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는 처음부터 무척 당혹하게 만든남자였다.
처음 소개받던 날이었다.
그의 다른 친구들은 모두들 술이 조금씩 취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술냄새도 풍기지 않았고 참 반듯한 모습이었다.
"술을 못하세요?"
"아니요. 안 마시는 거지요."
"왜요? 혹시 건강 땜에.....?"
"아니, 꼭 건강 때문이라기보단 그냥....."
"그런데 남자들 그게 돼요, 술을 드시던 분이? 얼마동안 안 마셨는데요?"
"2년이 조금 넘었네요."
그때 그의 한 친구가 끼어들었다.
"지선 씨, 저 친구 독한거야 말도 못해요. 여태 어떤 여자가 권해도 입에 안 댔고, 심지어 총장이 권했는데도 입에 안 댄 친구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학교 남자들에겐 왕따를 당했지 아마. 그렇지? 하하하..... 아마 지선 씨도 안 될 걸요? 지선 씨 오늘 저 친구에게 술 마시게 만들면 오늘 술값은 내가 다 낼게요. 2차까지도......"
"정말요? 전에는 술을 얼마나 드셨는데요? 주량이.....?"
"그 친구 술독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그럼, 제 잔도 거절할 수 있으세요?"
그녀는 처음 소개받은 자리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위해 장난을 걸어 보았다.
"지선 씨, 자신있어요?"
"그럼요. 저는 잘 못 마시지만 선생님은 마시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를 술먹여놓고 책임질 자신이 있어요?"
'어머! 책임? 무슨 책임을 말하는 걸까? 초면에 설마..... 또 나선배 입장도 있는데..... 보니까 다들 젊잖은 분들 같기도 하고.....'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어차피 장난인 걸 뭐......'싶기도 하고, 은근한 오기
가 생기기도 했다.
"그럼요. 자신 있지요. 설마 이 미모의 고지선이 잔을 피할 수 있는 남자가 을라구. ㅎㅎㅎㅎㅎㅎㅎ"
그러면서 그의 잔에다 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녀도 오랜만에 기분좋게 술을 한 잔 하고 싶었다.
그러면 가슴속의 외로움이 조금 덜어질 것 같았다.
술을 따라놓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그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 보았다.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엷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염 긴 얼굴에, 깔끔한 넥타이가 상당한 미적 감각도 지녔다 싶고, 어떤 개성도 엿보였다.
조금은 자좀심도 있어 보이는 콧날도 참 매력적으로 보이는 남자고.
그보다 더 그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마시던 술을 딱 끊을 수 있다는 그의 의
지력이었다.
그때 술잔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던 그가 조용히 술잔을 비운다.
"어머나, 어머나! 장난이었는데..... 저 장난이었어요. 어떡해? 설마 건강이 안
좋아서 안 드시는 건 아니죠? 저 장난이었어요. 이젠 마시지 마세요. 그럼 장난
을 건 제가 미안하잖아요."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녀보다 더 당황하고 놀라는 쪽은 그의 친구들이었다.
"야,야, 괜찮겠어? 이 친구, 장난 건 우리랑 지선 씨 미안하게....."
"그래, 이젠 마시지 마. 술 한 잔은 오히려 혈액 순환을 도울 수 있으니, 이젠 마시지 마."
" 잘 참아오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이 친구, 내가 괜히 지선이 나오라고 했더니, 지선이한테 벌써 빠진 거야?"
나선배는 지선을 쳐다보며 그렇게 능청을 떨었다.
"그래, 박교수 말대로 한 잔은 혈액 순환에 좋다니까 그만 마셔. 그리고 오늘
술값은 누가 낼 지 결정됐지? 하하하..... 자네 덕분에 2차도 걸판지게 한 잔 해야겠군!"
"형, 걱정하지 말아요. 남자가 세상에 태어났더라고, 한 번 쯤은 이렇게 인생을 걸고 술을 마시는 일도 있어야 맛이지!"
'인생을 걸어? 술에다 무슨 인생을 걸어?'
그녀는 무슨 말인 지 몰랐다.
아니, 그녀는 이런 분위기에선 어떻게 해얄 지를 몰랐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다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한 잔 더 주세요."
"어머, 정말 괜찮겠어요?"
