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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주석가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참을성과 이성과 소망”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결코 잃지 말아야할 것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든 참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혼란한 세상에서 명료한 이성은 큰 자산입니다. 또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롬8:24a)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소망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을 영원히 구속해 주실 날을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믿음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보리스 베커(Boris Franz Becker)는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권위를 가진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항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던 축구를 안방에서 밀어냈습니다.
테니스를 가장 즐겨보는 스포츠로 만들었습니다. 그랜드슬램 대회를 여섯 차례나 석권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으로서 엄청난 부와 함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엄청난 공허에 시달렸습니다.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나는 부자였다. 필요한 모든 물질을 소유했지만 아주 불행했다. 마음에는 평화가 없었다. 나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에 불과 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명한 한 작가는 “소년 시절에 알았어야 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정상에 도달해 봐야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누구나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채 자살까지 시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 중심에, 세상 부와 명예 등으로는 대신할 수없는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들의 근본적인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공이나 실패에 상관없이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참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까?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소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빌닷은 욥에게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8:4-6)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는 먼저 욥의 상황을 정확하게 살펴보거나 분석하고 판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욥의 자녀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라고 말씀합니다. 욥은 자녀들이 연이은 잔치로 인해서 신앙이 해이해 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관례처럼 규칙적으로 정결 의식을 행했습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불경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철저히 단속했습니다. 거기다 욥에게 임한 고난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욥이 당하는 고난의 이면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일천한 경험과 편협한 신학으로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찾지도,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다고 정죄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청결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았으며 기도하지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의 말은 욥이 자녀들이 범죄 하는 것을 방관 했고, 그 결과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진노 하실 수밖에 없는 죄에 물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욥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그가 내놓은 해결책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욥8:7)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처음”은 욥이 자녀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중”은 부와 명예와 권세 등이 다시 회복된 상황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인두껍을 쓰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하루아침에 생떼 같은 자식 열을 한꺼번에 잃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절친하다는 친구에게, 지금부터라도 착실하게 의로운 행실을 쌓다보면 언젠가 커다란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자식을 “창대” 곧 부와 바꿀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게 나름대로 식견과 신학까지 갖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맞습니까? 오늘 우리는 맘몬 곧 물질에 사로잡힌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월가의 살아있는 신으로 불리는 최고의 펀드매니저 소로스(George Soros)는, 이를 “화폐적 가치가 인간 고유의 가치를 대신하는 병든 현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마르쿠제(Herbert Marcuse)와 월러스틴(I. M. Wallerstein)은 인간과 사회와 역사 체제의 변증법적 마비 상태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한신대 장일조 교수는 “오늘날 우리는 물신을 갖다 앉히고, 당장 먹고 사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까지 병들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개탄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물질을 소유하는 것을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는 양식이 필요하고,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물”(物)을 독점하거나, 절대화 하는 것까지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땅은 아주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25:23)라는 말씀에 근거한 분명한 가치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구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라고 말하는 농부를 어리석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유”가 우리의 삶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물질은 결코 절대화하여 섬길 대상이 아닙니다. 물질은 소유한 개인을 위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과부와 고아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서 먹으려 한다면 반드시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유를 판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한 전부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물질을 절대시하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이 없습니다. 오히려 맘몬이 교회의 안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물질과 무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하는 저 같은 종들까지도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 편승하여 앞장서기까지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격을 상상 조차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대형화된 교회입니다. 성도는 물론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런 교회를 보면 과연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까요? 대형 교회 목회자라면 거의 대부분이 굴리고 있는 대형차를 보고는 무슨 말을 할까요?
소형이나 준 준형 정도의 승용차는 정말로 그들의 격에 맞지 않는 것일까요? 말이나 나귀도 타지 않은 채 걸어 다니며 전도하셨던 예수께서는 과연 뭐라고 하실까요?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린 교회를 보고, 연소득 1000만원도 되지 않는 서민들을 돌아보고 돕기 위해서 교회 창고를 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까지 섬김을 받으려하는 교회를 보고, 섬기기 위하여 물과 피를 다 흘리고 죽으신 예수께서는 과연 뭐라고 하실까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당신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보고 과연 뭐라고 하실까요? 세상의 빛과 소금은커녕 지탄과 비웃음거리가 되어 있는 교회와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들을 보시는 마음은 얼마나 착잡하실까요? 95%의 교회가 95%의 재정으로 건물이나 짓고, 자신들의 배나 살찌우고 있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외치는 종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깝고 절망적이실까요?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향해 나가라는 당신의 명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머리 숫자만 헤아리며 만족해하고 있는 당신의 종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성경은 맹목적으로 부동산을 무한정 소유하려 하는 투기꾼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채 세속적인 성공만을 추구하는 행태를 가증한 우상숭배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이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지자 이사야는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듯이 차지하는 자들아! 만군의 야훼께서 내 귀에 대고 맹세하신다. ‘많은 집들이 흉가가 되어 제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기척이 없게 되리라. 포도밭 열흘갈이에서 술 한 항아리밖에 나지 아니하고 종자 한 섬에서 곡식 한 독이 가까스로 나리라’”(사5:8-10)라고 외쳤습니다.
