북성은 석가장[石家莊:石家庄]이 성도(省都)로 화북평야 북부에서 내몽고[內蒙古] 고원 남동부에 걸친 하북성 지역을 차지한다.
청대(淸代)에는 직예성[直隷省]이라고 불렀고, 신해혁명(辛亥革命) 후 1928년 허베이성이라고 고쳤으며, 공산정권 수립 후 차하얼[察哈爾]·러허[熱河]의 두 지역을 성의 일부에 편입하였다. 한족(漢族) 외에 후이족[回族]·몽골족이 약간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唐帝堯 名放勳帝곡子在位一百年禪位帝舜(당제요 명방훈제곡자재위1백년선위제순)-※ 명성 훈공을 떨친 (名放勳) 제곡자(帝곡子) 재위(在位)에서 1백년이 되는 해에 당 요임금(唐帝堯)은 순(舜)에게 임금자리를 뺏겼다.
甲辰元年 諸侯廢摯而立帝居于冀(갑진원년 제후폐지이입제거우기) 요임금(帝堯) 갑진원(甲辰元) BC2357년에 제후(諸侯) 즉 여러 왕을 폐하고 순임금(帝舜)은 즉위하여 집권하였고 이때 왕도(王都)는 기(冀) 즉 기주(冀州)이다. 지금의 직예(直隸) 산서(山西) 2성을 말함이다. 치우가면극이 유명하고 모든 귀면이 등장하는 경극은 치우가면극이 그 역사적 효시다
건축양식의 어처구니와 민화의 장수도깨비나 신선과 같이 그려지는 해태(해치)로까지 반영된 치우신에 대한 이러한 벽사신상은 은주시대의 도철문의 주인공이 바로 치우귀면이 되게한 근본 동기가 되어(중국 은殷대의 유물로서 가장 유명한 도철문이 치우천왕의 형상이라는 내용은 중국 원가(袁珂)의 '중국고대신화'에 나온다) 기주(冀州) 에서는 치우희(蚩尤戱)라는 경극이 유행하고,
귀면 수막새&광화문 앞 해치
장안(長安)에는 치우사당(蚩尤祀)이 세워지고, 심지어 무기고(武器庫)에서조차 처음 철로 각종 무기를 만든 무신(武神)인 치우신에게 치우제(蚩尤祭)를 지내곤 했으니 한고조 유방마저 중원의 민간습속을 좇아 치우제를 지냈다.(見 Segye Shaman biweekly Newspaper <격주간>-도깨비에 나타난 우리 민족의 긍지-이하 2000년 7월 15일(토) 제8호)
《보안주지保安州志》라는 사서의 기록에 근거하면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에 후진의 황제 석경당石敬堂이 어려서 황제가 되어 탁록 내의 유주와 기주를 포함하는 16주를 요遼나라 총화總和 13년 7월에 거란국에 바쳤는데, 거란국 왕인 야율덕광耶律德光은 치우를 신봉하여 북방지역에서 치우에 제사지내는 활등을 크게 일으켜 각 지역에 조서를 내려 "수산택사우修山澤祠宇(무덤을 손보고 사당을 윤택하게 하라), 선철묘원先哲廟院(먼저 사당을 깨끗이 하고), 이시사지以是祀之(수시로 그에게 제사를 지내라)"할 것을 요구했다(《요·성종기 : 遼·聖宗記》)임창화(任昌華) / 중국 탁록중화삼조문화연구회( 鹿中華三祖文化硏究會) 회장의 < 치우분고(蚩尤墳考)> 中
당나라의 장수절이 주해한 「사기」에는 구려의 군주는 치우라 되어 있고, 송나라의 배인이 주해한 「사기」에 따르면 치우는 옛 천자(天子)라 하여 동이족의 제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치우천왕은 고대 중원에서 군신(軍神), 병주(兵主)로 추앙되었는데, 특히 치우의 능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蚩尤旗) 깃발처럼 휘날리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으로 믿었다고 한다.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풍패에서 기병해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은 그곳의 습속대로 전쟁에 나아가기에 앞서 언제나 치우에게 제를 올린 다음에 출전하였으며, 그 후 패업을 이룬 뒤에도 치우묘(蚩尤廟) 세웠다. 안그라픽스사에서 발간한 한국전통문양집 3권인 "도깨비편"에서는 도깨비의 기원중 하나로 치우장수 기원설을 설명하며(16p), 전설속의 인물인 치우 장수는 본래 동이(東夷)계의 군왕으로 중국 황제에 대항하였다 하여 후세에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숭앙 되었다 하며, 병주(兵主)의 신이라 불리워 온 도깨비의 조상이기도 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원 팔달문 문루에 그려져 있는 도깨비
창덕궁 귀면
