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 한 가락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리움은 미래를 향한 과거의 회상이다. 더 멋진 삶을 꿈꿀 때 우리는 어느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땟국물 좔좔 흐르는 손수건에 떡을 싸서 허리춤에 매었다가 두 손으로 손을 어루만지면서 손자에게 내어주시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거무죽죽 흙물이 배인 손수건은 할머니의 끔직한 손자사랑의 징표였다. 그 손수건엔 주루룩 인중 끝까지 흘렀다가 들이키던 손자의 누런 콧물도 묻어있었을 것이다. 하얀 광목 손수건은 이미 원래의 흰 색을 잊은 지 오래였다. 어찌 그 광목천을 손수건이라 할 수 있겠는가? 색깔도 색깔이지만 언제 빨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손수건은 환갑잔치를 하는 김 노인의 집에서 자신에게 차려진 잔칫상에서 덜 먹고 떡을 쌀 수 있는 유일한 보자기였다. 먹을 것이 풍족치 못했던 그 시절 잔칫상인들 어찌 풍족했겠는가? 과방에 부탁해서 상을 더 차려 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부족한 음식을 겨우 나누는 과방에도 부담이 갈 것이 확실하니, 자신의 음식을 아껴 손수건에 쌌다가 손자에게 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사랑은 그렇게 끝이 없으셨다.
내가 아라리를 처음 접한 때가 바로 그 시절 환갑잔치였다. 부족한 음식 탓에 손자 손녀를 데리고 잔칫집에 간다는 것은 눈치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배고픈 시절 흰 쌀로 만든 절편 한 조각을 얻어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 그 때문에 기웃기웃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잔칫집이 있으면 사립문 앞을 동네 아이들은 기웃거리곤 하였다. 잔칫집에 들어가 상을 받기에는 너무 쑥스럽고 부끄러운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신의 상에서 그렇게 땟국물이 흐르는 손수건에 떡을 싸서 건네주었던 것이다. 가끔 과방을 보는 아저씨의 배려로 아이들은 선심성 떡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콧물을 훔치던 손으로 한 개라도 더 먹으려고 씹지도 않고 떡을 삼켰다. 과방 아저씨가 내온 떡으로는 언제나 부족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언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떡을 건네줄까를 기다리며 동네 어른들의 잔칫집 분위기를 감상하였다. 그것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둔 아이들의 호사이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한 조각 떡을 기다리며 담 너머로 잔칫집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잔칫집을 담 너머 보면, 어른들은 막걸리를 기우리며 적삼자락을 휘날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물론 춤을 추는 그 순간에는 소리 한 가락이 흘러나왔다.
“새목이 미학이 할아버지 소리 한 가락 하시오.”
그렇게 주변에서 소리부탁을 하면 웃음을 머금으면서 각자 한 가락씩 소리를 뽑아냈다. 그때였다. 내가 기웃기웃하면서 마당에서 부르는 어른들의 소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난 처음으로 우리 할아버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탓에,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의 가사를 들었다. 얼마나 신기하고 또 어떤 가락일까를 긴장하고 들었던지, 나는 바로 외울 수 있었다. 어깨춤을 들썩이면서 할아버지는 소리 한 가락, 아니 아라리를 불렀던 것이다.
“뒷집에 숫돌이 좋아서 낫 갈러 갔더니 뒷집 처녀 옆눈질에 낫날이 홀짝 넘었네~~.”
할아비지의 소리가락에 금세 환갑 잔칫집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는 웃음을 띠며 한마디 하였다.
“저 놈의 영감탱이 한다는 소리가~~~.”
그때였다. 할머니는 사립문 밖에서 기웃대며 어른들의 소리를 듣고 있는 손자를 발견했다. 할머니는 손짓을 하면서 나를 들어오라고 하였다.
“야야, 얼른 와!”
나는 머쓱해 하면서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할머니는 허리춤에서 떡을 싼 손수건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이거 가져가 얼른 먹어라.”