그녀는 그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왜들 그래? 정말 오랜만에 기분좋게 술 한 잔 하려는데."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미소도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한 번, 또 친구들의 표정을 한 번, 이렇게 분위기
를 살피고 있었다.
'뭘까?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눈빛들 같은데.....'
"괜찮아요. 한 잔 더 주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는 술을 받자 마자 또 마셔 버렸다.
"후래자삼배(後來者三盃-술자리에 늦게 온 사람에게 벌주로 권하는 석 잔의술)라지요? 늦게 시작했으니 석잔은 마시고 드리겠습니다."
그는 연거푸 석 잔을 마시고서야 눈빛으로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참 궁금해지는 남자였다.
나선배의 후배고 교수라는 것 밖에,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나선배도 그에 대해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났고 처음으로 이렇게 술자리에 같이 앉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오늘 이 술자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니다.
술자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이상하다는 게 맞겠다.
원래는 나선배가 "술이나 한 잔 하게 나와. 친구들이랑 한 잔 하고 있어."라고
말을 했을때, 꼭 술보다는 혼자 있는 것보단 숨이라도 크게 한 번 쉬고 싶어서나왔다.
"언니는요?"
"언니는 애들 때문에 못 나와. 그리고 언니는 술자리를 안 좋아하기도 하고. 택시타고 송도 용궁횟집으로 나와. 택시타면 기사들 다 알거야. 친구들이랑 회시켰는데, 회 좋아하는 서울 촌놈이 생각나네! 젊잖고 편한 친구들이니까 편한 차림으로 나와. 원래 예쁘잖아. 밤바다 풍경이 참 좋네! 서울에선 바다가 멀지?"
나선배는 내가 바다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알고 있다.
특히 밤바다는 더 좋다.
처음에 아무 계획도 없이 부산에 내려왔을 때, 학교 선배 언니랑 결혼한 나선
배가 여러모로 배려를 해 주었다.
나선배의 부인이 된 연희 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무 생각말고 그냥 바람쐐러 내려온다고 생각하고 내려오라는 말만 믿고 내려왔다.
그날 나선배의 부인이 된 연희 언니랑 나선배랑 같이 술을 한 잔 하면서, 봤던
그 해운대 밤바다는 너무 좋았다.
여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바람둥이 남편의 외도에 시달리고, 시어른들의 냉대에 시달리고만 살았다.
이혼을 하고 툴툴 털긴했지만 가슴 어딘가가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때 본 밤바다가 너무 좋았고, 가슴에 막힌 그 무엇을 다 뚫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결혼이후부터, 계속 품고 다녔던 그 우울함도 시원한 바닷바람에 조금씩 조금씩 날려보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오늘밤도 저 바다 가운데다 마치 등불들을 촘촘히 띄워놓은 듯한 불빛들이 보였다.
'역시...... 아, 이 바다, 이 바람. 너무 좋다!'
"어때요? 한 잔 더 받으실래요? 아님 제가 마실까요?"
"저도 석 잔 마실래요. 후래자 삼배."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부끄러운듯이 애기들처럼 혀를 날름하며 웃었
다.
그러다 그녀는 언뜻 놀랐다.
'내가 이 남자를 언제봤다고 이렇게 가슴을 연 웃음과 함께 혀까지 날름거릴
까? 참! 나도 모르게 이상한 분위기로 빠져드고 있네!'
분명 아무도 의도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남자는 지선을 바라보며 아무말도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피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부러 무관심한 척을 하며, 멀리 바다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눈길을 돌렸는데도 이상하게 신경은 그 사람쪽으로 다 모이고 있었다.
'참 궁금하게 만드는 남자네! 아까 친구들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혹시 건강이
안 좋아서 술을 안 마신 걸까? 그렇다면 어디가 얼마나 안 좋은 걸까?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일까? 애기들은 몇일까? 저 정도의 남자라면 부인이 참 예쁘겠
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놀랐다.
부인, 부인이라.....
당연히 중년 남자라면 부인이 있어야 맞다.
그런데도 왜 유부남인 이 남자의 부인에 관심이 가는 걸까?
"지선 씨, 혹시 운명을 믿어요? 숙명 말고."
"운명? 네. 난 운명을 믿어요."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지선 씨를 만난 것도 운명이고, 그 운명이 지선 씨를
사랑하게 이끌어간다면 지선 씨는 어쩌시겠어요?"