사진설명)창덕궁 금천교 남면의 도깨비 석상이나, 남원 실상사 입구의 도깨비 장승, 수원 팔달문 문루에 있는 도깨비,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위에 있는 도깨비 단청, 전주 풍납문 호남 제일성에 있는 도깨비등은 우리 생활속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원형이 잘 보존 돼 있다.이중 불교 사찰의 귀면상은 원래 힌두교의 시바의 성소들과 신전 문 위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장식용 벽사의 탈-키티르티무카을 연원으로 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마치 불교 속에서 환웅을 습합해 대웅전이 되고 삼신신앙이 불교 속에 습합되어 삼신각이 되듯이 축귀를 위한 사천왕 신상처럼 치우신이 불교 속에 습합된 것이 아닌가 한다. ---
도철문은 무엇인가. 도철문이란 고대 중국 문양의 일종인 괴수문(怪獸紋)으로 치우신앙의 일환으로 은주 시대의 청동기 제품이나 건축양식 회화에 악귀를 쫓는 도깨비무늬를 새겨넣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두 마리의 동물을 좌, 우 대칭으로 배치하여 일명 '괴수문' 이라고도 한다
한. 중. 일 동양 3국이 숭배해온 풍운우뢰의 4대 도깨비는 풍백. 우사. 운사. 뇌공을 비롯한 3천여 도깨비를 거느리고 신시나라를 개국했다는 환웅천왕(桓雄天王) 건국역사 이야기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해 장수 도깨비상은 망와(望瓦)의 형태로, 벽사 전신상으로 자리 잡았고 장승의 형태로도 전승되어 왔다.(전통한옥의 지붕 위에 얹는 어처구니(망와)는 바로 치우귀면으로 근본적인 것이 빠졌거나 조리가 안 맞을때 쓰는 어처구니없다라는 말은 어디에서나 필요한 것이 어처구니 귀면 치우라는 뜻이다)
지붕위의 어처구니(망와)
또한 조선조로 오면서 서민화된 도깨비의 모습은 신화를 통해 찾아본 풍운우뢰의 도깨비상과 일치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왕동령(王桐齡)이 펴낸 「중국민족사」에 "4천년 전 중국대륙에 묘족(苗族)이 행세했는데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묘족과 접촉 투쟁했으니 묘족의 일원이 9려족(九麗)이며 그 군주가 치우(蚩尤)였다"고한다.
지나 한족은 진한시대에 정형화된 민족이므로 창세신화가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상고대륙시절 같은 동이족끼리 혈투를 벌이며 쟁패한 역사적 사실을 자기들 신화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동이족끼리의 전쟁인 강족(羌族)과 묘족의 투쟁 속에서 불거진 역사적 사실과 전설을 중국의 창세신화로 자리매김시킨다.
동이족의 역사를 마치 지나 한족(漢族)의 역사신화로 끌어들인 케이스는 환국말기 배달국의 이동 속에 불거져 나온 반고신을 창세 신으로 삼은 바 있듯이, 동이족 조상인 태호복희와 여와의 여와보천 신화를 지나의 신화로 끌어들이고, 치우천왕을 자신들의 무신으로 삼고 같은 동이족 강족과의 전쟁신화인 공공설화를 지나의 창세신화로 끌어들인 것이다.
공공(共工)이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아 대륙이 기울고 지구가 기울었다는 신화는 바로 적이었던 지나족에게 무신(武神)으로까지 떠받들어진 치우와의 전쟁 속에서 탄생한 신화이다.
황하 중류 일대에 살고 있던 강족(羌族:같은 동이족) 가운데도 공공(共工)이라는 뛰어난 두령이 있었다. 강족들은 이따금 홍수를 일으켜 하류에 살고 있는 이족을 괴롭혔다. 화가 난 이족의 두령 치우는 그의 독특한 신체적 조건과 안개를 뿜는 조화를 부려 공공 일족을 마구 두들겨 부수니 공공은 화가 나 그의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하늘을 떠받치고 있던 기둥이 부러지고 땅을 얽어매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면서 땅 덩어리가 기울어져 이 때부터 중국의 지형이 서북쪽은 높아져 산이나 고원 지대가 되고 동남쪽은 우묵해져 평야 지대가 되었다고 한다.