주변에서 나를 보는 아이들은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기계충으로 머리가 중간중간 빠진 개똥이는 흰 눈자위를 굴리면서 춤을 삼켰고, 옷이 다 떨어져서 불알이 훤히 드러난 버스바골의 다람쥐도 한 개만 달라고 손을 내밀면서 춤을 삼켰다. 단발머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때가 잔득 낀 흰 저고리에 옷고름을 바싹 맨 봉긋동이의 순이도 부러워하였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떡을 나눠 먹을 수도 있지만, 더욱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올망졸망 동생들이 생각났다. 나는 손수건에 싼 떡을 받아 윗옷 앞섬에 넣어 손으로 꽉 잡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집으로 향해 뛰었다. 미끄러운 검정고무신은 계속해서 벗어지려고 했다. 그렇게 좁은 마을길을 달렸다. 떡을 싸 온다는 기쁨에 마음은 들떠 있었다. 그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약주도 한 잔 하시고 저녁 어스름이 질 때 쯤 집으로 오셨다. 기분 좋게 들어오신 할머니는 또 다른 광목 손수건에 싸온 몇 개의 떡을 우리 앞에 내 놓으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은 참 행복한 하루였다.
내가 소리가락, 아니 정선아라리를 흥얼거린 것은 그 맘 때쯤이었다. 할아버지가 환갑 잔칫집에서 불렀던 소리가락은 어린 나에게 엄청 충격이었다. 매일 일만 하시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멋진 소리가락을 부르는 장면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노래라고는 전혀 하실 것 같지 않던 할아버지의 소리가락, 그 소리가락은 아직도 그때 그 모습으로 기억 속에 있다. 그것도 일만 하시던 분이 낭만적인 뒷집 처녀와의 로맨스 이야기를 노래 불렀다. 그 때문일까? 나는 어느 덧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삶과 함께한 소리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아니 떡 한 조각의 생존 현장에서도 부르며 살고 있다.
동네 아낙네들이 땡볕을 받으며 김을 맬 때 불렀던 가락도 가끔 떠오른다. 물론 그때 아낙들이 구성지게 소리를 부르면서 깔깔대던 가락의 뜻을 안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뒤였지만 말이다.
“저 건너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올해도 날과 같이 또 묵는 구나/ 앞산에 딱따구리는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있는 구멍도 못 뚫네~~~”
그 시절, 라디오와 유행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
커다란 라디오에서 시간이 멀다하고 자주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노래가 너무나 경쾌해서 초등학생인 나마저도 금방 따라 부르게 하였다. 몇 번 듣고 나니 저절로 노래를 외워 부르게 되었다.
라디오를 듣기 위해선 집 앞 미루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안테나를 설치해야 했다. 철사를 얼키설키 고기 굽는 석쇠모양으로 만들어서 나무 꼭대기에 매고 집 안까지 선을 연결해서 라디오 외장 안테나에 걸어두면 되었다. 그렇게 안테나를 매면 그런대로 몇 개의 주파수를 잡을 수 있었다.
라디오는 가끔 찌지직 소리를 내면서도 그런대로 산골마을에 도시의 문명을 전해주었다. 겨울이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떼서 시골에 팔던 아버지의 서울이야기와 구로공단에 가서 일을 하고 일 년에 한 번쯤 명절이면 선물을 사서 들고 왔던 동네 누나들의 서울 소식을 제외하면, 라디오는 산골마을에서 최고의 문화전파매체였다. 그런 서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유머 섞인 노래와 함께 장난을 하였다. 그 장난은 산골 아이들의 머쓱한 유머였으며 동시에 서울에 대한 동경이었다. 삽당령 너머 강릉에만 갔다 와도 크게 유세하던 시절이었으니 서울에 대한 동경은 말해 무엇 하랴.
“서울에 가면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차도 많고~~”
그렇게 서울에 대한 동경을 하면서 옆 사람을 발로 차면서 ‘차도 많고’를 ‘차도 좋다’로 바꿔 읊조리기도 하였다. 등잔불에 그을린 까까머리들의 서울 동경에 대한 어설픈 장난이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서울에 가고 싶은 꿈을 키웠다. 그런 아이들에게 서울에 사는 가수들이 유행가를 부르는 현장이 라디오를 통해서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버스도 한 대 다니지 않는 산골 구석에 라디오를 통해서 울려 퍼진 유행가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관심거리였으며 흉내내기를 하게 만들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달콤한 가수들의 목소리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당시 우리 집에 라디오가 있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라디오는 강릉에서 전파사와 시계점을 운영하는 고모부가 여름휴가 차 처가에 오면서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라디오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기야, 당시 그 동네에 라디오는 처음인지라, 우리 뿐 아니라 동네사람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라디오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라디오를 보고 그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처음 봤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다들 라디오 속에 작은 사람이 들어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뭔 사람이 그 속에 살아요. 뭘 먹고 사나요? 거 참 노래도 잘 하네.”