"어머! 그런게 어딨어요? 오늘 첨 뵀는데! 그럼 난 운명 안 믿을래요. 바람둥이신가 봐? 선배님 맞죠?"
그녀는 얼른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람들은 무슨 얘긴 지 자기들끼리 열심히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선배만 넙쩍하니 다문 입을 쭉 내밀며 잔을 들어보이고는, 그 잔속의 술맛보다는 그의 말을 음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선배, 이 사람 어떤 사람이예요? 미리 얘기라도 좀 해 주지!'
그녀는 보일 듯 말 듯한 눈빛으로 나선배를 향해 SOS를 보내고 있었다.
"세상은 자기가 사는 겁니다. 형님 그렇지요? 이 친구들도 그렇고, 다른 사람
들도 그렇고, 자기외에는 신경쓸 필요없어요. 또 손가락질 하면 어때요? 저길
보세요. 저기 머얼리 있는 저 배들을 보세요. 난 저 먼 바다위에 떠 있는 저 배
를 보면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봐요.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
가를. 우리 인간은 어차피 혼자잖아요. 주위 사람들이 좋긴하지만, 어쩌면 그
주위 사람들은 자기에게 맞는 춤을 강요할 때가 많아요. 어떨 땐 박수로서 주관을 잃게 만들고, 그걸 확인했을 땐, 나는 벌써 좌절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있
고..... 나를 그렇게 만드는데 일조를 한 박수는 금방 또 손가락질로 돌아올 수
도 있고.... 지음(知音)이란 고사가 있잖아요!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다면, 그 사람은 아마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지 않을까 싶네요! 눈치를 살필 필요가 있을까요? 어쩌면 그 눈치가 내 행복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사람은 지금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이는 것이리라!'
어쩌면 바람둥이일 것도 같았다.
전형적인 바람둥이의 말이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딱딱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는 느낌이었다.
그린듯한 그의 수염처럼 초연해 보이기 까지 하고.....
"자, 일어나지! 오늘은 철희 2년만에 술마시는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겠고, 또
처음보는 지선이에게 철희 마음이 갔다는 게, 낼 조간 신문에 날 것 같고, 그 담
엔 철희가 여태 저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첨이고, 오늘은 좋은 자리였
어."
그는 첫날 첫만남에서 내게 그렇게 당당하게, 다른 사람 눈치도 보지않고 그렇게 다가왔다.
기분 나쁘지 않으면서, 오히려 어떤 사람인 지 궁금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튿날 전화를 받았다.
"어머, 제 전화 번호를 어떻게....?"
"남선배 형수한테 물었어요."
"그걸 언니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차라리 저한테 묻지..... ㅎㅎㅎㅎㅎ 혹시 언니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안 해요?"
그렇게 말을 해놓고 그녀는 혼자 얼굴을 붉혔다.
꼭 뭘 숨기는 게 있는 듯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여자분들은 주위 사람들 눈치를 많이 보는군요! 그리고 지선 씨에게 물어도
자존심 땜에 안 가르쳐 주실 것도 같고....."
"그럼요. 아무래도 남자분들보단 그렇지요!"
"그렇군요. 낮에 보는 바다 풍경도 괜찮을 것 같네요. 난 지금 어제 내가 앉았
던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혼자?"
"네. 혼자. 지선 씨를 위해서 미리 지선 씨가 좋아하던 횟감으로만 시켜놓고 기
다리고 있는데....."
"어머,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시키셨어요?"
"안 그러면 안 나오실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단수시다!"
어쩐 지 그의 말 어디에서 느낄 수 있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외로움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미 오후 1시였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구나! 왜 이렇게 나도 모르게 자꾸 관심이 가는 걸까? 쉽게
보여서는 안 될 사람같기도 하고.....'
남자라고는 그 더러운, 남편이란 인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선이에게는, 너무 서투르고 조심스러운 존재만 같았다.
깎은 듯한 그의 모습에서 언뜻 느껴지는 바람끼도 불안하고, 흐트러짐 없고 지겹지않은 그의 논리 정연한 말솜씨도 어딘가 불안하고 .....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이미 화장을 하고 있었다.
화장을 해 놓고도 몇 번이나 거울을 보고, 어젯밤과는 다르게 옷 입음새도 확인하는 자신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 자신을 확인하고는, 어쩐지 바보처럼 이미 이 남자에게 마음을 뺏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