아주 먼 옛날 하늘을 지탱한 네 기둥 중의 하나가 부주산(不周山)을 절단해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고 땅이 동남으로 함몰했다. 서북천공에 큰 구멍이 생기고 천하(天河)가 그 구멍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대지위에 쏟아지니, 지진이 일어나 산이 요동쳐 홍수가 일어나고 맹렬한 불이 일어나 맹수들이 사납기가 극에 달했다. 여와는 오호사해(五湖四海)로 두루 달려가 채석(彩石)을 수집해 불을 이용해 돌을 야련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우고, 맹수를 참살하고 홍수를 다스렸으며, 인류생활의 평온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켰다.
치우 시대의 사회 조직이 엄하고 잘 조직되어 있음은 상서(尙書)에 전하는 묘족의 법이 엄했다는 내용을 보아도 익히 알 수 있다. 지나사관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비튼 표현이 귀에 거슬리지만 우리 입장으로 풀어 보면 법질서가 대단히 엄하고 체계적으로 시행된 조직적 사회였음을 짐작케 한다.
“(묘족은) 다섯 가지 사나운 형벌을 만들어 이걸 ‘법’이라 부르며 잘못이 없는 이들을 잡아 죽였다. 이때에 처음으로 코를 베고 귀를 베고 음부를 손상시키고 얼굴에 칼로 죄명을 새기고 먹을 들이는 형벌이 지나치게 시행되었으며, 법에 저촉된 자는 가차없이 처벌했고,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이조차 구별을 두지 않았다.”(<周書·呂刑>)
<상서>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형벌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다섯 가지 형벌(五刑)’을 동쪽 오랑캐인 치우와 그 후손 묘족의 흉악한 발명품이라 매도한다. 그러나 태평성대로 미화한 요순시절의 순임금 마저 묘족을 정벌한 뒤 묘족이 만든 다섯 가지 형벌을 채용했다.
사진)대한택견협회 심볼인 "치우(蚩尤)"와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 Red Devils 상징로고인 치우 & 대사헌 흉배 해치 수면상. 무신인 치우신은 벽사수면상(壁邪獸面相)인 귀면(鬼面)이다. 벽사신앙 민화는 기복을 방해하는 잡귀나 귀들을 쫓는 그림이다. 벽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화로는 호랑이 그림과 용 그림을 들 수 있으며, 이외에도 해태도· 신구도(神 狗圖)· 사신도(四神圖)· 천계도(天鷄圖)· 종규도(鍾?圖) · 치우도(蚩尤圖) · 처용도(處容圖)등이 있다. 한편 벽사용 민화 가운데는 사신도(四神圖)와 사령도(四靈圖)가 있다. 사신도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가 그려지며 사령도에는 용·기린·봉황·거북이 등장한다. ---
다만 귀를 잘라내는 이형(耳+刀,刑)을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월형(月+刀 刑)으로, 수치심을 주는 명예형인 상형(象刑)이라는 제도를 새로 만든 것 뿐 막상 자신들이 흉악한 오랑캐로 매도하는 치우의 묘예 묘족의 법을 그대로 시행했을 뿐 만 아니라 순은 바로 묘족의 근거지 창오에서 묘족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황하 유역에 자리잡은 한족(漢族)의 황제 세력은 맥족의 근거지인 대능하·난하 유역에 있던 치우와 탁록(탁록(鹿): 땅 이름. 상곡(上谷) 탁록현(鹿縣). {괄지지}에는 '또 탁록 옛성이 있는데, 규주 동남쪽 50리에 있다.
본디 황제가 도읍한 곳이다.'라고 함)의 들에서 결전하는데, 치우의 형제가 81인이었다고 한 것은 치우 세력이 마치 맥족이 세운 고구려가 형·대형·태대형과 같은 관등(官等)을 가진 것과 같이 형제적 부족 질서로 조직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 시조의 이름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몽(朱蒙)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주몽을 추모(鄒牟)라고 표기하고 있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보면 추(鄒)는 주루(婁)라고 쓰기도 하며 동이족의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침 {삼국사기}에 고구려 3대 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을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주류는 주루와 거의 같은 음이다. 여기서 '武神=주류'의 대응관계를 알 수 있으니, 주류나 추는 맥족의 언어로 활을 잘 쏘거나 병장기를 잘 다루는 무적(武的)인 영웅을 부르던 말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치우 역시 이 말을 달리 표기한 것이겠다. 한편 {산해경}에는 치우의 휘하에 풍백과 우사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풍백과 우사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치우 설화는 맥족의 초기 문화를 전해 주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필자미상;국가의 출현과 단군신화 해설)-
글의 출처 http://cheramia.net/index.html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