이 물음을 들을 때면, 순박한 호기심과 웃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검게 탄 산골 아낙의 표정이 생각날 것이다. 그 때문에 처음 라디오를 본 사람들은 라디오를 ‘소리기계’로 불렀다. 모두들 그 소리기계를 보기 위해서 저녁이면 삼 광주리를 들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 소리기계에서는 매일 저녁이면 라디오연속극을 하였다. 절실하게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주는 라디오연속극은 산골 아낙들에게 웃음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라디오 때문에 삼을 삼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산골의 밤풍경은 그렇게 바뀌었다.
미닫이문을 사이에 둔 산골의 겹집은 방 하나에만 라디오를 틀어도 사랑방, 안방, 건넌방, 도장방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콧숨 때문에 껌벅거리는 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그 라디오 소리로 가 있었다. 어린 나에게 그런 라디오 소리는 신비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유행가는 정말 달콤했다. 그 때문에 가끔 주파수 싸움도 있었다. 연속극, 뉴스, 유행가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다.
라디오는 또 다른 산골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산골의 10대들은 밤이면 남녀가 모여서 일명 ‘착착이’라는 놀이를 하였다. 이 착착이는 어른들이 허락한 젊은 남녀의 놀이문화였다. 착착이는 다름 아닌 손뼉을 칠 때 내는 소리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그때 가장 많이 했던 놀이는 ‘착착이’와 ‘은나나나나’라는 후렴을 넣어서 돌아가면서 해당하는 나무나 희망 등의 단어를 끊이지 않게 내는 것이었다. 가령, “나무 이름 대기 착착, 소나무가 착착, 대나무가 착착, 벚나무가 착착~~~”하면서 착착이라는 말은 손뼉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또 ‘은나나나나’는 “무엇이 되고 싶나 은나나나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 은나나나나, 목수가 되고 싶다 은나나나나, 대통령이 되고 싶다 은나나나나~~~”라면서 두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고 박수를 치면서 그 자리에 모인 10대들이 돌아가면서 소원을 부르다가 직업을 대지 못하면 벌칙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든가 춤을 추든가 하는 것이었다. 10대들의 심심풀이 놀이문화이면서, 산골과 농촌을 벗어나고 싶은 꿈을 키워가던 놀이문화였다. 이 놀이는 같은 동네 처녀총각들이 만나기도 했지만 산을 넘어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바로 이 ‘착착이’에 동원된 것이 라디오를 개조한 마이크와 앰프시설이었다. 작은 라디오 스피커를 떼서 마이크를 만들고 라디오 본체는 확성기로 사용한 것이다.
10대 아이들은 그렇게 개조한 라디오 앰프를 이용해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배운 유행가를 불렀다. 마치 누가 잘 하나를 시합하듯이 노래를 하면서 꿈을 키운 것이다.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 하네~~”
산골사람들의 마음과 너무나 일치하는 가사였다. 산골에 사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고된 삶을 그렇게 달랜 것이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임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임과 함께면 임과 함께 같이 산다면~~~”
그렇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산골 아이들의 고된 삶을 달래면서 꿈을 키웠다.
일 년에 한 번쯤 마을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인 콩쿨대회는 라디오를 통해 배운 유행가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고등학교 밴드부학생들이 연주를 하고 트럭의 엔진을 켜놓고 밧데리의 전기를 이용해서 확성기를 통해 노래를 하였다. 트럭의 엔진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박자를 놓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사람들은 환호를 하면서 다들 좋아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름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흥 때문에 막내 고모에게 부탁해서 노래값을 내고 무대에 섰다. 결과는 당연히 ‘땡~’이었지만, 그때 뜻도 모르면서 불렀던 노래가 <임과 함께>였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들 웃고 난리였다. 어린 애가 유행가를 부르면서 덩실덩실 아리랑 춤을 추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제 노래를 시작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헤매는 우스꽝스런 모습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시절 라디오는 산골마을을 서울과 연계하는 최고의 문화매체였다. 뉴스는 남자 어른들의 관심거리였고, 연속극은 여자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유행가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전축이나 녹음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라디오가 주는 문화충격은 정말 대단하였다.