또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의 저자 양낙흥 목사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러한 현상들의 근본 원인들 중 하나는 그릇된 복의 신학이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이 세속적 형통, 즉 부와 명예, 권력이라고 믿고 교인들에게 그렇게 설교해 왔다. 그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이므로 그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신하고 그들 스스로 그러한 신념 위에서 행동했다. 그 결과 오늘 한국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그동안 믿음과 전도와 성경공부와 기도 등에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아모스는 총체적인 절망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돌아오시겠느냐고 외치는 사람을 향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공의”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민족과 열방에 대한 책임 곧 대 사회적인 책임을 의미합니다. “인자”(헤세드)는 “사랑, 긍휼, 자비” 등의 뜻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당신께 서 허락해 주신 생명과 재물과 건강으로 서로 사랑하며 섬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을 돌아보는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탄절을 우리끼리만 즐기는 명절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작 축하를 받으셔야 되는 주님이 소외된 명절을 만들지 말아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지나 온 삶을 돌아보고, 공의와 인자를 행하지 않은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대 사회적인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이 가셨던 길을 걷기로 결단하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공의를 행할 수도, 인자를 사랑할 수도, 주어진 책임을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실 때 비로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이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보다 하나님이 먼저라고 선포하려는 의지를 가진 종도 드뭅니다. 설령 전하는 종이 있다 할지라도 먹고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물질을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물질을 추구합니다. 물질의 있고 없음으로 귀한 형제와 자매를 판단합니다. 신앙의 좋고 나쁨을 저울질합니다. 물질이 많으면 축복을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잘 참고 견디며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수근 거립니다. 판단합니다. 정죄합니다. 자신들의 행동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아픔과 상처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고 구원한 영혼들을 절망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빌닷이 그랬습니다. 생때같은 자식 열 명을 하루아침에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욥에게 바로 이 주장을 폈습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잘못된 교육 때문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다고 주장한 것도 모자라,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성실하게 살다보면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도무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저와 여러분이 빌닷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꼭 빌닷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모른 척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질이 나쁘다는 것도,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물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왕이면 많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물질이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물질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야합니다. 하나님 한분만 섬겨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자족해야합니다. 나누어야합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류 구원을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아낌없이 투자해야합니다.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쳐야합니다. 그것을 반드시 감당해야할 사명으로 여겨야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로 간절히 요구하시는 바른 믿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앞세우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가정과 이웃과 나라와 민족과 열방까지 섬기는 바른 물질관을 가진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편, 빌닷은 은연중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낙심해 있는 욥을 미약하게 된 자로, 자신은 창대한 자로 비유했습니다.
단지 드러난 현상만으로 욥을 아주 형편없는 인간으로 폄하(貶下)했습니다. 이번 일을 주도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까지도 얕보았습니다. 욥의 문제가 누구로부터, 어떤 목적 때문에 비롯되었는지 자세한 정황을 살펴보려는 일말의 노력도 없이, 단지 자신의 일천한 경험과 신학을 바탕으로 칼로 찌르듯 판단하고 정죄하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욥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2-4)라고 말했습니다. 빌닷은 하나님께서 악인은 심판하시고 의인은 보호하신다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하고도 형통할 자는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를 죄를 끝까지 추적하십니다.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3:10b-12)라고 말씀합니다. 욥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욥이 말하는 “의”는 친구들이 주장하는 개념과 달랐습니다.
친구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던 엘리바스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욥4:17)라고 말했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깨어지기 쉽다, 약하다, 병들다” 등의 뜻으로, 연약함과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함을 가진 인간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인간은 유한합니다. 절대 의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피조의 주체요 동력이신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성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존재 자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유한하고 부패한 죄 성을 가진 타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태생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는 인간이 하나님 “보다” 의로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사람이 감히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노력 여부에 따라 인생이 하나님 같이 의로워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진 빌닷 역시 지금 당장 미약한 것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심히 창대한 복을 주실 수밖에 없을 때까지 의를 쌓으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로울 수 없다고 천명했습니다.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일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외쳤습니다.
“멧부리들을 아무도 모르게 밀어내시고 홧김에 산을 뒤엎으시는 이, 기둥들이 마구 흔들리도록 땅을 그 바닥 째 흔드시는 이, 해를 보고 솟아나지 말라 명령하시고 별들을 봉해 버리시는 이,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 북두칠성과 삼성을 만드시고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신 이, 측량할 수 없이 크신 일을 하시고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을 하시는 이, 그가 내 앞을 스쳐 가시건만 보이지 않고 지나가시건만 알아볼 수가 없네.”(5-11)라고 절규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성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했습니다. 현재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견디기 힘든 고난으로 인해 격한 감정을 토로할 때도, 자기도 모르게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원망과 불평 같은 애가를 부를 때에도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지도 않았습니다. 불신앙의 자리로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록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할 것이다.”(욥13:15a)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유일하게 정죄하고 판단하실 수 있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왜 당해야 하는지 설명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견디면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지극히 물질적이고 자신의 일천한 경험과 신학에 사로잡힌 친구가 정죄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속을 뒤집어 놓는다면 어떻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겠습니까? 참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베르너 렘케(Werner Lemke)는 유년 시절 2차 세계 대전을 겪었습니다.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가족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심정으로 짐을 꾸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큰아들이 “잠깐만!”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더니 빠르게 피아노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평소 가족들이 즐겨 부르던 “예부터 도움 되시고”(찬438장)를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은 “내 소망 되신 주”라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뜨거운 감동과 함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의 소망이 되신다는 확신과 함께 담대함과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피난 중에도 소망되는 하나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순간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히6:19)라고 말씀합니다.
닻이 없는 배는 바람과 물결에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중심을 잡아 주는 닻이 없으면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기후로 인해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영혼을 안정시켜주는 닻입니다. 영혼이 세상 풍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꽉 붙잡아 주는 닻입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만나게 되는 모든 환난과 시험과 역경을 헤치고 날아오를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소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11)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성탄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낮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이들을 찾아다니며 섬기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물과 피와 생명까지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질지라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을 통해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위로와 평안을 얻을 뿐 아니라,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