장재터, 청풍설악의 마을 기행
마을은 온통 거목으로 뒤덮여 있었다. 구멍이 뚫린 밤나무, 아름드리의 소나무 숲이 장재터에서는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거목이 방문객에게 차를 세우고 내려 걷게 하였다. 길옆에도 거목이고, 시멘트로 포장을 해 놓은 길 중간에까지 거대한 나무가 꽂혀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상당히 고풍스런 마을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어서 눈에 들어온 돌담은 정말 정겨웠다. 어쩜 집집이 이렇게 예쁜 돌을 주워서 돌담을 했을까? 돌담의 돌은 모두 둥글고 예쁜 물돌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장재터 옆 쌍천에서 주워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예상은 빗나갔다. 그 돌담은 집집이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닦으면서 나온 것이란다. 옛날 이곳이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의 물길이었을 때가 있었단다. 바로 말무골에 살던 장재터의 주인공 장자가 떠내려 간 그 포락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병자년 포락이라고 했다. 비가 얼마나 내렸으면 포락(浦落)이라 했을까? 멀쩡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하늘에서 물을 퍼부어 밀고 내려 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에는 태풍 루사, 매미처럼 가끔 포락이 있었던 것 같다. 병자년 포락은 루사나 매미 때보다 더 했을 것이다. 포락이 밀고 가는 통에 이곳은 모두 모래땅으로 변했다. 그 때문에 장재터에는 사흘 걸러 비가 와야 농사가 된다고 한다. 모래땅이라 물이 빨리 빠지기 때문이다. 한적한 시골의 정취를 듬뿍 배어나게 하는 돌담에는 그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돌담은 정말 예뻤다.
큰 나무와 돌담에 넋이 나간 사이 벌써 발길은 설악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마을정자에 와 있었다. “淸風雪嶽(청풍설악)”, 마을의 정자에는 누군가 한자로 그렇게 써놓았다. 글씨도 아주 달필이었다. 종이에 써서 비닐을 씌워 정자 서까래에 붙여 놓은 멋들어진 글씨였다. 돈을 들여서 현판에 붙여 놓은 고급스러운 것보다도 더 마음에 와 닿았다. 한 여름 온통 더위에 시달리고 있을 때 장재터 사람들은 시원한 설악의 맑은 바람으로 더위를 모르고 살 것이리라. 청풍설악의 글씨만 봐도 그렇게 시원했다.
청풍설악정자에서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문득 눈에 띈 또 다른 시골의 풍경을 읽을 수 있었다. 솔무정을 이루고 있는 숲속에 놓여있는 마을 성황당이었다. 장재터를 지켜주는 성황신이 깃든 곳이다. 콘크리트에 함석지붕과 함석으로 만든 문을 달아놓은 작은 건물이다. 성황당 뒤에는 얕은 돌담이 쳐져 있고, 저 멀리 설악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황당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성황당 안에는 신주와 예단과 촛대와 향로가 놓여 있었다. 벽면에 붙여놓은 실타래와 한지 뒤에는 판자를 걸어놓았는데, 예단을 들 출 수 없어 보지 못했다. 신주에는 문이 닫혀 있는데, 그 속 글자는 “장재평 남성황님 여성황님”이라 했단다. 참으로 정겨운 위패가 아닌가. 남녀성황이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주고, 재액을 막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있음을 이곳 성황제 축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人依於神 神依於人 人神相資(인의어신 신의어인 인신상자)”라는 글귀이다. 번역하면 “사람은 신에게 의지하고, 신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사람과 신이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 너무나 멋진 한마당 잔치를 이른 것이다. 신과 인간이 어울러 놀고 있는 축제의 난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축문에는 환웅천황 때부터 이어온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弘益人間(홍익인간)’, ‘人乃天(인내천)’이라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사람 중심 사회이며, 음주가무를 좋아해 축제를 즐겼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장재터 사람들은 신의 집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1960년대 어느 해였다. 마을 사람들은 동제를 지내도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고 하여 당집을 과감하게 옮겼다. 마을 가운데 있던 당집을 마을 위쪽으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일까? 신은 고마움을 마을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당집을 옮기고 당제를 지낸 후로는 천재지변과 재앙이 모두 사라지고, 화합과 번영과 대풍(大豊)을 가져다주고, 설악산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입의 증대를 가져다주었단다.
성황당을 나와서 마을 안길로 접어들자, 정말 멋진 마을우물이 눈에 들어왔다. 물이 펑펑 솟아나는 샘이었다. 분명 이 샘에는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었다. 거목과 돌담이 늘어진 가운데 있는 마을 샘이었다. 마을길을 포장하던 어느 해 시멘트로 단장을 했다. 시멘트 포장을 하기 전에는 정말 정감있는 마을 샘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마을 아낙들은 말했다. 물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 그야말로 샘의 본질을 구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의 우물이면서 빨래터이고 민속의 현장이었다. 한 겨울 따뜻한 물이 펑펑 나오니 훌륭한 빨래터였다. 죽 늘어서 빨래를 하는 것도 모자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우물방송(?)’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순이와 순돌이가 연애하는 이야기며, 시아버지 잔소리에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시삼촌의 투전까지 못 나올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우물에만 오면 그렇게 방송이 되었으니, 일명 우물방송이라 한 것이다. 우물방송을 하면서 리듬을 맞춰 두드리는 빨래 방망이질에 어느 덧 스트레스는 다 풀린 것이다. 동네 이야기는 그렇게 빨래를 하면서 모두 퍼져 한 가족이 된 것이다.
또 여름이면 냉장고 구실도 하였다. 모 낼 때 먹으려고 콩나물을 키웠는데 날짜를 맞추지 못하면 웃자람을 막고자 찬 우물에 거꾸로 엎어놓기도 했다. 여름철 집집이 담근 김치는 통에 넣어 당연히 우물에 담가졌다. 그러면 동네 청년들이 밤에 모여 김치를 꺼내 술안주로 삼기가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 김치를 가지러 갔을 때 빈 통이 샘터 아래에 둥둥 떠 있으면 필경 동네 청년들의 소행이었다. 내 집 식구가 김치통을 비우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것도 가장 맛있는 김치가 든 통이 가장 먼저 비는 것은 말해 뭣하랴. 아침에 김치를 가지러 갔다가 빈 김치통을 보며 허탈해서 허허 웃으면, 옆집 아주머니가 자신의 김치통에서 김치를 덜어주었다. 사람 사는 모습이 우물 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우물은 여름날(정월 14일) 새벽이면 지푸라기를 든 마을 아낙들이 누가 일찍 오나 내기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힐긋 옆을 보면서 잽싼 걸음으로 우물까지 내달린 것이다. 그러고 휘영청 우물에 뜬 달을 바가지로 퍼서 동이에 담았다. 달은 풍요를 뜻하니 일 년의 풍요를 먼저 떠 잘 살기를 바란 것이다. 솟구쳐 흐르는 우물이라 장재터의 우물은 많은 집에 그렇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날이 샌 후에 보면 아낙들이 놓고 간 지푸라기가 마을 호수(戶數) 만큼이나 우물 아랫녘에 걸려 있었다. 그런 것은 개의할 필요가 없다. 내가 떠 온 물이 제일 먼저 뜬 달물이니까! 그 물로 오곡밥을 지어서 조상들께 제사하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 오곡밥을 마을에 돌린 것은 마을의 정을 나눈 것이다. 달물을 제일 먼저 떠서 지은 오곡밥을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정으로 함께 나눈 것이다. 나처럼 마을사람 누구나 똑같이 복을 받고 풍요를 누리기를 마음으로 바란 우리의 전통관습이다.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그 마음!
우물을 감상하다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마을회관이 나왔다. 어쩐 일인지, 남정네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아낙들만 있었다. 선뜻 들어선 남정네를 반겨주었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불쑥 들어간 것이다. 남정네라 해봤자 아들 같으니, 스스럼이 없었겠지. 금방 방문객과 동화가 되었고 서로 마을에 대해 아는 지식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우물터 자랑, 마을유래, 지명유래, 마을민속,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한없이 흘러 나왔다. 점심 식사를 못했으면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했으며, 커피는 기본이었다. 마을회관에서 먹는 라면, 정말 맛있었을 건데, 괜히 사양했나? 알콩달콩 마을이야기는 정말 좋았다. 마을회관에는 벽마다 마을의 역사가 붙어 있었다. 언제가 마을사람들의 체력을 위해서 건강체조도 했음을 자랑스럽게 벽에 사진을 붙여 놓았다. 함께 웃으며 체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설악산자락 고요한 마을 장재터 사람들의 삶은 여느 산골마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농사짓고 산나물 뜯어서 살아갔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부터 갑자기 사람들이 설악산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설악산이 수행여행과 신혼여행의 명소로 각광을 받으면서이다. 외설악 입구에는 숙박시설과 식당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그야말로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장재터사람들에게는 최고의 호재였다. 20여리만 걸어가면 지금의 소공원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장재터에서는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설악산의 호황은 자식들 학비를 마련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장재터사람들은 매일 물건을 이고지고 소공원까지 걸어 다녔다. 그렇게 장사를 하려면 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하늘에 뜬 달이 지기 전에 물건을 이고 걸었다. 고되지만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에 늘 흐뭇했다. 어느 날은 호랑이를 만나서 간담을 졸인 적도 많았다. 새벽에 호랑이가 길을 막고 눈에서 불을 밝히고 모래를 던질 때는 정말 오싹했다. 그러면 막 빌었다. “자식들 공부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등짐장사를 하니 산신령님 봐주십시오.”하고 한없이 빌다보면 호랑이가 어디로 가고 없었다. 그러면 또 다시 짐을 이고 설악산입구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 아마도 설악산 신령의 보살핌이리라.
장재터사람들은 봄이면 화전놀이를 하고 여름이면 천렵을 했다. 사람들이 함께 즐겁게 사는 모습을 구가한 것이다. 화전놀이는 보통 낙산사나 설악산 비선대로 갔다. 찬합에 갖은 먹을거리를 넣어서 꽃놀이를 가서 놀다가 왔다. 일 년 중 가장 즐거운 마을놀이였다. 그 전에는 마을 뒷산에서 꽃전을 구워 먹으며 놀이를 했다. 천렵은 속초상수원구역이 되면서 없어졌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에는 고기가 참 많았다. 메기, 은어를 비롯해서 별의 별 고기가 다 있었으나 지하댐을 건설하고 난 후 연어가 찾아들지 않고 아예 천렵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하댐은 쌍천이 돌이 많아 물이 지하로 흐름으로 속초에서 상수원을 확보하려고 수상 아래에 댐을 건설해서 상수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장재터의 명물로는 벼락바위가 있다. 이 벼락바위는 쌍천에 위치하고 있는데 도문과 장재터 중간이다. 정확히 따지면 도문이 가깝다. 그런데 장재터사람들은 벼락바위가 장재터 것이라 한다. 이 바위는 전설이 둘 있다.
하나는 옛날 도사가 딸 하나를 데리고 살았는데 파계승이 부처님 씨앗을 요구했다. 도사는 파계승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하자 내기가 시작되었다. 파계승이 가지고 있던 금은보화를 숨기고 도사가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도사가 약속한 기일이 되도록 파계승이 숨겨둔 금은보화를 찾지 못하자, 그의 딸이 하늘에 빌었다. 딸의 간절한 소망에 하늘이 감동하여 파계승이 바위에 숨겨둔 금은보화를 찾도록 벼락을 쳐서 바위를 깨트린 것이다.
또 하나 벼락바위는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등 신성한 바위였다. 그런데 마을에 처녀총각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청춘남녀는 신성한 그 바위위에서 부정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을 내려 두 남녀를 죽이게 되었는데 그때 바위가 갈라졌다는 것이다.
장재터! 설악산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직한 설악산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이다. 설악산을 삶의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이 더욱 멋지기를 빌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